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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565. [역경의 열매] 이상택 (1-25) 나그네 순례길 팔순… 전적으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삶
의사 길 걷게 하시고 기독 병원 세워
치유하게 하심은 모두 주님의 이끄심
야간 산행 하며 새벽 산 묵상하는 건
평생 인도하신 주님을 사모하기 때문
샘병원 설립자인 효산 이상택 박사가 지난 2009년 진료실에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새벽마다 경기도 평택 진위면 은산리 산을 오른다. 그때마다 시편 121편을 노래한 시인의 심정이 된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2)
그렇다. 나그네 순례길 팔순을 지나면서 깨닫는 것은 내가 나의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삶이었다. 할 일 많은 이 땅에서 수많은 직업 중에 의사의 길을 걷게 하시고 기독교 병원을 세워 사랑의 치유를 하게 하심도 주님의 예정하신 뜻대로 이끄심이다.
내가 자주 야간 산행을 하며 새벽 산을 묵상하는 것도 평생 나를 인도하신 주님을 간절히 사모함 때문이다. 우리 주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기도하시고 밝아 오는 새벽을 맞아 함께 복음을 전할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많은 병자를 고치신(눅 6:12~17) 그 모습을 떠올리면 언제나 가슴이 뛴다. 그렇게 이 죄인도 부르셨다.
그래서 나는 은산리 새벽 산에 솟아나는 샘물처럼 우리 병원이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영육을 치유하는 베데스다 샘(요 5:2~7)이 되고 실로암 못(요 9:7)이 되기를 기도한다.
나는 산이 좋아서 알피니스트로 등정을 이어왔다. 세계의 주봉인 히말라야를 정복한 수많은 산악인에 비교하면 어린아이이고, 평생 환우들을 돌봐왔기에 직업적으로 산을 오를 시간을 얻을 수 없었지만 아마추어 산악인으로 자주 산을 찾았다. 산은 내 인생의 교사다. 새벽 효(曉)에 뫼 산(山), 새벽 산이 내 아호이다. 최근 펴낸 회고록도 ‘새벽 산에 솟아나는 샘물’(창조문예사)로 이름 지었다.
새벽 산이 좋아서 은산리에 칩거하고 있는 나는 미국의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가 살았던 미국 뉴잉글랜드의 월든 호숫가 오두막을 가끔 생각한다. 일찍이 명문 하버드대를 나와 세속을 떠나 홀로 고향의 호숫가에 은거하면서 사색과 집필에 전념해 ‘월든’을 남긴 사상가 소로. 그는 오늘의 미국 정신을 형성한 ‘시민의 불복종’의 작가이기도 하다.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 간디나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주니어 목사 같은 세계적 인물들의 존경을 받았던 소로다. 그의 사상은 자연 친화적 삶, 신앙과 독서, 그리고 깊은 명상에서 나온 것이다.
나의 일생이 어디 그런 인물에 비견할 수 있을까마는, 내가 은산리 새벽 산의 사색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나의 사랑하는 아내 황영희 박사와 후손들께 전하려 한다. 나와 고락을 함께한 이 시대의 의사 선생님들과 간호사님 등 소중한 의료진과 더불어 국민일보 독자들께도 진솔한 이야기로 들려드리고 싶다. 후세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보다 더 큰 보람이 없겠다.
* [역경의 열매] 이상택 (1) 나그네 순례길 팔순… 전적으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삶
* [역경의 열매] 이상택 (2) 몽골 일본군 사령부서 일하던 부친, 가족과 목숨 건 탈출
* [역경의 열매] 이상택 (3) 며느리 기도와 아들 호소에 "오냐 나도 예수 믿으마"
* [역경의 열매] 이상택 (4) 질병·사고 잦았던 어린 시절… 날 살린 건 주님의 도우심
* [역경의 열매] 이상택 (5) 의대 목표로 공부… 건달 들끓는 통학열차 완전히 평정
* [역경의 열매] 이상택 (6) 가난이 준 '순간 기억법'으로 미국 의사자격 시험 합격
* [역경의 열매] 이상택 (7) 아내와 교제 위한 단 하나의 조건 "예수님 믿겠어요?"
* [역경의 열매] 이상택 (8) 소외된 지역에 '안양의원' 개원… 영세민·노숙인은 무료로
* [역경의 열매] 이상택 (9) 4년 반 만에 종합병원 면모 갖춘 ‘안양병원’으로 재탄생
* [역경의 열매] 이상택 (10) 재난 현장에서 빛을 발한 자가 발전기와 지하수 시설
* [역경의 열매] 이상택 (11) 슈바이처·장기려 박사 보며 의사의 꿈 키워온 우리 부부
* [역경의 열매] 이상택 (12) 이 땅에 기독병원이 세워진 것은 하나님 은혜의 역사
* [역경의 열매] 이상택 (13) 안양의원 개원 31년 만에 ‘효산의료재단’으로 도약
* [역경의 열매] 이상택 (14) 목사가 된 아내 황 박사… '생명 존중' 주님의 말씀 실천
* [역경의 열매] 이상택 (15) 아프간과 이집트 사건 수습하며 생명 최우선 병원으로 활약
* [역경의 열매] 이상택 (16) 딱한 사정의 환자 자녀들 돕다 장학재단 설립까지
* [역경의 열매] 이상택 (17)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사 중 가장 귀한 것이 찬송의 은사"
* [역경의 열매] 이상택 (18) 안양서 병원 개원 즈음 재소자 돕는 사역 시작하게 돼
* [역경의 열매] 이상택 (19) 효산국제재단 설립… 백년대계 교육 발전에도 부름 받아
* [역경의 열매] 이상택 (20) 의료사역 통해 아프리카에서도 하나님의 사랑 실천
* [역경의 열매] 이상택 (21) "하나님이 주신 선물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길러야"
* [역경의 열매] 이상택 (22) 아내 황 박사와 자식들 덕에 '올해의 부부상' 수상
* [역경의 열매] 이상택 (23) '생명존중'과 '투명경영'으로 주님의 공익기관 사명 다해
* [역경의 열매] 이상택 (24) 인생의 고비마다 만난 하나님… 삶의 중요한 전환점 돼
* [역경의 열매] 이상택 (25·끝) 세상은 모두 하나님의 것… "구원의 믿음 가져야"
약력= 1941년 출생, 경남중·고 및 부산대의대 졸업, 고려대 의과대학원(석·박사), 효산의료재단(샘병원) 설립자, 효산국제교육재단(경기수원외국인학교) 이사장, 국민훈장 석류장 수여.
정리=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역경의 열매] 이상택 (2) 몽골 일본군 사령부서 일하던 부친, 가족과 목숨 건 탈출
일본 도쿄대 나온 수의사 겸 검식관
군수품 보급·식품 관리하며
독립군 자금 대주다 발각 직전 탈출
꿈에 그리던 고향 정착했지만 6·25 터져
이상택(앞줄 가운데) 박사가 부모님, 아내 황영희(뒷줄 오른쪽부터) 박사 및 두 아들과 더불어 1972년 충남 아산 현충사에서 가족여행을 하고 있다.
나는 1941년 내몽골 자치구 장자호에서 태어났다. 조국 광복을 4년 앞둔 4월의 봄날이었다. 내가 몽골에서 태어난 것은 선친께서 그곳에 주둔한 일본군 사령부의 수의사 겸 검식관으로 근무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일본 도쿄수의전문학교(현 도쿄대 축산과)를 차석으로 졸업한 엘리트였다. 당시 일본에서 유학한 우리 선조들은 식민지 백성으로 차별을 받아 아무리 성적이 우수해도 언제나 차석을 줄 뿐 수석은 일본인이 차지하는 현실이었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군수물자 보급 담당을 겸하여 식량 파트의 식품검열관으로 1945년 7월까지 근무하셨다. 아버지는 일본군 지휘부로부터 상당한 신임을 받고 있었다. 맡은 임무가 군수품 보급과 식품 관리라는 요직이어서 나는 퍽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는 동족들이 늘 우리 집을 찾아와 매일 잔치를 하듯 떠들썩한 분위기였다는 점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들 중에는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군들도 상당수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들에게 은밀히 독립 자금을 지원하고 있었다.
나는 해방을 불과 한 달 앞둔 1945년 7월 몽골을 떠나 9월에 조국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대륙을 무대로 활동하던 독립군들을 은밀히 도와 오셨는데 그것이 부대에 있는 헌병대에 의해 그만 탄로가 난 것이다. 헌병대 체포 직전 가족을 데리고 몽골을 탈출하게 됐다. 평소 어려운 동료들을 돌봐준 덕에 체포조가 들이닥칠 것이란 정보를 누군가 아버지에게 전해 주었던 것이다. 잡히면 영락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우리 가족은 안정된 삶의 터전을 버리고 몽골을 떠나야만 했다.
독립군 지원사건 말고도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에 대한 아버지의 회의적 입장이 몽골을 떠나는 결단에 이르게 했다. 당시 아버지는 주권을 빼앗긴 조선의 청년으로서 비록 몸은 몽골에 주둔한 일본군에 예속돼 있었으나 마음은 아시아 전역을 전쟁터로 만든 일제의 만행을 혐오하고 있었다. 더욱이 그 무렵 아버지는 일본이 머잖아 패망할 것이라는 정세도 파악하셨다.
아버지의 빠른 판단과 정확한 행동으로 그해 7월, 가족은 중국 베이징으로 탈출해 8월 상하이에서 조국의 해방 소식을 듣게 됐다. 상하이에서 단둥으로 올라가 신의주를 거쳐 다롄에서 배를 타고 9월에야 꿈에 그리던 인천으로 귀국했다. 잡히면 끝장나는 생사를 건 탈출이었지만, 아버지는 온 가족을 이끌고 자유를 찾아 나선 모험에 성공했다.
우리 가족은 서울에서 얼마간 생활하다가 1946년 가을 고향인 경남 양산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양산군청 축산과장으로 영입됐고 이후 밀양군청에서도 일하셨다. 곧이어 6·25전쟁이 발발했다. 아버지는 군청의 종축장 시설을 딱한 사정의 피난민들에게 머물도록 조처하신 이유로 음해를 받아 군청에서 파면되고 말았다. 이때부터 아홉 남매 가운데 장남이던 내게 가정을 이끌 책임이 주어졌다.
***[역경의 열매] 이상택 (3) 며느리 기도와 아들 호소에 “오냐 나도 예수 믿으마”
동서양 교육 모두 받은 신여성으로
가난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어머니
아버지 만나 일생 고생 많이 하시다
돌아가시기 10년 전에 예수님 영접
이상택 박사의 모친 강복순(가운데) 여사가 1996년 가족들과 함께 생신 축하 모임을 열고 있다.
나의 어머니는 1920년 경남 진주의 갑부 집안 셋째 딸로 출생해 진주여고를 졸업한 신여성이셨다. 외할아버지는 양조장과 정미소를 경영하신 지방 사업가였다. 어머니는 서양 교육을 받은 신여성이면서도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시며 단아한 인품을 다지신 고전적 여성이기도 했다.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나 그야말로 부엌 물에 손 한 번 담그지 않고 성장하신 어머니가 가난한 남편을 만나 일생 고생을 많이 하셨다. 물론 결혼 초기에는 일가친척들에게 당대 최고의 엘리트인 일본 도쿄대 출신과 결혼을 한다고 부러움을 샀고, 남편이 만주와 몽골에서 식품 검열관 겸 군수물자 책임자로 일할 때만 해도 어머니는 가난이 무엇인지 몰랐다.
하지만 독립군을 도운 게 탄로 나 체포 직전 몽골을 탈출하면서 귀국하게 되자 말 그대로 맨손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더욱이 6·25전쟁 와중에 피난민을 돕다 아버지가 군청에서 실직하자 열한 살이던 내가 어머니의 가사를 적극적으로 돕게 됐다. 아버지는 마을을 돌며 집마다 가축의 출산을 돌봐 주시며 얼마간의 수고비를 받아 생활을 연명해야 했지만, 수고의 대가가 현금이 아니라 주로 곡식을 받았기에 전쟁 통에 모두 생활이 빈한해서 어려움이 컸다.
아버지는 1985년 1월 69세를 일기로 홀연히 이웃 마을을 다니러 가시듯 우리 곁을 떠나셨다. 당시 어머니는 아버지를 기리는 ‘가신 님 향산공께 드리는 시’를 지으셨다. 맨 앞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탁하고 험한 세상 맑게 사시다/ 어느새 반세기가 꿈만 같구려/ 비단같이 고운 마음 대쪽 같은 곧은 성품/ 호탕한 그 웃음소리 언제 다시 들어 보리/ 오늘도 그 이름 불러 봅니다.”
어머니는 2012년 1월 93세를 일기로 별세하셨다.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한 불효자이나 독실한 불교 신자이시던 어머님께 예수님을 전도해 천국에 가시도록 안내해 드린 것은 효도였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경남 인근 사찰의 주요 시주자이실 만큼 불심이 깊었는데 예수님을 믿는 아내 황영희 박사를 며느리로 받아들이실 때만 해도 “너희는 믿어라, 나는 안 믿는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10년 전에 예수님을 영접하셨으니 복음의 역사는 참으로 위대하다.
당시 어머니께 예수님을 전하려는 아내의 기도와 헌신은 실로 눈물겨운 것이었지만, 어머니의 마음 문을 열어드리긴 쉽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밤 나는 어머니 방을 찾았다. 조용히 무릎을 꿇고 어머니에게 불효했던 지난날을 진심으로 사죄드렸다. 내 눈에는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머니,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 못난 아들 때문에 평생 고생만 하셨습니다. 가정의 신앙문제로 어머니 마음을 불편하게 해드려 정말 죄송합니다만 어머님이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저렇게 애쓰는 며느리의 간절한 마음을 받아 주셨으면 합니다.” 아들의 눈물 호소를 들은 어머니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시더니 이윽고 입을 여셨다. “오늘 밤 네가 이렇게 어미를 붙잡고 눈물을 흘리니 내 마음도 찢어진다. 오냐 알았다. 나도 예수 믿으마.”
***[역경의 열매] 이상택 (4) 질병·사고 잦았던 어린 시절… 날 살린 건 주님의 도우심
혹한의 몽골 벌판 헤매다 구조되고
바둑돌 삼키고 급류에 휩쓸리는 등
한 사람이 겪기엔 너무 많았던 사건
이런 경험 통해 생명의 소중함 깨달아
이상택 박사가 중학교 시절이던 1956년 지게를 메며 집안일을 돕고 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질병과 사고가 잦았다. 다섯 살 되던 해인 1944년 겨울 미아가 되어 혹한의 몽골 벌판에 버려진 적이 있었다. 남달리 호기심이 많았던 어린아이가 몽골의 대자연에 이끌려 마을로부터 멀리 떠났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오후 5시쯤 길을 잃고 다음 날 새벽을 맞이하기까지 무려 10시간 이상 혹한과 눈보라 속에서 대륙의 벌판을 헤매야 했다. 체력이 바닥나 굶주림과 갈증을 눈으로 달래며 그야말로 생사를 오가는 악몽 같은 시간이었다. 눈사람이 되어 동사하기 직전, 이른 새벽 먼 길을 떠나는 장사꾼 행렬에 의해 구조됐다. 나는 지금도 그 시간을 회상하면 본능적으로 밀려오는 공포를 느낀다.
그 후에는 바둑돌을 삼켜 죽음 직전까지 간 일이 있었다.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몽골에서 태어난 나는 다섯 살 무렵, 집안 어른들이 바둑을 두는 것을 지켜보다가 하얀 돌이 하도 신기하고 맛있는 사탕처럼 보여 집어삼켰는데 그것이 식도를 막아 버렸다. 일시에 흉통과 함께 물을 포함한 어떤 음식도 삼키는 것이 매우 고통스러운 상태가 됐다. 어린 아들을 살리기 위해 아버지는 중국 선양에서 베이징, 베이징에서 평양, 평양에서 다시 베이징으로 큰 병원을 찾아가 마침내 나를 살렸다. 어린 시절 그 끔찍한 경험은 나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 최초의 사건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내가 죽지 않고 산 것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다.
1947년 경남 양산초등학교 1학년 때는 한여름 장마로 급격히 불어난 강을 겁 없이 건너다 급류에 휩쓸렸다. 폭포에 떨어져 익사 직전 구조됐는데, 폭포에서 떨어지면서 암벽에 부딪혀 열이면 열, 도저히 살아날 수 없는 환경이었는데도 희한하게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경남중 재학 때는 아버지가 사 주신 자전거를 타고 양산에서 물금으로 좁은 시골길을 가다가 그대로 낭떠러지에 굴러떨어져 왼쪽 팔목이 부러졌다. 그저 골절된 상태가 아니라 왼쪽 팔목 부위의 뼈가 완전히 박살 나는 대형 사고였다. 그 후유증은 일생 나를 따라다니고 있다. 후일담이지만 의대를 마치고 군의관 지원 차 신체검사를 할 때, 선배 군의관이 내 왼팔을 보고 이 정도면 군 면제 대상인데 왜 굳이 군의관이 되려고 하느냐면서 나를 딱하게 생각했다. 할 수만 있으면 군에 가지 않으려 하는데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그때 내가 시험관에게 한 말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지금 군의관이 부족한 거로 아는데요.” 그러니 나 한 사람이라도 더 군의관이 돼야 하지 않느냐는 반문이었다.
모진 가난으로 결핵을 앓았고 고교 때는 왼쪽 다리 골절 사고도 있었다. 한 사람이 겪기엔 너무 많고 가혹한 사고와 질병을 경험한 탓에 나에겐 일종의 본능, 선천적으로 고통당하는 이웃에 대한 연민의 정이 있었다. 이런 천성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만 다양한 아픔을 통해 후천적으로 터득한 동병상련의 정이기도 하다.
***[역경의 열매] 이상택 (5) 의대 목표로 공부… 건달 들끓는 통학열차 완전히 평정
중학교 입학해 집이 멀어 기차로 통학
허술한 치안 때문에 깡패들 폭력 난무
살기 위해 권투와 씨름으로 체력 단련
이상택 박사가 중학생이던 1955년 집안일을 돕기 위해 암염소를 끌고 가고 있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부터 장남으로서 집안 살림의 일부를 떠맡아야 했다. 광복과 전쟁으로 이어지던 격변기에 아버지는 피난민들을 돕다가 공직에서 물러나셨고 이에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졌다. 위로 누님과 남동생 셋에 여동생 넷까지 이렇게 아홉 남매였다. 거기다가 나이 어린 막내 삼촌까지 함께 살았으니 우리 집은 언제나 유치원처럼 왁자지껄했다. 누나가 있었지만 몸이 불편해 사실상 내가 어머니를 도와 맏이 노릇을 해야 했다. 비록 어렸지만 나는 집안일을 돕는 것이 즐거웠다.
1953년 나는 경남 물금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경남중학교에 진학했다. 어려서부터 품어 온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키워가며 ‘살아남기 위해 공부해야 한다’는 생존 의식이 생겼다. 이후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공부해야 한다’는 경쟁의식으로, ‘가정을 돕고 이웃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서는 공부해야 한다’는 사명의식으로 발전해 갔다.
중학교 생활은 처음부터 만만하지 않았다. 집에서 학교가 멀어 아침저녁으로 기차 통학을 해야 했는데, 열차 안에 도사리고 있는 깡패들의 폭력이 심했다. 6·25전쟁 와중 허술한 치안 상황에서 같이 통학하는 학교 선배들 가운데 건달들도 있었고 심지어 열차를 거점으로 선량한 승객을 괴롭히는 직업적 폭력배들이 있었다.
이들의 가장 만만한 먹잇감이 바로 내 또래의 애송이 중학생이었다. 열차 통학 자체가 폭력으로 점철된 공포였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 강해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어떻게 들어간 학교인데 이따위 폭력배가 겁이 나 학교를 포기하거나 물러선단 말인가. 방법은 한 가지였다. 강해지자 담대하자 그리고 힘을 기르자. 그날부터 나는 운동을 시작했다. 아령을 구입해 아침저녁으로 체력을 단련하고 가까운 친척 형들에게 권투와 씨름을 배우며 담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동생은 유도를 시작했다.
중학교 시절 기차 통학을 하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는 인생의 값진 교훈을 배웠다. 독자들은 믿거나 말거나 이후 중·고교 나의 통학 열차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경남 물금에서 부산역을 오가는 통학 열차를 완전히 평정하게 되자, 전에는 불량배 눈치를 보느라 안절부절못하던 친구들이 편안하게 책을 보거나 재잘재잘 담소를 나누며 학교에 가게 됐다.
한편 당시 통학 열차는 연착되기 일쑤였다. 그래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지각이 잦았는데 문제는 중고교 시절 중요한 영어 수학 국어 과목이 주로 오전에 배치돼 있다는 점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영·수·국에서 뒤질 수 없다고 생각한 나는 ‘쉬는 시간에 쉬지 않는’ 학습법을 개발했다. 한 시간 수업이 끝나면 10분 쉬는 시간에 친구들로부터 영·수·국 교과서와 노트를 빌려서 집중 공부하는 방법이었다. 인간의 뇌는 집중해서 잠깐 본 사물이나 단어를 평생 기억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 책은 빌린 것이야. 돌려주면 다시 볼 수 없어. 그러니 단단히 기억하자’고 비상한 마음으로 한 공부는 가난 속에서 교과서도 갖추지 못하고 공부하던 고교 시절은 물론 의과대학에서도 큰 도움이 됐다.
***[역경의 열매] 이상택 (6) 가난이 준 ‘순간 기억법’으로 미국 의사자격 시험 합격
친구들 쉬는 시간에 잠깐씩 책 빌려 배운 내용을 순간순간 머리에 담아
이 공부습관에 차츰 적응 웬만해선 한 번 보면 잘 잊어버리지 않게 돼
이상택(뒷줄 오른쪽 다섯 번째) 박사가 부산대 의대 시절이던 1964년 등록금 일체와 생활비를 지원한 한독장학생으로 선발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독자들은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학창 시절 교과서 없이 공부한 학생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나의 경남중·고와 부산대 의대 시절에는 이런 풍경이 심심찮게 있었다. 나도 그런 학생 중 한 명이었다. 가난한 환경 탓에 나는 책 없이 공부했다. 교과서는 말할 것도 없고 참고서 구입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일 때 나는 친구들이 노는 동안 잠깐씩 책을 빌려 배운 내용을 순간순간 머리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어깨너머로 공부한다는 옛 어른들의 말을 실감한 학창 시절이었다. 책이 없으니 예습 복습을 더 철저히 했다. 처음에는 이런 노력이 힘든 고통이었지만 차츰 적응돼 순간의 공부가 오래 뇌리에 남는 소중한 경험을 축적하게 됐다.
이렇게 공부한 습관은 나에게 대단한 축복을 불러왔다. 한 번 본 것은 웬만해서 잘 잊어버리지 않는 축복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순간 기억법이라고도 하고 연상법이라고도 했다. 직관과 사고의 순발력도 이때 생긴 것 같다.
나의 이른바 무책축복(無冊祝福)은 부산대 의대 재학 중 미국 의사자격(ECFMG: Educational Commission for Foreign Medical Graduates) 시험 합격으로 이어졌다. 가난으로 고달픈 대학 시절이었지만 나는 남모르게 커다란 목표를 세웠다. 미국에서 의사를 할 수 있는 자격을 따고 유학을 가는 것이었다. 강의가 없는 날엔 시간을 쪼개어 아르바이트하고 남는 시간을 미국 의사시험 준비에 쏟아부었다.
의대 시절 6년은 휴식과 거리가 먼 노동과 학업의 연속이었지만 본과 4학년 2학기 졸업을 앞두고 미국 의사시험에 합격했다. 부산대 의대 재학 중 합격은 최초였다. 동료들과 후배들을 위해 이 분야 자격시험 예상 문제집까지 만들었다. 이때 터득한 핵심 정리 습관은 내 바로 밑 동생 상지를 서울대 법대에 합격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청소년기 가난이 가져다준 책 없이 공부한 습관이 계속된 축복으로 이어졌다.
나는 평소 치유와 교육을 뗄 수 없는 관계라고 생각했다. 어려서 죽음에 대해 체험을 하고 성장 과정에서 아버지의 권유와 슈바이처 박사의 영향을 받아 의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했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과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내 안에 함께 자리 잡았다. 교육은 인간을 지성과 인격의 무지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고, 의학은 인간의 병든 육신과 정신을 치유하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우리나라에 기독교 복음을 전파한 초기 선교사들이 서양의 교육과 의술을 동시에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서양 의학의 출발이 알렌 헤론 스크랜턴 에비슨 같은 의료선교사들에 의해 이 땅에 심어진 역사적인 사실임을 확인하면서 이런 확신을 갖게 되었다. 치유가 인간의 구원과 관계된 것이라면, 교육은 인간의 창조적인 발전과 관계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역경의 열매] 이상택 (7) 아내와 교제 위한 단 하나의 조건 “예수님 믿겠어요?”
부산대 캠퍼스에서 만난 동급생 아내
남을 배려하고 양보하는 마음 돋보여
그녀가 믿는 기독교에 이미 호감 가져
이상택 황영희 박사 부부가 2004년 평화대행진 성지순례 당시 이집트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앞에서 팔짱을 끼고 있다.
나는 대학 캠퍼스에서 지금의 아내 황영희를 만나면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됐다. 그녀가 만난 예수님을 나도 만나게 된 것이다.
원래 우리 가문은 대대로 불교를 믿고 있었다. 윗대 어른들이 정해 놓고 출석하며 시주하는 절이 있었으니 고향 경남 양산의 통도사였다. 나의 모친은 불심이 남달라 처녀 시절 통도사에 가장 큰 시주를 하는 불자 중 한 분이어서 주위에서 보살이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였다. 선친도 총각 시절 이 사찰에서 제공하는 장학금으로 아시아 최고 명문인 일본 도쿄대를 졸업하시고 진주시청 축산과장으로 부임하면서 두 분이 만나게 되었다.
이처럼 불심의 가정에서 성장한 내가 대학생이 되어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중에 깨닫고 보니 하나님의 뜻과 섭리였지만, 당시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믿는 종교를 저항 없이 받아들인 탓이었다. 그때 나는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고 그 어떤 종교적 신념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
부산대 캠퍼스에서 나의 첫눈에 들어온 동급생 황영희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나에게 제시한 교제의 단 한 가지 조건은 바로 자신이 믿는 하나님을 당신도 믿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당시 나의 불심은 사랑하는 여인과의 사랑을 포기할 만큼 독실하지 못했다. 아니 나에게 그런 불심이 있었다 하더라도 나는 사랑을 얻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이 믿는 종교를 주저 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사랑을 위해서라면 내가 가진 종교쯤은 쉽게 버릴 수 있다는 일종의 ‘인간적 무신의’로 가볍게 처신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친숙한 불교에 대한 그 어떤 편견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평소 그녀가 하는 말과 행동이 다른 여학생들과는 다른 데가 있었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과 양보하는 자세에서 나는 그녀가 믿는 종교에 이미 호감을 느끼고 있었던 터였다. 그래서 나는 큰 갈등이나 저항 없이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예수님을 믿겠어요?” 그녀의 질문은 단 하나였다. “예수님을 믿겠습니다.” 나의 대답 또한 분명하고 단순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크리스천이 되었고 교회 생활과 함께 사랑하는 사람의 도움으로 조금씩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 가게 되었다. 내가 대학 캠퍼스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한 것은 내 생애 최대 사건이었다. 삶의 가장 큰 전환점이다. 그야말로 인생의 BC가 AD로 바뀐 것이다.
대학 시절 나의 심정을 그대로 표현한 찬송이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를 갚을 길 없음을 매 순간 깨닫는다. 작사가 존 뉴턴은 원래 노예를 사고파는 상인이었으나 회심하여 예수님을 만난 다음 자신의 죄성을 정직하게 고백했다. 대학 시절 주님을 만난 건 내 인생 최고의 축복이다.
***[역경의 열매] 이상택 (8) 소외된 지역에 ‘안양의원’ 개원… 영세민·노숙인은 무료로
가정 형편상 유학 미루고 군 입대
신혼 방 보증금 빼 의원 전세금 마련
먼저 아내 이름으로 의원 개원하고
사랑과 헌신의 진료로 환자 구름떼
이상택(앞줄 오른쪽 두 번째) 박사가 육군 20사단 61연대 의무중대장으로 복무하던 1966년 부대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1967년 11월 나는 아내 황영희 박사와 함께 안양의원을 개원했다. 나는 부산대 의대 최초로 미국 의사자격(ECFMG) 시험에 합격했지만, 유학의 꿈을 미루고 먼저 군 복무를 택했다. 유학을 다녀온 뒤 군 복무를 해도 되는 특혜가 주어졌지만 가정 형편상 먼저 군의관으로 복무했다. 그런데 전역을 앞두고 일어난 김신조 사건으로 1년을 더 연장 복무하게 됐다.
제대를 앞둔 군인에게는 하루가 1년 같은데 갑자기 1년이나 더 복무를 연장한다는 명령은 보통 충격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이내 마음의 평정을 되찾았다. 어차피 이렇게 된 마당에 군의 환우들을 더 돌보며 군의관으로서 충실히 복무하자고 마음먹었다. 결과적으로 나의 군의관 사역은 4년 4개월 만인 1970년 마감하게 된다.
나중 일이지만 큰아들은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나와 마찬가지로 군의관으로 복무했다. 작은아들 역시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장교로 전역했다. 큰아들과 작은아들 임관식 때 모두 나와 아내가 달려가 아들들의 어깨에 지휘 견장을 붙여줬다.
군 복무 중에 아내 이름으로 먼저 개원한 안양의원 간판은 아내가 직접 써서 달았다. 신혼 단칸방 보증금을 빼고 일부는 빌리기도 해서 의원이 들어설 공간의 전세금을 마련했다. 당시 안양엔 번듯한 병원이 없었다. 가난하고 척박했던 환경에서 안양뿐만 아니라 과천 시흥 안산 군포 의왕 그리고 수원에서도 환우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젊은 부부 의사가 사랑과 헌신으로 환우들을 돌본다는 소문이 퍼져 그야말로 구름떼처럼 밀려들었다.
병원에서 의사는 우리 부부뿐이었기에 모든 진료를 두 사람이 다 해야 했다. 엑스레이를 찍어서 현상하고 환자를 검진하는 일부터 임상병리과 의사 역할과 간호사 교육, 병원 운영 등 모든 일을 도맡아 하다 보니 언제나 잠이 부족했다. 영세민과 노숙인은 무료로 치료했다. 왕진도 마다하지 않았다. 병원 일손이 극히 부족했기에 나는 주로 야간을 이용해 환자를 찾아갔다.
이웃의 생명이 위독하다는 급보를 듣거나 한 생명이 막 태어난다는 소리를 듣고는 외면할 수 없었다. 야간 왕진은 무거운 가방을 들고 어두운 밤에 먼 길을 다녀오는 일이어서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 월곶과 대부도까지 가기도 했다. 그런데도 아내는 힘든 내색을 하지 않고 생사를 넘나드는 산모와 환자들을 찾아갔다. 나는 안양 지역 사체 검안까지 전담하게 돼 검찰과 경찰로부터 신뢰와 감사의 인사를 받게 됐다.
물론 좋은 일만 있던 건 아니다. 환자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오다 보니 첫째 아들은 병원에서 옮아온 간염을 앓게 되었고 둘째 아들 역시 폐렴을 앓았다. 둘째는 그 상태가 위급해 서울 소재 병원으로 급하게 이송해야 했는데, 당시 안양에 구급차가 없어 지인의 지프로 밤늦게 이송해 가까스로 생명을 건졌다. 개원 초기 이런 시험을 통해 우리는 더욱 주님을 의지하며 매사에 감사하게 됐다.
***[역경의 열매] 이상택 (9) 4년 반 만에 종합병원 면모 갖춘 ‘안양병원’으로 재탄생
의원 협소해 많은 환자들 감당 안 돼
건설사 대표 소개로 병원 부지 매입
지하 1층 지상 3층 30병동 병원 건축
경기도 서남부 최초 종합병원 승격
1972년 완공된 지하 1층 지상 3층의 안양병원 전경.
1960년대만 해도 안양은 행정 구역상 경기도 시흥군에 소속된 읍(邑) 정도의 낙후된 지역이었다. 몸이 아픈 주민들이 이용할 병원이 마땅치 않아 개원하자마자 많은 환자가 몰려들었다. 시민들은 우리 부부의 의술보다 환자들을 대하는 지극한 정성에 더 감동하게 된 모양이었다. 발 없는 소문이 천 리를 간다고, 안양의원의 친절한 의사 선생님을 만나기만 해도 병이 낫는 것 같다는 평판이 자자했다. 의원은 하루가 다르게 번창했고 그만큼 우리 부부는 24시간을 비상대기 상태로 긴장해야 했다.
안양의원을 개원하고 4년이 지난 1971년 어느 날, 평소 알고 지내던 건설회사 대표가 우리 부부를 찾아왔다. 좋은 곳을 보여주겠다며 우리를 어디론가 안내했다. 사방이 훤하게 트인 공터를 보여 주더니 “환자들은 늘어나고 지금 병원은 협소하니 이곳에 병원을 새로 지으시지요” 하는 것이었다. 남의 건물에 셋방살이하는 안양의원의 규모로는 밀려드는 환자들을 감당할 수 없어 그러잖아도 우리 부부는 이전을 고민하고 있던 참이었다.
건설사 대표가 보여 준 땅은 한눈에 보아도 제법 큰 병원을 짓기에 적합한 부지였다. 욕심은 났지만 당시 우리 형편으로는 무리여서 정중히 거절했다. 그랬더니 건설사 사장님은 예견이라도 한 듯 우선 땅값만 지급하고 건축비는 돈을 벌어서 천천히 갚으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고마운 배려에 힘입어 우선 부지를 매입했다. 그곳이 지금의 의료법인 안양샘병원 본원으로, 종합 클러스터를 이루고 있는 안양시 만안구 안양 5동 613-8번지의 땅이다.
병원 건축 공사는 1972년 진행해 지하 1층 지상 3층의 30병동을 갖추게 됐다. 안양의원으로 인술을 펴기 시작한 이후 4년 6개월 만에 비로소 병원다운 병원을 갖추게 됐다. 당시 안양 지역에는 10여개의 개인 의원은 있었지만 30병동을 갖춘 병원은 우리가 최초였다.
안양의원이 안양병원으로 명실공히 종합병원의 면모를 갖추고 재탄생한 날은 1972년 7월 1일이다. 경기도 서남부 지역 최초로 보건복지부가 허가해 준 종합병원으로 승격을 하게 됐다. 당시 안양병원은 내과 일반외과 소아과 산부인과로 구성됐다.
그런데 안양병원을 개원하던 그 날, 우리 병원에서 불과 1㎞ 떨어진 곳에 제법 큰 병원이 들어섰다. 규모보다 더 관심을 끈 건 원장부터 거의 모든 의료진이 서울대 의대 출신이란 사실이었다. 우리도 마음이 쓰였지만 환자들과 주위 분들이 더 걱정했다.
그러나 우리는 찾아오는 환자들을 지성으로 치료하고 돌보며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여리고 도상에서 강도를 만나 빈사 상태에 빠진 환우를 돕는 이야기를 들려주신 예수님의 사랑보다 더 큰 무기는 없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다수의 환자는 시설과 의료진이 좋은 이웃 병원보다 우리 병원을 즐겨 찾아왔다. 그래서 우리는 1년 만에 건축비를 다 갚을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이상택 (10) 재난 현장에서 빛을 발한 자가 발전기와 지하수 시설
40년 만에 최대 강수량 기록한 호우로 안양천 범람해 시 전체가 단전과 단수
비상시 대비한 전기와 급수시설 덕에 재난으로 몸과 마음 다친 환우들 치료
1972년 개원한 안양병원 내부 모습.
안양이 읍에서 시로 승격된 이후 4년 만인 1977년 7월, 40년 만에 최대 강수량을 기록한 집중호우가 내렸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더니 나중에는 흑암과 함께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 위력을 과시했다. 그 옛날 노아 홍수 상황이 이랬을까 하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안양 변두리 취약지대에서 산사태가 나고 많은 주택이 침수됐으며 급기야 안양천이 범람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전쟁을 치르고 난 것처럼 안양은 폐허로 변해 버렸다. 단전과 단수로 시가지는 암흑으로 변했고 통신마저 두절되면서 시민들은 불안과 공포에 떨었다. 40년 만의 홍수라는 뉴스가 나올 무렵, 아니나 다를까 수많은 부상자가 우리 병원으로 실려 오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사상자가 적지 않았다.
당시 안양에서 우리 병원만 환자를 받을 수 있었다. 다른 병원들은 거의 물에 잠겨 피해를 당했고 단전으로 병원 시설이 마비됐다. 하지만 우리 병원은 비교적 지대가 높은 곳에 있었고, 특히 비상시에 가동되는 자가 발전기와 지하수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평소 나는 성격상 이런 비상시 대비가 철저한 편이다. 병원을 지으면서 비상시에 가동할 자가 발전기와 지하수 등 기반 시설을 철저히 구축한 것이 큰 덕을 본 것이다.
건축 당시 병원 스태프들은 공사비도 빠듯한데 언제 쓰일지도 모르는 발전기까지 굳이 설치할 필요가 있겠느냐면서 반대가 심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매일 다반사로 사용되는 시설물이 필요한 만큼 언젠가 한번 요긴하게 쓰이는 시설물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천재지변으로 당시 사체검안 일까지 몰렸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이라 사체검안서를 일일이 손으로 작성했는데, 먹지를 사용해도 한 번에 3부밖에 복사가 안 되는데 한 명당 검안서 다섯 부를 만드느라 애를 먹었다. 혼자 100명 넘는 사망자의 검안서를 작성하느라 손이 부풀고 마비가 일어날 지경이었다. 혈육을 잃은 가족들의 심정을 생각해서라도 정확한 검안이 필수였고 경찰까지 입회하다 보니 보통 까다로운 일이 아니었다.
안양 시내에서 전기가 들어와 응급환자를 받을 수 있는 곳이 우리 병원이 유일했으므로 다친 환우들이 몰려들었다. 단전과 단수로 고생하던 시민들은 또 지하수 시설이 가동된 우리 병원에 물을 구하러 찾아왔다. 언론 매체에선 하얀 가운의 의료진들이 늦은 시간까지 수재민들을 돕느라 여념이 없는 모습을 보도했다. 이때의 봉사로 또다시 우리 병원이 유명해졌다. 수도권 서남부 전역에서 환자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인간의 생명을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하는 의사로서 자가 발전기와 지하수 시설을 설치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시민이 재난을 당했을 때 도움을 준 병원과 의료진에게 찬사를 보내오는 것을 보면서 순수한 봉사가 얼마나 큰 감동을 주는지 새삼 깨닫게 됐다.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전도서 11장 1절 말씀이 떠올랐다.
***[역경의 열매] 이상택 (11) 슈바이처·장기려 박사 보며 의사의 꿈 키워온 우리 부부
아프리카에서 그리스도의 사랑 실천한
슈바이처와 사랑의 인술 펼친 장 박사
나와 아내를 의사의 길로 이끈 멘토
두 분 뜻 따라 아프리카미래재단 설립
두 아들과 함께한 1974년 가족 사진. 이상택 박사, 황영희 박사, 큰아들 이대희, 작은아들 이재희씨 모습(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독자들께 나와 아내 황영희 박사에게 공통으로 의사의 길을 걷도록 영향을 준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와 성산 장기려 박사에 관해 말씀드리고 싶다.
앞서 언급한 대로 나의 부친은 일본 도쿄대 전신인 도쿄수의전문학교에서 수의학을 전공했는데, 기회 있을 때마다 어린 아들에게 슈바이처 박사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나는 비록 가축을 돌보는 수의학을 했지만 너는 반드시 사람을 위하는 의학을 하여라.” 선친께서 하셨던 말씀이다.
회고록을 집필하며 슈바이처 박사가 직접 저술하고 천병희 교수가 번역해 펴낸 ‘나의 생애와 사상’을 다시 구해 읽었다. 아프리카 선교 동기를 밝히는 이 대목이 특히 눈에 띄었다.
“1989년 어느 청명한 여름날 아침, 나는 귄스바흐에서 눈을 떴다. 그날은 성령강림절이었는데 이때 문득 이러한 행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이제 나도 무엇인가 베풀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창밖에서는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는데, 조용한 생각 끝에 서른 살까지는 학문과 예술을 위해 살고 그 이후로는 인류에 직접 봉사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로부터 14년 뒤인 1913년 38세의 슈바이처는 의료 선교사가 되어 아프리카로 떠났다. 인생의 전반부인 1899년 스물네 살에 철학 박사가 됐고 이듬해에는 신학 박사가 되었으며, 1903년부터 슈트라스부르크대 신학부 정교수가 되어 학생을 가르치며 목회도 병행한 그였다. 어린 시절부터 목사인 아버지에게 배운 파이프 오르간으로 바흐의 칸타타를 수준급으로 연주하기도 했다. 철학자 성직자 음악가로 선망을 받는 인생이었지만, 슈바이처 박사는 육신으로 고통받는 이웃을 치료해 영혼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일보다 더 귀한 일은 없다고 판단했고 마침내 의학을 공부하게 된다. 그리고 문명 세계에서 누리던 행복과 특권을 포기하고 홀연히 아프리카를 찾아 생의 후반부를 바치게 된다.
부산대 의대 캠퍼스에서 만난 아내 황 박사도 어려서부터 슈바이처 박사를 통해 의학을 공부할 결심을 했다고 말했다. 아내는 2017년 펴낸 회고록 ‘아프지만 살아내야지!’를 통해 아프리카에서 환우를 돌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슈바이처 이야기가 특별히 큰 울림을 주었다고 밝혔다.
나와 아내의 롤모델인 성산 장기려 박사님 역시 잊을 수 없다. 나는 장 박사께 직접 사사 받을 기회는 얻지 못했다. 다만 장 박사가 가끔 부산대에 오셔서 특강을 했는데 강의 내용보다 그분의 인자한 풍모에서 우러난 인품이 기억난다.
반면 아내 황 박사는 인턴 후 잠시 장 박사님의 부산 복음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아침 경건의 시간(QT) 예배 경험, 수술장 직접 지도를 받는 행운을 누렸다. 슈바이처 박사와 장 박사님의 뜻을 따라 우리 부부도 1997년 아프리카 의료 선교 위한 아프리카미래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과 고문으로 섬겨왔다.
***[역경의 열매] 이상택 (12) 이 땅에 기독병원이 세워진 것은 하나님 은혜의 역사
미국 의료 선교사 알렌에 의해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 병원인 ‘광혜원’
왕실과 귀족 대상에서 만백성으로 확산
1969년 안양의원(뒤쪽 왼편 흰색 2층 건물)과 주변 거리 모습. 간호사가 당시 돌이 갓 지난 이대희 현 샘병원 이사장을 안고 있다.
샘병원과 같은 국내 기독병원의 역사에 관해 말하고 싶다. 한국에서 효시는 미국 의료 선교사 알렌에 의해 1885년 4월 10일 세워진 광혜원(廣惠院)이다. 구한말 우리나라의 국운이 사실상 일본에 의해 기울 대로 기울어 가고 있던 상황에서 이 땅에 기독병원이 세워진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은혜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보다 반년 앞선 1884년 9월 한국을 찾은 알렌은 그 신분이 미국 공관의 공관의(公館醫)였다. 그는 원래 신학을 공부했으나 의료 선교사가 되기 위해 의학까지 공부해 1883년 의사 자격을 취득하자마자 곧바로 선교사로 자원했다. 당시 조선의 정세로는 정식 선교사 입국이 어려웠는데 알렌이 의사 신분으로 방한한 것은 결과적으로 초기 복음 전파의 마중물이 됐다.
공교롭게도 알렌이 입국한 그해 12월 우정국 사건으로 촉발된 갑신정변이 일어난다. 수구파의 리더 민영익이 개화파 자객의 칼에 혈관이 잘리는 등 치명상을 입게 된다. 당시 조정의 의술로는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에서 알렌은 서양 의술에 의한 대수술로 민영익의 생명을 살리게 된다. 이 사건은 후일 역사가들이 “조선의 불안한 상황 속에서 서양 과학을 통해 개신교 문호를 여신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평가하는데 나 역시 전적으로 공감한다.
이를 계기로 조정에서 허락한 최초의 서양 병원이 바로 광혜원이다. ‘널리 은혜를 베푸는 집’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병원은 처음엔 왕실 귀족들만 대상으로 세워졌다. 하지만 곧바로 모든 백성을 구제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부합하게 제중원(濟衆院)으로 이름을 바꾼다. 이 병원이 현재의 세브란스병원 시초가 되는 등 선교의 정신으로 들어온 서양 병원은 머잖아 전국으로 확산하게 된다.
1886년엔 누구나 치료해 준다는 아름다운 이름의 여성 병원인 보구여관(普救女官)이 서울에 세워졌다. 1887년 고종이 이름을 지어준 시병원(施病院)에 이어 평양에 기홀병원, 부산에 일신병원, 대구에 동산병원, 전주에 예수병원, 개성에 남상병원, 청주에 청주진료소 등 16개 기독병원이 전국 주요 도시에 세워진다.
나는 알렌 선교사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보다 6개월 먼저 한국에 들어왔다는 사실에서 묘한 영적 전율을 느낀다. 성경을 보면 세례요한이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나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셨다. 하나님께서 의사 알렌을 이 땅에 6개월 먼저 보내셔서 복음의 토양을 마련하셨다는 사실이 놀랍다. 실제로 광혜원 개원 닷새 전 한국에 도착한 언더우드 선교사는 곧바로 복음을 전할 수 없어서 잠시 광혜원에서 일하면서 그곳을 선교 거점으로 삼기도 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복음이 먼저 기독병원 선교를 통해 교회를 세우게 되고, 교회와 함께 기독교 학교가 세워지는 순서로 확산해 갔으니 우리 기독병원이 갖는 사명감과 보람이 얼마나 크고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역경의 열매] 이상택 (13) 안양의원 개원 31년 만에 ‘효산의료재단’으로 도약
2004년엔 샘병원으로 이름도 변경
사회와 이웃을 위한 치유의 샘으로
사명 감당하며 그리스도 사랑 실천
환우들 육신 치유 통해 영혼도 치유
효산 이상택 박사가 1996년 7월 안양병원 개원 24주년 기념식에서 축사하고 있다.
1967년 작은 개인 의원으로 시작한 ‘안양의원’은 5년 만인 1972년 ‘안양병원’으로 성장해 안양 최초의 종합병원 면모를 갖추었다. 이후 1998년 마침내 효산의료재단 이름의 공익 의료법인으로 도약했다. 안양의원 개원 31년 만이었다. 그러니까 부부가 시작한 개인 의원에서 지역사회를 위한 안양병원으로, 나아가 국가와 사회를 위한 의료법인 샘병원으로 마치 포도나무의 가지처럼 싱싱하게 뻗어 나간 것이다. 2004년엔 안양병원에서 샘병원으로 이름을 변경하고 새로운 CI도 발표했다.
“요셉의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창 49:22)는 말씀을 실감하면서 우리 부부의 어깨는 더 무거워졌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한 영적 사명감 때문이었다. 손바닥만 한 작은 구름이 먹장구름이 되어 오랜 가뭄의 대지에 흡족한 비를 뿌린 사건처럼(왕상 18:44) 그렇게 축복받은 효산의료재단은 이제 개인 소유가 아니라 사회의 공기요 이웃을 위한 치유의 샘으로의 사명을 성실히 감당해야 했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병원이 되어야 한다는 창립 초기부터 가진 영적 비전을 더 분명히 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1998년 6월 기독병원으로서 그 정체성을 대내외에 분명히 선언했다. 선언식에서 나는 앞으로 우리 병원이 기독병원으로서의 사명을 다할 것을 선언하면서 병원의 상징인 포도나무의 의미를 설명했다.
“우리는 포도나무에 달린 가지입니다. 포도 가지가 나무에 잘 붙어 있어야 좋은 열매를 맺는 것 같이, 포도 가지인 우리는 포도나무 되시는 예수님께 꼭 붙어 있어야 영적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붙어 있으면 살고 붙어 있지 않으면 죽습니다.”
우리가 표방하는 기독병원이란 우리 뜻대로 경영해 우리 인간이 원하는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뜻대로 경영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는 것으로 생각했다. 우리 병원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병원을 찾아오는 환우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심는 것이었다. 단순히 육신의 질병을 치료하는 병원이 아니라 육신의 치유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그들 영혼을 치유하는 것이 우리 병원의 사명이다.
의사는 육신을 치료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크리스천 의사는 육신만 치료하는 의사가 아니다. 영혼까지 치료하는 의사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기독병원이 추구하는 전인 치유의 사명이다.
그런데 우리 크리스천 의사들이 바로 알고 겸손해야 하는 것은, 의사들에게는 인간의 영혼을 치유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다. 죄로 말미암아 병든 영혼을 치유하실 분은 오직 예수님이시다. 우리는 환우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면 된다. 예수님을 전인격적으로 바로 만나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며 병든 영혼을 치유하는 길이다.
이런 점에서 병원은 영혼 구원의 황금어장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의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는 곳으로 학교와 군대, 병원을 생각한다.
***[역경의 열매] 이상택 (14) 목사가 된 아내 황 박사… ‘생명 존중’ 주님의 말씀 실천
20여 년 전부터 신학 공부 시작
신학·목회상담학 박사 학위 취득
낙태 반대하는 생명 살리기 운동
미혼모 돕는 일에 여생 바치기로
황영희 박사가 2004년 3월 경기도 안양 샘여성병원 개원 감사예배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나를 예수님께 인도한 아내 황영희 박사는 최근 목사 안수를 받았다. 20여년 전부터 공부해 신학 박사와 목회상담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동안 남모르게 틈틈이 신학을 공부해온 터였다. 남들이 다 은퇴하는 나이에 목사가 되어 예배 설교 호스피스 등에 쓰임을 받고 있다. 목사 안수 이전에도 나를 포함해 환자와 직원들을 위한 말씀 공부반을 열어 강의를 해왔다. 말씀에 순종하는 신학 수련의 삶을 살아온 것이다.
황 박사가 바쁜 병원 사역에 더하여 목사 안수를 받은 데는 인간의 생명을 살리는 운동을 하고자 하는 뜻이 강했다. 낙태를 반대하는 생명 살리기 운동뿐만 아니라 미혼모를 위한 선교회를 설립해 그들을 도우며 복음을 전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까지 생명에 대한 깊은 경외감을 가지고 남은 생애를 살겠다는 아내가 존경스럽다. 나도 이 일에 기도로 동참하려 한다.
과거 우리는 낙태가 없는 여성전문병원을 갖기 위해 오랫동안 기도했다. 그렇지만 그런 병원의 실현은 여러 면에서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병원 경영이 어려울 것이라는 회의적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생명을 존중하는 의료인이라면 누구나 이런 이상을 추구하기 마련이지만 정작 실천은 어려운 것이 우리네 현실이었다.
나와 황 박사는 잠언 16장 3절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는 말씀과 9절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는 구절을 붙잡고 기도했다.
마침 당시 낙태반대운동연합(현 프로라이프)에서 조직을 법인화하면서 대표를 물색하고 있었다. 적당한 인물을 섭외하지 못했는지 황 박사에게 교섭이 왔다. 산부인과 병원에서 임신중절 수술을 하지 않는 곳을 찾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 샘여성병원 소문을 듣고 황 박사가 낙태반대운동에 앞장서 달라는 것이었다.
아내는 처음엔 극구 사양했다. 그동안 자신을 돌아볼 때 본의 아니게 죄를 지었기 때문에 자격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단체의 간곡한 부탁에 결국 이사장직을 수락하게 되었다. 아내는 이 문제를 두고 깊이 기도하며 남편인 나와도 구체적으로 의논을 했다.
나는 황 박사를 위로하며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거절하지 말라고 조언하며 격려했다. 황 박사는 낙태의 죄를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낙태반대운동연합 이사장을 맡아 섬기게 됐다.
기독병원은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중히 여기는 의료기관이다. 성경은 온 세상과 인간의 생명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중에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고 증언한다.(창 1:27) 그러므로 기독병원의 의사에게는 세상의 일반 병원 의사들보다 더 신실한 사명의 멍에가 주어져 있다고 할 것이다.
***[역경의 열매] 이상택 (15) 아프간과 이집트 사건 수습하며 생명 최우선 병원으로 활약
아프간서 납치된 해외 선교사 일행 중
현지에서 순교한 배 목사와 심 청년의
시신 국내 송환시 샘병원 주도로 안치
효산의료재단 샘병원 50주년 기념식이 열린 2017년 11월 이상택 박사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한국교회 해외 선교 역사상 참으로 안타까운 사건이 2007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났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수습하는 데 있어서 평소 생명 존중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는 우리 샘병원을 쓰셨다.
당시 해외 선교에 앞장서 봉사해 온 분당 샘물교회는 청년 성도 23명을 단기 선교차 아프가니스탄으로 파송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무장 탈레반에 의해 모두 인질로 납치돼 인솔자인 배형규 목사와 심성민 청년이 순교를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한 달 넘게 납치를 당한 선교팀은 정부와 교계의 노력으로 구출됐으나 현지에서 순교한 배 목사와 심 청년의 시신을 국내로 송환하는 절차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상당 시간 탈레반 무장 게릴라에게 억류당한 생존자들의 정신적 육체적 상태도 정밀 체크가 필요했다.
시신을 모시는 것부터 난관이었다. 일반적으로 영안실 시신 보관대는 국내에서 제작되는 관의 크기에 맞게 제작되는데, 해외에서 운구되는 두 시신의 경우 항공 운구 규정에 따라 대형 관으로 제작됐고, 이에 따라 대형 시신 보관대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다른 병원과 장례식장에서는 해외 운구용 대형 시신 보관대가 흔치 않았는데, 마침 샘병원 장례식장에는 2기의 대형 보관대가 운영 중이어서 문제없이 안치할 수 있었다.
피랍 성도들은 배 목사의 순교하던 날 모습을 들려주었다. 탈레반이 배 목사를 따로 불러내 어디론가 데리고 가려 하자, 배 목사는 최후를 예감하고 팀원들에게 이렇게 유언을 남겼다 한다.
“형제님들, 끝까지 믿음을 지키십시오. 저들이 협상을 위해 우리 중에서 한두 사람을 죽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죽기 전에 저들에게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한국과 세계의 지도자들과 언론에 여러분을 속히 구출해 달라고 부탁하겠습니다.”
그즈음 우리 병원은 A병동의 22개 병실을 완화병동으로 만들고 20~40명이 집단으로 전인치유를 받을 수 있는 교실 크기의 예배 치유실 공간을 리모델링해 오픈을 앞두고 있었다. 아프간 피랍자 21명은 귀국 후 우리 병원에 와서 별도로 예배와 심리상담, 치유를 받았다.
샘병원이 당시 흔치 않았던 해외 운구용 대형 시신 보관대를 운영해 배 목사와 심 청년의 시신을 안치할 수 있었고, 피랍 사건 직전 예배 치유실을 준비해 피랍자 21명에게 심리상담과 치유를 제공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아닐 수 없다.
2014년에도 우리 국민이 이집트에서 성지순례 도중 버스 폭탄테러를 당해 4명이 사망하고 30여명이 부상하는 끔찍한 일이 있었다. 부상 환자 가운데 25명이 샘병원에 입원해 전인 치유 프로그램으로 치료를 받고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했다. 이런 일들로 샘병원은 고통을 당하는 이웃을 위한 생명 최우선 치유 기관으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역경의 열매] 이상택 (16) 딱한 사정의 환자 자녀들 돕다 장학재단 설립까지
어머니 간호로 대학 휴학한 여학생
등록금 지원 나중에 대학교수 되고
연탄가스 사고로 졸지에 가장된 소년
우리 집에서 같이 살다 양아들 삼아
2006년 한 식당에서 열린 어버이날 가족 모임에서 목사 아들을 포함한 세 아들 부부가 기타 반주로 노래하고 있다.
한 가정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자식들이 공부를 해야 한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가정과 국가의 장래가 다음세대인 우리 자녀들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나와 황영희 박사는 궁핍한 환경 속에서 대학 시절을 보냈다. 그때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 은혜를 갚는 길이 바로 사람을 기르는 장학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부부는 1970년대부터 장학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우리는 아직 갚아야 할 병원 빚도 적잖았지만, 어려운 학생들에게 개인적으로 초중고, 부산의대 등지에 장학금을 나누기로 했다. 이 일이 2003년 효산장학문화재단으로 이어져 여러 해 학생들을 도왔다.
장학과 관련해 몇 가지 잊지 못할 추억이 있다. 장학재단 설립하기 전, 아내가 어느 수술 환자를 회진하는데 환자의 따님이 어머니를 돕고 있었다. 사연을 듣고 보니 아버지는 수년 전 돌아가시고 대학을 한 학기 다니다가 등록금이 없어 휴학을 한 학생이었다.
안타까운 사정을 들은 우리는 그 환자의 따님이 학교에 다시 돌아가도록 등록금을 지원했다. 그 여학생은 다시 학교로 돌아가 열심히 공부해 나중에 대학교수가 됐다. 무엇보다 고마운 것은 그 학생의 동생 셋도 언니를 본받아 억척같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부해 대학을 졸업하게 됐다는 사실이다.
또 86년 1월 어느 날 부부가 연탄가스 중독사고로 우리 병원 응급실에 실려 왔다. 부부를 돌보는 학생은 고3 졸업반으로 한창 공부해야 할 때였다. 안타깝게도 그의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생명은 건졌지만 후유증으로 정상적 생활이 어려웠다. 졸지에 어머니를 잃고 불구가 된 아버지를 봉양해야 하는 소년 가장의 학생 사정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이 학생의 사정을 딱하게 여긴 친구들과 부모님들이 힘을 모아 학생에게 대학 입학금을 마련해 주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도 후원에 동참했다. 그 후 이 학생의 근황이 궁금해 수소문해 본 결과 아버지가 행방불명돼 찾으러 다니느라 학교도 못 다니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이 학생의 학비를 지원하는 한편, 자립할 때까지 아예 우리 집에 들어와 살도록 했다. 어느 날 그 학생이 우리 부부에게 수줍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어머니, 아버지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배 안 아프고 아들 하나를 더 얻게 되었다. 새로운 부모를 얻은 그 학생은 성격이 아주 밝아졌으며 열심히 공부해 훌륭한 목회자가 되었다. 지금도 명절이 되면 온 가족이 찾아와 든든한 아들 노릇을 하고 있다.
장학 일을 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베푼다는 것은 남을 위한 일이기 전에 먼저 나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적은 물질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배려하지만, 그것으로 말미암아 느끼는 보람은 이루 형언할 수 없으며 기쁨이라는 보상을 먼저 받게 된다. 나눔의 기쁨은 이웃에서 이웃으로 흘러내리는 것이란 걸 체험했다. 하나님의 축복이다.
***[역경의 열매] 이상택 (17)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사 중 가장 귀한 것이 찬송의 은사”
지휘 전평화 선생·이미경 반주자와 함께
안양 쌍투스합창단 단장으로 쓰임 받아
찬송 부르면 마귀 떠나고 영혼 소생돼
효산 이상택 박사가 단장으로 이끈 안양 쌍투스합창단이 1995년 무대에 올라 공연하고 있다.
나의 회고 중에서 쌍투스합창단은 의미 있는 추억이다. 내가 젊어서 이루지 못한 성악가로서의 꿈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후 창단된 안양시립합창단과 깊은 관련이 있기도 하다.
안양에 처음 쌍투스합창단이 시작된 것은 1978년으로 내가 36세 때 일이다. 초기부터 지휘를 맡은 전평화 선생과 이미경 초대 반주자 등의 노력으로 창단했으며 나는 단장으로 쓰임 받았다. 그러다가 96년 안양시립합창단이 창단될 때 쌍투스합창단 전 지휘자와 이 반주자가 옮겨 쓰임 받은 것이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나는 훗날 경기도 예술인 대상을 받기도 했다.
‘쌍투스’(sanctus)란 라틴어로 ‘거룩하시도다’란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다. 시편 22편 3절은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라고 말씀한다. 세상을 살면서 아무리 큰 근심과 걱정이 있을 때도 찬송을 부르면 마귀는 떠나가고 내 영혼이 소생함을 맛본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사 중에 가장 귀한 것이 찬송의 은사라고 생각한다. 가까운 이웃들이 나에게 당신은 찬송하기에 좋은 목소리를 타고났다고 칭찬할 때가 가장 기쁘고 즐겁다.
이런 이유로 우리 부부와 아들은 군포지샘병원 13층에 24시간 찬양이 흐르는 베데스다홀을 마련했다. 이 방에는 한밤중에도 24시간 찬양곡이 켜져 있고 누구든 그곳에서 기도할 수 있다. 안양에 있는 본원에도 예배실과 기도실이 24시간 열려 있으며 찬양을 들을 수 있다.
나는 10여년 전 아내와 함께 ‘부부 찬양집’을 CD로 제작해 가까운 지인들에게 선물하며 또 전도용으로 사용한 적이 있다. 아내 황영희 박사도 타고난 음악성이 있어서 노래를 곧잘 부르고 큰며느리도 나와 제법 화음이 맞는다. 우리 가족이 낸 음반에는 ‘크나큰 은혜’ ‘주님께’ ‘감사합니다’ 등 찬양곡과 ‘뒷산 소나무’ ‘버들피리’ ‘젖은 별’ 등 삶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추억의 노래, 그리고 ‘샘병원가’ 등 효산의료재단의 정신을 담은 노래 10편이 수록돼 있다.
현재 우리 병원에서 부르는 ‘샘병원가’는 효산의료재단 발족 후 내가 작사를 돕고 우리나라 음악계의 원로인 정풍송 선생이 작곡했다. 병원이 법인화되기 전에는 아내 황 박사가 작사하고 안양시립소년소녀합창단 지휘자 김영생 선생이 작곡한 ‘안양병원가’를 부르다가 의료법인화 이후에는 샘병원가를 정식 원가로 부르고 있다. 샘병원가는 “우리는 샘가족 아름다운 샘가족/ 사랑을 온누리에 샘물처럼 담는다”라는 노랫말로 시작한다.
부부 찬양집을 내도록 도와준 친구 정풍송은 나와 고향이 같은 죽마고우다. 국민이 애창하는 ‘석별’ ‘웨딩드레스’ ‘허공’ 등을 남긴 한국 가요계의 전설이다. 이 유명한 친구가 우리 부부의 음반을 내도록 지도를 해줬으니 예술적 가치가 있다고 자부하고 싶다.
***[역경의 열매] 이상택 (18) 안양서 병원 개원 즈음 재소자 돕는 사역 시작하게 돼
교도소엔 상주 의사 없어 환자 발생하면
병원 환자 다른 의사에게 맡기고 달려가
아내도 여자 소년원 의무과장으로 봉사
효산 이상택 박사가 2001년 5월 법무부 교정위원 중앙협의회 간담회에 참석해 초대 회장으로서 축사하고 있다.
내가 재소자에게 관심을 두게 된 것은 병원 설립 시기와 비슷한 1967년 안양의원 개원 때다. 당시 안양에는 의원이 많지 않았고 교도소엔 의무실은 있으나 낮과 밤에 상주하는 의사가 없었다. 그래서 교도소에 환자가 발생하면 병원 환자는 다른 의사에게 부탁하고 급히 교도소로 달려가야 했다. 환자 상태에 따라 의료 장비와 영상 의학 및 검사가 필요하면 병원으로 후송해 먼저 치료에 최선을 다했다.
당시 교도소 예산 관계로 재소 환자를 무료로 치료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평소 가난한 이웃과 소외 계층을 치료하는 것을 최우선 사명으로 여겨온 나로서는 불편한 환경 속에서 육신의 고통을 겪고 있는 재소자들을 돌볼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했다. 아내 황영희 박사도 초기부터 여자 소년원의 촉탁 의무과장으로 봉사했다.
1964년 세워진 안양교도소는 전국에서 가장 큰 시설이었음에도 의무과와 의무실을 갖추지 못했기에 교도소 내에서 환자를 치료할 시설이 없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환자가 발생하면 우리 병원에서 내가 제일 먼저 달려가 우선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고 그 정도에 따라 교도소에서 간단한 치료를 하거나 병원으로 이송했다.
이런 응급처치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었다. 환자가 미결수이면 환자로서 수감생활을 할 수 있느냐를 법원의 판사가 결정했다. 반면 기결수는 형이 확정된 상태로 수형생활을 계속할 수 있는지를 지역 검찰청 검사장이 결정했다. 이때 의사는 판사나 검사에게 해당 수감자에 대한 정확한 건강 상태를 의학적으로 고지해야 하는데 이는 대단히 중요하고 또 어려운 일이었다.
어디까지나 환자의 상태를 정확하게 진단하는 것이 의사의 제일 사명이지만, 이를 방해하는 요소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더 어렵고 중요했다. 환자가 자신의 상태를 과장하고 부풀려 진단을 어렵게 하기도 하고 가족이나 변호사의 개입으로 사실 이상의 진단서를 요구하기도 한다. 교도 행정 라인을 이용한 외압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정치권 인사와 재벌그룹 회장 등이 재소자로 있을 때 건강 문제로 검진을 받았던 경우가 많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 경우에 있어서 단호하고 냉정했다. 환자의 처지를 한없이 위로하고 아파하는 마음 때문에 환자의 실제 상태를 부풀리거나 축소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 의사로서 내 책임이자 소신이다. 정확하고 공정한 판단이야말로 교도소를 위해서나 환자를 위해 모두 유익한 것이다. 만일 의사가 사실과 다른 판단을 내린다면 법질서는 무너지게 되고 그 피해는 결과적으로 국민에게 돌아가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수십 년 이어온 재소자 봉사가 인정돼 정부에서는 98년 나를 법무부 교정위원 전국협의회(현 교정위원 중앙협의회) 초대 회장에 위촉했다. 나중엔 국민훈장도 받았다. 갇힌 자를 돕는 사역을 하면서 재소자들의 억울한 사정을 이해하고 마음의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어 보람됐다.
***[역경의 열매] 이상택 (19) 효산국제재단 설립… 백년대계 교육 발전에도 부름 받아
평소 의술 못잖게 교육에도 큰 관심
대전외국인학교 건설과정에서 생긴
재정적 어려움과 경기수원외국인학교
학교 설립 인가 등 법적 문제 해결
효산 이상택 박사가 2020년 5월 경기도 수원 영통구의 경기수원외국인학교(GSIS) 졸업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나는 평소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 일생 의료봉사에 부름 받아 일했지만 의술 못잖게 국가 백년대계의 교육 발전에도 봉사하고자 했다. 인류의 역사는 질병과 싸우며 발전했으며 동시에 교육을 통해 발전해 왔다. 평소 우리 샘병원과 이웃의 안양대, 성결대와 산학협력을 강화하고 장학금을 기탁해 온 것도, 그리고 잠시 숭실대 이사를 역임한 것도 나의 교육에 대한 남다른 애정의 표현이었다.
이런 가운데 대전외국인학교(TCIS) 발전을 도울 기회를 얻게 됐다. 이 학교는 1910년 평양의 의료선교사 로제타 홀이 세운 평양외국인학교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광복과 전쟁 후 1958년 대전 한남대 용지에 다시 문을 열었다. 평양외국인학교는 이 땅에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의 자제들이 공부한 유명 교육기관이다. 1973년 여의도 집회를 통해 한국교회를 뜨겁게 달궜던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사모 루스 벨 그레이엄이 이 학교에서 공부했으며, 강원도 태백에 예수원을 세우고 평생 기도해 온 대천덕 성공회 신부님 역시 이곳에서 수학했다.
대전외국인학교는 2008년 대전 유성구 대덕단지에 대지를 마련하고 새 교육 시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건설 과정에서 재정적 어려움에 봉착해 1년 이상 공사가 중단됐다. 이런 상황을 안타깝게 여긴 둘째 아들 이재희 가천대 교수가 나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서 도움을 호소했다. 교육 일선에 부름을 받은 이 교수는 학부형 대책위원이자 친구인 주동욱과 함께 뜻을 모아 2011년부터 이 학교를 돕기 시작했다.
그 당시 대전외국인학교와 같은 재단이던 경기수원외국인학교(GSIS) 역시 법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경기수원외국인학교는 이후 2020년 1월 수원시와 새로운 협약을 체결하고 그해 7월에는 경기도교육청으로부터 새로운 학교 설립 인가를 받게 됐다.
법적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재판부 권유에 따라 2019년 비영리법인인 효산국제재단을 연고가 있던 미국 오하이오주에 설립하게 됐다. 대전외국인학교와 분리해 이 재단이 경기수원외국인학교의 새로운 운영자가 됐다. 학교에서 교육재단 명칭을 효산이라고 해서 나는 더 보람을 느낀다. 새벽(曉) 산(山)처럼 푸르고 싱싱한 다음세대들이 이곳에서 모든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배우길 바라고 있다. 학문을 갈고닦으며 주님 안에서 아름다운 꿈을 마음껏 꽃피우게 된다면 이보다 더 큰 보람이 어디 있겠는가.
경기수원외국인학교는 IB(International Baccalaureate) 학교로 대전외국인학교와 함께 국내에서 가장 먼저 초중고 전 과정에 IB 커리큘럼을 도입한 외국인 전문 교육 기관이다. 일생을 의료계에 종사한 나로서는 은퇴 이후에 이처럼 보람 있는 글로벌 인재 양성에 이바지할 수 있게 되어 큰 보람을 느낀다. 자칫 다른 종교 재단으로 넘어갈 뻔한 학교를 하나님이 이끌어 주심에 깊이 감사드린다.
***[역경의 열매] 이상택 (20) 의료사역 통해 아프리카에서도 하나님의 사랑 실천
어릴 적 꿈꾸던 슈바이처 박사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하기 위해
‘아프리카미래재단’ 세워 의료 봉사
건강한 아프리카를 위해 노력하는 아프리카미래재단의 홈페이지 화면.
지난 56년 동안 우리 샘병원은 국내외 재난이 있는 곳이면 언제 어디든지 달려가 사랑의 인술로 이웃들을 도왔다. 파키스탄 대지진, 인도네시아 자바섬 인근 지역에서 일어난 강진과 지진해일로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고 있을 때 샘병원은 앞장서 긴급 의료팀을 파견했다. 재난이 있는 곳, 생명을 구하는 일이라면 국경을 초월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려 애써왔다. 북한의 평양의대 인공신장실을 세울 때도 박상은 샘병원 미션원장이 일곱 차례를 오가며 투석기 설치를 도왔다.
이런 가운데 샘병원은 마침내 아프리카를 구체적으로 돕기 위해 2007년 아프리카미래재단(AFF)을 창립했다. 의료봉사 활동을 통해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현재의 아프리카는 지난날 어두웠던 우리나라의 형편을 떠올리게 한다. 미래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아프리카에 밝은 미래를 가져올 수 있겠다는 믿음으로 나의 제안에 따라 아프리카미래재단이라고 명명하게 됐다.
나와 아내 황영희 박사는 일찍이 아프리카의 성자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를 흠모해 그 숭고한 발자취를 따르기 위해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우리는 65세가 되면 직접 아프리카로 가든지 아니면 사람을 보내든지 해서 복음을 전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아직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기에 아프리카 미래를 돕기 위한 재단을 만들게 된 것이다.
나와 아내 황 박사가 이사장을 맡아 기회 있을 때마다 아프리카 주요 국가를 순회하며 봉사해 왔다. 지금은 임용택 안양감리교회 목사가 이사장직을 맡아 수고하고 있다. 나는 창립 당시부터 고문을 맡아 보이지 않게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중남부 아프리카 선교사대회에도 수차례 방문해 선교사 가족을 위한 진료를 이어왔다.
아프리카미래재단은 2007년 7월 외교부에 국제봉사재단으로 등록 후 2010년 한국국제협력단(KOICA) 빈곤퇴치 기여금 사업에 참여했다. 2014년엔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KOFIH) 지원 사업으로 잠비아에 의료기기 지원센터를 세우고 에티오피아에 모자보건 사업을 시작했으며 2015년엔 아프리카미래연구소도 창립했다. 말라위 모자보건 증진 사업, 마다가스카르 통합 의사 훈련, 짐바브웨 심장 수술 및 재활 치료 서비스 증진, 탄자니아 병원 운영 컨설팅, 잠비아 보건대학 및 교회 설립 등을 도왔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는 말씀에 따라 아프리카미래재단은 창립 초기부터 잠비아 말라위 짐바브웨 등지에서 병원 개설과 모자보건 프로젝트를 수행해 현지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비록 역사는 길지 않으나 재단은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 현지 법인을 등록할 만큼 신뢰와 권위를 쌓아 선교와 관계된 많은 일을 별다른 제한 없이 오늘도 수행하고 있다.
***[역경의 열매] 이상택 (21) “하나님이 주신 선물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길러야”
성장하며 모범적으로 자란 두 아들
하나님 경외하고 신앙생활에 충실
자녀는 가장 위대한 하나님 선물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두 아들은 1992년 동시에 서울대를 졸업했다. 의학과를 졸업한 첫째 이대희 현 샘병원 이사장, 아내 황영희 박사, 이상택 박사, 경제학과를 졸업한 둘째 이재희 현 가천대 교수(왼쪽부터).
나는 하나님이 맺어주신 생의 동반자인 황영희 박사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나는 9남매 사이에서 자랐기에 두 아들로는 서운했다. 그렇지만 그 시절 정부 시책은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것이었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 생의 반려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는 것 모두 인위로 되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에 의해 이뤄지는 일이다. 자식을 두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느 가정이나 자식은 부모에 의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얻는 것이다. 그래서 자녀는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던가.
우리 가정에 주신 두 아들은 그야말로 열 자식 부럽지 않은 알곡으로 자라 주었다. 부모가 쉴 틈 없이 바쁘니 하나님이 길러주셨다. 전두환 정권 시대라 과외도 해본 적이 거의 없다. 성장 과정에서도 부모 속을 별로 썩인 적이 없었고,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모범으로 자라 주었다. 큰아들 대희는 제 부모의 전공을 이어 의학 중에서도 종양학을 공부하고 샘병원을 경영하고 있다. 둘째 아들 재희는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거쳐 지금은 가천대에서 후학을 가르치면서 경기수원외국인학교(GSIS)에서 부이사장으로 섬기고 있다.
무엇보다 두 아이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생활에 충실한 것이 가장 자랑스럽고 고맙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부모가 자기 자신의 교훈과 훈계로 자식을 양육하면 그것은 부모의 힘으로 자식을 키우는 결과가 된다. 성경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교훈과 훈계로 자식을 길러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것이 사랑하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고 실망과 좌절과 원망에 빠지지 않는, 방향과 목적이 올바른 유일한 양육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부모 된 우리가 내 힘으로 자녀를 기른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하나님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니 하나님이 친히 기르시는 것이다.
나는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최고사령관의 ‘아들을 위한 기도문’을 좋아한다. 아이들이 고등학교 때는 책상머리에 붙여주었고 2003년 손자들이 초등학교 고학년 때엔 다시 선물로 액자를 만들어 가정마다 선물했다. 벽에 붙이고 늘 읽고 자랐을 것이다. 당시 우리 집 가훈인 ‘먼저 하나님께’ 액자도 함께 선물했다. 기도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게 이런 자녀를 주소서/ 약할 때 자기를 돌아볼 줄 아는 여유와/ 두려울 때 자신을 잃지 않는 대담성을 가지고/ 정직한 패배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의연하며/ 승리에 겸손할 줄 아는 온유한 자녀를 주소서// 생각할 때에 아집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주님을 알고 자신을 아는 것이/ 지식의 기초임을 아는 자녀를 내게 허락하소서//(중략) 그리하여 아비 된 나는 인생을 헛되이 살지 않았노라고/ 어느 날 당신께 조용히 고백하겠나이다. 아멘.”
***[역경의 열매] 이상택 (22) 아내 황 박사와 자식들 덕에 ‘올해의 부부상’ 수상
신앙으로 모범적인 자녀 양육한 두 아이 어머니 황 박사와 함께
의료 선교와 지역 봉사 활동 등 이웃 사랑 실천으로 귀감이 돼
효산 이상택 박사와 아내 황영희 박사가 2017년 11월 열린 ‘아프지만 살아내야지’ 출판기념회에서 함께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이 내 자식을 길러주셨다고 하니 부부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천사가 내려와 두 아이를 길러 주었다고 오해하기 쉽다. 하나님이 우리 집에 천사를 보내기는 보내셨는데, 그 천사가 바로 내 아내요 두 아이의 어머니인 황영희 박사다. 하나님은 내 아내를 천사처럼 보내주셔서 당신의 두 아이를 과외 한번 없이 신앙으로 양육했다.
2010년 우리 부부는 ‘올해의 부부상’을 수상했다. 그때 수상 이유 중에 가장 큰 평가가 바로 자녀를 모범적으로 양육했다는 것이었다. 둘째도 대학 합격했을 때 기뻐서 자랑하고 싶었지만 우리 부부가 서로 입 다물기로 하고 참았다. 나는 지금도 그 부담스러운 상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모범이 되라고 하나님이 내리신 멍에로 알고 있다.
나도 오래 잊고 지낸 그때 사연을 아내 황 박사가 지난 2017년 샘병원 창립 50주년을 맞아 펴낸 자신의 신앙 일지 ‘아프지만 살아내야지’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자녀 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고민하는 독자들을 위해 여기 그 내용을 소개한다.
2010년 어느 날 진료를 마치고 병원을 나서는데 어디선가 전화가 걸려왔다.
“이사장님 부부께서 ‘올해의 부부상’ 대상자로 선정됐습니다.”
“네? 부부상이라고요?”
“예, 그렇습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여러 상을 접했지만, ‘올해의 부부상’은 처음 들어보는 상이었다.
“대체 그 상은 무엇이고, 어떤 평가 기준으로 수여하는 건가요?”
“세계 부부의 날을 맞이해 세계 부부의 날 위원회에서 대한민국 최고의 부부에게 주는 상입니다.”
매년 5월 21일을 세계 부부의 날로 제정해 국회에서 기념행사를 하는데, 올해는 우리 부부가 선정됐다는 설명이었다. 올해의 부부상은 화합과 사랑으로 30년 넘게 생활해 오면서 자녀 교육에도 성공하고 이웃 사랑의 실천에도 앞장선 모범 부부에게 수여하는 아주 특별한 상이라고 했다. 우리 부부가 선정된 것은 자녀 둘이 의사와 교수가 되었고, 의료 선교와 지역 봉사 활동 등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한 것이 귀감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마디로 최선을 다해 모범 부부로 살아온 분들에게 주는 상이죠.”
불현듯 내 결혼 생활이 과연 상을 받을 만큼 모범이 됐나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그런 상이라면 저희는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다른 분에게 주셔요.”
나는 정중하게 사양했지만, 주최 측에선 우리 부부가 상을 받기에 적합하다고 했다. 나는 우리 부부가 과연 그 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되돌아보았다. 아이들 앞에서 화내고 큰 소리로 싸운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늘 화평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남편(이상택 박사)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내가 더 잘할 테니, 우리 그 상 받읍시다.”
“자식들 때문에 이 상을 받게 되었네. 주님께 감사하네요.”
***[역경의 열매] 이상택 (23) ‘생명존중’과 ‘투명경영’으로 주님의 공익기관 사명 다해
생명존중은 의사로서 최우선 철학
‘선 치료 후 재정’ 원칙 세우고 지켜
정권 바뀔 때마다 힘든 특별 세무감사
받았지만 투명 경영으로 깨끗함 밝혀
효산 이상택 박사와 아내 황영희 박사가 2016년 사택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반세기 넘도록 의료인의 길을 걷는 동안 경영 철학을 말하라면 하나는 ‘생명 존중’이고 다른 하나는 ‘투명 경영’이다. 샘병원 미션은 “전인 치유와 섬김으로 생명 사랑을 실천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구현한다”이다.
생명 존중은 의사로서 처음이자 마지막 사명이다. 환자 최우선이란 철학이다. ‘생명 사랑’이라고 하면 거창한 얘기가 되지만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야 한다’고 하면 절박한 현실의 이야기가 된다.
개업 당시 병원의 현실은 응급 환자가 오면 먼저 환자의 재정 상태에 관심을 가졌다. 병원도 경영이 돼야 하는 일종의 기업이기 때문에 그랬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선(先)치료 후(後)재정’ 원칙을 지켜오고 있다. 이러한 나의 의료 철학은 히포크라테스의 정신에서 기인한다. 넓게는 인류를 위한 봉사이며 좁게는 육신의 고통에 처한 이웃을 위한 배려이다. 의과대학 졸업식장에서 낭독하는 히포크라테스의 선서, 주요 항목은 이렇다.
“이제 나는 의업에 종사하는 일원으로서 인정받는 이 순간, 나의 생애를 인류 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
“나의 양심과 위엄으로써 의술을 베풀겠노라.”
“나는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
“나는 환자가 알려 준 모든 내정의 비밀을 지키겠노라.”
“나는 의업의 고귀한 전통과 명예를 유지하겠노라.”
“나는 인종 종교 국적 정당 정파 또는 사회적 지위 여하를 초월하여 오직 환자에 대한 나의 의무를 지키겠노라.”
“나는 인간의 생명을 수태된 때로부터 지상의 것으로 존중히 여기겠노라.”
“비록 위협을 당할지라도 나의 지식을 인도에 어긋나게 쓰지 않겠노라.”
또 다른 기둥은 투명 경영이다. 외부에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은 아니지만 내 마음에 스스로 다짐하고 지켜온 것이다. 이런 내적 선언이 더 구속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건 약속이고 선언이기 때문이다. 나의 주인이시고 우리 병원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서약하고 실천한 사항이 투명 경영이다. 경기도 군포에 있는 G(지)샘병원의 ‘G’는 ‘God’을 뜻한다.
경영 철학에 대한 회고는 간략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역대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감당하기 힘든 특별 세무감사(세무사찰)를 무려 다섯 번이나 받았다는 사실로 함축하고 싶다. 아무리 법을 준수하며 투명 경영을 한다 하더라도 털어서 먼지 안 나는 곳이 없다는, 시쳇말처럼 먼지를 털려는 외부세력의 도전은 늘 나를 따라다녔고 병원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나 그 순간은 너무나 힘들고 어려웠지만 병원의 투명 경영의 결과는 사실 그대로 밝혀져 큰 보람을 느끼곤 했다.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뿐이며 현실의 어려움에 후회는 없다. 앞으로도 우리 병원은 생명 존중과 투명 경영의 원칙을 준수하면서 주님의 공익기관으로서의 사명을 잊지 않을 것이다.
***[역경의 열매] 이상택 (24) 인생의 고비마다 만난 하나님… 삶의 중요한 전환점 돼
유아 시절 미아 된 경험부터 시작해
질병으로 생사 오가던 유년 시절
가장 큰 전환점인 아내와 주님 만남
마지막으로 경영 일선서 물러나며
효산 이상택 박사와 아내 황영희 박사가 1987년 5월 설악산 대청봉을 가리키며 잠시 쉬고 있다.
인생의 중요한 고비마다 삶의 중요한 전환점이 있었다. 이를 돌아보려 한다.
가장 큰 전환점은 ‘예수님을 만난 사건’이다. 인류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BC에서 AD로 바뀐 것처럼 나에게도 그분이 찾아오심으로 인생이 바뀌었다. 팔순을 넘긴 나이에 새벽 산(曉山)에서 지난날을 회고한 것도 주님을 만난 사연을 고백하기 위함이었다.
유아 시절 전환점은 몽골 벌판에서 미아가 된 경험이다. 1944년 겨울 혹한의 몽골 벌판에서 호기심에 이끌려 마을에서 벗어났다가 길을 잃고 무려 10시간을 눈보라 속에서 새벽까지 벌판을 헤맨 경험은 생사를 오가는 시간이었다. 바둑돌을 삼켜 식도가 막히자 부친은 나를 선양에서 베이징으로, 베이징에서 평양으로, 평양에서 다시 베이징으로 큰 병원을 찾아 헤매고 마침내 소생시켰다. 그때 내가 죽지 않고 산 것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다.
유년 시절 일찍부터 소년 가장처럼 지낸 일, 사고와 질병을 통해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은 일, 청소년기 가난 때문에 책을 살 수 없어 쉬는 시간 친구들 책을 빌려 순간 기억법으로 공부해 두각을 나타내게 된 일 등은 말 그대로 전화위복의 축복이다.
대학 시절 캠퍼스에서 아내와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은 삶의 가장 큰 전환점이었다. 부산대 캠퍼스에서 나의 첫눈에 들어온 황영희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우리 가문은 원래 대대로 불교를 믿고 있었다. 철저한 불심의 가정에서 성장한 내가 대학생이 돼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중에 깨닫고 보니 하나님의 뜻과 섭리였지만 당시로써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믿는 종교를 저항 없이 받아들인 탓이다. 그때 나는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고 그 어떤 종교적 신념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체험하게 됐다.
부산대 의과대학 시절에는 재학 중 미국의사자격(ECFMG) 시험에 합격해 유학의 길이 열렸다. 미국 유학은 첫째 선진국 의학을 깊이 있게 공부해 실력과 인격을 갖춘 명의가 되겠다는 꿈과 둘째 가난에서 해방되겠다는 꿈을 이룰 발판이었다. 하지만 나는 유학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처한 환경이 나를 놓아주지 못했는데 이 또한 생애 큰 전환점이 됐다.
하나님께서는 젊은 날 내 유학의 꿈을 포기하게 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두 아들을 통해 이루게 하셨다. 의학을 전공한 첫째 아들은 미국 댈러스의 바이블스쿨 CFNI(Christ For the Nations Institute)에서 신학도 공부했으며, 둘째 아들은 펜실베이니아주립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생애 마지막 전환점은 2016년 병원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것이었다. 당시 샘병원 개원 50주년을 앞두고 새로운 50년을 향해 다시 신들메를 고쳐 매고 허리를 동이며 출발을 독려하기 위해 다음세대에게 바통을 넘기고 병원 수련원인 경기도 평택 진위면 은산리로 들어오게 됐다.
***[역경의 열매] 이상택 (25·끝) 세상은 모두 하나님의 것… “구원의 믿음 가져야”
애초부터 가진 것 없이 태어난 인생
생명도 삶의 자리도 다 주님이 마련
영혼 구원 받아 영원한 생명 얻어야
효산 이상택 박사가 지난 5월 경기도 평택 진위면 은산리 자택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83년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우리의 육신이 잠시 이 땅에 묻혀 쉬는 것은 별반 큰 의미가 없다. 중요한 문제는 영혼의 구원이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일생을 두고 추구할 것은 바로 구원의 문제임을 요즘 많이 깨닫고 있다. 성경이 증언하는 대로 우리 주님께서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날 것이다.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주님을 영접하여 우리가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이다.(살전 4:16)
정말이지 우리는 애초부터 가지고 온 것이 없다. 생명도 삶의 자리도 다 하나님이 마련해 주셨다. 관리자로 불러 주셨고 청지기로 써 주셨다. 욥이 고난 중에 고백한 대로 내 것은 하나도 없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그러고 보니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라고 하신다. 우리 신앙의 3대 덕목이 믿음 소망 사랑이라고 사도 바울은 증언했다. 구원의 믿음을 가지라고 가르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듯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신다. 이 험한 세상 풍조에 흔들리는 배가 되지 말고 하나님께 소망의 닻을 든든히 두라고 가르치신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5)
나는 아내와 함께 아름다운 샘가족을 만들기 위해 애써 왔다. 그러나 허물과 부족함 많은 나를 감싸주고, 지금까지 고락을 함께한 샘가족 여러분께 나의 사랑을 제대로 고백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때로는 내 마음만 귀히 여기고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에게 상처를 준 일도 있었다. 회개한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으니(벧전 4:8) 지난날 나의 허물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용납해 주시기 바란다. 언제나 내 마음에는 “고마워” “수고했네” “사랑해”라는 말 한마디가 남아 있음을 고백하고 싶다.
2011년부터는 매월 둘째 주 화요일 안양 과천 군포 의왕의 기관장 기업인 직능단체 대표 등이 함께 모여 지역과 국가의 안녕, 편안을 위해 기도하는 모임인 안양지역조찬기도회에서 대표회장으로 쓰임 받고 있다. 모두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일이다.
오늘도 은산리 새벽 산이 운무 속에서 밝은 얼굴을 내민다. 나와 동행하는 그분이 계시기에 발걸음도 가볍다. 역경의 열매를 읽어주신 독자들께 샘병원의 인사말인 “사랑합니다”로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지금 이곳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