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두截頭의 계절 외 1편
신승민
옛말에 이르기를
인산성천(仁山性天)이라,
감악산에 물잠자리 비껴 날면
섬마을은 금세 흐릿해지느니
장송(長松)이 송장 되어
불명(不明)의 배로 입관(入棺)하는 때
붉은 바다는 나를 떠나간다
저공(低空) 비행의 갈매기여,
이 계절을 물고 뻘밭으로
하구(河口)의 여름비 속으로
무너져 가거라
긴 시간이 손목을 끌고
호명(呼名)은 다시 불안을 부르고
먹자골목에서 이런저런 술을 먹고
비 맞으며 비 부르며
한 세월 지새느니
아, 슬프다
폐공장에 개 짖는 소리
첨탑이 낮은 집에 사는
털복숭이들아,
한데 모여 우리 개죽을 끓여 먹자
허망의 입에서 무수한 발길질을 토해내자
세상은 그렇게 우연스럽지 않다
그러나 어디에 영원이 있겠는가
파도에 몸을 맡기며,
순간 순간을 살아내는 힘
아름다운 시절만
간직하는 길
나는 그것이 괴로울 뿐이다
폐점(閉店)
폭염보다 무더운 절삭기의 불꽃이
독촉처럼 튀는 강남역 철거장(撤去場)
인파에 떠밀린 또 하나의 가게가
외진 등나무 그늘 아래로 잠겨든다
타는 지열(地熱)에 나지막이 꺼지는 한숨이
질근질근 떼어낸 주인의 간판을 씹어댄다
최후통첩 고리대에 치여 파산한 유리를
적자에 그을린 문짝을 남 일처럼 넘겨봐도
비틀린 안색은 시멘트 가루보다 텁텁하고
한증막 같던 바람도 장대비 내리듯 서늘하다
금싸라기 요지(要地)가 한 줌 거품이 되기까지
콘크리트 축석(築石)만큼 억셌던 의지가
폐업 신고서 한 장으로 허물어지기까지
세상은 그리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제 남은 건 발목 잘린 우리들의 사다리와
철근에 엉긴 초로(初老)의 나무의자 한 채
떠나보낸 기억들이 조각난 틈새로 고이는
앙가슴에 몽땅 구멍이 뚫린 벽돌 더미
헛배만 가득 찼던 지난 세월의 살점들이
팔월 염천에 파지(破紙)처럼 녹아내린다
쓰라린 고철마냥 속절없이 산패(酸敗)한다
십자 각목에 눈 먼 피가 번진다
쇠못에 무릎을 먹인 김 씨가 주저앉고
미신처럼 돌아가는 환풍기 창틈 너머
방치된 신음의 빛이 새어나온다
날 선 실격의 탄식들이 도사린 지하에선
앞니 빠진 집념만이 엄혹한 소독이다
자루를 묶어 나르면 찢긴 숨통에
질식해 죽어 있는 목장갑의 마디들
벌거벗은 흙먼지 무딘 가슴팍에
푼돈처럼 나동그라지는 막걸리 병들
상판에 짓눌린 지린내가 정강이를 타고
버글거리며 올라와 자존심을 긁어대도
끓어오르는 사람들은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땀에 찌든 톱질은 인내심을 잘라내기 급하다
나사 풀린 숟가락질로 헌 국밥을 쑤석대다
너무 일찍 녹슬어버린 뒷골목에 쪼그려 앉아
가는 담배 두 개비로 굵은 시름을 대신할 뿐
절망마저 이지러지는 폐점(閉店)의 여름에는
망명 차표처럼 노임을 건네는 점주(店主)도
구겨진 손아귀로 수모를 터는 역부(役夫)도
하나 같이 귀퉁이가 깨진 형광등의 삶이다
재기(再起)의 광채를 한데 모으지도 못하고
아스라이 점멸하는 눈물로 연명 중인 생이다
폐자재로 짐칸을 불린 트럭이 아가미를 열고
노독(路毒)에 지친 먹물을 토해내며 사라진다
주인은 피로한 선잠 속으로 셔터를 끌어내리고
남루한 적막 몇 줄로 부푼 단꿈을 매듭짓는다
임대문의 벽보가 골절된 팔다리를 저는 오후
한 컵 소주에 질긴 울분을 머금는 그림자들이
독거(獨居)의 안개 속으로 젖어가는 저녁이다
신승민
1992년 서울 출생. 한양대 한국언어문학과 졸업.
2015년 미네르바 등단. 시집 일곱 번째 감각-ㅅ(공저).
한국시인협회 기획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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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Poetry
절두截頭의 계절 외 1편 / 신승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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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1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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