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북간도 용정촌 약사 (1924년 ~1925년)
1924년, 1월 24일 레닌 사망하였다.
참의부가 설립되었다. 통의부 소속의 간부들이 이념갈등으로 분열이 되자 일군의 지도자들이 상해 임시정부와 교섭하여 광복군사령부의 전통을 계승한 임시정부 산하 직속 남만군정부가 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 주만참의부를 발족하였다.(1929년 해체)
서간도 유하현에서 정의부가 탄생하였다. 대한통의부, 군정서, 광정단, 의우단, 길림주민회, 노동친목회, 변론자치회, 고본계 등의 대표들이 통합회의를 개최한 결과 정의부가 발족되었다.
갑자년 대 흉년으로 연변 조선인 사회가 요동을 쳤다. 특별히 많은 사립학교들이 경영난에 봉착하였다.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이 북방의 군벌들과 체국주의 열강에 맞서기 위해 합작을 이루었다. 국민당은 이를 계기로 소비에트의 원조를 얻으려 하였고 공산당은 식민지 해방을 위해 민족주의 세력과 연대하라는 코민테른의 노선에 따른 것이다. 국민당은 소비에트와 연대하고 공산주의를 받아들이고 농민과 노동자를 돕는다는 정책을 채택하였다. 공산당원들은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입당해 리다자오, 마오쩌뚱 등이 국민당의 요직에 올랐다.
❰천도경편철도❱가 완성되었다. 용정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개산툰에서 두만강을 횡단하여 조선의 상삼봉에 이르러 북선철도와 연계되어 청진항구까지 갈 수 있었고 서쪽은 조양천 로두구를 통과하여 천보산에 이르렀고 북쪽은 조양천을 거쳐 국자가에 이르렀으며 서남쪽은 두도구 까지 뻗었다.❰천도경편철❱가 개통됨에 따라 연변 각지의 농산물과 특산물이 용정을 거쳐 일본으로 수출되었고 일본의 공산품이 조선을 거쳐 용정으로 들어와 연변 각지로 수송되었다. 사방에서 상인들이 모여들어 용정거리에 집을 짓고 점포를 열었다. 5개의 조선인들의 시장❰평양시장❱,❰용정시장❱,❰세관촌시장❱,❰새시장❱,❰49금시장❱,❰우시장❱이 매달 두 번씩 섰으므로 용정은 한 달에 12일이 장날로 붐볐다.
6월 21일 대흥전등주식회사가 세운 화력발전소가 시운전을 하고 7월 24일에 전기를 생산하여 전등불을 보게 되었다. 전기 공급으로 농업과 상업이 발전하여 용정이 계속 번창하였다.
조기공산주의자 화요파 성원들이 동흥중학교와 대성중학교에서 ❰마•레주의 연구소조❱를 조직하였다.
용정의 노동자들이 용정건설자동맹의 지도아래 파업을 단행하였다.
연길운수조합이 노동조건과 생화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투쟁을 조직하였다. 운수조합과 계량기조합이 친일단체인 조선인거류민회의 죄상을 폭로하고 부가세 징수를 거부하였다.
캐나다장로회 지회에 속해 있는 영신학교가 경영난에 봉착하였다. 영신여자중학교에서 조직한 여자가극대가 연변 각 지역을 순회하며 모은 기부금과❰동아일보사❱의❰재외동포위문회❱의 지원을 받아 위기를 모면하고 새 교사를 지었으나 그 해 흉년으로 말미암아 학생 수가 대폭 감소되었다. 수업료가 주 수입원이었던 학교는 폐교에 직면하여 교장인 캐나다장로회 박례헌 목사는 조선인 민회, 은진중학교, 간도노회 서울 등지에서 운영자를 물색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학교 운영을 노회로부터 위임을 받은 윤화수는 출구를 찾기 위해 광명재단의 일본인 히다까 헤이지로를 만났다.
1924년 조선의 조기 사회주의자 김사국이 명동에 체류하면서 공산주의 사상을 전하며 학교가 종교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에 영향을 받은 명동학교 졸업생들과 주민들이 종교와 교육의 분리를 주장하여 여론이 끓어오르기 시작하였다. 명동학교 8기 졸업생 송산우는 연해주로부터 명동일대에 와서 공산당 지하활동을 벌였다.
중국군벌이 만철부속지의 교육권을 회수한다는 이유로 조선인 사립학교 교육을 제한하거나 학교를 폐교시켰다.
1924년에 세워진 학교는 1개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현재 연변지역 중에서 훈춘, 왕청, 연길, 도문, 용정, 훈춘, 화룡까지만 포함시킨 것으로 안도현과 돈화현의 학교는 포함시키지 않았다.
1924년에 세워진 교회가 분명히 있는데도 자료 부족으로 이름을 확인하지 못하였다. 연변의 민족출판사에서 나온 ⌜종교사⌟ 152쪽에 보면 당시 북간도에는 조직교회가 38개, 미조직교회가 47개, 기도처가 35개로 교회가 총 120개이다. 조직교회가 전 해에 비해 9개, 미조직 교회가 3개 증가하였으며 간도노회를 섬기는 목사 6명, 장로 57명 조사 13명, 영수 36명으로 충분한 숫자는 아니지만 초기에 비하면 아주 양호해진 편이다. 그러나 현규환의 ⌜한국유이민사 상권⌟ 530~ 534쪽에 의하면❰노두구교회❱,❰백초구중앙교회❱,❰해진기교회❱가 설립된 것으로 나온다. ❰해진기교회❱는 1910년에 세워진 ❰만진기교회❱가 문을 닫았다가 다시 설립한 것인지를 확인해보아야 한다.
1925년, 연변지구 조선인호수는 5만7천7백호에 인구 34만 6천명이었고 소유지 면적은 9만2천보로 총경지 면적의 절반에 달하였다.
1월, 목릉현에서 부여족통일회의가 개최되고 동년 3월에 만주 영안현에서 대한독립군단과 대한독립군정서를 중심으로 하여 신민부가 결성되었다. 자유시참변 이후로 비로소 남만주(서간도)와 북만주에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로 자리를 잡았다.
백군을 지원하던 일본이 1925년 1월 러시아와❰러일기본협약❱을 체결하고 동맹국이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조선독립군들은 다시 중국 경내로 이동하거나 아니면 적위군이 되어야 했다.
❰러일기본협약❱으로 러시아는 대일정책을 수정하였다. 국제공산당 원동국의 지시에 따라 활동하던❰적기단❱이 러시아의 대일 평화정책으로 말미암아 해체되었다.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은 1922년 6월 10일 이승만 대통령 불신임안을 제출하여 칠일 간의 토론 끝에 불신임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탄핵 되어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것은 1925년 3월이다. 면직 이유는 윌슨에게 위임통치를 청원한 것과 임정회의 무시 및 장기 부재, 독단적인 행동 등 때문이었다. 박은식이 차기 대통령이 되어 그 뒤를 이었다.
1925년 6월 봉천군벌 장작림과 조선총독부 미쓰야 경무국장은 “쌍방한인취체방법”즉 삼시협약을 체결하였다. 협정 내용은 조선인 무기 휴대와 조선 내 침입을 엄금하며 위반자는 검거하여 일본제국 경찰에 인도한다는 것, 재만한인단체를 해산시키고 무장을 해제하여 무기와 탄약을 몰수한다는 것, 일제가 지명하는 독립운동 지도자를 체포하여 일본제국경찰에 인도한다는 것, 조선인 취체의 실황을 상호 통보한다는 것이다.
11월, 영안에서 봉천당국은 각 지방 관서에 조선인 취체에 관한 일련의 방침과 관리총칙을 하달한 동시에 삼시협약을 집행한다는 구실로 조선인을 일률로 “조선교민”으로 간주하고 “교민증서”와 “이민증서”를 발급하여 한 달에 한 번씩 호구조사를 하였으며 또 조선인의 이주와 여행을 제한하였다. 협약대로 하면 이 조약은 요녕성에 만 해당하고 연변지구는 간도협약에 따라 처리를 해야 한다. 그러나 동북지구의 항일운동이 거세지자 중국지방당국은 1927년부터 귀화조건을 엄격히 하고 한족으로 하여금 연변지구로 이주하도록 권장하고 또 귀화하지 않은 조선인이 개간한 땅을 한족이민에게 나누어 주는 조치를 취하여 연변지구 조선인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였다.
11월, 영안에서❰북만노력청년동맹❱이 결성되고❰노동청년❱이 발행되었다.
12월, 봉천군벌정부에서❰조선교민관리규약❱,❰조선교민을 고용하여 황무지를 일구어 벼를 심는 것을 관리하는 법❱을 발포하여 조선인 농민들을 제한하고 박해하였다.
북만에서 ❰북만노력청년동맹❱이 결성되었다.
❰간도청년동맹❱이 조직되었다.
❰간도체육협회❱가 설립되었다. 회장은 간도총업주식회사 사장 강재후였고 비서장은 유명원이었다.
❰전권단❱이 8월 29일 조선 국치일에 즈음하여 항일대시위투쟁을 실행할 계획으로 민족의 자주 독립과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삐라 5,000장을 용정촌에 살포하였다.
동흥중학교 출신 여남수, 김우근, 김만복 등이 용정 동흥중학교에 공산주의 사상연구단체인 ❰독서회❱를 만들었다.
국자가에서 전 연변 축구운동회가 개최되었고 영신중학교 축구팀이 우승하였다.
용정❰광명회❱회장 히다까 헤이지로가 광명고등여학교, 광명실천여학교, 광명여학교, 광명유치원을 열었다.
은진중학교 교장 스코트가 함흥으로 전근 가고 4대 교장으로 배례사 선교사가 부임하였다.
학생들이 종교와 교육 분리를 위한 투쟁을 시작하였고 예배와 성경 과목을 거부하기 시작하였다. 영신학교 운영권이 4월에 히다까 헤이지로에게 넘어갔고 영신여자중학교는 7월에 폐교되었다. 명동중학교가 폐교되어 중학부 교사들이 명동을 떠났으며 학생들이 용정 각 중학교로 전학을 갔다. 명동소학교는 교회가 운영하며 남녀공학으로 바뀌었으나 계속 종교와 교육의 분리를 외치는 여론에 직면하였다.
1925년에 세워진 학교는 조양천 ❰봉림소학교❱ 한 곳이다.
정재면이❰한족생계회❱를 조직하였다.
❰간도노회❱가 명칭을 ❰동만노회❱로 개칭하였다.
동아기독교(침례교)의 윤학영, 김문주, 박문기, 이창희가 길림성에서 사역 중에 공산주의자들에게 밀정으로 몰려 순교의 피를 흘렸다. 이후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교회협박과 폭행, 살해와 방화들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1925년에 세워진 교회는 자료 부족으로 찾지 못하고 있으나 민족출판사에서 나온 ⌜종교사⌟ 152쪽에 보면 조직교회 26개, 미조직 교회 80개, 기도처 40개로 교회 총수가 155개로 교세가 급성장한 것을 알 수 있다. 현규환의 ⌜한국유이민사 상권⌟ 530~ 534쪽에 의하면❰팔도구교회❱가 설립되었다.
10부로 계속
2026년 3월 17일 화요일 진시
우담초라하니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