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독제독(以毒制毒) -
'독(毒)을 없애는 데 다른 독을 쓴다' 는 뜻으로, 악인(惡人)을 물리치는 데 다른 악인으로써 함.
태복 장현(太僕 莊顯)은 검각(劍閣)에 있는 강유(姜維)에게 위(魏)나라에 항복(降伏)하라는 후주(後主)의 칙령(勅令)을 전달(傳達)했다. 강유(姜維)는 너무 놀란 나머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소식(消息)을 들은 장수(將帥)들은 하나 같이 눈을 치뜨고 이를 갈며 분노(憤怒)했다. 어떤 장수(將帥)는 칼을 뽑아들고 바위를 내리치며 소리를 지른다.
"우리는 여기에서 죽음을 각오(覺悟)하고 싸우는데 성도(成都)에서는 천자(天子)가 먼저 항복(降伏)을 하다니. 이런 법이 어디있나!"
나라를 잃은 슬픔에 촉군(蜀軍) 진영(陣營)에는 통곡(痛哭)소리가 가득했다.
강유(姜維) 또한 어디에라도 분풀이를 하고 싶었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도 장병(將兵)들이 모두 촉한(蜀漢)을 걱정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 큰 위안(慰安)이었다.
강유(姜維)는 장병들을 위로(慰勞)하며 말한다.
"지금 여기서 통곡(痛哭)하고 있는 촉한(蜀漢)의 장수들은 걱정하지 말라. 나에게 한실(漢室)을 부흥(復興)시킬 계책이 있다."
강유(姜維)의 말에 모여 있는 장수들의 이목(耳目)이 집중(集中)되었다.
여러 장수(將帥)가 강유(姜維)에게 묻는다.
"계책(計策)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대장군(大將軍)과 기꺼이 함께 하겠습니다."
강유(姜維)는 말이 새어나가지 않게 귓속말로 계책(計策)을 일러주었다.
이튿날, 검각(劍閣) 관무(關門) 사면(四面)에는 항복(降伏)의 깃발이 세워졌다. 강유(姜維)는 종회(鍾會)의 영채(營寨)로 사람을 보내서 곧 항복(降伏)하러 나갈 것이라는 소식(消息)을 전(傳)했다. 종회(鍾會)는 크게 기뻐하며 사람을 보내서 항복(降伏)하러 나오는 강유(姜維), 장익(張翼), 요화(廖化), 동궐(董厥)을 영접(迎接)하도록 했다.
강유(姜維)가 장막(帳幕) 안에 들어오자 종회(鍾會)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백약(伯約 : 강유의 자), 어찌 이리 늦으셨소?"
강유(姜維)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단호(斷乎)하게 말한다.
"나라의 모든 군사(軍士)가 내 휘하(麾下)에 있는데, 오늘 내가 이 곳에 온 것도 이른 것 아니겠소?" 같은 장수로서 종회(鍾會)는 강유(姜維)의 말을 깊이 공감(共感)했다.
그리고 비록 강유(姜維)가 항복(降伏)을 하러 왔으나 당당(堂堂)한 태도(態度)에는 변(變)함이 없어 강유에 대해 존경심(尊敬心)마저 들었다. 그래서 종회(鍾會)는 자리에서 내려와 강유와 맞절을 하고 강유에게 상석(上席)에 앉도록 권유(勸誘)했다.
자리에 앉은 강유(姜維)가 종회(鍾會)에게 말한다.
"장군(將軍)께서는 회남(淮南) 토벌전(討伐戰) 이래로 마련한 모든 계책(計策)을 실수(失手) 한 번 없이 성공(成功)으로 이끌었다 들었소. 지금 사마씨(司馬氏)가 조정(朝廷)에서 권세(權勢)를 잡고 있는 것도 모두 장군(將軍)의 덕(德)이 아니오? 비록 우리는 적(敵)이었지만 나는 장군을 흠모(欽慕)하고 있었소. 그래서 장군께 와서 항복(降伏)을 한 것이오. 만약(萬若) 검각(劍閣) 앞에 있는 것이 장군이 아니라 등사재(鄧士載 :등애)였다면 나는 죽을 힘을 다해 싸웠지, 이렇게 항복(降伏)을 하지는 않았을 거요." 종회(鍾會)는 강유(姜維)의 말에 감격(感激)했다.
종회(鍾會)가 바로 곁에 있는 화살을 한 대 꺼내더니 그것을 반으로 부러뜨리며 맹세(盟誓)한다.
"백약(伯約 : 강유의 字), 우리 의형제(義兄弟)를 맺음이 어떠오?" 강유(姜維) 또한 화살을 꺾어 그 둘은 의형제(義兄弟)를 맺었다.
종회(鍾會)는 강유(姜維)와 친형제(親兄弟)보다도 더 친밀(親密)하게 지내는 것은 물론 강유(姜維)가 옛 병사(兵士)들을 그대로 거느릴 수 있도록 했다. 마음 속으로 그리는 바가 있는 강유(姜維)는 속으로 크게 기뻐했다.
그 무렵에 등애(鄧艾)는 사찬(師纂)을 익주 자사(益州 刺史)에 봉(封)하고, 견홍(甄弘), 왕기(王頎) 등에게 각 주군(州郡)을 다스리게 했다. 또, 면죽(綿竹)에 전공비(戰功碑)를 세운 후 잔치를 성대(盛大)하게 열어 아군 장병(我軍將兵)들을 위로(慰勞)하고, 촉(蜀)의 옛 관리(官吏)들도 빠짐 없이 초대(招待)하여 크게 대접했다.
한 잔 두 잔 술이 계속되자 얼큰하게 취한 등애(鄧艾)가 촉(蜀)의 신하(臣下)들을 향해 말한다.
"그대들은 나를 만난 것이 행운(幸運)이네. 나 말고 다른 장군을 만났으면 오늘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이야. 떼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거든." 여기 저기에서 촉(蜀)의 관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등애(鄧艾)에게 절을 올려 사례(謝禮)를 했다.
그때 검각(劍閣)에 사신(使臣)으로 갔던 장현(莊顯)이 들어와서 등애(鄧艾)에게 보고(報告)한다.
"강유(姜維)가 종회(鍾會) 장군(將軍)에게 항복(降伏)했습니다."
"그래? 잘 되었군." 등애(鄧艾)는 모두가 듣는 앞에서는 잘 된 일이라고 말했지만 사실(事實) 속으로는 종회(鍾會)에 대한 시기심(猜忌心)이 불타고 있었다.
등애(鄧艾)는 생각 끝에 낙양(洛陽)에 있는 사마소(司馬昭)에게 편지(便紙)를 한 통 적어 보냈다.
“신 등애(鄧艾)가 간절(懇切)한 마음을 담아 말씀 올립니다. 병법(兵法)에서 '먼저 소리쳐서 알리고 그 후에 실력(懇切)을 보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촉(蜀)을 평정(平定)한 지금(只今)의 기세(氣勢)로 이제는 오(吳)를 석권(席卷)할 차례입니다. 허나, 워낙 큰 작전(作戰)을 수행(遂行)한 이후인지라 장수와 군사들이 모두 지쳐 있어서 바로 다음 일을 도모(圖謀)할 수 없는 실정(實情)입니다. 농우(隴右)의 군사 이만과 촉군(蜀軍) 이만을 남겨두어 휴식(休息)을 취(取)하게 하면서 소금을 굽고, 쇠를 벼리고, 선박(船舶)을 만들게 하여 장차(將次) 물길로 진격(進擊)할 준비를 갖춘 뒤에 오(吳)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이해(理解)와 사리(事理)를 따져 설득(劉禪)하면 싸우지 않고도 우리가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폐주(廢主) 유선(劉禪)을 후하게 예우(禮遇)하여 오주(吳主) 손휴(孫休)의 마음이 흔들리게 하소서. 지금 유선을 낙양(洛陽)으로 압송(洛陽)하면, 분명 오에서는 진공(晉公)의 뜻을 의심하여 우리에게 귀순(歸順)할 마음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유선은 그대로 촉에 머물게 했다가 내년 겨울쯤에 낙양(洛陽)으로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유선(劉禪)을 바로 부풍왕(扶風王)에 봉(封)하고 재물(財物)을 내리셔서 자신(自身)의 옛 신하들에게 주게 하고, 그 아들들은 공후(公侯)로 삼아 귀순자(歸順者)에게 은총(歸順者)을 베푼다는 것을 널리 알리십시오. 그것을 보면 오(吳)나라 사람들은 진공(晉公 : 사마소)의 덕망(德望)에 감화(感化)되어 싸울 생각은 하지도 않고 자진(自進)하여 귀순(歸順)할 것입니다.”
사마소(司馬昭)는 등애(鄧艾)의 서신(書信)을 다 읽고, 등애가 승리(勝利)에 도취(陶醉)한 나머지 앞으로 제멋대로 권력(權力)을 좌지우지 하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疑心)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등애를 태위(太尉)로 봉하고, 식읍(食邑) 이만 호를 내려서 포상(褒賞)을 한다는 황제(皇帝)의 조칙(詔勅)과 함께 사마소(司馬昭) 자신(自身)이 직접 쓴 서한(書翰) 한 통을 감군 위관(衛瓘)을 통해 등애에게 보냈다.
사마소가 보낸 편지(便紙)에는 '건의(建議)한 뜻은 잘 알겠으나, 그 일에 대해서는 우선 황제께 아뢰고 조정(朝廷) 대신들이 상의(相議)해야 하는 문제이니 함부로 행동을 개시하지 말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조칙(詔勅)과 서신(書信)을 들고 온 위관(衛瓘)에게 등애(鄧艾)가 말한다.
"손자병법(孫子兵法)에 그런 말이 있지 않더냐? '장수(將帥)가 외지(外地)에 원정(遠征)을 갔을 때에는 군주(君主)의 명령(命令)도 듣지 않을 수 있다.'라고 말이다. 내가 이미 황제(皇帝)의 명으로 정벌(征伐)의 전권(全權)을 가지고 있으니 아무도 나를 막을 수는 없다."
그 무렵에 낙양(洛陽) 조정(朝廷)에서는 등애(鄧艾)가 반역(反逆)할 것이 틀림없다는 소문(所聞)이 파다했고, 등애(鄧艾)를 향한 사마소(司馬昭)의 의심(疑心)도 깊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등애는 그런 실정(實情)은. 전혀 알지 못한 채, 사마소(司馬昭)에게 답장(答狀)을 적어 보냈다.
“신(臣)등애(鄧艾)는 서촉(西燭)을 정벌(征伐)하라는 황제(皇帝)의 명을 받들어 이미 원흉(元兇)을 굴복(屈伏)시켰습니다. 이러한 때에 현지(現地)의 형편(形便)에 맞추어 일을 처리(處理)해야만 상황(狀況)을 안정시킬 수 있겠습니다. 조정(朝廷)의 명령(命令)을 받아서 일을 처리(處理)하느라 전령(傳令)들이 먼 거리를 계속 오가면 세월만 늦어질 뿐입니다. 춘추(春秋)의 대의(大義)에 이르기를, '대부가 국경 바깥으로 나가 있을 때는 조정(朝廷)과 나라의 안녕을 위하여 독단(獨斷)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아직 오(吳)나라는 항복(降伏)하지 않았고, 언제라도 촉한(蜀漢)의 잔당(殘黨)들과 오(吳)나라가 연합(聯合)할 가능성(可能性)이 있는데 관례(慣例)에 얽매여 일을 처리하다가 기회(機會)를 잃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손자병법(孫子兵法)에도 '장수는 진격할 때 명예를 구하지 말며, 패전했을 때는 그 책임을 피하지 말라 [ 진불구명(進不求名) 퇴불피죄(退不避罪 ]' 고 했습니다. 이 등애(鄧艾)가 비록 옛사람들만큼의 절개(節槪)는 없으나 오판(節槪)하여 나라에 손실(損失)을 끼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선(于先) 이렇게 아뢰고 시행(施行)하고자 하오니 부디 너그러이 봐주십시오.”
사마소(司馬昭)는 등애(鄧艾)의 답장(答狀)을 읽고 깜짝 놀라며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급(急)히 모사(謀士) 가충(賈充)을 불러다가 계책(計策)을 상의(相議)했다.
사마소(司馬昭)가 가충(賈充)에게 말한다.
"등애(鄧艾)가 공을 세운 것을 믿고 교만(驕慢)하게도 제 멋대로 행하려 하니, 반역(反逆)하려는 것이 분명(分明(分明))하다. 어찌하면 좋겠는가?"
가충(賈充)이 대답한다.
"종회(鍾會)에게 등애(鄧艾)와 같은 직권을 가진 벼슬을 내리시지요. 종회가 등애를 견제(牽制)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게 좋겠군. 이독제독(以毒制毒)의 절묘(絕妙)한 계책(計策)이야."
사마소(司馬昭)는 가충(賈充)의 권유에 따라 즉시 종회(鍾會)를 사도(司徒)에 봉한다는 조서를 띄우고, 더불어 자신이 적은 밀서를 종회에게 전달했다. 또 한편으로는 감군 위관에게 종회(鍾會)와 등애(鄧艾)를 모두 감독하는 권한을 주면서, 변란이 발생했을 때는 즉시 장병들을 동원하여 방비하라는 명을 내렸다.
종회(鍾會)는 벼슬을 내린다는 조서(詔書)와 함께 도착한 사마소(司馬昭)의 밀서(密書)를 읽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강유(姜維)를 청해다 상의(相議)를 해보기로 한다.
"백약(伯約 : 강유의 자), 지금은 등애(鄧艾)의 공이 나보다 크고 또, 태위의 직책도 받았소. 그런데 사마공(司馬公)은 등(鄧艾)애가 반역(反逆)의 뜻이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여 나에게 등애를 제압하라는 밀명을 내리셨는데, 무슨 좋은 방도가 없겠소?"
강유(姜維)가 대답한다.
"등애(鄧艾)는 출신이 미천해서 어릴 적에는 농가에서 소나 치며 살았다고 들었소. 이번에 어쩌다가 요행으로 음평(陰平) 샛길을 알아내어 큰 공을 세운 것일 뿐이오. 지모가 뛰어나서가 아니고 나라의 큰 복에 기대서 성공한 것이오. 만일 장군이 검각에서 이 강유(姜維)와 대치하지 않고 있었다면 등애(鄧艾)가 무슨 수로 나까지 감당하며 그리 큰 공을 세웠겠소? 등애가 촉주를 부풍왕으로 옹립하려는 것도 촉한 백성들의 인심을 사서 군주의 자리를 노리는 것이오. 누가 봐도 그렇지 않소? 진공(晉公)이 의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오."
"좋은 계책이 없겠소?"
"잠시 좌우를 물려주시오. 내가 은밀히 할 말이 있소." 종회가 측근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내자,
강유(姜維)는 소매 안쪽에서 지도를 한 장 꺼내 종회(鍾會)에게 건네며 말한다.
"이 지도는 옛날 제갈무후(諸葛武侯 : 제갈량의 시호(諡號)께서 남양 초려에서 나오실 때, 선제(先帝 : 유비)께 바친 것이오. 이 지도를 바치면서 '익주의 땅은 기름진 토지가 천 리나 있어 백성은 풍요롭게 살고, 나라는 부강해질 수 있는 곳이라 패업(覇業)을 이룰 만한 곳이다'라고 말씀하셨다하오. 선제께서는 제갈무후(諸葛武侯)의 말씀을 옳게 여겨 성도를 근거로 삼아 촉한 건국의 위업을 달성했던 것이오. 그런 좋은 위치의 땅을 얻었으니 등애(鄧艾)가 욕심에 정신이 나가 방자한 뜻을 품게 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 아니겠소?"
등애(鄧艾)를 깎아내리는 강유(姜維)의 말에 종회(鍾會)는 기뻐하며 지도를 살폈다.
강유는 지도에 그려진 산천의 형세를 종회에게 일일이 설명해 주었다.
종회(鍾會)가 강유(姜維)에게 묻는다.
"등애(鄧艾)를 어떤 계책으로 상대하면 좋겠소?"
"우선 진공(晉公 : 사마소)께 등애(鄧艾)가 반역(反逆)을 도모(圖謀)하고 있다는 표문(表文)을 올리는 것이 좋겠소. 진공(晉公)이 등애를 의심하고 있으니 (晉公. 틀림없이 진공(晉公)께서는 장군에게 등애(鄧艾)를 토벌하라는 명을 내릴 것이오. 조정의 명령만 있으면 장군의 능력으로 등애 (鄧艾)쯤을 잡는 것은 일도 아니지 않소?"
종회(鍾會)는 강유(姜維)의 말을 쫓아 낙양에 표문(表文)을 올렸다.
등애(鄧艾)가 전권(全權)을 휘어잡고 있으면서 촉(蜀)의 신하와 백성들의 인심을 사고 있으니 머지 않아 반역할 것이 분명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는 한편 종회(鍾會)는 등애(鄧艾)가 낙양으로 올려보내는 표문(表文)을 중간에서 낚아채어 표문을 위조했다. 등애의 필적을 흉내내어 등애가 적은 내용을 오만무례한 말투로 고쳐서 낙양으로 보냈다.
종회(鍾會)가 손을 댄 등애(鄧艾)의 표문(表文)을 본 사마소는 대로했다. 즉시 종회에게 사자를 보내서 등애를 잡아들이라는 명을 내렸다. 그리고 가충에게 삼만의 군사를 주고 야곡(斜谷)으로 진출하게 하고, 사마소 자신은 위주 조환(魏主 曹奐)을 설득하여 친정군(親征軍)을 일으켰다.
서두르는 사마소(司馬昭)에게 서조연 소제(西曹椽 邵悌)가 간한다.
"종회(鍾會)의 군사가 등애(鄧艾)보다 6배나 많습니다. 종회 혼자서도 등애를 잡을 수 있는데 굳이 주공께서 직접 나가시려 하십니까?"
그 말에 사마소(司馬昭)가 빙그레 웃더니 답한다.
"그대가 전에 한 말은 잊었나? 장차 종회(鍾會)가 반드시 반역(反逆)할 것이라는 말 말이다. 나는 지금 등애 때문에 가는 것이 아니다."
소제도 사마소(司馬昭)를 따라 웃으며 말한다.
"저는 명공(明公)께서 혹여나 그 일을 잊으셨나하여 여쭌 것입니다. 이제 진정한 뜻을 알았으니 안심입니다. 다만 이 일이 밖으로 새나가는 일은 없어야겠습니다."
"그렇지. 당연한 말이다." 사마소(司馬昭)는 곧 대군을 이끌고 낙양성을 떠날 채비를 갖추었다.
그 무렵, 가충 또한 사마소에게 종회(鍾會)가 딴 뜻을 품고 있는 것 같다는 밀고를 했다.
사마소(司馬昭)는 가충(賈充)에게 퉁명스럽게 말한다.
"만약에 내가 종회(鍾會)와 등애(鄧艾) 대신 그대를 보냈으면, 내가 그대 또한 의심해야 하는 것이냐? 내가 장안에 이르면 모든 것이 명백해질 터이니 괜히 앞질러서 의심하지 말라." 사마소는 모사 가충(賈充)에게조차 비밀을 누설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탐꾼을 통해 사마소(司馬昭)의 토벌군이 출정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종회(鍾會는 황급히 강유(姜維)를 불러다가 등애(鄧艾)를 칠 계책을 상의했다.
강유(姜維)가 말한다.
"먼저 위관에게 등애(鄧艾)를 잡아들이라고 명하시오. 등애가 위관을 죽이려든다면 그것이 바로 등애가 반역(反逆)을 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것이오. 그때 장군이 군사를 일으켜 등애군을 토벌하시오." 종회(鍾會)는 강유(姜維)의 말에 동의했다.
즉시 위관에게 수하 수십 명을 이끌고 가서 등애(鄧艾) 부자를 잡아오도록 명했다.
위관이 명을 받들고 성도로 떠나려 하자 수하 하나가 위관에게 아뢴다.
"떠나지 마십시오. 이것은 종사도(鍾司徒 : 종회의 자)가 정서장군 등애의 손으로 장군을 죽여 반역(反逆)의 증거를 잡으려 함이 분명합니다. 모략이 분명한 이상, 절대로 나가셔서는 안 됩니다."
위관의 대답은 단호하다.
"나도 생각이 있다."
위관은 성도로 향하기 전, 격문 이삼십 통을 적어 선발대를 통해 먼저 보냈다. 격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황제의 조서를 받들어 등애를 체포하러 왔을 뿐,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겠다. 미리 귀순하면 벼슬과 상을 내릴 것이나, 감히 맞서는 자가 있다면 삼족을 멸하리라.”
위관은 죄수 이송용 함거(檻車)를 두 대 마련하여 밤을 새워가며 성도로 내달렸다.
새벽닭이 울 무렵, 위관이 먼저 띄워보냈던 격문을 발빠르게 읽은 등애 수하의 장수들은 모두 위관 앞에 나와 엎드려 절했다. 등애는 그런 사정은 전혀 알지 못한 채 아직도 부중에서 잠들어 있었다.
위관이 부하들을 이끌고 등애의 침실로 들이닥친다.
"황제의 칙명을 받들어 등애 부자를 체포한다!"
단잠을 자던 등애(鄧艾)는 벼락같은 소리에 깜짝 놀라 침상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위관은 무사들을 호령하여 등애를 포박했다. 등애(鄧艾)의 아들 등충(鄧忠) 또한 소란에 놀라 급히 잠자리에서 달려나왔다가 제 아비와 같이 포승줄에 묶이는 신세가 됐다.
등애(鄧艾)에게 충성하던 장수와 관리들이 그제서야 무기를 휘두르며 등애(鄧艾) 부자(父子)를 구해내려 했으나 그것은 헛수고였다. 저 멀리서 모래 먼지를 자욱하게 날리며 종회(鍾會)의 대군이 몰려왔던 것이다. 등애 부자를 구하려고 애쓰던 장수와 관리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종회(鍾會)는 강유(姜維)와 함께 말에서 내려 등애(鄧艾) 부자(父子) 앞으로 갔다. 묶여 있는 등애 부자를 보더니 종회는 다른 사람에게 보일 듯 말듯 한 희미한 미소를 짓다가 이내 인상을 쓰더니 채찍으로 등애(鄧艾)의 머리를 후려치며 외친다.
"소나 치던 놈이 감히 이런 짓을 꾸민 것이냐!"
옆에 있던 강유(姜維) 또한 거든다.
"같잖은 놈이 요행으로 큰 공을 세우나 싶더니 결국 이런 꼴이 되었구나!"
등애(鄧艾)는 비록 묶여 있었으나 가만히 있지 않고 목청을 높여 욕설을 하며 종회(鍾會)와 강유(姜維)의 말을 맞받아쳤다. 종회(鍾會)는 등애(鄧艾)와 등충(鄧忠)을 함거에 실어 낙양으로 올려보냈다.
등애(鄧艾)의 군마를 모두 휘하에 넣게 된 종회(鍾會)는 그 기세와 위엄이 대단했다.
종회가 강유(姜維)에게 말한다.
"내가 이제야 내 평생의 소원을 이루었소!"
강유(姜維)가 감격에 차 있는 종회(鍾會)에게 차분한 말투로 말한다.
"옛적에 한신(韓信)은 괴통(蒯通)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가 미앙궁(未央宮)에서 화를 당했고, 월(越)나라 대부 문종(文鍾)은 범려(范蠡)를 따라 오호(五湖)로 물러나지 않았다가 칼에 엎드려 죽고 말았소. 한신(韓信)과 문종(文鍾)의 공이 얼마나 빛났소? 하지만 이해(利害) 판단(判斷)을 잘 하지 못하고 시기를 살피는 것에 둔하여 화를 당한 것이오. 오늘날 공이 세운 공은 이미 그 위세(威勢)가 진공(晉公)을 능가할 지경이오. 이제는 배를 띄워 조용히 발자취를 끊고 아미산(峨嵋山) 깊은 골짜기에서 적송자(赤松子)와 함께 노니는 것이 좋을 것이외다." 강유(姜維)가 종회(鍾會)의 심사(心思)를 뻔히 알면서도 종회의 마음과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했다. 강유(姜維)의 말은 종회(鍾會)의 권세욕(權勢欲)을 은근히 부추길 것이었다.
종회(鍾會)0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한다.
"하하하하하! 그 말은 잘못된 것이오. 내 나이가 아직 마흔도 안 됐소. 앞으로 나아갈 생각만 해도 모자를 젊은 나이에 어찌 물러나서 한가하게 노는 일을 본받아야 하겠소?" 종회(鍾會)의 반응에 강유(姜維)는 일이 제대로 돌아간다 싶었다.
속으로 기뻐하며 종회에게 말한다.
"은퇴할 생각이 없다면 조속히 좋은 계책을 세우시오. 이 늙은이의 잔소리가 없어도 공의 지혜와 능력으로 능히 이룰 수 있을 테지만 말이오."
종회(鍾會)는 웃음에 손뼉까지 치며 기뻐한다.
"하하! 백약이야말로 내 마음을 잘 알아주시는구려." 강유(姜維)의 말에 종회의 마음은 더욱 들썩였다.
이날부터 두 사람은 날마다 큰 일을 도모하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그럴 때에 강유(姜維)는 후주 유선에게 밀서를 보냈다.
폐하, 며칠만 더 굴욕을 참고 계시옵소서. 신 강유(姜維)가 위태로운 사직을 평안케 하고, 어두워진 해와 달이 다시 빛을 내도록 하겠사옵니다. 한실의 운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사옵니다.
종회(鍾會)가 강유(姜維)와 함께 한창 반역(反逆)을 꾀하고 있는데 갑자기 사마소(司馬昭)로부터 편지가 한 통 도착했다.
“나는 종사도가 등애(鄧艾)를 토벌하지 못할까 염려되어 직접 대군을 이끌고 와서 장안에 주둔하고 있다. 조만간 만나고자 하여 이렇게 먼저 알린다.”
종회(鍾會)는 편지를 다 읽고 강유(姜維)에게 묻는다.
"이 편지 내용을 보시오. 내 군사가 등애보다 몇 배가 더 많아 내가 등애를 잡는 것은 간단한 일이라는 것을 진공(晉公)께서도 아실 터인데 직접 군사를 이끌고 장안으로 오셨다니, 이것은 필시 나를 의심하는 것 아니오?"
강유(姜維)가 대답한다.
"군주에게 의심을 사면 그 신하는 반드시 죽게 마련이오. 등애(鄧艾)의 경우만 봐도 그렇지 않소."
"내 뜻은 이미 결정했소. 이 일이 성공하면 천하를 얻을 것이고, 설령 실패하더라도 서촉(西蜀) 땅으로 물러나 지키면, 유비 정도는 될 것이오."
종회(鍾會)의 의지를 보고 강유(姜維)가 종회에게 계책을 내놓는다.
"근래에 듣자하니 곽태후(郭太后)가 세상을 떠났다고 하오. 장군께서 마치 임금을 시해한 사마소(司馬昭)의 죄를 물으라는 태후의 유촉(遺囑)을 받은 것처럼 꾸며서 군사를 일으키시오. 명공의 능력이면 분명히 중원을 손에 넣을 것이오."
종회(鍾會)가 강유(姜維)의 손을 맞잡으며 말한다.
"백약에게 선봉을 부탁하겠소. 일을 이루고 부귀를 함께 누리십시다."
강유(姜維)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겠소. 다만 걱정되는 것이 있소. 과연 여러 장수들이 우리의 뜻을 따르겠소?"
"그것은 걱정하지 마시오. 내일이 원소절(元宵節)이니 등불을 가득 내걸고 장수들을 불러다 잔치를 벌여서 다짐을 받겠소. 불복하는 자는 곧장 목을 베어버릴 것이오." 강유는 일이 뜻대로 돌아가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다음날 종회(鍾會)가 예고대로 잔치를 열었다. 부하 장수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술이 몇 순 배 돌았을 때 종회가 술잔을 꽉 움켜잡더니 갑자기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장수들이 모두 놀라 종회에게 까닭을 물었다.
종회(鍾會)가 대답한다.
"곽태후께서 세상을 떠나실 무렵, 나에게 이런 조서를 남기셨소. '사마소(司馬昭)는 군주를 시해한 대역죄인으로, 조만간 위나라 황실을 찬탈할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그런 불상사가 닥치기 전에 그대가 토멸하시오.' 하고 말이오. 여기 그 내용이 담긴 조서가 있으니 제장들은 이 문서에 서명을 하고 마음을 합쳐 사마소(司馬昭)를 벌합시다."
갑작스러운 종회(鍾會)의 말에 장수들은 크게 놀라 그자리에서 서로를 쳐다볼 뿐이었다. 어색하게 눈치만 살피는 분위기를 깨는 건 종회의 노한 목소리였다.
종회(鍾會)는 쥐고 있던 술잔을 탁자 위에 탁 소리가 나게 내려 놓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남과 동시에 허리의 칼을 빼서 장수들을 가리키며 외친다.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참형에 처한다!"
장수들은 두려움에 떨며 마지못해 문서에 서명을 했다.
종회(鍾會)는 장수들을 궁궐에 감금하고 군사들을 시켜 그들을 삼엄하게 감시하게 했다.
강유(姜維)가 종회(鍾會)에게 말한다.
"내가 보기에는 충심으로 명에 따르려는 자가 아무도 없소. 장수들을 생매장 해버리시오."
"좋소. 궁중에 구덩이를 파고 곤장을 수천 개 준비하여 다짐을 받아야겠소. 그래도 따르지 않으려는 놈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때려 죽여 구덩이에 파묻겠소."
종회(鍾會)가 강유(姜維)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그 옆에는 종회(鍾會)의 심복(心腹) 장수(將帥) 구건이 곁에 있었다. 구건(丘建)은 원래 호군 호열(護軍 胡烈)의 옛 부하(部下)였다. 호열(胡烈)은 지금 종회(鍾會)에 의해 궁중(宮中)에 감금(監禁)되어 있는 신세(身世)였다.
구건(丘建)은 종회(鍾會)가 했던 말을 호열(胡烈)에게 몰래 알렸다.
호열(胡烈)은 울면서 구건(丘建)에게 부탁의 말을 한다.
"내 아들 호연(胡淵)이 지금 성(城)밖에서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있으니 종회(鍾會)의 음모(陰謀)를 어찌 알겠나? 자네가 지난 날의 정(情)을 생각해서 이 소식(消息)을 내 아들에게 알려주면 고맙겠다. 그리 해주면 내가 죽는다해도 여한(餘恨)이 없을 것이네."
"염려(念慮) 마십시오. 제가 무슨 수라도 써보겠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와 곧장 종회(鍾會)를 찾아갔다.
구건(丘建)이 종회(鍾會)에게 말한다.
"ㅈ공(主公), 궁(宮)에 감금(監禁)된 장수들이 먹고 마실 것이 마땅치 않습니다. 한 사람에게 오가며 음식을 전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평소(平素)에도 종회(鍾會)는 구건(丘建)의 말을 믿었던 터라 아무런 의심(疑心)없이 그렇게 하라고 지시(指示)하며 당부(當付)의 말을 한다.
"내가 너를 깊이 믿어 맡기는 일이니 외부 새나가는 일이 없도록 하라."
"마음 놓으십시오. 엄(嚴)하게 단속(團束)할 방법이 있습니다."
구건(丘建)은 믿을만한 심복(心腹) 한 사람을 호열(胡烈)에게 들여보내서 밀서 하나를 받아오게 했다. 그리고 그 밀서(密書)를 호열의 아들 호연(胡淵)에게 전했다. 호연은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그 내용에 깜짝 놀랐다. 종회(鍾會)의 음모(陰謀)를 알게 된 호연은 각 진영(陣營)에 아버지가 보낸 밀서를 돌렸다.
밀서(密書)를 받아 본 각처(各處)의 장수들은 급히 호연(胡淵)의 영채(營寨)로 달려와 계책(計策)을 논의(論議)하기 시작했다. 모인 장수(將帥)들의 의견(意見)은 모두 같다.
"차라리 우리가 죽었으면 죽었지, 역신(逆臣)을 따를 수는 없소!"
장수(將帥)들의 결의(決意)를 보고 호연(胡淵)이 말한다.
"정월 여드렛날 궁중(宮中) 안으로 짓쳐들어 갑시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 되오." 호연(胡淵)이 상세(詳細)한 계책(計策)을 내놓자 감군 위관(監軍 衛瓘)이 매우 기뻐하며 동의했다. 종회를(鍾會) 치기 위해 군마를 정돈하고, 구건(丘建)으로 하여금 호열(胡烈)에게 이 소식을 전달하도록 했다. 연락을 받은 호열은 그 내용을 함께 갇혀 있는 다른 장수들에게 전파했다.
다음날 아침, 종회(鍾會)는 강유(姜維)을 불러서 묻는다.
"내가 지난 밤에 수상한 꿈을 꾸었소. 큰 뱀 수천 마리가 나에게 달려들어 내 몸을 마구 물어 뜯는데, 이것이 길몽인지 흉몽인지 모르겠소."
강유(姜維)는 지체없이 대답한다.
"꿈에 용이나 뱀이 나타나는 것은 모두 경사(慶事)스러운 길몽(吉夢)이오." 종회(鍾會)는 그 말에 기뻐하며 수상한 마음은 금새 잊었다.
그리고 강유(姜維)에게 말한다.
"구덩이를 다 파고 곤장(棍杖)도 준비가 끝났소. 장수들을 모아놓고 지금 문초(問招)하면 어떻겠소?"
강유(姜維)가 고개를 내젓고는 말한다.
"그자들은 틀렸소. 하나같이 복종(服從)할 마음이 없소. 그대로 두면 해가 될 것이니 차라리 이참에 죽여버리는 것이 낫소."
"음...... 그러는 것이 좋겠소. 백약에게 그 일을 부탁해도 되겠소?"
"분부만 내리시오."
강유(姜維)가 무사들을 이끌고 장수들이 감금되어 있는 궁으로 향하려고 몸을 일으키는 순간, 가슴에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그리고 그대로 땅에 쓰러지고 말았다. 강유(姜維)는 좌우의 부축을 받고 몸을 일으키기는 했으나 온전히 정신이 돌아온 것은 반나절이나 지난 후였다. 정신을 차린 강유(姜維)가 다시 궁으로 가려는데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군사들이 벌떼처럼 온갖 방향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강유(姜維)가 말한다.
"이것은 틀림없이 갇혀 있는 장수들이 꾸민 일이오. 우선 그들의 목부터 쳐야 하오!" 강유(姜維)의 말에 종회(鍾會)가 판단을 내릴 겨를도 없이 저쪽 군사들이 벌써 궁문 안으로 짓쳐들어오고 있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마음이 급해진 종회(鍾會)는 바로 전각의 문을 닫게 하고 군사들을 전각 지붕으로 올려보냈다.
그리고 전각 기와를 집어 던져 싸우라고 명했다. 양쪽의 군사 모두 변변한 무기가 없는지라 서로가 기왓장을 집어들고 마구 던져댔다. 혼전 속에 순식간에 수십 명이 죽었다. 잠시후 궁 밖에서 불길이 솟구치더니 중무장한 감군 위관의 군사들이 전각 문을 부수고 들이닥쳤다.
종회(鍾會)는 칼을 빼들고 몇 명을 쳐죽였다. 하지만 사방에서 헤아릴 수도 없이 날아드는 화살에 맞아 쓰러지고 말았다. 한때 종회(鍾會)의 부하였던 장수들이 쓰러진 종회에게 우르르 달려들어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종회(鍾會)의 숨통을 끊어 놓았다. 종회(鍾會)의 목은 높은 장대에 매달리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강유(姜維)는 전각 위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적을 무찌르며 나아가는데 그만 다시 가슴 통증이 강유(姜維)를 덮쳐왔다.
타들어 갈 듯한 가슴을 부여잡고 강유(姜維)가 하늘을 향해 탄식(歎息한다.
"이것 또한 하늘의 뜻인가!"
강유(姜維)는 적(敵)을 향(向)하던 칼날을 자신(自身)에게 겨누고 스스로 목을 찔렀다. 한실(漢室) 부흥(復興)의 마지막 한 줄기 희망(希望)은 강유(姜維)의 자결(自決)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그때 강유(姜維)의 나이 쉰아홉이었다.
1, 한(漢)나라 장군(將軍) 한신(韓信)이 병권(兵權)을 쥐었을 때 괴통(蒯通)이 유방(劉邦)을 저버리라고 한신(韓信)에게 간(諫)하였으나, 한신은 이를 듣지 않았다가 끝내는 병권을 박탈(剝奪)당하고 간계(奸計)에 속아 미앙궁(未央宮)에서 죽었다.
2, 문종과 범려(范蠡)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월(越)나라의 공신(功臣). 둘은 월왕(越王) 구천(勾踐)을 섬겨 오를 정벌하였으나, 범려는 구천(勾踐)이 즐거움을 함께 누릴 수 없는 인물이라고 판단하여 그를 떠나면서 문종에게 함께 가기를 권했는데, 문종은 이를 거절하였다. 훗날 문종은 구천의 박해를 받아 자결했다.
3, 한(漢)나라의 공신(功臣) 장량(張良)은공은 이룬 뒤에 신선 적송자를 따라 은둔하여 화를 면했다.
삼국지 - 417회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