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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일 학이시습지길... 깊어만 가고 있는 사무국 앞 가을 풍경 (09:52)
‘학이시습지’는 공자의 논어 첫머리에 나오는”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를 인용한 말이다.
우리나라 최초로 대학교와 지역 트레일 단체가 합심하여 탐사한 이 길은
강릉원주대학교 옆 강릉여행자플랫폼 강릉수월래에서 출발하여
오죽헌과 선교장, 매월당 김시습기념관, 허난설헌 생가마을을 지난다.
죽헌저수지의 물버들 숲길도 그림처럼 아름답지만,
강릉의 자연과 역사와 미래를 함께하는 우리나라 선비문화의 종합 선물세트와 같다. / 바우길
사무국에 떡 하니 계시는 짱돌 형님 벽돌님...
국장님 인사말...
스카이블루님
칭런님과 여인님들...
가을날의 담쟁이덩굴은 꽤나 이쁘다는 생각이...
살짝 내리는 가을비를 맞으며 출발 준비를 한다...(10:09)
강릉대 해람지의 가을 풍경...
16구간 입구에서...(10:16)
가을비에 젖은 나무 계단과 가로등...(눈 내리는 날 풍경이 꽤 운치 있겠다는 생각이...)
조덕배의 노래 '그대 없는 빈 자리 '가 생각났다.
마명산 능선길을 가을과 더불어 걸어간다
마명산(馬鳴山)은 마을 뒤에 있는 제일 높은 봉으로 강릉대학 뒷산 주봉.
동원 최문한공의 말에 의하면 말이 이곳에 와서 울었다고 하여
"말이 와서 운 산"이란 뜻에서 생긴 이름이다.
동원공 (東原公)이 전쟁에 나가 싸우다가 전사를 하자 말이 주인인 동원공과 그의 유품을 등에 싣고
이곳에 와 울자 후손들이 공이 타고 다니던 말 울음소리를 알고 달려와 보니
전사한 동원공이 말 위에 있자 그를 이곳에 묻어 묘를 쓰고 유품도 같이 묻었다 한다.
또 죽헌리 마정(馬井 - 말우물)에서 나온 용마가 이산에 와서 울었다고 하여 마명산(馬鳴山)이라 했다.
崔文漢墓碑
강원도 강릉시 지변동의 마명산에 있는 고려 후기 문신인 최문한(崔文漢)의 묘비.
최문한은 충숙왕의 부마이며 고려 말에 국운이 다하자 강릉으로 낙향한 후에 강릉최씨 시조가 되었다.
[1799년 강릉에 거주하는 최문한의 자손들이 최문한 묘지의 표석으로 묘비를 세웠다.
강원도 강릉시 지변동의 유천재사(楡川齋舍)가 있는 마명산 자락에 있다.
받침돌 위에 높이 180㎝, 두께 13㎝, 폭 90㎝의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얹었다.
비석 제목은 ‘고려국부마도위최공묘비명병서(高麗國駙馬都尉崔公墓碑銘幷序)’이다.
비문은 정범조(丁範祖)가 지었고, 글씨는 이정운(李鼎運)이 썼다.
느릅내 어귀에 있는 미수기님 집 뒷 마당에 있는 이름이 '맒음'이라는 멍멍이....
근데, 이 멍멍이는 낯선 사람을 보고 전혀 짖지를 않고 아무나 보고 좋아라 한다...(개의 의무를 망각한 멍멍이다)
느릅내 삼거리에서....
느릅내[楡川]
강원도 강릉시 유천동에 있는 자연 마을.
예전에 마을로 흐르는 냇가(위촌천 하류)에 느릅나무가 많이 자라 생긴 이름이다.
이 내는 위촌천으로 성산면 위촌리에서 흘러와 죽헌저수지로 흐른다.
마을은 땅재봉에서 마명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있어 이 줄기를 기준으로 윗 느릅내, 아랫 느릅내로 나눴다.
느릅내 한가운데는 강릉의 4주산과 경포의 4주산 가운데 하나인 땅재봉이 있고,
땅재봉 북쪽 줄기 끝에는 위촌천이 흐른다.
땅재봉은 삿갓을 엎어 놓은 형상으로 생겼는데,
영험한 산이라 하여 다른 지역 사람들이 묘를 쓰기 위해 밤에 몰래 썼으며,
또 급하게 쓰다 보니 봉분도 하지 않고 그냥 땅속에 시신을 묻고 간 묘들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
느릅내 마을로 흐르는 내를 따라 올라가면 성산면 위촌리가 되고,
내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죽헌동 원퉁이(죽헌저수지), 경포호가 된다.
땅재봉 동쪽 줄기 밑에는 평평한 바위에 새겨진 바둑판이 있고,
그 옆에는 남자의 성기 모양이 붙어 있는 남근석과 여자의 성기 모양이 붙어 있는 여근석이 있는데,
이 바위를 건드리면 느릅내 처녀총각들이 바람이 난다고 하여 이 바위를 건들이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느릅내는 윗 느릅내와 아랫느릅내 마을로 나눠졌는데,
아랫느릅내 앞에 있는 죽일에는 논을 메워 거대한 주택단지가 되었다.
백일홍
이 계절의 강릉은 어딜 가나 감이 많은 것 같다.
저수지 어귀에서 잠시 휴식을...(10:52)
16구간 공포의 언덕길 정상에서...(11:09)
가을 ~가을 한 주니정님의 모습인데... 당기다 보니 미세한 흔들림에도...(무쟈게 죄송)
점심 식사 안내와 후반 모임 장소를 설명하고 있는 구간지기 수정님...(11:45)
강릉 한옥마을 입구에서...
강릉오죽한옥마을
한옥은 예로부터 작위적인 형태가 아닌 자연을 관조하며 주위의 환경요소와
어울리도록 지었기 때문에 주위의 경관요소를 거르지 않는 곳에 집을 짓되
그곳에서 나오는 재료를 사용하여 그곳의 지세에 맞는 형태의 것이 되도록 하였다.
초가의 선은 뒷산의 모양을 닮았고 기와의 선은 양끝을 잡은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늘어진 새끼줄의 선을 표현하며,
처마는 후림과 조로를 두고 용마루의 가운데를 처지게 하여 자연스러운 형태를 나타나게 하여 유연성을 품고 있다.
강릉오죽한옥마을은 이러한 한옥의 특징을 최대한 살려 자연스럽고 언제 보아도 정겨운 공간으로 조성하였다.
비록 기교 있는 장식으로 화려하지는 않지만, 재료 본연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담백함과 순수함을 나타내었으며,
마을 곳곳에 심어진 대나무의 경관은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차분해지고 심신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조선의 대표학자 율곡 이이가 태어난 집으로 유명한 오죽헌과
강릉한옥마을을 연계하여 율곡의 사상을 전파할 수 있는 인성 교육장을 운영하며,
다양한 전통문화체험을 통해 전 세계인에게 한옥의 우수성과 전통성을 알리는 매개체가 될 것이다.
옛 선조들의 삶의 지혜를 보존하고 과거와 현대를 잇는 강릉의 대표적인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겠다.
오~만원 권이 되고 싶은 여인네들...
강릉 오죽헌(江陵烏竹軒)
보물 제165호, 정식 보물 명칭은 '강릉 오죽헌(江陵烏竹軒)'이다.
강릉시 죽헌동에 있는 조선중기의 목조 건물로, 단일 주거 건축으로 역사가 가장 오래되었다.
'오죽헌'이라는 명칭은 뒤뜰에 검은 대나무가 자란 것을 계기로 붙었다.
검은 대나무를 까마귀 오(烏) 자를 써서 오죽(烏竹)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신사임당의 친정집으로 이곳에서 율곡 이이가 태어났다.
1975년에 오죽헌 정화 사업으로 율곡의 영정을 모신 문성사를 비롯해
자경문, 율곡기념관 등을 신축하고 강릉시립박물관과 통합되어 1998년에 개관하였다.
오죽헌 입구에서는 ‘세계 최초 모자 화폐인물 탄생지’라는 소개 문구로 장소를 소개하였다.
오죽헌은 본래 신사임당 생전에 건축된 것이 아니라, 그보다 약 백 년 전인
15세기 중엽에 건축된 것이 상속되어 신사임당에 이르게 된 것이다.
오죽헌을 건축한 인물은 최치운이라는 강릉의 명사이며,
최치운에게서 그의 아들 최응현에게 상속되었고, 최응현에게서 그의 사위인 용인 이씨 이사온에게로 상속되었으며,
이사온에게서 평산 신씨 신명화에게 상속되었다. 이 신명화가 바로 신사임당의 친부이자, 율곡 이이의 외조부이다.
신명화는 사위인 권처균에게 물려주었고, 오죽헌의 택호는 권처균의 호 오죽헌에서 유래된 것이다.
신사임당의 외고조부인 최치운에게서 신사임당에게까지 내려온 고택이 바로 오죽헌 인 것이다.
칭런, 블루, 선화님.
16 구간지기 선유심, 수정님.
사무국 실땅님.
오랜만에 참석한 바우길 초대 이사장 이순원 님
메타쉐콰이어길...
팀장님과 낭만주객님...
고인 빗물에 비친 우산과 오선 전깃줄 위에 떠 있는 음표 같은 낙엽들...
늦가을 속을 걸어간다...
낙엽 / 레미 드 구르몽 Remy de Gourmont (1858-1915)
시몬 나뭇 잎새 져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덥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 빛깔은 정답고 모습은 쓸쓸하다
낙엽은 덧없이 버려져 땅 위에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해질 무렵 낙엽의 모습은 쓸쓸하다
비림에 흩어지며 낙엽은 정답게 외친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발길에 밟히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날개소리와 여인의 옷자락 소릴 낸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가까이 오라 우리 또한 언젠가는 낙엽이리니
가까이 오라 이미 날은 저물고 바람이 분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선교장
강릉 선교장 江陵船橋莊
선교장은 강원도 지역에서 가장 잘 남아 있는 품위 있는 사대부 가옥이다.
강릉시에 경포 쪽으로 4km쯤 떨어진 선교장은
조선시대 상류층의 가옥을 대표하는 곳으로, 국가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경포호가 지금보다 넓었을 때, “배 타고 건넌다"라고 하여
이 동네를 배다리 마을(船橋里)이라 불렀는데, 선교장이란 이름은 바로 여기서 유래한다.
선교장은 조선 영조 때(1703년) 효령대군의 후손인 이내 번이 족제비 떼를 쫓다가
우연히 발견한 명당자리에 집을 지은 후, 그 후손이 지금도 살고 있다.
총 건평 1,051.24m²(318평)으로, 긴 행랑에 둘러싸인 안채, 사랑채, 동별당, 가묘 등이 정연하게 남아있고,
문밖에는 수백 평의 연못 위에 세워진 활래정이라는 정자가 있어, 정원까지 갖춘 완벽한 구조를 보여 준다.
선교장은 건물뿐 아니라 조선 후기의 주거생활과 생활용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주변 경관과 어우러진 풍치가 아름답다. 선교장의 사랑은 열화당이라 하며,
여기에는 용비어천가, 고려사 등 수천 권의 책, 글, 그림 등이 소장되어 있다.
* 안채
안채는 1700년 이전에 건립된 건물로 세종의 형인 효령 대군의 10대손인 이내번이 창건한 것으로
선교장 건물 중 가장 서민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안방과 건너방이 대청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부엌이 안방에 붙어 있다.
* 열화당(悅話堂)
열화당은 남주인 전용의 사랑채로서 내번의 손자 후가 순조15년(1815)에 건립하였으며
당호인 열화당은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 (悅親戚之情話)에서 따왔다고 한다.
열화당은 3단의 장대석 위에 세워진 누각형식의 건물로 아주 운치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 동별당(東別堂)
안채와 연결된 주인 전용의 별당건물로 이근우가 1920년에 지은 ㄱ자형 건물이다.
동쪽에 2개, 서쪽에 1 개의 온돌방을 만들고 앞면에는 넓은 툇마루를, 뒷면과 동쪽은 좁은 툇마루를 돌렸다.
* 활래정(活來亭)
활래정은 선교장 정원에 판 인공 연못 위에 세운 정자로 순조16년(1816) 열화당을 세운 다음해에 세웠다.
정자명은 주자의 시 (관서유감) 중 "爲有頭源活水來" 에서 땄다고 한다.
이 건물은 마루가 연못 안으로 들어가 돌기둥으로 받친 누각형식의 ㄱ자형 건물이다.
활래정은 벽면 전부가 분합문의 띠살문으로 되어 있으며 방과 마루를 연결하는 복도옆에 접객용 다실이 있다.
* 기타
안채와 열화당 사이에 서재겸 서고로 사용하던 서별당이 있는데 소실되었다가 1996년에 다시 복원하였으며,
건물의 전면에는 행랑채가 있다. 또한 건물의 측면에는 원래 창고였으나
개화기때 신학문을 가르치던 동진학교(東進學校)터가 있다
활래정
해운정
강릉 해운정 (江陵海雲亭)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雲亭洞)에 있는 조선 중기의 정자.
해운정은 1530년(중종 25) 어촌 심언광이 강원도감찰사로 있을 때 건축한 상류 주택의 별당이다.
자연석 초석 위에 25㎝의 네모기둥을 세우고 초익공의 포작을 얹은 후 팔작 기와지붕의 해운정을 완성하였다.
강릉 해운정은 1963년 1월 21일에 보물 제183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재지정되었다.
경포 호수 건너 스카이베이 호텔을 당겨 본다.
오랜만에 보는 국장님의 익살스러운 표정과 아무것도 모르는 여인네들...
선두에서 수고한 수정님...
웃는 표정들이 참 좋다.
허난설헌 생가터에서 이순원 님의 설명이 있었다...(14:39)
간간이 내리는 가을비를 맞으며 쌓여 있는 낙엽을 밟으며... 학이시습지길을 그렇게 걸었다...(15:18)
Oh ! je voudrais tant que tu te souviennes 아 나는 당신이 기억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오 Des jours heureux ou nous etions amis. 우리가 함께 했던 행복한 날들을 En ce temps-la la vie etait plus belle, 그시절 인생은 더없이 아름다웠고 Et le soleil plus brulant qu'aujourd'hui. 태양도 오늘보다 더욱 불타올랐지요 Les feuilles mortes se ramassent a la pelle. 낙엽들이 무수히 나뒹굴고 있네요 Tu vois, je n'ai pas oublie... 아시죠? 제가 잊지 않고 있다는걸요 Les feuilles mortes se ramassent a la pelle, 낙엽들이 무수히 나뒹굴고 있네요 Les souvenirs et les regrets aussi 추억과 회한(悔恨)들 역시도 Et le vent du nord les emporte Dans la nuit froide de l'oubli. 그리고 북풍은 망각의 차가운 밤속으로 그것을 실어가네요 Tu vois, je n'ai pas oublie La chanson que tu me chantais. 당신이 내게 불러 준 그 노래가 나에겐 잊혀지지 않네요. C'est une chanson Qui nous ressemble 그것은 우리와 닮은 하나의 노래이지 Toi qui m'aimais Et je t'aimais 너는 나를 나는 너를 사랑 했지 Nous vivions tous les deux ensemble 우리는 그리 함께 살았는데 Tou qui m'aimais Moi qui t'aimais 나를 사랑 했던 너 너를 사랑 했던 나 Mais la vie separe Ceux qui s'aiment Tout doucement Sans faire de bruit 삶은 서서히 소리없이 사랑하던 우리를 갈라 놓았지 Et la mer efface sur le sable Les pas des amants desunis. 그리고 파도는 모래위에 새겼던 연인들의 흔적을 지우고 갔네 * Les Feuilles Mortes (고엽, 枯葉 , Autumn Leaves) /Yves Montand(이브 몽땅) 프랑스의 시인 자크 프레베르의 시에 작곡가 조제프 코스마가 곡을 붙인 노래. 프랑스의 작곡가 조제프 코스마가 1945년에 초연된 롤랑 프티의 발레 작품'랑데부 Le Rendez-Vous'를 위해 만든 곡으로, 시인 자크 프레베르(Jacques Prevert)가 작사했다. 1946년 이브 몽탕(Yves Montand)이 영화 '밤의 문'(Les portes de la nuit)에서 처음 불렀다.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인 가수 줄리에트 그레코(Juliette Greco)가 맨 처음 청중 앞에 나타나 부른 노래도 이 노래였다고 한다. 1950년 조니 머서가 가사를 영어로 옮겨 미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유명한 곡이 되었다. '낙엽을 긁어 모아도 북풍이 싸늘한 망각의 어둠속으로 몰아가 버리네. 추억과 회한도 저 낙엽과 같은 것'이라고 낙엽을 빌려 덧없는 인생과 사랑을 노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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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낙엽을 밟으며
가을 속을 걷는 바우님들이 참 아름답네요~^^
촉촉한 가을날의 풍경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걷자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