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그리고 부모님
"인간의 신체 중에 가장 정직한 곳이 등입니다.
입은 거짓말을 할 수 있습니다. 손도 거짓말을 합니다.
그러나 뒷모습은 거짓말을 못 합니다. 부모님이 성공했을 수도 실패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셨다면,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사셨다면 그런 부모의 뒷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은 자라게 돼 있습니다."
2015년 3월 2일 전남도립대학교 입학식 축사
이낙연은 전라남도 영광 법성포 용덕리 발막부락이라는 궁벽한 시골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가난한 농민이었다. 부모는 지독하게 못살았고 배운 것은 없었지만 자식들 앞에서 당당했고 세상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아이들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면서 자란다.”라는
말은 이낙연이 돌아가신 부모님께 드리는 헌시나 다름없었다.
아버지 이두만, 어머니 진소임.
부부는 열 명의 자식을 낳았다.
한국 전쟁 피난 중에 두 아들을 잃었고, 딸 하나는
어릴 적에 병으로 떠나보냈다.
4남3녀에 조모까지 열 명의 대식구는 방 두 칸짜리 작은 초가집에서 살았다.
두 형의 죽음으로 삼남인 이낙연은 장남이 되었다.
귀한 아들이었지만 여느 농촌 아이들처럼 그도 집안 농사를 거들었다.
“저도 학생이라기보다는 집안의 작은 일손으로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습니다. 봄이면 아버지의 모내기를, 여름이면 어머니의 밭일을 돕거나 소를 먹이며 지냈습니다. 가을이면 홀태질을 해가며 추수를 거들었습니다. 돕거나 거들었다고 말하지만 저의 일 솜씨는 형편없었습니다. 매번 아버지의 호된 야단을 듣기 일쑤였습니다.”
등에 지고 오던 지게를 논에 빠트리자 아버지는
그 뒤로 장남에게 농사일을 시키지 않았다.
아버지와는 다른 삶을 살라는 무언의 명령이었다.
아버지는 호인이었지만 자식들에게 무척 엄했다. “게으르면 성공 못한다”며 근면, 성실을 누누이 강조했고,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가르쳤다.
원칙에서 벗어나고 양심적이지 않은 행동을 절대로 눈감아주지 않는 꼬장꼬장한 선비 같았다.
전주 이씨 양도공파 왕가의 후손이라는 자부심 또한 높았다.
둘째딸 이금순의 회상이다.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여유는 없었지만 정신적으로 여유로웠어요. 가족 모두에게 정신적 지주 같은 존재였습니다. 매서운 원칙주의자였고요. 예를 들어 말린 고추 같은 것을 팔 때도 다른 집에서는 고추씨를 넣어서 무게를 늘리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아버지는 그런 꼼수는 절대 용납하지 않았어요.
품질 검사 받기 위해서 채소나 곡식을 담을 때도 흔히 눈에 보이는 쪽에 번듯한 걸 두고, 아래에 상처 입고 질 낮은 걸 숨겨두는데, 이런 것도 이해하지 못했어요. 동네에서 발막부락 이두만 씨네 거라고
하면 안 보고도 가져갈 정도가 됐지요.”
아버지는 오늘로 치면 마을 공동체의 오피니언 리더였다. 농사철이 지나면 큰 키의 아버지는 위아래 하얀 모시옷, 백구두까지 번듯하니 차려입고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러 다녔다. 열심히 야당 당원 활동을 해왔던 아버지의 모습을 이낙연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민주당 지방당원이셨습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저는 권력에 대한 저항의식과 정의감을 가슴속에 키우며 성장했어요. 어깨너머로 정치를 배웠다고 할까요.
그 당시 야당은 지금보다 훨씬 더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도 불합리한 현실을 피부로 느꼈을 정도였지요.”
이상과 현실의 차이가 커서였을까. 아버지는 거의 매일 술을 마셨다. 이런 아버지 곁에는 남편을 살뜰하게 보필하는 키 작은 장둥댁 어머니가 있었다.
고창 출신의 어머니는 훈장이신 부친 옆에서 곁눈질로 천자문을 뗀 똑순이였다. 체구는 작았지만 모든 일에 거침이 없는 여장부로 생활의 융통성이 덜한 남편을 대신해 생계를 꾸려갔다.
어머니가 팔순을 맞던 2006년 7남매가 선물로 준비했다는 책 ‘어머니의 추억’에는 1949년생인 큰딸 연순이의 추억부터 1969년생인 막내아들 상진이의 추억까지 각기 다른 7개의 추억이 담겨 있다. 거기엔 새벽닭 울면 일어나 장으로 향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등장한다.
둘째 아들 이하연의 회고담이다.
“새벽 4시 반이면 어머니는 무, 배추 같은 채소 다발을 광주리에 이고 집을 나서신다. 나는 어머니의 기척을 느끼고는 곧 다시 점이 든다. 어머니가 한 시간 남짓 신작로를 걸어 5km 떨어진 법성에 도착하시면 6시. 남의 집 문을 두드려가며 채소를 다 파시고 나면 7시 정도가 되었다. 나는 학교에 가기 위해 7시쯤에 책가방을 들고 집을 나선다. 그리고 등굣길 중간쯤에서 빈 광주리를 머리에 인 어머니와 마주친다. 나는 습관적으로 어머니를 외면하고 말 한 마디 없이 어머니 옆을 그냥 지나가버린다.
이런 장면은 여러 번 번복되었다.
7남매의 기억에 아침에 만난 어머니의 얼굴은 구릿빛보다 검었고, 입술은 메말라 터 있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고단한 삶을 살면서도 “아이들이 다 크고 나면 아주 행복한 삶이 기다릴 것이다”라면서 웃음을 잃지 않았다. 농사철은 농사철대로 손을 놓지 않으면서 가을 농사 마치면 밑반찬 장만하려고 해변을 오가며 게를 잡으러 다녔다. 가까운 해변에 게가 없으면 전북 고창 심원 해변까지 오갔다.
훗날 어머니가 걸어 다녓던 길에 국도가 났는데
그제야 자식들은 도로표지판을 보고 왕복 거리가 자그마치 50km나 됐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낙연은 “어머니는 넓은 영광 법성포를 다 헤집으며 나를 키웠다”라고 회상했다.
이낙연은 당연히 집안의 기둥이었다. 특히 전쟁통에 두 아들을 잃은 어머니에게는 목숨과도 같았을 것이다. 어머니는 큰아들 생일이면 참기름 종지에 실로 만든 심지를 넣고 불을 밝혀 지극 정성으로 기도했다. 그런 정성 덕인지 이낙연은 잘 자랐고 마을 사람들은 어머니를 부러워했다. 그래도 무조건 애지중지하는 모성은 아니었다. 금쪽같은 아들이라 해도 어머니는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호되게 야단을 쳤다.
이낙연이 초등학교 3학년 때 있었던 일화다.
저는 북숭아가 먹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습니다.
저는 우리집의 캄캄한 골방에 들어가 보리 항아리에서 보리를 한 되쯤 훔쳤습니다. 그 보리를 복숭아밭에 가지고 가서 복숭아를 사 먹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웬걸 밭일 나가신 어머니가 집에 일찍 돌아와 저를 기다리고 계시는 겁니다. 저를 보자마자 어머니는 “너 이리 좀 와라!” 하시더니 준비해둔 회초리로 제 종아리를 때리셨습니다. “왜 도둑질을 하느냐!” 하시며 끝도 없이 때리셨습니다.
어머니는 언변이나 혜안이 남달랐다. 때문에 동네 아주머니들의 상담 역할을 도맡았고, 마을 사람들이 싸우면 달려가 갈등을 중재하며 양쪽에 이런저런 잘못이 있다면서 최종 판결을 내려주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은 이런 어머니를 가리켜 변호사, 판사라 부르며 마음속으로 신망했다. 나중에 큰아들이 국회의원이 된 뒤에야 혹여나 이웃들이 일 시키는 걸 부담스러워할까 봐 “나는 아직 장둥댁(어머니 택호)이여. 일할 때 불러!” 하면서 일당 2만원짜리 밭일을 나갔다.
그렇게 모은 돈을 다음 선거 비용으로 쓰라며
장남에게 내어주었다.
이낙연에게 어머는 영혼의 둥지 같은 존재였다.
“그저 어머니를 뵙는 것만으로 저는 위안을 받습니다. 어머니의 짧고 인상적인 말씀. 제게는 너무도 익숙한 어머니의 표정만으로 저는 격려를 받습니다. (…) 요즘엔 제가 어쩌면 ‘마마보이’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요즘 저는 차라리 마마보이가 되고 싶어졌습니다.” (어머니의 추억 중에서)
이낙연은 2014년 전남도지사에 취임하며 어머니를 관사로 모시고 들어갔다. 1991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홀로 지내온 어머니를 모시게 된 것을 그는 기뻐했다. 중학교 때 어머니 품을 떠나 50년 만에 돌아오게 된 것이라며 전남도지사 당선보다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어 기쁘다고 말했다. 그러나 채 3년이 못 되어 2017년 5월 총리로 임명되면서 어머니와 헤어져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2018년 3월 25일에는 어머니와 지상에서 영영 이별해야 했다. 상을 치른 뒤 이 총리는 페이스북에 감사 인사와 소회를 밝혔다.
“어머님을 하늘로 보내드렸습니다. 향년 92세. 어머니는 전쟁하듯 처절하게. 그러나 늘 긍정하며 유머를 잃지 않고 사셨습니다. 25일 소천한 어머님의 평생 일구신 고향 마을 작은 밭 모퉁이에 오늘 모셨습니다.
어머님은 27년 전에 모신 아버님 묘소 곁에 누우셨습니다. 비석도 제단도 없는 묘지. 그래도 부모님께 가장 익숙하고 편한 곳이라 생각합니다.”
글: 이제이 <다름 호에 계속>
이 뉴스클리핑은 http://goeul.kr에서 발췌된 내용입니다.
제 20대 국회의원 총선거일을 맞아 이낙연 전남지사가 13일 오전 어머니 진소임씨와 부인 김숙희 여사와 함께 투표를 마쳤다.(2016년)
어머니 고(故) 진소임 여사는 2018년 3월 25일 저녁 향년 92세로 별세했다.
첫댓글 좋은 부모가 되는건 힘들죠. 형 가족한테 쌍욕하기는 더 힘들구요
감동 파괴
왼쪽 끝이면 키 크신 분? 강직해 보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