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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강의8
제 8강 장성한 자가 되라(제5장 11절 ∼ 제6장 20절)
제5장 1절에서 저자의 말은 드디어 그 주류에 들어와서 제사직의 의미를 말하고 그 자격을 말하여서 10절까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주류는 문득 여기서 한 큰 바위를 만나 나가지 못하고 한 바퀴 소용돌이를 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 바위란 곧 수신자의 양심의 순탁(純濁)이라는 것이다.
예수는 대제사장이라고 위에서 말했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예수도 유대교의 대제사장과 같이 인간을 동정하는 자요 하나님이 임명하신 자라고 하였다. 그러나 또 예수는 저들과 전혀 같은 자가 아니다. 크게 다른 것이 있고, 그 다른 점이 예수의 영원한 참 대제사장 되는 소이(所以)다. 그래 그것을 설명하기 위하여「시편」의 예언된 것을 인용하여다가 그는 멜기세덱 계통의 제사장이라고 하였다. 그러고 본즉 자연 멜기세덱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여져서 11절에서 “거기 관하여는” 하고 말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시작해놓고 저자의 말은 막혔다. 바위돌 같이 굳은 수신자의 양심이 턱 가로막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가던 길을 내놓고 문득 분노의 거품을 토하게 되었다. 그것이 11절 이하의 말이다. 그리고는 제 6장에 있어서 뒤이어 책망(責望)을 하고 권면을 하고 격려(激勵)를 하게 되어 이장 전체는 5장에서 시작되어 제10장 18절에서 끝나는 본론과는 직접 연속이 아니 되는 딴 말이 되었다.
그러나 격려 말까지를 필(畢)하여 소용돌이의 한 바퀴를 다 돌고 돌아온 때는, 처음에 가로막혔던 바위는 이미 부서져서 20절에서는 다시 ‘멜기세덱’에 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유연(悠然)한 유세(流勢)로 제7장에 들어간다.
1. 굳은 음식을 먹으라
11. 거기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그러나 풀어 말하기가 어려운 것은 너희가 알아듣는 힘이 둔하여졌음이다.
12. 과연 너희가 때를 지난 것으로 하면 이미 선생이 되었어야 할 터인데, 다시 누가 너희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를 가르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으며, 굳은 음식이 못되고 젖이나 필요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13. 대개 젖을 먹는 자는 어린 아해(兒孩)이니 의(義)의 말씀에 경험이 없는 자다.
14. 그러나 장성한 사람, 즉, 지각을 사용함에 의하여 연단(練鍛)되어 선악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굳은 음식이 합(合)하다.
멜기세덱은 무한히 풍부한 그리스도의 인격을 표하는 한 개 상징이다. 그 의미를 풀어 말하자면 한정이 없다. 샘물에 나가는 사람처럼, 태양광선을 받는 사람처럼 그 진리에 접하는 사람은 먹고, 마시고, 목욕(沐浴)하고, 전신에 그 빛을 받고 그 열을 흡수(吸收)하여, 시원하고 기쁨을 얻을 것이다. 다만 필요한 것은 귀를 여는 것이다. 듣는 귀를 가지지 못하면 이는 내게 아무 소용이 없다. 진리는 귀 있는 자만이 받는 양식이다. 저자는 이제 이 진리의 문을 열자는 것이다. 그러나 수신자의 맘은 조는 유두고처럼 둔하여졌다. 말해도 말해도 알아들을 줄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저들은 믿은 연수(年數)로 한다면 벌써 쑥쑥 진보하여 진리의 오전(奥殿)에 들어갔어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아직도 첫 계단에 서서 머뭇거리고 있다. 고로 저자의 맘은 열(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이 그들의 맘을 그렇게 둔하게 하였나. 무슨 고장(故障)이 있어서 이들은 그렇듯 발육 불완전이 되었나. 여러 가지 말을 할 수 있을 터이나 그 주인(主因)은 그리스도에 대한사랑이 식은 것이라고 할 것이다. 재지(才智)는 학문에서 나오는 것 아니오 사랑에서 나온다. 사랑이 있으면 모든 것의 의미가 스스로 환하게 보이고 자기 할 바를 자연히 알게 된다. 유아의 남어(喃語)를 타인은 몰라도 그 사랑하는 어머니는 알아듣는다. 자모(慈母)는 육아론을 배우지 못하고 아동심리학을 배우지 못했어도 어떻게하면 제 사랑하는 것이 편해 하는지 좋아하는지를 안다. 도리어 이들 학문 이야말로 사랑의 소산이다. 그리스도의 양이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것은 그에 대한 신뢰 때문이다. 사랑은 사람의 눈을 밝게 하고 귀를 총(聰)케 하고 혀를 정확케 하고 붓을 날카롭게 한다. 삼일불독서(三日不讀書)면 구중생형극(口中生荊棘)이라고, 학자가 학문애가 없어지면 노둔(魯鈍)이 얼굴에 떠오르고, 백성이 국가애를 잃어버리면 유랑의 빛이 그 행동에 나타나고, 계집이 남편 사랑하기를 그만두면 파렴치(破廉耻)의 냄새가 그 입속에서 나온다. 신자도 그리스도를 사랑하기를 그치고 그 양심이 돌 같아지지 않을 수 없다. 어제까지 설교를 하던 사람도 오늘에 그리스도를 버리면, 성서의 한마디도 알아듣지를 못한다.
그러한 사람은 도로 어린 아해(兒孩)가 된 것이다. 내분비선(內分泌腺)에 고장이 있어 영구히 아이에서 더 발육을 못하는 것처럼, 신자의 양심 안에 그리스도에 대한 애(愛)의 분비가 그칠 때 그만 유아의 상태에 멈추고 만다. 유아는 젖을 먹는 자다. 아직 언어를 분명히 못하는 자다. 자라지 못한 신자는 의(義)의 말씀에 대하여 그러하다. 여기 ‘의의 말씀’ 이란 말은 또 ‘똑똑한 말’이라고도 역(譯)할 수 있다. 아이가 어려서 말을 똑똑히 알아듣지 못하는 것같이 양심이 어려서 도리를 분별치 못하는 것이다.
여기 주의할 것은 “의의 말씀에 경험이 없다”는 말이다. 의의 말씀은 경험하지 않으면 안된다. 스스로 연습(練習)하지 않으면 안된다. 진리는 들어서만 되는 것 아니다. 진리는 귀로 듣는 것 아니요 행동으로 들을 것이다. 행동으로 듣는 것이 아니고는 진리는 알아들을 수 없다. 어린아이가 말을 연습해서만 말을 배울 수 있는 것같이, 신자는 의를 행해서만 의를 알 수 있다. 현대인의 큰 잘못의 하나는 진리는 듣기만 하면 되는 줄 아는 일이다. 라디오라도 더욱 보급되어 넓이 전도를 하기만 하면 세계는 고쳐질 것인 듯이 생각하는 것이 현대인의 생각이다. 그러나 이것이 저들이 진리에 대해 어떻게 어린이임을, 어떻게 무식자임을 증거하는 말이다. 의는 연습하지 않으면 안된다. 아이가 행보를 배우듯이, 넘어지고 넘어지면서 실습하지 않으면 의의 다리 힘은 서지 않는다. 히브리서의 수신자도 그러한 나이만 먹은 커다란 아이였다.
눈을 들어서 세상을 보면 커다란 유아들이 얼마나 많음이어! 관청에도 어린애가 그득하고 학교 교원실에도 어린애가 그득하고 교회당에도 젖만 먹는 어린애가 그득하다. 우리는 통이 진리에 있어서 어린아이다. 왜.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선악의 판단에 있어서 우리 신경은 목석같이 둔한 자들이다. 시험삼아 신문을 들고 앉아 거기 나타나 있는 기사를 검토해보라. 거기 시사비평이 있고 사설이 있고 학문연구 발표가 있고 취미물(趣味物)이 있고 지방 소개(紹介)가 있고 공직자, 사업가, 교육가, 종교가, 문인의 표창(表彰)이 있고 기타 각가지 것이 있으나, 과연 거기 선악의 진정 정확한 판단으로 된 것이 몇 개나 있나. 신문은 오늘날 우리의 거울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처럼 도덕적으로 어린아(兒)인 원인은 우리가 의의 말씀을 실습하지 않는 데 있다. 실전(實戰)한 군인만이 이기는 강군이다. 강자는 어떤 굳은 음식이라도 삼키고 소화하는 것이요 굳은 것을 먹고 소화한 자만이 더 큰 싸움을 싸워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다.
2. 신앙에서 자라라
6장 1. 그런 고로 우리가 그리스도에 관한 초보의 말을 버리고 완전한 데 나가며. 죽은 행실의 회개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2. 세례, 안수, 죽은 자 부활, 영원한 심판 등에 대한 교훈으로 다시 터를 고쳐 닦지 말 것이다.
3. 그리고 하나님이 허(許)하시면 우리가 이 일을 할 것이다.
4. 그것은 한번 빛비침을 얻고, 하늘의 은사(恩賜)를 맛보고, 성령에 같이 참여한 자가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장차 올 세계의 능력을 맛보고,
6. 그리고 타락하는 자는 자기 자신에다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못박아 드러내놓고 욕보이는 자니,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가 없다.
7. 땅이 그 위에 자주 나리는 비를 마시고 그 밭가는 자에게 쓸 만한 채소(菜蔬)를 내어주면 하나님께 복을 받는 것이요,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을 당하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어린애로 있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까지든지 신앙의 초보 이야기만 하지 말고 더욱 완전한 데 나가야 한다. 초보의 것으로 터를 닦는 것이 불가한 일이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터 닦는 것만으로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자리지 못하는 아이는 어른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종내 아이대로도 있을 수 없게 된다. 신앙의 초보적인 것만을 안연(晏然)히 묵수(墨守)하고 있는 자는 그 기초적인 것도 종내 유지하지 못하게 되고 만다. 있는 자에게 더 주고 없는 자에게는 있는 것까지를 빼앗는 것이 천국의 법이다. 진리의 나라에서는 장성이냐 그렇지 않으면 사(死)가 있을 뿐이다. 은한 냥을 지중(地中)에 안장(安藏)하는 자는 천국 백성의 자격이 없다.
믿는 일은 재판소에 재산등록을 하여 두는 것같이 한번 한 후에는 안연(晏然)히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시각각으로 새로이 전취(戰取)하지 않으면 안된다. 타락이란 주색잡기에 빠지는 일만이 아니다. 자라지 못하는 것이 타락이다. 이미 한번 들어온 빛이, 한번 맛본 은혜, 한번 받은 성령, 한번 실험된 능력이 다시 자라지 못하는 것은 원인이 다른 데 있지 않고, 고의로 성령을 거역(拒逆)하는 일이 나 자신 안에 있기 때문이다. 고로 타락이다. 저들은 이미 믿어 그리스도의 지체(肢體)가 되었던 것인즉 이제 그의 생명의 활동력을 스스로 고의로 말살하여버리는 것은 자기 자신에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못박는 일이다. 이런 사람은 회개케 할 수가 없다. 하나님 편에서 미워하셔서라기보다도 스스로 제 맘을 완악(頑惡)케 하는 그 심적 태도 때문이다. 하나님이시라도 신앙을 강제하실 수는 없다. 우로(雨露)를 내리고 일광(日光)을 비친 담에는 좋은 작물을 내고 못 내는 것이 땅 자기에게 있는 것같이, 사람의 양심 위에 성령의 감동으로 새 세계의 원리가 계시된 후는 저가 그 나라 백성으로 자라고 못 자라는 것은 그의 자유의지에 있다. 그런 고로 경성(警醒)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말을 듣고「히브리서」의 수신자는 부르르 떨었을 것이다.
3. 열심을 발하라
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말은 이렇게 하나, 그러나 이보다 더 나은 것이 너에게 있고, 구원에 가까운 것이 있는 것을 확신한다.
10. 참말 하나님은 불의하시지 않으시니 너의 행한 사업과. 이미도 성도를 섬겼고, 지금도 섬김으로써, 그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그 사랑을 잊으시지 않을 것이다.
11. 그래 우리가 간절(懇切)히 바라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그와 마찬가지의 부지런을, 마지막까지 소망의 풍성한 확신에 대하여 나타내어,
12. 그리하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견딤으로 약속을 유업으로 얻은 자를 본받는 자가 되는 일이다.
이제 타락하면 다시 회개할 수 없다고까지 말하는 것은 혹독(酷毒)하다면 혹독한 말이요, 너희가 젖이나 먹는 어린 아이라 하는 말은 인격에 대한 모욕(侮辱)이라면 모욕이다. 그러나 이는 결코 미워서 하는 것도 아니요 멸시(蔑視)해서 하는 것도 아니다. 속에는 간절한 사랑이 있어서 하는 말이다. 저는 결코 일편 책망으로만 지나버리고 마는 소위 선생이 아니었다. 책망을 하는 한편 그 장점을 들어 권면할 줄 아는 참 스승이었다. 사람은 열 가지 부족의 지적만을 주는 것보다 한 가지 미점(美點)을 스스로 알게 하여 그것을 키워주는 때에, 훨씬 더 많이 자라는 것이 있다. 9절의 “사랑하는 자들아……” 하는 일어(一語)는 거의 자모의 음성 같은 말이다.
너희는 반성하여라, 아니하면 멸망이다. 그러나 두려워하지는 말라. 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그것은 다른 사람도 아니요 과거에 너희 자신들이 실(實)경험해본 일이다. 너희가 이날껏 신자의 살림을 지어왔으니 그것을 반성해보아라. 이제 생각하면 진저리가 나는 일이지만 역시 그것을 지나온 것 아니냐. 너희가 성도를 위해 동정을 과거에 했고 지금도 하지만 그 아무것도 없는 자들을 너희가 왜 동정하느냐. 그들을 동정해서 너에게 해가 있고 위험이 있을지언정 현세적으로 일분(ᅳ分)의 이(利)가 없는 것 아니냐. 그런 것을 너희가 왜 하느냐. 역시 눈에 뵈는 복리의 세계 외에 다른 어떤 것을 위하는 것이 있어서 하는 것 아니냐. 힘이 그렇게 너에게 있지 않으냐. 열심이 그렇게 있지 않으냐. 이제 그 열심을 장차 오는 세계를 위하여 끝까지 발(發)하고 버리지 말라.
4. 하나님의 약속이 너희를 완성하리라
13. 왜 그런고 하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서(盟誓)할 자가, 보다 더 큰이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서하여 말씀하시기를
14.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다.
15. 그리고 저가 또 그와 같이 오래 참아 그 약속을 얻었다.
16. 사람들은 (자기)보다 큰 자를 가리켜 맹서하는 법이요, 맹서는 저희의 모든 논쟁의 최후 확정이 된다.
17. 이런고로 하나님이. 약속을 계승하는 자에게 그 뜻의 변치 아니함을 더 충분히 보이시라고 맹서로써 중간에 보(保)하였으므로
18. 거기 관하여 하나님이 거짓말할 수가 없으신 즉, 이 변할 수 없는 두 가지 사실로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잡으려고 도망하여 나온 우리로 하여금 굳센 원기를 가지게 하시었다.
19. 이 소망은 우리 영혼에 닻과 같아서 안전하고 튼튼하여 위장(幃帳) 안에 들어가니 예수는 그리로 향하여, 우리를 위하여 앞장서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어 들어가셨다.
책망을 받고 자포자기할 염려가 있는 수신자에게 원기를 주기 위하여 과거의 역사를 회상시켰다. 과거 자기의 생애는 분명히 희망에 대한 보장이 될 수 있다. 지난날에도 이미 이러이러한 일이 있으니 우리에게도 힘이 없는 게 아니다 할 때 약하던 사람도 강해진다. 사회 개조를 할 사명을 지는 청년에게 먼저 줄 것은 선조들의 빛나는 역사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참 보장이 될 수 없다. 인간의 일인 한 아무도 절대의 확신을 줄 수는 없다. 참말 보장은 하나님의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하나님의 보장을 말한다. 너에게 힘이 있으니 염려 말라. 그러나 설 혹 그 힘이 없다 하더라도 염려할 것 없다. 너희가 아니고라도 하나님이 자기의 진실 때문에 장차 오는 세계를 기어이 완성하시고야 말 것이다. 그는 그것을 약속했고 약속만으로도 부족하신 듯이 다시 자기 이름을 두고 맹세까지 하셨다. 하나님의 이름이면 이 이상 더 높고 불변인 것은 천지간에 없다. 하나님은 이 이상 더 크고 영구한 것이 없어서 자기 이름으로 하신 것이다. 그러면 이 이중의 사실에 의하여 하나님이 자기 면목 때문에 이것을 반드시 성취하실 것은 의심 없다. 그러면 염려 할 것이 도시(都是) 없는 것 아니냐.
이보다 더 억센 논법은 다시없다. 우리로 인하여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우리 믿음을 완전케 하신다는데 다시 더 말이 있을 수 없다. 아무리 배수진을 친 우리라도 이 한 말씀을 들으면 안온(安穩) 할 수 있는 원기를 가지게 된다. 믿는 자는 장망성(將亡城)에서 도망하여 나온 자다. 건너온 뒤에 교량을 끊은 자다.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 이 의미에서 신자의 생애는 불안을 가지는 위기적인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창파에 뜬 배처럼 앉았는 밑과 사방에서는 안정할 줄 모르는 노도거파(怒濤巨波)가 끊임없이 흉용(洶湧)한다. 그러나 이 소망이 있기만 하면, 하나님의 진실성에 근거하는 이 소망이 있기만 하면 염려(念慮)없다. 물결이 아무리 흔들려도 그 물 밑을 통하여 밑바닥에 곽 들어박혀 있는 닻이 있으면 배가 든든한 것같이 우리 믿음이 하나님의 진실성이라는 영원한 반석에 깊이 닻 준 것이면 어떤 경우를 당하여도 태연할 수 있다.
우리 인생이란 이 위장(幃帳)은 밑바닥의 반석을 감추는 흔들리는 물결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지나서 저쪽에 소망을 두는 우리 믿음이 있기만 하면 장차 오는 나라는 우리 것이다. 예수는 벌써 우리를 위하여 앞장서서 그 위장(幃帳)을 제치고 저쪽 세계로 들어가셨다.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도 그리 들어가게 아버지께 교섭하시기 위하여 들어가셨다. 대제사장으로 들어가셨다. 멜기세덱 같은 말 영원한 대제사장이다.
이렇게 듣고 수신자의 흉중(胸中)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식었던 사랑이 일순간에 다시 불붙기 시작하였을 것이요 굳은 진리를 씹어 소화할 수 있는 힘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것을 믿으면서 저자는 차장(次章)에서 본론으로 다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