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말씀일기 본문은 시편 73편 16-20절인데
지난번에 시편 73편을 통째로 올려서
오늘은 교회전체 말씀일기본문인 욥기 19장을 정리해 올려 보겠습니다.
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27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
욥이 까닭 모를 고난을 당하면서
드디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바라보게 됩니다.
‘자신의 대속 자가 살아계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대속자는 히브리어로 ‘고엘’입니다.
고엘의 사상이 룻기에서 잘 나옵니다.
나오미의 땅만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끊어져버린 그 씨도 이어주는 것이 ‘룻과 보아스’를 통하여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런 대속자, 고엘이 살아 계시다고 하는데,
왜 욥은 이런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늘 ‘현세중심’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내가 현재 여기서 복을 받아 누리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내가 현세에서 잘 되어야
전도가 잘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내가 욥과 같은 고난을 당하면
전도도 안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룻을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이방 여인 룻이 나오미의 가정에 시집을 왔는데,
시아버지도 죽고, 남편도 죽고, 동서의 남편도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집안의 하나님을 목숨 걸고 따라나서는 것입니다.
잘되고 형통한 집안의 하나남이 아니라,
모두 죽고 망해 버린 집안의 하나님을 롯은 믿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를 위하여, 하나님을 영광을 위하여
내가 세상에서 잘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직 하나님도 모르고 복음도 모르는 것입니다.
욥은 이런 극심한 고난 가운데
자신의 대속자가 살아계시며 그분이 마침내 땅 위에 설 것이라고 합니다.
이 땅이란 ‘땅의 티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땅의 티끌로 만들어진 모든 인생들이 그 앞에 설 것입니다.
그 때에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줄 알고 산 사람들,
이 세상의 원리 곧 인과율을 따라 살아간 사람들이 다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욥은 그리스도의 영이 임함으로
‘까닭 없는’ 극심한 고난 가운데서 ‘부활의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욥은 고난 가운데
육체 밖에서
즉 인간의 모든 이론과 논리를 넘어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인간의 모든 이론과 사상을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까닭 없이 주어지는 고난과 일한 것도 없이 주어지는 은혜를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결국 욥기에서 심판장(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욥의 손을 들어주십니다.
베드로전서 2: 22~25절. “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예수님의 고난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고 길을 찾았습니다.
지금도 이 방법으로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내가 세상의 힘을 가지고’
보란 듯이 증인이 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세상에 속한 이론과 사상입니다.
이러한 기독교가 아님을 십자가가 보여주고 있음에도
십자가를 말하면서 세상의 이론을 넘어서지 못하고,
인과율을 넘어서지 못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적으로 여길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고난을 통하여,
이 육체의 한계, 세상의 이론의 한계를 넘어서게 됩니다.
고난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게 해 줍니다.
그 십자가를 통하여 육체 밖에서, 세상의 논리 밖에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몸의 부활도 소망합니다.
오늘도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견고한 사상과 생각을 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억하며
고난 속에서 ‘몸의 부활’을 소망하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