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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계룡산
2024년 11월 17일(일요일)
산행코스 : 상신마을(08:50) - 큰골삼거리(09:30) - 남매탑(10:00) - 삼불봉(10:20) - 관음봉(11:05) - 연천봉(11:45) - 갑사(12:55) - 주차장(13:25)
산행거리 : 12.3km
공주 상신리 당간 지주(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4호)
계룡산은 특이하게 동서남북에 모두 사찰이 있는 곳 입니다.
동쪽에 동학사, 서쪽에 갑사, 남쪽에 신원사, 북쪽에 구룡사
이 가운데 가장 큰 절이 구룡사였습니다.
당간의 크기만 봐도 당시 사세를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절이 망한 이유는 계속 불이 나서 그랬다고 합니다.
일설에는 이곳 상신리가 토속신앙의 기가 강한 곳이라서 그렇다고도 합니다.
상신탐방지원센터
관음봉 5.3km, 남매탑 3.1km, 삼불봉 3.7km
계룡 08-01 이정목 해발167m
계룡 08-02 이정목 해발205m
금잔디고개 2.2km, 남매탑 2.4km, 상신탐방지원센터 0.8km
용산구곡 제9곡 신룡연(神龍淵)
"용이 승천하여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구룡조천(九龍朝天)
용산구곡(龍山九曲)은 '계룡산 상신계곡'에 있습니다.
한 은사(隱士)는 자신의 간절한 소망을, 용(龍)이 승천하는 이야기형식을 빌어 아홉군데 바위에 새겼습니다.
그 은사는 취음(翠陰) 권중면(權重冕) 선생(1856~1936)이고, 간절한 소망은 '조국의 광복'입니다.
구한말 벼슬생활을 했던 취음 선생은 회갑을 맞은 1916년 봄, 망국의 한을 품고 상신계곡에 은거하며 비분(悲憤)을 삭혔습니다.
돌아가시기 4년전인 1932년 8월에 아드님의 도움을 받아 그 한(恨)을, 그 비분을 바위에 아로새겼습니다.
용산구곡(龍山九曲)은 구곡의 설정 주제를 용으로 삼은 점이 특징입니다.
용이 숨어있다가 승천할 때까지 이야기 전개를 통해 국권을 강탈당한 조선인의 국권회복 의지와 염원을 자연과 소통하는 방식으로 이루고자 한 것으로 보입니다.
계룡산 상신계곡에 은거해 수도하던 용이 비로소 때를 만나 여의주를 물고 승천함을 조국이 독립하고 번영하는 것으로 상징화시켜 전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제1곡 심룡문(尋龍門) : 용을 찾는 문
제2곡 은룡담(隱龍潭) : 용이 숨어 있는 못
제3곡 와룡강(臥龍岡) : 용이 수련하는 곳
제4곡 유룡대(遊龍臺) : 용이 수련하다 쉬면서 노니는 곳
제5곡 황룡암(黃龍岩) : 용이 공부가 무르익어 여의주를 얻는 바위
제6곡 현룡소(見龍沼) : 용이 세상 이치를 보는 능력을 얻어 모습을 나타내는 곳
제7곡 운룡택(雲龍澤) : 용이 구름을 만나 하늘로 오를 준비를 하는 못
제8곡 비룡추(飛龍湫) :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곳
제9곡 신룡연(神龍淵) : 용이 승천해 신이 된 못으로 구곡의 위치와 명칭을 정했습니다.
계룡 08-04 이정목 해발 365m
큰골삼거리
남매탑 1.4km, 상신 1.8km, 금잔디고개 1.2km
계룡 08-05 이정목 해발 376m
계룡 08-06 이정목 해발 576m
큰배재
동학사주차장 2.8km, 상신탐방지원센터 2.6km, 남매탑 0.4km
남매탑고개(590m)
동학사주차장 3.0km, 남매탑 0.2km
계룡 02-11 이정목 해발 595m
동학사 갈림길
동학사 1.7km, 천정탐방지원센터 2.8km, 남매탑
남매탑(男妹塔)
남매탑(男妹塔)은 계룡산에 있는 두 개의 탑으로 동학사에서 갑사로 넘어가는 연천봉 중턱에 있는 상원암 근처 해발 615m 지점(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산18번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곳은 계룡 팔경중 제팔경인 '오뉘탑의 명월'로 꼽힐 만큼 풍광이 뛰어난 곳입니다.
남매탑은 충남 지방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곳에 청량사가 있었다하여 청량사지쌍탑이라고도 불립니다. 5층 석탑은 보물 제128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7층 석탑은 보물 제128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청량사는 임진왜란때 병화로 전각이 모두 소실되었고, 이 탑만 남게 되었다고 합니다. 일명 남매탑 또는 오뉘탑이라 부르기도 하고 이 2기의 석탑들은 1950년대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61년에 복원하였습니다. 탑을 쌓은 돌들은 계룡산 일대의 존재하는 화강암류로 담홍색 흑운모화강암입니다.
남매탑은 통신신라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의 연구자들은 12세기경에 건립되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두 탑은 백제계 양식을 가진 탑으로 5층석탑은 정림사지석탑을 모방하였고, 7층석탑은 미륵사지석탑을 모방하였습니다.
남매탑(男妹塔)
좌측 공주 청량사지 오층석탑(보물 제1284호), 우측 공주 청량사지 칠층석탑(보물 제1285호)
남매탑에는 탑이 세워진 내력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신라 성덕왕 때 상원조사가 이곳에 암자를 짓고 불공을 드리고 있는데 호랑이가 찾아와 입을 벌리고 우는 소리를 내었습니다. 스님은 호랑이의 목에 걸려 있는 큰 뼈다귀를 빼주었는데, 호랑이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사라져버렸습니다. 얼마 후 호랑이가 스님을 태우고 어디론가 달려갔는데 거기에 실신한 처녀가 있었습니다. 스님은 그 처녀를 암자로 데리고 와서 간호를 하였습니다. 얼마 후 정신이 든 처녀는 자신이 상주에 사는 임진사의 딸인데 혼인날에 호랑이가 나타나 그만 기절을 하였는데 이 곳까지 왔다고 하였습니다.
스님이 호랑이와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자 처녀는 부처님이 맺어준 인연이라고 하며 부부의 연을 맺기를 청하며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상원조사는 흔들리지 않고 함께 수도에 정진하자고 하며 거절하였습니다. 그 후 스님과 처녀는 의남매를 맺고 불도를 닦으며 일생을 보냈는데 후에 상원조사의 제자 회의화상이 두 개의 불탑을 세워 그 뜻을 기렸고, 사람들이 그 탑을 오뉘탑이라고 불렀습니다.
상원암
상원암
정면에 걸려있는 상원암(上元庵) 편액
측면에 걸려있는 상원암(上元庵) 편액
戊寅 冬 如初居士(무인 동 여초거사 1998년) 무인년(1988) 겨울 여초 김응현(如初 金膺顯 1927~2007)의 글씨입니다.
삼불봉 갈림길
삼불봉 0.5km, 갑사 3.0km, 동학사 1.7km, 천정탐방지원센터 2.8km, 금잔디고개 0.7km, 상신탐방지원센터 3.2km
계룡 01-07 이정목 해발 627m
삼불봉고개
남매탑 0.3km, 갑사 2.7km, 금잔디고개 0.4km, 관음봉 1.8km, 삼불봉 0.2km
계룡 01-08 이정목 해발726m
삼불봉을 향하여 올라가던 도중 바라본 장군봉 뒤로 우산봉, 신성봉, 갑화산
삼불봉(775m)
삼불봉에서 바라본 관음봉 방향 파노라마
천황봉, 쌀개봉
관음봉, 문필봉, 연천봉과 우측 계룡저수지
삼불봉에서 바라본 광덕산 방향 파노라마
오서산 방향
당겨본 보령 오서산과 그 앞에 칠갑산
광덕산 방향
당겨본 광덕산, 망경산
우측 나무 뒤로 천안 흑석산
당겨본 흑석산, 성거산, 위례산
관음봉 1.3km, 금잔디고개 0.4km
뒤돌아본 좌측 삼불봉
부처님 세 분이 서 있는 형상이라서 삼불봉이라는 이름이 붙은 봉우리인데 계룡산 주능선을 조망하기에 가장 좋은 곳입니다.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황적봉 방향 파노라마
삼불봉
당겨본 신선봉과 그 뒤로 좌측 문장대, 속리산 천황봉과 우측 보은 국사봉, 노성산
황적봉
당겨본 서대산
천황봉
당겨본 대둔산
계룡산 주봉 천황봉과 닭벼슬 능선
당겨본 천황봉, 쌀개봉
계룡 07-05 이정목 해발768m
천황봉, 쌀개봉, 관음봉, 문필봉, 연천봉
뒤돌아본 삼불봉
갑사 방향
관음봉 1.0km, 삼불봉 0.6km
관음봉 0.8km, 삼불봉 0.8km
계룡 07-03 이정목 해발 715m
자연성릉의 중간 지점을 통과합니다.
가야할 관음봉, 문필봉, 연천봉
뒤돌아본 삼불봉
천황봉, 쌀개봉, 관음봉, 문필봉, 연천봉
관음봉으로 이어지는 자연성릉
자연성릉(自然城陵)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된 바위 성벽이 눈 앞에 나타났습니다.
정면으로 보이는 바위 절벽이 이름 그대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성벽처럼 생겼습니다.
동학사와 멀리 보이는 대전 유성 시가지
자연이 만든 성벽 위를 따라 이어지는 자연성릉 등산로
뒤돌아본 지나온 삼불봉
관음봉으로 올라가는 긴 계단이 보입니다.
당겨본 관음봉
계룡 07-01 이정목 해발 692m
관음봉으로 오르는 급경사 데크계단
관음봉 오르는 길에 바라본 좌측 자연성릉 우측 쌀개봉 파노라마
수정봉, 금잔디고개, 삼불봉
금잔디고개, 삼불봉, 장군봉, 갑하산, 노적봉, 향적봉, 금수봉, 백운봉과 중앙에 동학사
자연 암릉으로 이루어진 성곽이라 하여 이름 붙여진 '자연 성릉'이 길게 펼쳐집니다.
우측으로 길게 뻗어 있는 능선은 도덕봉, 향적봉과 우측으로 금수봉, 백운봉, 관암산이 보입니다.
쌀개봉
관음봉 정상이 코 앞에 다가 섰습니다.
관음봉 팔각정
관음봉 정상
관음봉 정상에서 바라본 신원사 방향 파노라마
천황봉, 향적산
향적봉, 노성산
연천봉, 문필봉
동학사
관음봉고개(계룡산국립공원 긴급재난 안전쉼터)
연첩봉 1.0km, 동학사 2.3km, 관음봉 0.1km
계룡 04-06 이정목 해발 706m
좌측 연천봉(740m), 우측 문필봉(756m)
연천봉 0.7km, 관음봉 0.4km
계룡 04-05 이정목 해발 677m
연천봉고개
신원사 2.7km, 갑사 2.0km, 등운암 0.1km, 연천봉 0.2km
계룡 04-04 이정목 해발672m
등운암 대웅전
등운암에서 바라본 계룡산 천황봉
산신각
보광원 1.8km, 등운암, 연천봉 0.2km
연천봉 정상이 보입니다.
연천봉 정상에서 바라본 계룡산 천황봉
연천봉에서 바라본 관음봉 방향 파노라마
수정봉, 금잔디고개, 삼불봉
삼불봉, 문필봉, 닭벼슬능선
쌀개봉, 천황봉, 머리봉
계룡산의 정상 천황봉(846.5m)
군사보호지역이라 비탐방지역입니다.
당겨본 대둔산, 운장산
연천봉 석각
조선이 건국된후 482년만에 망한다는 연천봉 각자
방백마각, 구혹화생 (方百馬角 口惑禾生)
헬기장과 문필봉
연천봉 0.6km, 갑사 1.6km
계룡 04-03 이정목 해발490m
계룡 04-02 이정목 해발420m
갑사 0.9km, 연천봉 1.3km
계룡 04-01 이정목 해발375m
관음봉, 2.4km, 연천봉 1.7km, 등운암 1.7km
대자암에서 내려오는 임도
갑사 0.3km, 연천봉 1.9km
연천봉 2.2km, 대자암 0.7km, 금잔디고개 2.2km, 신흥암(천진보탑) 1.2km
용문폭포
약사전 옆의 계곡은 친일민족반역자 벽수 윤덕영이 만든 명월암이 보입니다.
윤덕영의 친필 "명월암(明月潭)"
윤덕영은 조선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이며 한일병합에 적극적으로 나선 인물입니다.
갑사구곡 (甲寺九曲)을 남긴 이가 취음 선생과 동시대에 살았던, 대표적 친일파의 한 사람인 간옹 윤덕영(1873~1940)입니다.
그는 순종비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로, 1910년 조선이 국권강탈을 당할때 순종에게 옥새날인을 강요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그 공로로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고 또한 적지않은 포상금을 받아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며 여생을 보냈습니다.
윤덕영은 갑사계곡에 '간성장(艮成莊)'이란 별장을 지어놓고 유유자적하며 말년을 보냈다. 그리고 '갑사구곡 '을 남겼습니다.
제1곡 용유소(龍遊沼) : 용이 노니는 소(沼)
제2곡 이일천(二一川) : 수정봉과 연천봉 발원, 계곡물의 합수지점
제3곡 백룡강(白龍剛) : 여름 우기에 물보라가 마치 흰 이 꿈틀대는 곳과 같은 곳
제4곡 달문택(達門澤) : 연못으로 배를 띄워놓고 퓽류를 즐긴 곳
제5곡 금계암(金谿嵒) : 금계포란(金鷄抱卵)또는 천조(天鳥)인 닭의 새벽알림
제6곡 명월담(明月潭) : 달 밝은 밤 잔잔한 물위에 비치는 달빛이 마치 하늘이 물속에 있는 듯한 절경
제7곡 계명암(鷄鳴巖) : 계룡산이 처음 열릴 때 산 속에서 닭이 날개짓을 하며 울었다는 바위
제8곡 용문폭(龍門瀑) : 자연폭포로 약10m정도의 낙수광경이 절경인 폭포
제9곡 수정봉(水晶峰) : 산봉이 수정처럼 맑고 깨끗한 백색을 띈 암석으로 피라미드형의 바위산
갑사 석조약사여래입상 (石造藥師如來立像)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0호)
둥근 얼굴에 육계는 소발로 이목구비는 마멸되어 잘 알 수 없지만 부드러운 인상입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통견(通肩)은 어깨에서부터 발까지 U자주름으로 늘어져 있습니다. 양 손을 들어 올렸는데, 한 손에는 약합을 들고 있습니다.
갑사 석조약사여래입상은 고려시대에 조성되었으며 갑사 중사자암에 있었던 것을 현재 위치로 이안하였다고 합니다.
가을이면 '추 갑사'라 해서 아름다운 갑사의 가을을 구경하려고 많은 사람들이 옵니다.
관음전
관음보살을 모신 곳입니다.
관음전에는 관세음보살을 주존으로 봉안했고, 그 배후 벽면에는 1,000구 이상의 작은 소원불을 함께 봉안했습니다.
이곳에는 무수히 많은 신도들의 성원이 함께 합니다.
관음보살
삼성각 (三聖閣)
삼성각은 대웅전 우측 자연석 기단 위에 자리하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 지붕입니다. 외부는 정면 여닫이문으로 처리하고 공포는 이익공 양식으로 내부는 우물 마루 바닥 위에 불단을 설치하여 칠성 탱화 좌우로 산신 탱화와 독성 탱화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중앙에는 칠성여래, 왼쪽에는 독성, 오른쪽에는 산신이 그려진 탱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칠성은 북두칠성을 말하는데, 별나라의 주군(主君)으로 인간의 복과 수명을 담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나반존자(那畔尊者)라고도 불리는 독성은 십이인연(十二因緣)의 이치를 홀로 깨달아서 성인의 위치에 올라 말세 중생에게 복을 내린다고 합니다. 또, 사찰에 따라서는 독성과 산신과 용왕을 봉안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불교 밖에서 유입된 신들로서, 하근기(下根機) 중생을 위한 방편으로 채택되었기 때문에, 그 건물의 이름을 전(殿)이라 하지 않고 각(閣)으로 일컬은 것입니다.
갑사 대웅전(보물제2120호)
갑사 대웅전은 조선시대 중기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는 건물입니다.
17세기 건축으로서 갑사 대웅전은 전환기 건축의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정면5칸, 측면3칸의 건축규모는 사례가 많지 않으며 8척, 12척 등 간단한 비례로 구성하였고, 맞배지붕에서 정면과 배면 공포의 형식이 동일하고 등간격의 배치를 하고 있습니다.
대웅전 주련(柱聯)
淨極光通達(정극광통달) 맑은 다한 빛 통달함이여
寂照含虛空(적조함허공) 고요한 저 허공 모두 비추네
却來觀世間(각내관세간) 마음의 번뇌를 물리친 후 세간을 관찰해 보니
猶如夢中事(유여몽중사) 모두가 꿈속의 일이로다
雖見諸根動(수견제근동) 비록 모든 근원의 움직임을 볼지라도(六根)
要以一機抽(요이일기추) 요컨대 단번에 뽑아버려라
대웅전(大雄殿) 편액
‘大’의 왼쪽 획이 ‘雄’의 ‘主’획과 겹쳤습니다.
또한 ‘雄’의 왼쪽 삐침을 크게 돌려 ‘殿’의 ‘又’획을 범접했습니다.
아주 드문 자법이자.쉽게 감상하기 힘든 대형 글씨로 보는 이를 압도합니다.
康熙八年己酉六月日書(강희8년기유6월서) 라는 款識(관지)로 보아 현종 10년(1669) 기유년 6월에 섰습니다.
글씨가 크고 획이 비대하기 때문인지 石蜂 韓濩(1543~1605)의 친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紀年인 己酉는 석봉이 죽은 지 65년이 지난 1671년 입니다.
석봉의 친필로 보기는 시대가 맞지 않습니다.
석봉의 친필이 아닐지라도 이만한 명필은 보기 쉽지 않습니다.
대웅전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과 사보살입상(보물제2076호)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중앙에 봉안하고 우측에 아미타불, 좌측에 약사불을 봉안하여 삼세불의 봉안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협시불로는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의 4대보살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삼존좌불과 사보살입상은 1617년(광해군 9)에 행사(幸思)등 9명의 조각승이 제작한 총 7존(尊)으로 구성된 대단위 작품이며, 특징은 진흙으로 만드 소조불상이며 평균 높이가 2.5m, 보상상은 평균 높이가 2m 이상으로 임진왜란 이후 조성된 7존불 중 현존 최대작(最大作)이자 최고작(最高作)이라고 합니다.
법당의 후불벽화인 '석가여래삼세불도' 역시 보물 1651호로 지정돼 있습니다.
중앙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은 높이 255cm로 둥근 얼굴에 백호가 조각되어 있고, 목에는 삼도가 있으며, 법의는 통견으로 소조좌불입니다.
석가여래상은 항마촉지인상(降魔觸地印像)을하고 있으며, 상호는 둥글며 양미간에 백호가 있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고, 법의는 통견(通絹)이며 가슴 부분이 벌어졌는데 조선시대 불상으로는 우수한 불상이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갑사 삼신불쾌불탱(甲寺 三身佛 掛佛幀) (국보 제298호)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석가와 노사나불 등 삼신불이 진리를 설법하고 있는 장면을 그린 괘불입니다.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던 대형 불교그림을 말합니다.
이 그림은 전체 1,270.4×887.6㎝ , 화면 1,082.4×844㎝의 크기로 전체적으로 상·중·하 3단 구도를 이루고 있습니다. 맨 윗부분에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상, 제자상, 금강역사상 등이 배치되어 있고, 가운데에는 비로자나불, 석가, 노사나불 등 삼신불이 묘사되어 있고, 맨 아래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상, 사천왕상, 사리불 등이 있습니다.
가운데 부분의 비로자나불은 등뒤로 광배를 가지고 있으며 둥근 얼굴에 두 어깨를 감싼 옷을 걸치고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싼 지권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큰 얼굴과 큼직한 손에 비해 몸은 다소 왜소하며 어깨에 비해 무릎 폭이 넓은 모습입니다. 비로자나불의 왼쪽에 있는 노사나불은 머리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두 손을 어깨까지 들어올려 설법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오른쪽의 석가불은 악귀를 물리친다는 뜻의 손모양인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습니다. 비로자나불과 석가불은 기둥처럼 솟은 특이한 머리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맨윗부분은 붉은 색의 두광을 가진 관음·세지보살과 십방제불, 나한 등이 화려한 빛깔의 구름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천상세계를 만들고 있습니다. 비교적으로 단순한 구성을 보이고 있는 맨아래부분은 사천왕과 문수보살·보현보살, 사리불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채색은 녹색, 홍색, 황색과 같은 중간 색조와 금으로 채색하여 화면 전체를 밝고 화려하게 나타내었습니다.
이 괘불은 효종 원년(1650)에 제작되었는데 중단의 삼신불을 크게 강조한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림에 괘불 조성에 필요한 많은 물품의 시주자를 적어놓고 있어 17세기 중반의 생활상과 사찰의 재정규모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갑사 강당(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5호)
강당은 승려들이 법문을 읽고 공부하던 건물입니다. 전통적으로 사찰을 세울 때에는 강당을 가장 뒤편에 두고 그 앞에 대웅전을 두는데, 갑사에서는 강당이 대웅전 앞에 있습니다.
강당 건물 보수 공사를 하면서 대들보에 쓰인 상량문이 발견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이건물은 원래 갑사의 정문이었다고 합니다.
정면 3칸(9.09m), 측면 3칸(3.94m)의 맞배지붕건물. 공포(栱包)는 다포식(多包式) 안팎 2출목(二出目)이다. 자연석 위에 덤벙주춧돌을 배열하고 그 위에 배흘림을 한 둥근 기둥을 세운 뒤 그 위에 창방(昌枋)을 짜올렸습니다.
건물 입구에는 기둥 사이 아래쪽에 머름중방을 설치하였으나 문설주에 단 문짝은 많이 변형되었습니다. 양 옆칸의 문미(門楣 : 창문의 위틀) 바로 위에는 교창(交窓 : 낮은 창)이 있습니다. 가구(架構)는 평방 위에 2출목으로 공포를 짜올려 도리를 받치는 한편, 평주(平柱) 사이에 대들보를 걸치고 기둥 4개를 세워 이를 받쳤습니다.
대들보 위쪽의 천장은 판장천장(板張天障)이다. 공포의 모양은 외부 첨차의 쇠서[牛舌]가 비교적 곧바르고, 내부 살미첨차는 운궁형(雲宮形)으로 만들어 연꽃을 조각하였습니다.
광해군 6년(1614)에 처음 지어진 후 정조22년(1798)과 고종 27년에(1890)에 보수하였습니다.
계룡갑사(雞龍甲寺) 편액
강당 현판을 보면 끝에 "정해국추 절도사 홍재희(丁亥菊秋 節度使 洪在羲)"라고 쓰여 있는데, 정해년이면 고종 24년(1887년)이며, 기년 뒤에 쓴 국추는 9월을 의미하며(季秋 暮秋 咏月)등과 같은 뜻입니다.
정해년 가을(고종 24년 9월)에 충청도 지방의 병마절도사 홍재희가 쓴 글씨입니다.
강당의 "계룡갑사(雞龍甲寺)"로 쓰여 있는데, 앞 글씨가 계(鷄)가 아닌 계(雞)로 쓰여 있는 것이 보이는데, 혼용된다고 하면 뜻은 모두 "닭계"로 같습니다.
갑사 동종 종각
갑사 동종(보물 제478호)
갑사 동종(甲寺 銅鐘)은 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조선 선조 17년(1584)에 만들어졌습니다. 동종이란 청동으로 만든 종을 말하며, 종의 표면에는 지장보살의 모습과 종의 내력을 적은 글이 있는데, 이를 보면 1583년에 북방 오랑캐가 난을 일으켜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 있는 사찰의 종을 모아 무기로 만든 탓에 이듬해 갑사에서 철8천근을 들여 다시 종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또 여기에 갑사사(甲士寺) 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갑사가 과거에 갑사사로 불렸음을 말해줍니다.
갑사 동종은 종의 가장 위쪽에 있는 용의 모습을 한 고리인 용뉴가 잘 남아 있는 것이 특징이며, 현재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종의 상태가 양호합니다.
상대 바로 밑에 있는 4개의 유곽(乳廓) 내부에는 각각 9개의 유두(乳頭)가 3열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종신에는 4개의 당좌(撞座)와 그 당좌 사이에 석장(錫杖 : 중이 짚는 지팡이)을 쥐고 구름 위에 서 있는 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이 겉면보다 도드라지게 표현되었습니다. 종의 하단에서 떨어진 위쪽에 태조 두 줄을 돌려 마련한 하대에는 보상화문(寶相華文)이 역시 도드라지게 표현되었으며, 하단에는 태조 한 줄을 돌렸습니다.
유곽과 승상(僧像) 사이의 한 곳에 양주종대(陽鑄縱帶)를 마련하고, 그 위에 사분(四分)으로 양각한 명문(銘文)은 이 종의 주조 내력과 연대, 소요된 쇠의 근량을 밝히고, 당시 주조에 쓰였던 물품의 시주자를 적어놓았습니다.
크기는 높이 131cm, 입지름 91cm로 전체적으로 어깨부터 중간까지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중간 지점부터 입 부분까지 직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종 꼭대기에는 음통이 없고, 2마리 용이 고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1583년에 주조된 동종은 일제강점기에 쇠 공출로 제공되었다가 8 · 15광복 후 인천에서 다시 찾아온 것입니다.
(판독문: 정병삼)
公州 岬寺鐘記
時維萬曆十一年七月爲以▨▨大熾兵亂大起因以得抑下三道寺刹器鐵盡取納
國兵器火砲鑄鋪矣是以 ▨無人皆嘆曰不小大刹寺朝暮爲
主上祝壽處時有無顔卽勸甲申夏巳月日公山東鷄龍山岬士寺大鐘新鑄成鐵八
千斤萬世流傳
(해석문: 정병삼)
공주 갑사 종기
때는 만력(萬曆) 11년(선조 16, 1583년) 7월에 북방 오랑캐의 전란이 크게 일어나 그로 인해 충청 경상 전라 하삼도 사찰의 그릇과 쇠붙이를 모두 가져다가 나라에 바쳐 병기와 화포를 주조하도록 하였다. 이런 까닭에 갑자기 없어졌다. 사람들이 모두 탄식해 말하기를 “크고 작은 절을 가리지 않고 절이란 아침 저녁으로 임금을 위해 장수를 기도하는 곳인데 때로 낯이 없이 권하는 일이 있었다.”고 하였다. 갑신년(선조 17, 1584년) 여름 4월 일에 공산(公山) 동쪽의 계룡산(鷄龍山) 갑사사(岬士寺, 충남 공주시 계룡산에 있는 절. 갑사(岬寺))에서 대종을 새로 주조하여 이루었으니 철이 8천근이다. 만세토록 전해 가리라.
정상에는 음통(音筒)이 없이 두 마리의 용으로 고리를 만든 다음, 종의 어깨 부분에 삼각형에 가까운 입상(立狀)의 물결 모양 무늬를 돌렸습니다. 상대(上帶)에는 어깨 부분 밑에 하대와 비슷한 태조(太彫) 한 줄이 구획되고 원권(圓卷)내에 겉면보다 약간 도드라지게 표현된 범자(梵字) 31자가 일렬로 배치되었습니다.
공우탑(갑사 중건에 도움을 준 황소를 기리는 탑)
공우탑은 소의 공적을 기린다는 의미로, 갑사 공우탑은 조선 후기 갑사의 중건 과정에 얽힌 전설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갑사는 나라에서 토지를 내려줄 만큼 크고 중요한 절이었으나 1597년 정유재란으로 건물 몇채만 남게 되었습니다.
선조 37년(1604)에 나라의 지원을 받아 대웅전과 진해당 등을 다시 세웠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당시 주지 스님의 꿈에 황소가 나타나 절을 지어 주겠다고 약속했고, 그날 이후 소 한마리가 나타나 매일 공사에 필요한 재목을 등에 싣고 왔습니다.
그러나 갑사가 완공되는 날 갑자기 소가 죽었고, 이에 스님들은 갑사 중건에 도움을 준 소의 공을 기리고자 이 탑을 세운 것으로 전해집니다.
공우탑
1층 탑신에 있는 臥塔起立 人道偶合 三兮乙乙 厥功届甲(와탑기립 인도우합 삼혜을을 궐공계간)은 간신 윤덕영이 새긴 것으로 "누운 탑을 일으켜 세우니 사람들 방책에 우연히도 부합된다네, 세번씩이나 힘들었으니 그 공덕이 으뜸이라네"라는 의미로 어쩌면 공우탑을 자신의 공적탑으로 만들었습니다.
대적전으로 가는 개울옆에 있는 간성장(艮成莊) 입니다.
간성장은 숙종황제의 국구(부원군)인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형으로 아우를 대신하여 척세를 농단하던 윤덕영(1873-1940)의 별장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는 한일합방 당시 매국의 대가로 일제에 의해 자작의 봉작을 받던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매국노입니다.
간성장은 나중에 공주 출신으로 국회의원을 지낸 박충식(1903~1966)의 별장으로 사용했으며, 그 후 한동안 전통찻집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제5곡 금계암(金谿嵒)
대적전 가는 길에 있는 "금계암" 표석, 갑사가 금계포란형 지형이고 이곳이 가장 핵심이 되는 곳이라 합니다.
이 표석 역시 친일 반민족 행위자 "윤덕영"의 글씨입니다.
대적전 (大寂殿)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6호)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에 팔작지붕으로 다포식 건물입니다.
높이 60cm의 장대석 으로 쌓은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돌 위에 둥근 홈을 새겨 주좌를 표현하였습니다. 기둥 위에는 창방과 평방을 십자모양으로 짜맞추고 그 위로 건물 앞쪽에서는 내3출목, 외2출목의 공포를 짜올렸는데 건물 뒤쪽에서는 공포를 생략하였습니다. 창호는 띠살창으로 어칸은 4분합의 문을 달았고 그 위쪽에 공간포를 배열하였습니다. 협칸과 옆면 앞칸에는 2분합의 문을 달았습니다.
단청은 특이하여 천정에 연꽃무늬와 태극선 모양의 파문을 대들보에 물고기, 앞쪽 창방에는 신선도, 평방에는 개와 고양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대적전 주련
太一眞如大覺空(태일진여대각공) 천지본원 진여세계 공도리를 대각하니
法身卽寂化身雄(법신즉적화신웅) 법신은 공적하고 화신은 웅장해라
金軀艮佛眉閒白(금구간불미간백) 금빛 몸 우리 부처 미간의 백옥호로
長照一元三甲中(장조일원삼갑중) 길이길이 일원삼갑 가운데를 비추시네.
대적전의 편액에 '道光六年四月 牧岩書(도광육년사월 목암서)'라고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순조26년(1826)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구 유형문화재 제228호)
공주 갑사 대적전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은 본존인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로 이루어져 있는 불상입니다.
갑사는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1657년(효종 5)을 전후로 다시 고쳐 지었는데, 삼존불은 이때 함께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삼존불의 넓적하면서도 편평한 얼굴 표현과 균형 잡힌 몸, 협시보살이 옷을 입고 있는 착의법이 서로 다르게 표현된 점 등은 17세기 중반 충청도 지역에서 주로 만들어진 불상의 특징입니다.
목조석가여래삼존불은 17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높이 142cm, 폭 108cm입니다.
공주 갑사 승탑(보물 제257호)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높이 2.05m. 현재 갑사 중심부에서 벗어나 계곡을 건너 남쪽 경내에 있으나 본래는 갑사의 뒤쪽 계룡산중에 있었던 것이다. 원위치에 쓰러져 있던 것을 1917년 현위치로 옮겨 세웠습니다.
갑사 부도는 전체 높이가 205cm로 고려시대의 것으로 전하며 통일신라시대의 부도양식을 겸비하고 있습니다.
본래 위치는 갑사의 중사자암에 위치했던 것을 현 대적전 앞으로 이전하였다고 전합니다.
구조는 기본형을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부에서는 특이한 수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8각의 높직한 지대석 위에 3층으로 구분되는 지대석이 놓였는데, 하층이 넓고 상층은 차차 줄어들었습니다.
하단에는 8각의 형태를 지키면서 각 귀퉁이마다 밑에서 연잎이 피어나는 모양을 하고, 각 면에는 한 구씩의 형태를 달리하는 사자를 조각하였는데 모두 원각(圓刻)에 가까운 대담한 수법을 보이고 있습니다.
상단에는 운룡문(雲龍文)을 입체적으로 조각하였는데 그 수법이 웅혼장려합니다. 그 상하단의 조각 안으로는 홈이 패어 있는데 특히 하단에는 홈의 물이 밖으로 빠지도록 장치되어 있습니다. 상단에는 그 홈의 중앙에서 한 단의 높은 8각 받침이 솟아 중대석(中臺石)을 받치게 되어 있습니다.
중대석은 거의 원에 가까운데 각 귀퉁이에 해당하는 위치에 꽃모양의 무늬가 튀어나왔고 그 사이에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이 돋을새김되었습니다. 상대석은 8각으로 밑에 두툼한 부연(副椽)이 있고 상면에는 32잎의 연꽃이 둘려 있으며 중앙에 2단의 굄이 있습니다.
탑신석(塔身石)도 8각으로 가는 주형(柱形)이 있고 전후 양면에는 문호형(門戶形)과 자물쇠가 새겨졌고, 그 좌우에는 사천왕입상(四天王立像)이 두드러지게 돋을새김되었습니다. 옥개(屋蓋)는 높이가 높은 데 비해서 넓이가 좁아 안정감을 잃었으나 표면과 뒷면의 조각들은 정교합니다.
옥개석 밑에는 여러 단의 받침을 중심으로 가는 연목(椽木 : 서까래)이 촘촘히 있고, 지붕 위 낙수면에는 굵은 우동(隅棟) 8조가 매우 급한 경사를 이루었고, 그 사이에 역시 가는 기왓골이 여러 줄 모각되었습니다.
상륜(相輪)은 지금 남은 것이 없고 새로 만들어 올려놓은 보주(寶珠)가 있을 뿐입니다. 전체적으로 조각들에 웅대한 기백이 넘쳐흐르며 각 부에 변화를 주어 장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부에 갈수록 조법(彫法)이 약해져서 옥개에 이르러 목조건물양식의 모각은 정교함을 지나 섬약에 흐른 점이 눈에 띈니다.
공주 갑사 철당간(보물 제256호)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는 철당간 15m, 지주 3m. 원위치에 철제당간에서 기단까지 모두 남아 있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기단은 단층으로 크고 길쭉한 두 장의 돌을 결구하여 만들었는데 장방형으로 되었습니다.
갑사 동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이 당간은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으로는 유일한 것입니다. 네면에 구름무늬를 새긴 기단위로 철당간을 높게 세우고 양옆에 당간지주를 세워 지탱하였습니다.
측면 사방은 상하에 굽을 돌려 정연한 규격을 보이는데, 좌우에는 2구씩의 안상(眼象)을, 앞면·뒷면에는 3구씩의 안상을 음각하였습니다. 윗면에는 아무런 조식도 없고, 양 지주 사이의 밑바닥 부분에는 당간을 받치는 간대(竿臺)가 있습니다.
윗면의 중심이 되는 이 부분의 형태는 원좌로서 그 주변에는 아무런 조각도 없습니다. 양 지주는 동서로 마주서 있는데, 마주보는 내측면과 외면, 그리고 앞뒤 측면에도 아무런 조각이 없는 소박한 지주입니다.
정상부의 윗면은 평평하고 외측면으로 접어드는 모서리는 모를 크게 죽여서 원만한 사분원을 이루고 있습니다. 당간을 고정시킨 간은 상부 한 곳에만 구멍을 뚫어 장치하였는데, 철제당간의 오절철통(五節鐵筒)을 굵은 철사로 세번 돌려서 고착시켰습니다.
철당간은 지름 50cm의 철통28개를 연결하였던 것이나, 고종35년(1899) 폭풍우에 벼락을 맞아 4절이 부러졌다고 하며 현재는 24절만 남아 있습니다.
지금도 윗면의 접착부분 두 곳에는 두 장의 돌을 결구시켰던 쇠못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춘마곡(春麻谷) 추갑사(秋甲寺)” 공주를 대표하는 두 사찰 중 마곡사는 봄에 초록 산 빛이 곱고, 갑사는 가을 단풍이 수려하니 지금 둘 중 하나를 고른다면 당연히 갑사입니다.
사천왕문
사천왕문(四天王門) 편액
壬午年 七月(임오년 칠월 2002년)에 쓴 글씨입니다.
북쪽 다문천왕은 비사문천이라고도 하며 항상 부처님의 도량을 지키면서 설법을 듣고, 왼손에는 비파를 들고 있으며 야차와 나찰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동쪽 지국천왕은 안민의 신으로서 선한 자에게 상을 내리고 악한자에게 벌을 주어 항상 인간과 국토를 보호하기 위한 천왕입니다. 왼손에는 칼을 쥐고 오른손바닥에는 보석을 올려놓고 있으면 건달바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남쪽 증장천왕은 자신의 위덕으로써 만물이 태어날 수 있는 덕을 베풀겠다는 서원을 세운 천왕입니다. 오른손은 용을 잡고 왼손은 용의 여의주를 들고 있습니다. 구반다등 무수한 귀신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서쪽 광목천왕은 잡어, 악안으로 불리는데, 이는 웅변으로 나쁜 이야기를 물리치거나 눈을 크게 부릅뜬 위엄으로 나쁜 것을 물리치기 때문입니다. 왼손에는 보탑고 오른손에는 삼지창을 들고 있고 용과 비사사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갑사탐방지원센터
계룡산 갑사(鷄龍山甲寺) 일주문
계룡산 갑사(鷄龍山甲寺) 일주문 편액
구당 여원구(丘堂 呂元九) 해서체로 戊寅之夏(무인지하 1988년 여름) 구당이라는 款識(관지)가 보입니다.
구당은 독실한 불교 신자로 예서와 해서의 대가이며, 대한민국 國璽(국새)를 印文(인문)한 전각가입니다.
갑사 초입에 당산목인 괴목대신(槐木大神)
주차장에서 바라본 계룡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