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설 과정
준비 작업
한국광복군은 1939년 1월 8일 창립된 임시정부의 여당 한국독립당 당군(黨軍)을 모태로 하였다. 이후 기타 독립군 및, 지청천, 이범석 등이 이끌고 온 만주 독립군과 연합하여 1940년 9월 성립전례식을 준비, 계획하였다.
1936년에 장개석의 제안으로 임시정부는 중국에 있는 전 조선인 무장세력을 규합하여 광복군 조직을 추진하고 있었다.[1]
1940년 5월 임시정부 측은 중국 국민정부 장개석 주석에게 한국광복군의 활동을 승인해줄 것을 교섭하였고, 중국 국민당군의 지휘 하에 둔다는 조건으로 광복군 창립을 승인받았다. 광복군의 지휘권은 중국의 국민당 정부가 통제하고 있었으나 1944년 8월 임시정부로 통수권이 넘겨졌다.
성립전례식과 창군
1940년 9월 17일 충칭 대한민국 임시 정부 청사에서 임정 요인들과 현지 한국 거류민 및 중화민국 국방성에서 파견한 군관들이 임석한 가운데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을 거행함으로써 창설되었다.
창군 당시 광복군의 규모는 정확하지 않으나 약 30여 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1942년 1월 충칭 주재 미국대사관의 보고서는 충칭의 한국 거류민은 200명을 넘지 못한다고 적고 있다.[2][3][4] 그러나 임정 에서는 5백여 명 이상의 대원으로 시작했다 하며 그 위용을 과시하였다.
광복군은 중화민국의 지원 하에 활동해야 하는 한계를 가지고 출발했다. 중화민국 정부는 광복군을 인정하는 대신 1941년 11월 광복군은 중화민국 정부 측으로부터 한국광복군 행동준승이라는 9개 조항으로 된 조건을 하달받았다. 준승에 따르면 한국광복군은 중화민국 중앙군 참모총장의 명령과 통제를 받아야만 움직일 수 있도록 명시되어 있었다.[5][6] 이현희는 이 준승은 한국광복군은 명실상부한 한국의 독립군이 아니라 중국의 일개 보조, 고용군이 된다는 굴욕적인 군사협정이었으며, 임시정부 자체도 그 지위가 의심스러워지기까지 하는 등의 미묘한 국면을 제공하였다고 평가하였다.[5][7]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화민국 측의 이 준승 명령에 분개하여 임시정부를 미국 워싱턴 D.C.로 옮길 것을 계획하고,[5] 이승만과 연락을 취하기도 하였다.[8] 그러나 중국 정부가 김구를 설득하면서 임정 천도안은 무산되었다.[9]
성장과 활동
한국광복군은 먼저 각지에 흩어져 활동하던 한인 항일 군사조직을 흡수하여 통합하는 데에 진력하였다. 1941년 1월 무정부주의 계열의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편입되었으며, 1942년 7월에는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용대의 일부를 흡수하였다. 이로써 광복군은 지청천 총사령과 김원봉 부사령 밑에 3개 지대와 제3전구공작대, 제9전구공작대, 토교대를 두게 되었으며, 중국 각지에 징모 분처를 설치하고 한국청년훈련반과 한국광복군훈련반이라는 임시훈련소를 운영했다. 기관지 '광복'을 펴내기도 했다.[4] 이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놓고 논란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김구와 대립하고 있던 김원봉이 김구의 지도성을 인정한다는 조건으로 군무장관에 임명되었다.[1] 김원봉의 군무부장 겸 제1지대장의 임명에도 임정 편입을 탐탁치 않게 생각한 조선의용대원들은 화북의 김두봉, 무정에 의해 운영되던 조선독립동맹으로 넘어간다.
맨 앞줄 좌로부터 (박찬익, 조완구, 김구, 이시영, 차이석
두 번째 줄 맨 왼쪽 성주식, 징모제3분처주임인,김문호,신정숙요원,분처요원, 분처요원, 김붕준
맨 뒷줄 왼쪽부터 조성환, 조소앙, 이청천, 이범석, 이름 미상
임정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1941년 12월 9일 일제와 독일에 선전포고(이 선전 포고는 일본 측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국제법의 효력은 없었다)를 하였다. 광복군은 1943년 영국군에 파견되어 버마 전역에 투입되었으며, 그 뒤 임정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을 통해 미국 국무부에서 파견한 도노번 장군에게 OSS 특별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1945년 4월 당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문서에 따르면 광복군의 총 병력 수는 339명이었다고 한다. 물론 일본제국 의용군에 자원입대한 조선인들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숫자이다. 1941년 12월 9일 태평양 전쟁의 발발과 함께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일본 제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였으며, 좌우합작이 이루어져 1942년 7월 김원봉계의 조선의용대의 일부를 한국광복군 부대로 흡수했다. 일본 측에는 한국광복군과 일본군의 공식의 전투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광복군은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 한국인 병력의 귀순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장준하는 자신을 영입하려던 부사령관 겸 1지대장 김원봉을 비판하였고,[10] 일본군 출신들을 독자적으로 영입하려던 것을 지청천에게 보고하기도 하였다. 장준하는 김원봉이 일본군 출신 한인 병력에게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불신임을 심어주려 하였다고 주장하였다.[11]
한국광복군 준승은 1944년 8월에 폐기되었고, 이때 광복군의 통수권은 임시정부로 이양되었다.[5] 그러나 광복군의 훈련과 유지는 국민당 정부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아 이루어지고 있었고, 그 계획과 목표 설정까지도 장개석의 통제 아래 있었다.[1] 그 뒤 김구와 연락한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의 미국 국무성과의 접촉으로 도노반 등을 파견하여 OSS 특별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국내정진작전과 국군자격 귀국의 좌절
1945년 4월 당시 임시정부 의정원의 문서에 따르면 한국광복군의 총 병력 수는 339명이었다.[12] 4월에는 광복군의 OSS 훈련을 승인하였고, 미국군 중국전구 사령관 웨더마이어 중장을 방문하였다.
김구는 독자적으로라도 한국광복군의 한반도 진주를 추진하고자 하였으나, 중국 내에서 활동하는 군사집단에 대한 관할, 감독, 지도권은 중화민국 정부에 있다는 국민당 정권의 경고로 실패하고 만다. 대신 김구는 미국에 체류중이던 이승만에게 수시로 연락하여 광복군과 미국 육군, 공군과의 OSS 합동훈련 계획 진행 상황을 수시로 독촉하였다.
임정은 일제의 항복이 가까이 다가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자력으로 국토를 수복하기로 하고, 1945년 8월 11일 이범석을 총지휘관으로 하는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을 편성했다. 8월 16일 미군 비행기를 통해 그 선발대가 한반도로 향했지만 "가미카제 특공대가 아직 연합군을 공격하고 있다"는 무전을 받고 회군하였다. 이틀 뒤 8월 18일 다시 국내 진입을 시도해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지만 일본군의 저항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 뒤 임정은 오광선을 국내지대장으로 파견해 서울에 한국광복군 국내지구사령부를, 대전에 한국광복군 경비대 훈련소를 개설했다. 그러나 광복 후 아무런 저항 없이 한국에 진주하여 통치권을 행사하던 미군정은 '사설 군사단체 해산령'을 내려 광복군 국내지대를 해체시켰으며, 귀국길이 막혀 버린 중국 주재 광복군도 1946년 5월 16일 중국 국공내전(國共內戰)의 혼란 속에서[4] 사실상의 해체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에서의 난동
1944년 중국 국민당 정권은 한국광복군의 통수권을 임시정부 주석 김구에게 이양한다. 그러나 장개석의 한국광복군 통수권 환수를 놓고 중국 국민당 내에서도 반대하는 시각이 나타났다. 그들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이청천과 이범석 휘하의 광복군이 저지른 난폭한 행동들은 특히 상하이에서, 중국인들 뿐만 아니라 중국 거주 조선인들에게도 증오감을 사고 있었다. 광복군은 친일 매국노를 처단하는 데에도 이용되었다.[1] 그러나 광복군의 제거 대상은 친일파나 친일 부역자들에게만 향한 것은 아니었다. '친일 부역자'들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에 반대하는 정적(政敵)을 처단하는 데도 이용되었다. 그 당시 임시정부는 경제적인 지원을 받고 있던 보수 진영에 완전히 경사되어 있었고, 공산주의와 소련의 위험에 대해서 소리높여 비난하고 있었다.[1]
귀국
광복 이후 일본군과 만주군을 전역한 한인 병력을 모집하였다. 1945년 9월 21일 만주국 육군 중위로 복무하던 박정희는 동료들과 함께 베이징 쪽으로 건너가, 장교 경험자를 찾고 있던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어, 북경의 김학규가 지휘하는 한국광복군 제3지대 제1대대 제2중대장에 임명되어 광복군 장교로 활동하였다.
광복군 대원들은 1946년 2월부터 6월 사이 이범석의 영도 하에 개인자격으로 귀국하였다. 박정희는 1946년 5월 8일 미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당시 광복군 대원수는 20만 명으로 홍보되었다.
과장과 비판
그러나 실제보다 과장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2005년 SBS 삼일절 특집 뉴스추적 취재에 의하면, 1945년 4월에 작성된 대한민국임시정부 문서에는 광복군의 인원이 339명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광복군은 560명으로 이들 중 해방 후인 8월 19일에 입대한 인물도 있다.[13]
광복군 제1지대 대원이었던 독립운동가 김득명은 “이것도 사실 중국으로부터 물자를 타기 위해 부풀려진 수”라고 말했다. 광복군은 당시 중국의 경제 원조를 받고 있었다. 김씨는 “중국정부로부터 더 많은 보급물품을 타기 위해 가족 등 관련 없는 이들도 숫자에 포함시켰다”고 밝혔다. 김씨의 증언을 차치하고 공식문서에 언급된 3백39명이 모두 ‘진성 광복군’이라 하더라도 3백39명과 5백60명 사이의 공백은 엄청 크다. 일제의 패망이 짙어지면서 해방 직전 혹은 직후 광복군에 편입된 이들이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일본군 포로로 중국군 포로수용소에 잡혀있던 한인 출신 포로들이 광복 직후 임시정부에 무더기로 승계되고, 이들이 광복군으로 편입돼 임정과 같이 귀국하면서 인원이 부정확해졌다는 분석이 많다. 가짜 광복군 논란은 이들(토교대)을 비롯, 비호대와 3지대 등에서 주로 불거지고 있다. [14]
구성원
한국광복군의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계급 체계
한국 광복군의 경우 계급 체계는 상당 부분 대한제국군에서 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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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 |
견장 |
장관(將官) |
정장(대장)(正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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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장(중장)(副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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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장(소장)(參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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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관(領官) |
정령(대령)(正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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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령(중령)(副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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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령(소령)(參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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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관(尉官) |
정위(대위)(正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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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위(중위)(副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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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소위)(府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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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위(准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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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사관(下士官) |
복무정사(특무상사)(服務正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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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상사)(正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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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사(中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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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하사)(參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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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兵士) |
상등병(上等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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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등병(一等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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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등병(二等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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