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이상(李箱, 1910-1937) |
국가 |
한국 |
분야 |
소설 |
해설자 |
이재복(한양대학교 한국언어문학과 교수) |
이상은 생전에 시 56편, 소설 16편(장편 1편), 수필 35편(권두언, 서신, 문학평론, 앙케트 제외)을 남겼다. 작품 수로 보면 당대의 다른 작가들과 비교해 그다지 많은 편이 아니다. 하지만 21세에 정식으로 작품을 발표하고, 28세에 폐결핵으로 요절한 점을 고려한다면 이것은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더욱이 처음 각혈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와 첫 작품인 ≪십이월 십이 일≫을 발표한 시기(1930년)가 같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몸의 모든 에너지를 글쓰기로 소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그의 글쓰기는 진정성을 지닌다. 이 진정성은 단순히 결핵과 문학과의 긴밀한 상관성(결핵문학)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이 의미 있는 것은 그것이 모더니즘의 본질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김수영은 <진정한 현대성의 지향>에서 “진정한 현대성은 육체 속에 자각되어 있는 것”이고, “시작(詩作)은 머리나 심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밀고 가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모더니티 혹은 모더니즘의 본질이 몸에 있다는 것을 간파한 탁견이다. 정신이나 사유의 절대성을 기반으로 하는 모더니즘이 배제하고 소외시킨 것이 몸이며, 모더니즘은 바로 이 몸을 통해 사유(반성)할 때 그 진정한 실체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우리의 모더니즘이 결하고 있는 몸의 문제를 이상은 ‘향유’와 ‘반성’이라는 방식을 통해 드러낸다. 그에게 있어서 최고의 향유 대상으로서의 몸은 ‘각혈하는 몸’과 ‘독화(毒花)로서의 여성(금홍, 권순옥, 변동림)의 몸’ 그리고 ‘회탁(灰濁)의 도시 속으로 산책하는 몸’이다. 먼저 각혈하는 몸은 그의 문학의 심층화된 지배소다. 각혈은 “수명(壽命)에 대(對)한 개념(槪念)을 파악(把握)”[<공포(恐怖)의 기록(記錄)>]하게 하는 질료로 작용한다. 죽음을 전제한 각혈은 ‘불ㆍ숯ㆍ흑연ㆍ피ㆍ뼈ㆍ거미ㆍ회충’ 같은 이미지로 드러나면서 탕진한 몸을 표상한다. 특히 ‘뼈’는 ‘살’과 ‘피’가 탕진되고 남은 응결체다. 여기에서의 ‘뼈’는 현실의 경험을 인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추상적 근거에 불과하다. 이것은 모든 구체적인 이미지가 축출된 상태, 곧 형태상의 순수 기호적인 자취만 남겨진 상태를 의미한다. 이처럼 그의 각혈하는 탕진한 몸은 탕진한 언어(순수 기호)를 발생시킨다.
그러나 탕진한 몸은 여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은화(銀貨)처럼 맑은 정신(精神)’과 ‘흐느적거리는 육신(肉身)’(<날개>)이라는 아이러니와 패러독스를 생산한다. 그는 그것을 문학 전반에 걸쳐 “바둑 포석(布石)처럼 느러놓”는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아이러니와 패러독스는 그의 문학을 구성하기 위한 일종의 전략이다. 그는 이 전략을 비밀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한다. 그에게 “비밀(秘密)이 없다는 것은 재산(財産)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실화>)이다. 보다 많은 비밀을 위해 그는 가면을 쓴다. 그 가면은 가면을 쓰고 있는 자기 자신도 결코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럴 때 이 “가면은 가면이 아니라 그 자체가 자신의 본 얼굴에 제일 가까운 것이 된”[<불행(不幸)한 계승(繼承)>]다. 가면을 쓴 채 아이러니와 패러독스를 생산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문학은 그 전모가 드러나기 어렵다. 이 난해함은 그의 경우 근대 혹은 근대성과 연결된다. 근대는 이미 출발부터가 이중적이다. 아무리 근대가 애매모호하고, 일시적이며 불안정한 육체를 배제한 상태에서 투명하고 안정된 정신을 토대로 기획되어 왔다고 할지라도 육체의 모호함은 온전히 배제되지 않은 채 정신의 이면에 존재하면서 이중적인 층위를 형성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각혈하는 몸은 자기 소외와 자기 실존에 대한 불안과 공포라는 근대적인 삶에 대한 하나의 메타포로 기능한다. 하지만 그의 전략은 자신의 각혈하는 몸에 대한 향유의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그의 글쓰기 전략은 ‘여성(금홍, 권순옥, 변동림)의 몸’을 대상화하는 차원으로 나아간다. 그중에서도 금홍의 몸은 각별하다. 그녀의 몸 역시 자신처럼 소외되고 비천한 창부의 몸이다. 창부의 몸은 소설 전편에 걸쳐 출몰한다. 음란한 요물 같은 <공포의 기록>의 가출한 아내, 자신의 몸을 파는 <지주회시(鼅鼄會豕)>의 아내와 <날개>의 연심(蓮心), <봉별기(逢別記)>의 금홍(錦紅), “히멀건 살의 매력(魅力)이 이렇게 다섯 달 동안이나 놀고 없는 것은 참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이 아깝”다고 말하는 <종생기(終生記)>의 19세 소녀 정희(貞姬) 등은 글쓰기 주체의 시선에 의해 창부로서의 몸이 가지는 이중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직접적으로 창부의 모습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불행한 계승>에서 “열아홉 처녀를 보고도 마음이 동하지 않는 작가는 거세당한 놈”이라고 말하는 은선(銀仙), 남자의 “거츠른 행동이 몹시 기다려졌다”는 <단발(斷髮)>의 주인공 소녀 선(仙), “독화(毒花)의 눈초리들”을 가진 <동해(童骸)>의 임(姙), 카페 여급인 <환시기(幻視記)>의 순영 등은 모두 어느 정도 그 안에 창부의 속성을 가진 존재들이다.
이러한 창부의 몸 혹은 그 이미지들은 다른 어떤 대상보다도 글쓰기 주체의 의식에 강하게 각인되어 드러난다. 이 의식의 강렬함은 때때로 글쓰기 주체와 그 대상인 창부의 몸 사이의 경계가 해체되는 데까지 이른다. 이것은 창부의 몸이 비록 글쓰기 주체의 의식이 타자화된 대상이라고는 하지만 주체의 타자화라는 점에서 그 창부의 몸은 글쓰기 주체의 몸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창부의 몸을 통해 글쓰기 주체는 자신의 몸을 보고 있는 것이다. <지주회시>의 아내는 창부다. 어느 날 아내가 손님들에게 발길로 차여 층계에서 굴러 떨어지자 글쓰기 주체는 “그대그락대그락하는몸이은근히다쳤겠지―접시깨지듯했겠지―아프다. 아프다”라고 말한다. 행간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몸을 파는 아내의 몸에 대한 심한 자의식이다. 점점 ‘말라깽이’가 되어가는 아내의 몸에서 각혈로 인해 점점 창백해져 가는 자신의 몸을 본 것이다. 아내의 몸에 대한 양가 감정은 결국 여성의 몸을 독화(毒花)로 인식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하기에 이른다.
<날개>와 <봉별기>에 드러난 아내의 몸은 ‘나’를 살해하고 흡착하려는 무서운 몸[毒]이면서 동시에 가장 편안하고 안일한 그런 몸[花]이다. 창부인 아내의 몸이 가지는 이 독화로서의 존재성을 최후의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은 채 자신의 글쓰기 대상으로 삼는다. 마치 유서를 쓰듯이 소설을 썼다고 한 <종생기>에서도 이러한 독화의 양가성은 강하게 드러난다. 여기에서 정희는 요조숙녀와 요부라는 이중성을 지닌다. 이 둘은 글쓰기 주체의 의식 속에서 차이를 가지지만 결코 그 두 개의 속성이 대립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이 두 속성은 차이를 유지하면서 끊임없이 의미를 지연시킨다. 정희의 몸은 순수와 비순수, 이성과 감성, 육체와 정신, 아름다움과 추함 사이에서 심한 딜레마를 앓고 있는 글쓰기 주체의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
정희의 몸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글쓰기 주체의 욕망을 표상한다. 그것은 ‘암만 베껴도 정체(正體)가 드러나지 않는 다마네기’(<실화>)와 같은 것이다. 어째서 그녀 혹은 그녀들의 몸은 다마네기와 같은 것일까? 욕망이 끊임없이 계속된다는 것은 이들의 몸을 조정하고 규정해 줄 상징적인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의 몸이 떠도는 것은 부부관계라든가 가정 혹은 가족과 같은 상징적인 체계가 해체되어 있기 때문이다. <봉별기>에서 금홍의 몸은 생활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 생활에 밀착된 몸은 부부관계나 가정의 해체에서 오는 허무와 페이소스가 스며들 틈이 없지만 생활에서 벗어나면 사정은 달라진다. 금홍의 몸과 ‘나’의 몸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면서 불투명하고 애매모호한 세계를 이룬다. 이것은 “사물(事物)의 어떤 ‘포인트’로 이 믿음이라는 역학(力學)의 지점(支點)을 삼아야겠느냐는 것이 전(全)혀 캄캄하여졌다는 것”(<공포의 기록>)과 다른 것이 아니다. 사물을 드러내는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나 준거가 캄캄하다는 것은 세계 인식의 차원에서 보면 모더니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모더니즘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포인트로 삼을 만한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나 준거가 없기 때문에 사회적ㆍ역사적 현실에 대한 객관적 관찰과 총체적 이해, 그리고 그 변화를 수반하는 미래에 대한 전망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객관적 관찰과 총체적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모더니즘적 주체가 외적인 대상이 자신의 의식에 표상되는 모습 그대로 의식 밖에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회의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표상은 의식의 내면과 외면을 서로 매개하는 동시에 단절하고, 열어놓는 동시에 폐쇄하는 이중성을 띠게 된 것이다. 근대적 의식은 이렇게 주관적 표상과 객관적 실재의 불일치가 사실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처음 탄생한 것이다. 외면과 대립하는 내면적 세계의 가능성은 그런 불일치의 체험 속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불일치의 체험은 현실 속에서의 극단적인 개인주의적 주체의 자기표현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개인주의적 자기표현은 1) 미학적 자의식 또는 자기 반영성, 2) 동시성, 병치 또는 몽타주, 3) 패러독스, 모호성, 불확실성, 4) 비인간화와 통합적인 개인의 주체 또는 개성의 붕괴 등과 같은 존재 형식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내면성의 발견은 불안을 동반한다. 불안하기 때문에 주관과 객관의 대립을 화해시키고 내면과 외면의 분리를 재봉합하려는 시도를 보인다. 사물의 ‘포인트’의 상실로 인해 글쓰기 주체는 자신의 내면을 발견하게 되지만 그와 동시에 세계의 상실에 대한 불안이라는 과제를 또한 떠안게 된다. 이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데카르트적인 근대적 자아는 자율성의 신화에 빠져들게 된다. 그로 인해 세계 상실의 공포를 잊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상의 소설에 드러나는 글쓰기 주체는 자율성의 신화에 빠져들지 않는다. 글쓰기 주체는 내면과 외면, 주관과 객관의 상호 접촉 불가능성에 대해 불안해하며 허무주의로 이어지는 세계 상실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지만, 그 불안과 공포로부터 도피하려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불안과 공포를 불안과 공포로 보려 한다. 그 실체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다마네기 같은 창부의 몸을 한 꺼풀씩 벗겨 내려가는 행위는 허무주의의 실체를 외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면하려는 글쓰기 주체의 강한 의지로 볼 수 있다. 글쓰기 주체의 이러한 의식은 근대에 대한 향유와 반성을 모두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더니즘적이면서 동시에 포스트모더니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글쓰기 주체가 보여주는 몸을 통한 근대의 향유와 반성의 문제는 근대적인 도시 공간으로의 산책(散策)이라는 또 다른 몸 체험을 통해 새롭게 확장되고 변주된다. 근대적인 도시 공간으로의 산책은 몸의 감각과 근대적인 세계와의 상호 소통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은 이상이 밀고 나간 근대적인 기획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성과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근대적인 도시 공간으로의 산책은 ‘내객의 눈에 의해 타자의 보여짐을 자각한 이후’(<날개>)에 이루어진다. 근대적인 도시 공간으로의 ‘세 번의 밤 외출과 두 번의 낮 외출’은 ‘동시성의 집합’과 ‘동시성의 확장’이라는 양태를 띤다. ‘경성역 티 룸’에서 ‘산’으로 ‘산’에서, 다시 ‘미쓰꼬시 옥상’으로의 공간 이동은 각각 일정한 차이와 독립적인 존재성을 드러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근대적인 도시 공간인 경성이라는 단일한 이미지와 연관되어 있다. 이 사실은 글쓰기 주체의 즉흥적인 산책을 통해 드러나는 각각의 병치된 공간과 그것의 치환된 형태로 드러나는 공간 사이에 형성되는 긴장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병치와 치환이라는 이러한 중층성은 기본적으로 근대적인 공간 자체가 그 안에 불가해한 요소와 결코 융합할 수 없는 어떤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글쓰기 주체의 눈에 근대적인 도시 공간은 불투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금붕어 지느레미처럼 흐늑흐늑 허비적거리”거나 “끈적끈적한 줄에 엉켜서 헤어나지들을 못하”(<날개>)는 것으로 표상될 뿐이다. 글쓰기 주체는 그것을 ‘회탁(灰濁)’으로 명명한다. 그렇다면 글쓰기 주체는 왜 근대를 회탁이라고 명명한 것일까? 여기에는 근대를 조감하고 투시하는 글쓰기 주체의 시선이 내재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글쓰기 주체는 근대는 태생적으로 주관과 객관의 화해와, 내면과 외면의 재봉합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글쓰기 주체는 회탁의 거리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근대적인 세계에 대한 이러한 문제의식은 경성이라는 근대적인 도시 공간을 단순히 외적 관찰이 아닌 내적 반성의 차원에서 인식하게 한다. 경성이라는 근대적인 도시 공간이 근대 및 근대성과 관련하여 전망의 불투명성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회탁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 것은 비극성을 강하게 환기한다고 할 수 있다.
글쓰기 주체가 보여주고 있는 이러한 일련의 사실들은 그 자체가 한 편의 몸의 드라마인 동시에 근대 혹은 근대성의 드라마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는 몸으로 말하고 사유하는 방식을 통해 우리의 근대나 근대성이 가지는 특수한 측면은 물론 근대 일반의 보편적인 측면을 탐색했던 것이다. 근대 및 근대성을 탐색하면서 그가 몸을 토대로 했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지난 세기까지 자명성의 원천으로 군림했던 자아 또는 주체를 몸에 대한 사유 속에서 재창출하고 우리의 존재 이해를 재형성하는 것을 진정한 근대성이라고 한다면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근대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이상의 문학을 논하면서 자아의 분열 양상을 강조해 그를 마치 조현증(정신분열증) 환자 취급을 한다거나 전기적인 사실을 강조해 그를 창백한 정신의 표면을 유랑하며 권태와 회의에 깊게 빠져 결국 여기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죽어간 비극의 주인공, 혹은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세계로 도피하려고 한 무미건조한 스타일리스트로만 간주하는 것은 그에 대한 온당한 평가라고 할 수 없다. 그의 근대 체험의 중요한 행위로 평가받고 있는 ‘방 → 거리 → 경성역 → 산 → 미쓰꼬시 옥상’으로의 공간 이동은 몸에 대한 이해, 곧 ‘각혈하는 나의 몸’에서 ‘독화로서의 너(창부)의 몸’으로 그리고 다시 ‘회탁(灰濁)의 세계에서의 간신체성(inter-corporeality)으로서의 우리의 몸’에 대한 치열한 인식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그 안에 내재한 심층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상이 왜 진정한 모더니스트인가 하는 물음은 그가 근대에 대한 향유와 반성을, 몸을 통해 사유하고 실천했다는 사실에서 찾지 않으면 그 온전한 의미를 드러낼 수 없을 것이다.
- 참조어
- 날개, 종생기, 지주회시, 봉별기, 실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