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1년 4월 18일(부활절 후 두 번째 주일)
출애굽기 5:1-14
구원이란 무엇인가?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who?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에리직톤’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금기를 어겨 신의 저주를 받는 사람입니다. 여신 시어리어스는 에리직톤에게 굶주림의 저주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무리 먹어도 배가 고프게 되었습니다.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채워지지 않아 결국 그는 가진 재산을 다 탕진하였고, 급기야는 자기의 딸을 팔았고, 결국 자기 살을 뜯어 먹다 죽고 말았습니다. 에리직톤에게 임했던 그 불같은, 끝없는, 어찌할 수 없는 욕망은 신의 징벌이었고, 죽음과 파멸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상한선을 모르고 치솟기만 하는 우리의 욕망이 어쩌면 이 시대에 내려진 징벌일지도 모릅니다. 가질 만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허기와 결핍을 느끼는 현대인들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주변에 보면, 자기가 가질 만큼 가졌으니 만족을 느낀다고 말하는 사람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집어넣는다 해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 공간이 우리 영혼 속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자리가 매 꿔지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진정으로 안식을 얻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출처: 이승수, 「사막은 샘을 품고 있다」(서울: 복 있는 사람, 2017); 「생명의 삶 플러스」(서울: 두란노, 2021년 4월호), p. 149에서 재인용.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던 모세는 즉각적으로 순종하지 못하고 무려 다섯 번에 걸쳐 하나님과 줄다리기를 하였습니다(출 3:11-4:17). 결국 모세는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형 아론과 함께 애굽 왕 바로를 찾아갔습니다.
본문 1절에서, 모세와 아론은 바로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의 이야기를 들었던 바로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2절).”
바로는 자신이 여호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광야로 보낼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모세와 아론은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했습니다. 자신들이 광야로 사흘 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기에 이를 허락해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모세와 아론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바로는 백성의 노역을 쉬게 할 수 없다며 그들의 간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말았습니다(4절). 이제 이 땅에 이스라엘 백성의 수가 많아졌는데, 모세와 아론이 그 백성들의 노역을 쉬게 하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감독하던 자들과 기록원들에게 명령을 내려 백성들의 노역을 가중시켰습니다. 바로는 그동안 벽돌에 쓸 짚을 공급해 주던 것을 중단하고, 이스라엘 백성들 스스로 짚을 줍게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게다가 그들이 전에 만들던 벽돌의 수효는 그대로 유지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것이 오히려 자신들의 고통을 가중시킨 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로는 한술 더 떠서 모세와 아론이 거짓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속이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애굽의 감독들은 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매일 주어진 할당량을 채우라고 압박하였습니다.
과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모세와 아론이 애굽 왕 바로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것이 문제였을까요? 괜히 바로의 심기를 건드려서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만 가중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선한 일을 하려다가 오히려 좋지 않은 결과를 낳았으니 모세와 아론의 마음이 얼마나 속상했을까요? 이럴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바로가 정신이 번쩍 들도록 그를 한 대만 때려주신다면 우리의 속이 얼마나 시원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문제의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와 관련하여 표면적인 많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에게 있어서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함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바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2절)”
여기서 ‘여호와를 알지 못한다.’고 말할 때, ‘알지 못하니’는 히브리어로 ‘로 야다’입니다. 이 말은 체험적이고 인격적인 앎을 갖지 못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애굽에는 많은 수의 신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으로 애굽을 치셨을 때, 그 재앙들은 애굽의 신들에 대한 심판이었습니다.
애굽에 있던 많은 신들 가운데 가장 높은 신은 애굽 왕 바로였습니다. 이미 바로 자신이 애굽에 평안과 번영을 주고 있는 현존하는 최고의 신인데, 그런 바로가 구지 노예처럼 부려먹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에게 관심을 기울이거나, 그 신의 요구를 들어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문제의 근원은 바로가 여호와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가 여호와를 알지 못했던 문제는 몇 가지 표면적인 문제들을 낳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대표적인 것들이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시켰고, 그로인해 인간을 상품화시키고 말았습니다.
우리 다함께 5절을 찾아서, 한 음성으로 읽겠습니다.
“바로가 또 이르되 이제 이 땅의 백성이 많아졌거늘 너희가 그들로 노역을 쉬게 하는도다 하고”
여기에서, “이 땅의 백성”이라는 표현은 ‘노동을 전담하는 백성’이라는 경멸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생명의 삶 플러스」, p. 143.). 바로의 눈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존중받아야 할 인간으로 보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만족과 이윤을 극대화시켜 줄 도구로 보였던 것입니다.
최고 통치자가 이런 논리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순간, 인간의 행복에 대한 관심보다는 인간을 도구화시키고,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할 것인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소위 인간이 상품화되는 비극적 현실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극은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지 못한 타락한 인간성에서부터 출발된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안식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거부합니다.
노동과 안식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려주신 소중한 선물이었습니다. 우리는 노동과 안식을 통해서 행복을 느끼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인간에게서 안식을 제거해 버렸습니다. 안식을 게으른 사람들의 사치처럼 여겨버린 것입니다. 심지어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게으르기 때문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자며 목소리를 높인다고 판단했습니다. 만약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동 강도를 높인다면, 아마 그들의 입에서 다시는 하나님께 제사 드리자는 허튼 소리가 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로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필요하다면 폭력까지도 허용해야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14절).
what's problem?
여러분은 이러한 바로의 말과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바로의 말에 동의할 수 있습니까?
저는 바로의 말에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하고 싶습니다.
첫째, 인간이 누구인가에 관한 반론입니다.
인간은 존엄합니다.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결코 도구화되거나 상품화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언제 행복할까요? 상대방으로부터 내가 존중받는다고 느낄 때 인간은 행복을 느낍니다. 만약 상대방을 존중하지 못하고, 수단화 시킬 때 누군가가 행복을 느낀다면 그것은 왜곡된 행복입니다.
바로는 힘의 논리에 이끌려 있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의 축적을 위한 수단으로 보았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복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바로의 내면에는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5절에서, 바로는 ‘이제 이 땅의 백성이 많아졌다’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많아졌다는 말은 그들에게도 힘이 생겼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바로가 이제 그들을 통제하지 않으면 언제라도 거꾸로 그들에게 통제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내재해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바로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두려움을 이야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출 1:9-10).”
바로가 가지고 있던 두려움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숫자와 강함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적절히 통제함으로서, 그들의 힘을 자신의 성공을 위한 기회로 삼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바로의 마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타락한 인간이 갖는 본성입니다.
만약 바로가 모세와 아론의 간청을 받아들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보내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오히려 바로를 축복해 주시고, 애굽 민족을 더욱 강대한 민족이 되게 하시지 않았을까요?
잘 생각해 보세요. 애굽 민족이 어떻게 강대국이 되었습니까? 이 때보다 약 430년 전으로 시간을 거꾸로 올라가다보면,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나라를 다스리고 있을 때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있으면서 애굽이 얼마나 부강한 나라가 되었습니까? 요셉은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는 7년간의 큰 풍년의 때에 창고를 짓고 곡식을 모아 두었다가가, 이후에 전 지역에 임했던 7년간의 극심한 기근을 대비했습니다. 이 때 애굽에 쌀을 구하러 온 사람들에게 왕실이 대가를 받고 쌀을 나누어 주었을 것이고, 그 덕에 애굽 왕실은 큰 부를 축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요셉 한 사람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던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건졌고, 애굽 왕실은 엄청난 부를 축적했으니, 바로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받았던 은혜가 그만큼 크지 않았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 동안 애굽에 머물러 있었지만,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머물러 있는 것이 전혀 도움도 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더 큰 해만 입혔다면, 어떻게 그 오랜 시간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와서,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학대하고, 그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배만 채우려고 했던 것은 바로가 너무나 이기적이고 악하게 행동한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은혜를 악으로 갚았던 것입니다.
둘째, 노동과 안식에 관한 반론입니다.
노동은 신성한 것입니다. 노동이 신성한 이유는 노동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목적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창 2:15)”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신 후에, 그를 통해 에덴동산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습니다. 아담은 노동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된 세계를 보존할 사명을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만약 아담이 일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연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가 엉망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노동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소중한 사명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노동은 단지 먹고 살고, 부를 축적하기 위한 수단만은 아닌 것입니다. 그보다 더 고차원적인 의미가 인간의 노동에 들어가 있는 셈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노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와 보존 사역에 동참하는 보람을 느끼는 것입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사역하시는 한 여자 선교사님이 올 겨울을 한국에서 지내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글 제목은 “개발하는 것도 어렵지만 보존하는 것이 더 어렵다.”입니다.
집에서 밥하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빨래를 하다 보니 보존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알게 되었다. 밥을 해 먹여서 생명을 보전하는 일, 설거지 거리가 쌓이지 않고 싱크대가 비어 있도록 보존하는 일은 매일 휴가도 없이 해야 하는 일이다.
별로 특별한 활동을 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하루만 청소를 하지 않아도 집 안 여기저기에 먼지와 머리카락, 음식물 부스러기가 밟히고 굴러다닌다. 빨래는 세탁기가 하지만, 그것도 잊어버리고 있으면 얼마 안 가 입을 옷이 없다. 별 일 아닌 것 같아도 쓰레기를 분리수거하고, 냄새 나지 않도록 제 때에 버리는 것도 추운 겨울 귀찮지만 꼭 해야 할 일 중에 하나다.
안 하면 엄청 티가 나지만, 한다고 전혀 티가 나지 않는 일이 바로 보존하는 일이다. 티가 나지 않기 위해 하는 일이 보존하는 일이다. 이 보존을 잘 못 하고 개발만 죽어라 했다가 지구가 지금 온난화니, 공해니, 쓰레기니, 전염병이니,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최초에 주신 아름다운 파란 별 지구, 초록 별 지구를 잘 보살피고 아끼고 보존하는 일이, 지금 현재는 개발하는 일보다 더 시급할지도 모른다.
-출처: https://www.facebook.com/wonkyoung.cho.5/posts/3856249644408945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듣고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집에서 청소하고, 밥하고, 빨래하고, 쓰레기 분리수거 하는 일이 우리에게 큰 의미 없는 일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상적인 노동이 넓게 보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아름답게 보존하는 일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에는 안식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육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제칠 일째 되던 날에 안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이 피곤하셔서 칠 일째를 쉬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칠일 째 안식하신 것은 인간을 포함한 이 세상이 진정한 안식을 소망하기 원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엄밀히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제칠 일째 되던 날에 안식하신 것이 아니라, 안식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안식은 인간의 행복과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쉬면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일을 요구했던 것은 그들이 게으르기 때문이라며 비난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과연 게으름의 표시일까요? 우리는 시간이 남고, 할 일이 없어서 교회당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까?
오히려 우리가 주일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하는 일입니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와 보존사역에 동참할 뿐만 아니라, 인간은 안식을 통해서도 그것들에 동참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바로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게으르기 때문이라고 비난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을 인격적이고, 체험적으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했던 말이었습니다.
what?
자, 그렇다면 과연 구원이란 무엇일까요?
첫째로, 구원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바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보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절기를 지키고, 제사를 지내야만 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바로에게 보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보내라고 말씀하셨던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려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여호와이십니다(1절). 여호와가 누구입니까? 여호와는 언약을 맺으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출애굽기 6장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여호와이니라(출 6:2).”라고 자신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가나안 땅을 주기로 언약하셨습니다(출 6:3-4).
그리고 하나님은 애굽 사람이 종으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듣고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출 6:5).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빼내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6:7).
‘여호와’는 약속을 맺으시고, 기억하시고, 이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여호와’란 이름 속에는 이스라엘 백성과의 특별한 관계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약속은 혼자 맺는 것이 아니고, 약속을 맺는 당사자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켜 “내 백성”이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그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결국 구원은 우리가 ‘언약의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또한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야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구원은 세속적인 가치관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 구원의 출발점이라면, 하나님께서 세속적인 가치관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는 것은 구원의 목표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바로에게 “내 백성을 보내라(1절).”고 선포하셨습니다. ‘보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샬라흐’입니다. 이 말은 ‘해방하다, 놓아주다’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은 이 세상의 권력을 향해 하나님 백성의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바로에게 이스라엘은 애굽을 위한 노예였고, 그의 소유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 백성이요 자유인들입니다. 때문에 이 세상이 하나님 백성을 억압할 수 없습니다.
-출처: 「생명의 삶」(서울: 두란노, 2021년 4월호), p. 97에서 인용.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바로, 그리고 그의 삶에서 드러났던 인간의 존엄성 상실과 인간의 상품화, 노동과 안식에 관한 왜곡된 시각과 같은 문제들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문제들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세속적인 가치관들로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길 원하십니다.
혹시 어떤 분들은 다음과 같이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애굽의 학대로부터 우리를 해방해 주신다는 이야기지요? 거 좋은 이야기네요. 그런데 그 다음은요? 그 다음은 어떻게 되지요?”
참 좋은 질문입니다. 여러분,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요? 성경대로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탈출한 후, 광야로 들어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3절). 그럼 여러분이 이렇게 반문할 수 있을 겁니다. “하루 종일, 일 년 내내, 아니 평생 제사만 드린다고요? 혹시 다른 것은 없나요?” 어떤 분이 저에게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 천국에 가서는 일도 안하고 매일 예배만 드린다면서요? 쉽지 않겠는 걸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애굽에서의 삶의 특징과 광야에서의 삶의 특징이 확연히 대조가 되고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바로를 대표하는 애굽에서의 삶의 특징은 자기중심적인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의 삶의 특징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입니다.
과연 예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애굽에서의 삶의 주인은 철저히 자기 자신입니다. 때문에 다른 사람을 수단화시키고, 안식을 부정합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삶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이유는 하나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구원은 ‘주어 바꾸기’입니다. 이는 ‘나의 삶의 주인이 누구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구원은 세속적인 가치관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킬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매일, 매순간, 하나님을 나의 삶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삶이 구원입니다. 때문에 구원받은 자의 삶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입니다. 예배는 일주일에 한 번 예배당에 모여서 드려지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나의 삶 속에서 드려져야 합니다.
how?
그렇다면 구원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제가 끝으로 여러분에게 이야기를 하나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인데 오늘 하나님이 나를 너희 손에 붙였으니 죽이든지 살리든지 너희 뜻대로 해라!” 파푸아뉴기니의 고산 정글에서 사역하는 우리의 제자 발루스 세데오가 부족 전쟁 중에 사로잡혔을 때 외친 절규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적이 화살을 내려놓더니 “어서 가라!”라며 놓아주었다고 합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발루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를 때면 눈에 눈물이 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한 형제들은 낮에도 캄캄한 움막에 살며, 고구마와 ‘차코’라는 야생풀만을 먹습니다. 주위 환경도 힘듭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음의 공포에서 놓여 자유를 누립니다. 그들은 성품이 변화되어 새롭게 살아갑니다. 그들은 이전과 다른 맑은 눈과 밝은 얼굴로 아내와 자녀를 돌봅니다. 이 때문에 부족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거나 부족 풍속을 따르라고 협박 받지만 그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의지도 신념도 아닌 십자가의 능력이 그들을 자유롭게 한 것입니다.
여러 명의 아내를 돈 주고 사는 것이 풍습이지만, 그들은 여자들을 가족에게 돌려보내고, 아이를 책임집니다. 그들은 누군가 잃어버린 물건이 생기면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립니다. 이런 변화는 우리에게 참된 구원의 의미를 알려주었습니다. 하나님은 부족 형제들의 변화된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의미를 새롭게 세우길 원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교육도, 철학도, 과학도, 종교도 사람을 바꾸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능력만이 우리를 의롭게 합니다.
-출처: 문성, 「벌거벗은 그리스도인」(서울: 두란노, 2019); 「생명의 삶」(서울: 두란노: 2021년 1월호), p. 49에서 재인용.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듣고 무엇을 느끼십니까? 하나님은 애굽과 같은 이 세상에서 우리를 “내 백성”이라고 불러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당신의 언약 적 사랑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받은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인격적이고, 체험적으로 알아가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저와 여러분은 애굽이라는 세속적인 가치관으로부터 해방을 받아,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은 예배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광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어떻게 대답하시렵니까?
♤ 사진은 영화 <택시 운전사>의 촬영지였던 충청투데이 건물 1층에 붙은 현판입니다. 몇 달 전, 저는 동네를 한 바퀴 걷다가 우리 동네에 이런 명소가 있었는지를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제가 감명 깊게 보았던 영화인데, 이 영화 촬영지가 우리 동네에 있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해서 사진으로 남겨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