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원산 산보기
내가 자주 가는 등산 카페에 거창의 산 이야기 나오길래, 과거 내가 쓴 <금원산 산보기>를 찾아보니, 2006년에 쓴 것이라 없다. 15년 전 당시 우리는 933 홈페이지란 걸 운영했고, 그 홈페이지를 중도에 없애 버렸다. 그래 내가 30년 이상 드나드는 카페에서 글을 찾아서 여기 우리 933 카페에 실어놓는다.
강남역 총동창회 사무실 근처에 가서 비봉산악회 5대의 버스 중 2호차에 오르니, 김덕균 김병지 박홍식 서태병 이화웅 정우섭 총각이 앉아있고, 김원용 김화홍 손부일 이병소 이인기 이창국 친구는 웬 이쁜 여학생을 하나씩 데리고 앉아있다. 가을 지리산도 보고 진주 친구들 얼굴이나 볼 겸 따라나섰는데, 가보니 산이 뜻밖에 아름답다. 거창군 위천면 상천리에 있는 해발 1352미터 금원산은 명산 智異 德裕 伽倻山 옆의 낯선 산이지만, 숨어있는 미인처럼 자태가 아름답다.
매표소 근처부터 범상치가 않다. 보름달 뜨는 날 선녀가 내려와 목욕하였다는 선녀담이란 연못가 단풍은 진홍빛인데요, 물은 싸파이어처럼 푸르다. 잠시 너럭바위에 앉아서 물소리에 귀를 씻노라니, 여기 옛날에 은거했던 선비들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처음부터 분위기 팍 살아있다. 서태병, 정우섭 친구와 일행이 되어 산보하듯 천천히 오르는데, ‘儒案廳 계곡’이란 계곡 이름이 특이한데, 그 뜻을 이야기해줄 사람은 없고, 물소리 따라 올라간 곳에 자운폭포가 있는데, 그건 한글로 적혀있어 또 그 뜻 애매하다. 넓은 반석에 비스듬히 드러누운 臥瀑이라, 물빛이 紫色 구름같이 아름답다고 紫雲폭포라 했지 않겠는가 짐작만 될 뿐이다.
근처 공기가 수정처럼 맑은데, 넓은 반석 위로 시원스럽게 물은 쏟아져내리고, 골짜기 빽빽한 푸른 소나무와 붉은 단풍이 속세의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은 여기서 한그루 복숭아 나무를 보았는지 모르겠다. 이끼 낀 바위 덮은 그 복숭아나무가 봄바람에 붉은 꽃잎을 옥같은 물 위로 떨어트리는 모습은 그대로 이태백의 ‘桃花流水杳然去 別有天地非人間’ 시구 생각나게 한다.
여기서부터 산은 완전히 仙界로 변하여 계곡의 바위와 나무와 물은 저마다 山水美의 극치를 보여준다. 물은 바위를 휘돌아 흐르기도 하고, 혹은 바위를 타고 폭포로 떨어지기도 하고, 옥구슬 물방울 되어 허공을 적시기도 하고, 넓은 반석 위에 작은 沼는 밑바닥까지 투명해 에메랄드 거울이 되기도 한다. 나무는 둥치가 바위 위에 범처럼 웅크린 기괴한 것도 있고, 뿌리가 바위를 기묘하게 덮은 것도 있고, 혹은 전신을 물 위로 던지듯 멋을 내고 드러누운 것도 있다.
유안청 계곡 전체가 예술이다. 내가 일본 궁성들과 북경 이화원, 소주의 졸정원 같은 외국의 이름난 庭園들 대충은 구경했지만, 여기 물과 바위와 나무 같은 생동감을 느껴본 적 없다. 돈 주고 외국 나들이할 것이 아니라 제나라나 제대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길이 계곡 옆이라 싫컨 물구경하며 오르니, 우리 세 거북이들 목적지인 ‘유안청폭포’가 나온다. 산을 가로지르고 비스듬히 들어 누운 그 거대한 암반의 길이가 한 100미터쯤 될까? 이태백이 보았다면 당장 飛流直下三千尺이라고 후라이 쳤을 것이다. 가을 가뭄 끝이라 수량은 많지 않았지만, 은하수처럼 아득히 하늘 위에서 떨어지는 폭포 아래 물가 바위에 우리 세 사람이 앉으니, 단풍은 표표히 떨어져 옷깃을 스치어 금방 우리가 羽化而登仙할 것 같다.
‘산은 되도록 천천히 오르는 사람이 진짜다. 되도록 많이 쉬고, 유유히 감상하면서, 詩도 읊어보면서, 오래 오래 늑장을 부리는 우리가 진짜다.’ 서태병 친구와 나눈 이야기다.
한참 쉬다보니 시간이 아침 8시. 한 시간 반 산행이면 족하다고 이쯤에서 하산하고 싶은 눈치 역력한 정우섭 친구와 셋은 다시 거북이걸음으로 유안청 제2폭포로 올라갔다.
역시 명품이다. 규모는 작았으나, 그렇게 고전틱 할 수 없다. 암벽 생김새도 좋고, 수목도 울창하다. 이런 데 토굴 하나 파놓고 10년 공부하면 도를 통하던지, 得音을 하던지 둘 중 하나는 하지 싶다. ‘과일 좀 드세요.’ 30회 선배 부인이 옆에서 우리에게 깎은 참외를 권한다. 천상선녀가 따로 있나? 우리도 떡을 권했더니, 웃으며 삶은 고매까지 또 건네주신다.
금원산 휴양림은 폭포 옆까지 임도로 차가 갈 수 있다. 하산길은 임도를 택했는데, 하늘을 찌를 듯한 낙엽송 숲 속에 방갈로도 있고, 물가에 데크도 있다. 여름에 수박 몇 덩이 싣고 와서 여기서 바둑 삼매에 빠질만한 곳이다. 족구장도 있길래 참새가 방앗간 그냥 지나가나? 거기서 공 차고 늑장 부리다 내려오니, 진주 문성열 원장과 강홍열 대장이 빨치산처럼 획획 나르면서 지나간다. 엊그제 설악산 대청봉 백담사 코스 다녀온 분들이다. 그들은 보나 마나 1353미터 금원산 정상이 목표다. 우리는 그들에게 눈인사만 하고 내려오다 물가에 바위가 있길래 거기서 또 점잖게 洗足을 했다. 굴원은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 ’ 하지 않았던가? 지금은 우리가 마땅히 발이나 씻을 난세가 아닌가. ‘마하반야 바라밀다!’ 일공은 般若心經을 외고 거사는 손바닥으로 목탁 치며 놀다가 산행을 마무리 지었다.
*거창 문화관광의 유안청에 대해 설명
'유안청폭포의 본디 이름은 가섭동폭이었다. 옛날 금원산에 자리한 가섭사에서 비롯된 것을 조선시대에 들어 유생들이 지방 향시(鄕試)를 목표로 공부하였던 공부방 격인 유안청(儒案廳)이 자리해 유안청 계곡으로 부르게 되었다. 유안(儒案)이란 청금록(靑衿錄)과 같은 말로 유생(儒生 선비)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푸른 도포를 입은 사람이 청금(靑衿)이며 주자의 백록동규(白鹿洞規)에서 이 말을 쓴 후로 우리나라에 전파되어 사림, 사족(士族), 유림이란 뜻으로 유안, 청금안(靑衿案), 향안(鄕案)들로 사용했는데 본래는 시경에서 따 온 말이다.'
첫댓글 오래된 산행기 하나 농여놓습니다.
이제사 카페에 들어와 선배님의 글을 봅니다. 사진 한 장 없는 글 산행기지만 글 하나만으로도 그 모습을 가히 짐작케 합니다. 아니 더 진하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