탐내지 말라(출 20:17)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계명은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는 계명과 동일한 의도를 가진 수미상관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영광과 찬송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탐심의 근원은 질투입니다. 이웃의 집을 탐내는 근본적인 동기는 질투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가장 큰 대적은 질투이고, 십계명은 질투의 근원을 강하게 금지하고 있습니다.
질투의 원인은 불만족 때문입니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자신의 것보다 타인의 것이 좋아보이고, 새로워 보인다는 의미입니다. 아무리 좋은 소유라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식상해지는 삶의 단조로움은 새로운 것을 찾을 때 극복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찾는 인류의 욕망이 발전의 원동력이기는 하지만 탐심의 내적 동기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것이 불만족스러워 타인의 것을 탐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됩니다.
질투는 또한 비교 의식에서 기인합니다. 신혼 초 아내가 친구들을 만나고 돌아오면 옥신각신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목사라는 직업에서 오는 경제적 박탈감에서 기인하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쉽게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웃의 아내나 남종, 여종, 소나 나귀 등 이웃의 소유가 내 것보다 좋아 보이는 비교 의식이 탐욕의 근원인 질투의 중요한 내적 동기가 됩니다.
탐욕을 금하는 열 번째 계명은 외형적인 소유뿐만 아니라 내적인 탐욕의 동기를 동일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한 자라고 예수님은 경고하셨습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칠계명이 비단 행위에서 머물지 않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불의까지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이웃의 아내부터 소유까지 탐내는 것은 비단 도둑질뿐만 아니라 간음과 살인, 거짓말까지 하는 잔인한 범죄가 되는 성경의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탐했던 다윗은 이웃 사랑의 모든 계명을 범하게 됩니다. 우리아의 아내를 도둑질하고, 간음하고, 부하 장수를 살인하고, 거짓말까지 했습니다. 십계명의 탐심이 불러온 끔찍한 결과였습니다.
‘탐한다’는 히브리어는 하마드(חָמַד)입니다. 이 단어는 하와가 선악을 알게하는 열매를 보고 탐스러워했다(창 3:7)는 단어와 동일어입니다. 선악을 알게하는 열매를 먹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탐욕에 빠진 죄의 결과를 직시해야 합니다. 하나님 없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는 인간의 죄악이 불러온 혼돈과 참혹함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유혹하고 넘어뜨리는 탐욕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그의 명령을 기억하여 살아가려는 삶의 수고가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을 탐욕을 우상 숭배(골 3:5)라고 경고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의 목적을 잊고 우상 숭배를 하는 것은 탐욕의 죄악으로 빠지는 것입니다. 너무 바빠서 돈 쓸 시간이 없다는 이들에게는 돈이 결코 그들의 우상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탐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자족해야 합니다. 로마의 감옥에서 사도 바울은 자족을 배웠다(빌 4:11)고 고백합니다. 억울하게 모암을 감옥에 갇힌 상황 속에서도 바울이 자족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믿음의 뿌리를 두었기 때문입니다. 죄로 죽었던 삶을 용서하시고 다시 살리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믿음의 고백이 어떤 형편이든지 자조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탐욕을 일으키는 내적 동기는 타락한 마음입니다. 타락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오직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마 15:19)’뿐입니다. 잠언 기자의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잠 4:23)’고 교훈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들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하나님 사랑으로부터, 이웃의 소유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이웃 사랑의 명령까지 순종하는 바다교회 가족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