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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가 있는마을 스크랩 시뮬라크르의 칼날 : 환유적 몽타주와 부정성의 詩學
진란 추천 0 조회 83 06.10.23 02:44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시뮬라크르의 칼날 : 환유적 몽타주와 부정성의 詩學

- 2005년 상반기 신진시인들의 시집을 중심으로

박대현

 

1. 21세기, 시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21세기, 젊은 시인들의 시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90년대의 강박관념이 문화의식이며, 현대시의 문화적 체험이 주로 대중문화 또는 대중예술의 체험인 점으로 인해, 현대시세계가 문화적 체험으로 대치되고 있다는 90년대 중반의 진단1)은 ‘21세기 문학’에 접어들수록 더욱 심화되고 있는 양상이다. 최근 젊은 시인들2)이 대중문화의 수용을 넘어, 대중문화에 이미 포획되어 있다는 사실을 다시 강조하는 일도 이제 지겨운 일이다. 이들에 대한 평가 역시 90년대 ‘신세대시’를 바라보던, 곤혹스러우면서도 사뭇 상기된 지난 평단의 표정을 떠올리게 한다. 90년대의 ‘신세대시’는 70․80년대 사회․정치적 이데올로기의 균열과 붕괴 속에서 발아한 전위시학으로서 대중문화를 반영한 문학의 한 흐름을 강력하게 추동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신세대 문학’이라는 이름 자체가 “이들을 낯선 존재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던 기성문단이 유포한 다분히 <부정적인> 이름이었”다거나 “신세대라는 말과 결부되어 있는 이데올로기적 또는 상업주의적 혐의들을 경계하”3)고자 했던 90년대 평단의 부정적인 분위기는 현재의 상황과 너무나도 흡사한 것이다. 

 

  젊은 시인들이 생산하는 전위적 시세계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기도 하는 소장비평가와 달리 중진 비평가들의 태도는 여전히 권위적이고 조심스럽거나, 때로는 노골적인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시는 끝장나고 죽었다! 시는 고갈되어 죽은 것이 아니라 과잉으로 죽었다”는 장석주의 탄식은 최근의 시가 “시의 영악한 시뮬레이션, 시의 상상임신으로 인한 헛구역질, 시의 화려한 할리우드 액션이다”4)라는 절망감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젊은 시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전위적’인 시학이 90년대 전위시의 에피고넨을 뛰어넘어, 뚜렷한 시적 정체성을 가진 ‘미래파’로서의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들의 공격 대상은 전래의 ‘서정’이다. 이들은 전래의 서정시가 현대소비사회의 물화된 세계를 적극적으로 반영하지 못하는 한계를 비판한다. 권혁웅은 “전통적인 서정이 기대고 있는 자연은 죽은 자연”이며, “미학적인 힘을 소진한(이를테면 정서적 환기력을 거의 잃어버린) 제재”5)라고 말한다. 이는 일인칭 영혼을 화자로 한 전래의 서정시를 “서정의 인공정원”6)으로 격하시킨 이장욱의 언술과도 같은 맥락이다.

 

  이들에게 서정의 본질은 사실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다만, 젊은 시인들의 내면을 형성하고 있는 현대소비사회의 문화 이미지가 빚어내는 ‘낯설고도 기이한’, 반(反)서정이 아닌 “다른 서정”(이장욱)의 현실태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서정의 파괴, 혹은 새로운 서정에 대한 모색일 수 있다. (여기서 서정적 세계관의 산물인 은유는 사라지고 환유가 시적 방법으로 적극적으로 채용된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인 변화가 감지된다. 90년대의 신세대시가 “70년대 이후 우리의 현대시는 모든 변화를 체험했으며 선배시인들이 <부술 것은 다 부수고 시도할 것은 다 시도해 버렸다>는 신세대들의 고갈의식”7)에서 출발했던 것과는 달리, 이들은 뚜렷한 시학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많은 시인들에게 ‘해체’와 ‘균열’은 이상적 상태를 전제로 한 결여의 상태가 아니라 그저 삶의 당연한 조건”일 뿐이며, “해체를 해체로 의식하지 않으며 균열을 균열로 의식하지 않”을 뿐더러, 그런 의미에서는 ‘해체’도 ‘균열’도 없다”8)라는 시적 세계관은 21세기 새로운 시학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젊은 시인들의 시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시인은 “사라져 버린 신들의 흔적을 느끼고 그 흔적 위에 머무르며, 자신과 동류인 인간을 위해 전회의 길을 찾아내 주는 인간이다”라는 하이데거의 믿음은 폐기된 지 이미 오래다. 이들의 시는 더 이상 그러한 과중한 의무를 짊어지지 않는다. 하이데거의 믿음은, 보러의 말을 빌리자면 “신화로서의 심미적 구성물에 철학적인 메시지를 강요함으로써 예술을 식민지화하”9)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들은 더 이상 형이상학의 무거운 짐을 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진창의 현실 속에서 재현적 리얼리티를 위해 투쟁하지도 않는다. 이들에게선 천상에서 지상도, 지상에서 천상도 아닌, 실재에서 ‘가상현실'(Virtual Reality)로의 뚜렷한 시적 변화의 징후가 감지되고 있다. 

       

2. 육체는 사라지고 ‘눈알’만 남은 모니터킨트

 

  주지하다시피 가상현실은 비평담론에서 새롭게 대두된 문학환경이다. 가상현실은 환상현실과 동일한 개념이 아니다.10) 김진석11)은 가상현실을 이상현실․환상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고 있는데, 그의 글은 개념의 명확성보다 세 현실의 변증법적 관계에 대한 사유를 착종적으로 서술하고 그 개념을 열린 구조로 방치함으로써 이해가 쉽지가 않다. 김진석의 논의 속에서 어렵게 추출해낸 가상현실과 환상현실의 개념구분은 이상현실과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쟝 보드리야르12)는 실재의 절대적 퇴적층 위에 환상이 근거한다고 역설한다. 환상은 형이상학적 절대성에 근거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에 기대어, 필자 나름대로 재해석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상현실은 형이상학적 절대성, 다시 말해 본질적 원형성과 불변성, 진리의 순수성을 담지한 현실이다. 그것은 관념적으로만 존재하는 이데아적 성격을 지닌다. 반면에 가상현실은 불확실하고 가변적인 현실로서, 형이상학적 절대성이라는 초월적 가치에서 벗어나 수평적인 가치 계열을 따라 미끄러지는 현실이다. 환상현실은 동의할 수 없는 진리의 이상현실을 부정하고, 새로운 진리를 담지한 이상현실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각들의 유기적 결합이자 ‘상징적 상상력’의 결과물이다. 이런 점에서 환상현실은 이상현실과 가상현실의 주변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실재(절대진리)와의 관계가 단절된 가상현실이 형이상학적 절대성으로부터 탈주하여 그것자체로 분화되고 복제되고 수평적 가치계열을 따라 미끄러지는 현실개념이라면, 환상현실은 이상현실과 가상현실의 틈새에서 새로운 이상현실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현실개념인 것이다. 따라서 실재를 탈각시킨 가상현실과 달리, 환상현실은 어디까지나 실재와의 관계를 바탕으로 정립된 현실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가상현실은 실재(절대진리)를 부정하는 현실개념으로 영상매체와 사이버공간이 물질적 토대를 이루는 동시에, 대중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가상현실이 점령하기 시작한 대중문화에 심취한 시인들의 태도는 이미 낯선 것이 아니다. “오 놀라운 전능의 네모난 신전/ 우린 모두 당신의 불쌍한 종이에요”(김형술,「텔레비전 광시곡」)“텔레비전을 아버지라 부르고 싶다”(함민복,「오우가」), “TV를 禪하고 싶다”(황지우, 「아이들은 먼 곳을 보기를 좋아한다」)와 같은  90년대의 시적 언술에서 확인되듯이 브라운관으로 대표되는 영상매체는 젊은 시인들의 피할 수 없는 문화적 실존이 되었다. 따라서 가상현실과 삶의 실재가 뒤엉킨다는 문제적 성찰(“이제는 그녀가 영화를 찍는 것인지, 영화 속의 그녀가 그녀를 대신 사는 것인지 모르게 됐다”, 장정일, 「8미리 스타」)은 그런 점에서 당연한 귀결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최근 젊은 시인들의 영상매체에 대한 태도는 보다 노골적이다. 인간의 육체는 이제 육체로서만 존재하지 않고, 이미지를 “찍어대는” 영상매체로 인식된다. 다시 말해 인간 실존은 이미지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단순한 영상 기계로 대체된다. 


  사진을 찍었다 필름을 화분에 심었다 볕이 잘 드는 베란다에 화분을 내놓았다 화분 속에서 주렁주렁 사진들이 익어갔다 너무 익은 사진은 바닥에 떨어져 짓물렀다 방안 가득 단물이 고였다 물컹물컹 사진들이 내 발목을 핥았다 한 달 전에도 사진을 찍었다 어제도 찍었다 화분에서 흘러넘친 필름은 창을 향해 넝쿨처럼 뻗었다

  출렁이는 필름을 타고 앳된 얼굴의 어머니가 오셨다 여기저기 셔터를 눌러대는 나를 보셨다 어머니에게 렌즈를 맞추었다 눈을 깜박이던 어머니가 벽에 걸렸다 액자 속에서 어머니는 두 팔을 바닥으로 길게 내리뻗었다 발 디딜 틈 없이 쌓인 사진을 비집고 가위를 집어 올렸다 나는 어머니 아래 웅크리고 앉았다

   어머니는 손에 잡히는 대로 사진들을 오려냈다 눈을 감은 어머니는 가위질 솜씨가 대단했다 물집을 도려내자 사진들은 오븐에 구운 것처럼 금세 바삭해졌다 다리가 잘린 아버지가 목이 없는 아이의 무릎에 포개져 방바닥에서 웃고 있었다 감탄한 나는 자꾸 사진을 찍었다

  (중략)토막난 사진들이 보기 좋은지 어머니는 자꾸 오렸다 눈은 뜨지도 않으셨다 푸른 날개를 단 반 토막의 기차가 방바닥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어머니의 가위질은 멈추지 않았다 밤이 되자 사진들은 분말이 되어 흩날렸다 어머니의 가위를 피해 습자지처럼 얇아진 나도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창가에서 떠돌다 끈적한 천장에 들러붙었다 난자당한 사진들 속에 흩어져 있던 나의 눈들이 천천히 걸어나와 나를 찍었다

- 이민하, 「사진놀이」부분


  사물을 보는 행위는 “사진을 찍”는 행위로 표현된다. 화분 속에 주렁주렁 익어가는 열매조차 시적 자아에게는 ‘사진’으로 보인다. 이미지에 비인간적인 기계적 물성(物性)으로 가득한 것이다. 사물을 바라보는 행위 자체가 사진을 찍는 행위라는 시적 상상력은 우리가 얼마나 이미지의 삶에 오염되어 있는가를 보여준다. 이미지로 가득한 삶의 가상과 허위를 오려내고 삶의 실재를 보여주고자 하는 어머니의 “놀라운 가위질 솜씨”에도 불구하고, 이미지에 오염된 “나”는 “어머니의 가위를 피해 습자지처럼 얇아”진 채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그리고 “난자당한 사진들 속에 흩어져 있던 나의 눈들이 천천히 걸어나와 나를 찍”는 것이다. 사진 속의 “나”가 현실 속의 “나”를 찍는다는 진술은 가상과 실재의 전도 현상을 드러내는 동시에, 이미지에 포획된 현대인의 주체 상실이라는 실존적 정황을 보여 준다. 주체 상실은 ‘사진을 찍는’ ‘무반성적’인 행위 속에 존재한다. ‘사진을 찍는’ 이미지 생산행위는 실재에 대한 어떤 반성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사진찍기의 자동적이고 기계적인 행위 속에 시적 자아는 함몰되고 무화된다. 곧 육체의 눈은 영상기계에 지나지 않게 되고, 이미지의 범람 속에 시적 자아의 ‘주체’는 증발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적 상황은 다른 젊은 시인들에게서도 발견되는 공통적인 현상이다.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시적 제재는 당연하게도 ‘텔레비전(브라운관)’이다. 이영주는 브라운관을 통해 전달되는 ‘이미지’를 “새로운 피”, “황홀한 피”, “나쁜 피”(이영주,「나쁜 피」)로 진술한다.


  화면을 켜면

  내 속으로 들어오는 새로운 피

  고압전류에 휩싸인 그가

  긴 담벼락을 질주하네

  몸 속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내려가네

  컬러바 전자기호가 우르르 쏟아지네

  나는 깊은 곳에 그를 수혈하네 화면을 켜면


  너는 고아다

  너를 키운 것은 기호였다 그리운 것들은 모두 터질 것 같은 전선의 미로 속으로 흘러들었다 뜨거운 전선줄이 아버지의 목을 동여맸다 너는 기호의 아버지를 만났다 투명한 꽃잎을 본 것도 기호의 해독코드가 가동되면서부터였다 추억의 흐릿한 빛으로 사라진 아버지를 화면 밖에 파묻고 너는 새로운 플러그를 꽂았다 너는 고아였고 네 몸은 나쁜 피로 가득 차올랐다 점점 네 머리를 덥히는 아름다운 피


  그와 뒤엉켜 이제 나는 밑으로 가라앉네

  그가 더듬을 때마다 축축하게 젖어오는 자궁의 일련번호들

  방 안 가득 넘실대는 새로운 종족의 사생아들

  나는 황홀한 피 속에 잠기네

- 이영주 「나쁜 피」전문


  텔레비전을 통해 쏟아지는 이미지의 과잉은 시적 자아를 억압한다. 텔레비전의 이미지는 근원을 알 수 없는 파편적인 것이다. 그래서 영상이미지의 자녀인 시적 자아는 ‘고아’일 뿐이다. 시적 자아 속에 가득 차오르는 영상이미지는 “나쁜 피”다. 그 순간 시적 자아는 이미지를 주관하는 텔레비전에 의해 감호받고 관리되는 무력한 자아가 된다. 그것은 이미지인 “그가 더듬을 때마다 축축하게 젖어오는 자궁의 일련번호들”을 통해 암시된다. “새로운 종족의 사생아들”은 텔레비전 앞에 모여 있는 현대인의 초상인 것이다. 그들의 기억과 내면은 정체와 출처를 알 수 없는 온갖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그것은 삶의 실재에 기반한 이미지가 아니며, 가상현실의 이미지이다. 그것은 시적 자아의 존재를 지워버린다. 이미지의 포만과 번식이 오히려 시적 자아를 무화시켜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무화의 감각은 거부할 수 없을 만큼 “황홀한” 것이기도 하다. 이미지 속을 떠도는 “모니터킨트”! 그는 “한밤중에 일어나 눈동자를 열고 모니터를 꺼내”는 것이다.(유형진,「모니터킨트」)  “아무도 텔레비전을 끄지 못하”는(이영주, 「유적지」) 상황은 ‘모니터킨트’의 거부할 수 없는 ‘탈현대적’ 실존이다.

 

  모니터킨트에게 있어서 “눈알”은 곧 육체의 전부다. 왜냐하면, 이미지에 가장 기민하게 반응하는 신체 기관이 ‘눈’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한 그루의 거대한 눈알나무”(김민정, 「멀리 개 짖는 소리 들리더니」)로 형상 된다. ‘눈’이 아닌 ‘눈알’이라는 시어는 이미지 과잉으로 충혈된 눈의 피로성을 더욱 핍진하게 한다. “내 몸에서는 사랑스런 난자 대신 눈알들이 자라”난다. 인간 생식의 생물학적 근원인 난자 대신 눈알이 자라나고 있다는 시적 언술은, 곧 이미지를 채취하는 눈이 우리 삶의 실존적 근거임을 말해준다. 그 눈알들이 자리한 “죽은 개의 악다문 입”은 죽음의 공간이자 공포로 가득한 이 세계의 밀폐성을 단번에 그려낸다. 동시에 그 눈알이 “오히려 죽은 개를 한입에 삼겨버리는” 기이한 풍경은 세계의 공포를 집어삼키는 눈, 혹은 세계를 집어삼키는 눈의 공포를 드러낸다. 인간은 곧, 이미지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공포에 질린 “눈알”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두 종류의 “눈알”이 있다. 하나는 대상의 실재 이미지를 감각하는 진짜 육체로서의 눈알이고, 다른 하나는 육체를 대체한 카메라로서의 눈알이다.(김민정, 「눈 내리는 거리에 눈알 파는 소년들이 들끓었다」) “눈알 사세요 눈알 사세요”! “눈알 팔이 소년”이 팔고 있는 “눈알”은 실재 이미지를 감각할 수 있는 육체의 “눈알”이다. 하지만, 라이터가 성냥을 대체했듯이, 육체의 눈알은 소외된다. 그래서 “눈알 팔이 소년”의 이미지는 성냥팔이 소녀의 가련한 이미지와 중첩된다. 현대사회에서 자본축적의 주요원천이 되고 있는 기계의 “눈알”은 가상 이미지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눈알”, 다시 말해 카메라로 대표되는 영상기계다. ‘눈알/눈알’의 대립은 곧 ‘육체/기계’, 혹은 ‘실재/가상’의 대립과 등가를 이룬다. 기계로서의 눈알은 인간을 감시하고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 육체로서의 “눈알”은 “모래바닥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이리저리 뒹구는 눈”, 놀이터의 흙속에 묻어버린 “눈알”(이영주, 「재미있는 놀이」), 폐기처분된 “눈알”인 것이다. 이는 이미지가 실재를 삼켜버린 가상현실의 탈현대적 정황을 암시해준다.


3. 죽이고 싶은 ‘육체’의 아버지, 황홀한 ‘기호’의 아버지

 

  눈이 바라보는 이 세계는 거대한 ‘아버지’다. 인간은 언어의 질서를 배워가면서 아버지(세계)의 법 또한 체득해 나간다. 자신에게 상징계라는 폐쇄된 순환고리를 만들어준 아버지로부터 인간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아버지의 법은 곧 세계의 질서다. 세계의 벽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벽을 빠져나가는 것은 “꿈”에서나 가능할 뿐이다. “꿈을 꾸었어요 이카루스, 벽을 빠져나가는 꿈/ 눈감지 말아요 이카루스, 다가갈 수도 달아날 수도 없는 걸요”(이민하, 「사각의 눈」) 이카루스는 신(세계)이 설정한 한계를 뛰어넘고자 했으나, 비극은 비의(秘義)에 다가가고자 하는 자에게 필연적으로 다가온다. 상징계의 벽은 “쇠망치”를 들이대도 무너뜨릴 수 없다. “벽은 무너질 줄 모르”는 것이다.

 

  아버지의 법은 “새장”(이민하, 「앵무새 一家」)으로도 상징된다. “날갯죽지가 가려”운 딸아이에게 아버지는 오히려 “새장”을 선물한다. 날갯죽지의 “가려움”과 “새장”은 의미의 대립을 이룬다. 딸아이의 애원과 아버지의 행위는 빗겨나가고 온전한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날갯죽지가 가렵다구요 아버지, 생일은 두 달 전에 지나갔잖아요.” 그러나 “아버지는 딸아이의 말이 끝난 식탁 위에 마침표처럼 새장을 단호하게 내리찍”는다. 그리고 말한다. “작고 예쁜 새를 길러보렴 얘야, 날개보다 아름다운 걸 키울 수 있을 테니 너의 흥건한 피로 새장을 꼼꼼히 칠해 보렴”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아버지는 딸아이를 새장 속에 가둘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가두는 것이다. “아버지는 팔과 다리를 구겨 새장 안으로 들어”간다. 아버지는 온전하게 상징계(새장)의 부피와 일치한다. 상징계의 바깥은 아버지의 영역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아버지 또한 상징계에 갇혀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는 동시에 ‘육체’(실재)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이영주에게 ‘아버지’의 이미지는 보다 실재적이다. 다시 말해, 이영주의 “아버지” 이미지는 정신분석에 적합한 심리적 실재가 아닌, 실제 현실에 근거하고 있다. 아버지는 “하루 종일 거리를 떠다니”다, 밤이면 “담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던” 전형적인 가장의 모습이다. “나는 문 뒤에 숨어/ 어둠이 빨아들이는 연기를” 바라볼 뿐, “벽에 박힌/ 검은 재 같은 아버지의 뼈를/ 만져 보지 못”한다.(「어떤 통증」) 그리고 아버지는 “점점 척추가 휘어가는 아버지”(「아버지의 작업」)이거나 “혀 잘린 개의 벌어진 눈”(「수장(水葬」)과 같은 죽음의 이미지와 ‘안쓰럽게’ 병치된다. 그래서 이영주에게 “집은 무덤이”며, “봄빛은 거미처럼 무덤을 판다”(「봄빛은 거미처럼」)라는 시적 진술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그런데 이영주의 시에는 육체의 아버지에서 “기호의 아버지”로의 전환점이 발견된다.

  

  너는 고아다

  너를 키운 것은 기호였다 그리운 것들은 모두 터질 것 같은 전선의 미로 속으로 흘러들었다 뜨거운 전선줄이 아버지의 목을 동여맸다 너는 기호의 아버지를 만났다

- 이영주 「나쁜 피」부분


  이 고백은 ‘육체’(실재)의 아버지를 제거하고, “기호의 아버지”가 이 세계의 법을 접수했음을 암시한다. 육체의 아버지가 “뜨거운 전선줄”에 “목을 동여매”여 죽음으로써, 비로소 새로운 “기호의 아버지를 만나”게 된 것이다. ‘기호'의 아버지는 ‘이미지’의 아버지이며, 시뮬라크르가 지배하는 이 세계의 법이다. 원본 이미지로서의 근원은 아득히 멀어지고 복제된 영상 이미지가 이 세계를 유령처럼 떠돌게 됨으로써, 시적 자아는 새로운 ‘기호’의 아버지를 맞이하여 유희에 젖거나 끝까지 저항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시적 자아에게 이 기호의 아버지는 역설적인 존재이다. 기호의 아버지가 제공하는 “새로운 피”는 분명히 “나쁜 피”이면서 동시에 “황홀한 피”인 것이다. 이처럼 시뮬라크르가 지배하는 천국(지옥)에 대한 이 모더니킨트의 태도는 양가적이다. 그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이 양가적 태도는, ‘육체’(실재)와 ‘기호’라는 ‘두 아버지’를 둔 혼란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젊은 시인들은 ‘기호’의 아버지, 다시 말해 이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의 세계를 받아들인다. 이로써, 그전에 존재했던 ‘육체’(실재)의 아버지는 이제 거부의 대상이 된다. ‘육체’의 아버지는 원본 이미지이자, 삶의 실재를 드러내는 진리로 존재해 왔다. 이 세계는 “구름만큼이나 낡아빠진 목소리로 위대한 것 웅장한 것을 노래하”던 “아버지들이 짓다 허문 모래성"(황병승, 「판타스틱 로맨틱 구름」)임에도 불구하고, 온갖 금기와 억압을 자행하는 폭력적인 법으로 군림한다. 그러한 억압의 법을 벗어나 새로운 법으로의 ‘엑소더스’는 필연적인 과정이며, 이전의 부친은 제거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김민정의 시에서 발견되는 부친 살해 욕망의 극단적인 표출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

  아버지는 오늘도 쥐약 먹은 개처럼 날뛰었다(중략) 죄다 나와 이 빌어먹을 딸년들아! 우리들은 촛농처럼 울었다(중략)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우리는 꽃삽으로 구덩이를 파놓았어요 밥만 먹고 우리는 열심히 땅을 팠어요 파놓은 구덩이 속에는 장독대를 묻어두었어요 장독대 안에 아버지의 베개도 옮겨다 놓았어요(중략)


2.

  아버지의 건강 진단서는 쓰레기통에 처박힌 그제 일자 신문처럼 안 읽고도 따분해요


  뭐 좀 신나는 일이 없을까요

- 김민정,「그러나 죽음은 定時가 되어야 문을 연다」부분


   이 고얀 년아, 육실헐 년아, 벼락 맞아 뒈질 년아, 이년아, 네가 날 살려야지


   (텅, 텅, 텅)


   下官은 이제 끝났어요, 아버지 그만 아가리 닥치고 잠이나 퍼 자요

- 김민정,「마지막 舌戰」부분


  죽어도 / 절대 / 안 죽는 / 내 / 소꿉친구의 / 아버지는 / 이제 / 영원히 / 내가 / 죽여버렸어요

- 김민정, 「죽어도 절대 안 죽는 내 소꼽친구의 아버지는 이제 영원히 노래할 수 없어요」부분


 인용된 부분은 부친 살해의 단계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부친 살해 시도와 성공, 그리고 다른 아버지마저도 살해하는 과정은 육체의 아버지에 대한 철저하고 뿌리깊은 살해 욕망을 드러낸다. “오늘도 쥐약 먹은 개처럼 날뛰는” 아버지의 모습은 시적 자아가 벗어나고 싶은 이 세계의 폭력상이다.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이라는 아늑한 상상계의 요람을 벗어나게 되면, 아버지를 묻을(죽일) “구덩이를 파놓”을 수밖에 없다. “구덩이 속에는 장독대를 묻어두”고 “장독대 안에 아버지의 베개도 옮겨다 놓”는다. 아버지의 죽음을 소원하며, 아버지의 베개를 묻는 이 ‘감염주술’ 행위는 부친 살해 욕망의 간절함을 강조한다. “下官은 이제 끝났어요, 아버지 그만 아가리 닥치고 잠이나 퍼 자요”에서처럼, 살해된 아버지는 이제 시적 자아에게 어떤 권위도 없다. 그것은 더 이상 울분의 대상이 아닌, 분노와 조롱이 섞인 야유의 대상일 뿐이다.


나는 태우다 만 금붕어들을 죽은 아빠의 입 속에 꾸역꾸역 쑤셔넣고 있습니다 죽은 아빠가 뒤집어진 물방개처럼 발발거리고 있습니다 엄마가 씩 웃으며 달군 다리미로 죽은 아빠의 몸을 주름 잡아 다리고 있습니다 나도 따라 씩 웃으며 ZIPPO 라이터로 죽은 아빠의 주름 잡힌 몸을 지글지글 지져대고 있습니다 죽은 아빠가 뻐끔뻐끔 금붕어 물 빠는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엄마와 내가 죽은 아빠를 번쩍 들어올려 어항 속에 처넣고 있습니다 죽은 금붕어들이 어항 속에 빠져 죽은 아빠를 뱅뱅 돌려가며 뜯적뜯적 뜯어먹고 있습니다(중략) 엄마와 내가 고 - 고 - 고 금붕어 사내기 맞고를 칠 때의 일입니다

- 김민정,「매일매일 놀러오는 우리 죽은 아빠」부분

 

  육체의 아버지는 시적 자아와 완벽한 결별을 이룬다. 가끔씩 출몰하는 유령처럼 아버지가 찾아와도, 시적 자아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아버지를 희롱한다. 오히려 죽은 아버지를 조롱하고 고문하는 것이다. 그곳에는 어떤 연민의 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위장된 아이러니의 느낌조차 가질 수 없을 정도로 죽은 아버지에 대해 철저히 거리를 둔다. 이러한 희롱과 조롱은 이미 “엄마와 내가 고 - 고 - 고 금붕어 사내기 맞고를 칠 때의 일”, 다시 말해 과거의 일인 것이다. 그리고 부친 살해 이후 새로운 아버지가 이 세계를 접수한다. 그것은 금기, 권위, 폭력, 질서, 이성, 위계 등으로 명명될 수 있는 육체의 아버지가 아니라, 탈중심, 탈권위의 정상/비정상을 구분하지 않는 새로운 “기호의 아버지”다. 그것은 실재/비실재를 나누지 않고 ‘그것’ 자체로 존재하는 이미지의 법이며, 시뮬라크르의 무국적의 이미지가 지배하는 ‘기호’의 세계인 것이다. 다시 말해, 이미지가 모든 것을 삼키는 시뮬라크르의 세계다.

         

4. 이미지의 증식, 자아상실, 환유적 몽타주

 

  황병승과 유형진의 시세계는 이미 ‘육체’의 아버지가 죽어버린 세계다. 황병승의 「벤치 스텝핑(Bench Stepping)」에 육체적 아버지의 흔적이 일부 남아 있긴 하지만, 그조차도 이미 엽총을 든 어머니에게 쫓기는 “겁에 질린 아버지”일 뿐이다. 금기와 권위와 폭력적인 힘을 지닌 육체의 아버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무의식 속에 자리잡은 이드(id)를 통제하고 억압할 아버지의 부재는 곧 시적 자아 속에 내재한 이드(id)의 해방을 함축한다. 이는 시적 스타일의 일탈적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13) 다시 말해 이드의 해방은 시의 해체적 성향을 강화하는 것이다. 부친 살해의 욕망으로 들끓는 최근 젊은 시인들의 특이성은 시의 형식적 파괴와 더불어 이미지의 자유로움, 다시 말해 이미지의 무질서한 ‘번식적’인 스타일이다. 이미지는 의미를 전달하는 도구다. 그러나 이들의 시에서 일관된 의미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무질서한 이미지의 나열과 파편적 서사는 시적 의미 파악을 어렵게 하거나 불가능하게 한다. 이들의 시는 철저하게 환유의 ‘파편적’ 이미지 배열을 통해 시를 직조해내는 것이다. 그리고 해방된 이드(id)가 주관하는 환유의 이미지는 이제, 실재가 없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로의 지향이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이는 대중문화의 세례로 인한 리얼리티의 변화를 암시하는 동시에, 총체성을 담지하지 못하는 ‘탈현대성’의 자연스러운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해, 그것은 시뮬라크르가 지배하는 현대소비사회의 새로운 리얼리티, ‘가상현실’이라는 의의를 획득한다. 

 

  「캔디바를 물고 있는 폭풍 속의 하록 선장」(유형진)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하록 선장은 애니메이션 속에만 존재하는 가상실재다. 문제는 하록이 영화관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에서 튀어나와 현실의 거리에서 활보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하록은 녹아흐르는 하늘색 캔디바의 단물을 쭉 빠”는 가벼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현실은 “더이상의 전쟁은 없는 시대”(얼마나 많은 전쟁이 진행중인가!)이고 스크린 내에서만 “살육”이 자행된다는, 가상과 실재의 전도현상과 뒤섞임은 영상문화에 중독된 현대인의 왜곡된 삶을 드러낸다. 그것은 “텔레비전 채널이 아이의 손가락을 돌리고/ 아이가 은하철도를 타고 티비 속으로 들어가”며, “여자는 브라운관에 머리가 낀 아이를 끌어내”(이민하,「데칼코마니」)는 것과도 같은 자아상실의 삶이다. 

 

  자아상실은 ‘거울’의 현대적 해석을 통해 한층 깊이 있게 드러난다. 이상의 「거울」이 ‘자아분열’ 징후의 고전적 전범을 보여준다면, 최근의 ‘거울’ 이미지는 실재와 가상이 뒤섞인 ‘자아’의 양상을 보여준다. 「거울놀이」(이민하)와 「잠들어 거울 속에서 눈 뜬 검은 나나」(김민정)는 정체 모를 이미지의 어지러운 교합을 통해, 모호하거나 해체된 자아를 드러낸다. 특히 김민정의 「나는 안 닮고 나를 닮은 검은 나나들」연작은 자기분열적 징후와 함께 이드(id)의 표출로 인한 끔찍하고 잔인한 이미지를 드러내는데, 이 또한 삶의 실재를 떠난 가상 이미지에 근거한다.(‘나나’라는 이름 또한 분열된 ‘자아’의 복수결합을 의미한다)


염통 껍데기에 크림치즈를 바르고서 시뻘겋게 달군 석쇠에 지글지글 구웠더니 앗 뜨거 앗 뜨거 하면서 내가 혈관솔기를 뜯고 나와 까꿍 했대요

- 김민정,「회상의 회상 - 나는 안닮고 나를 닮은 검은 나나들2」


가나안 정육점 앞에서 외팔이 소년을 만난다 외팔이 소년은 제 한 팔을 갈아먹은 고기 써는 기계에 내 한 다리를 쑤셔넣고는 오늘도 영구 흉내를 내보인다 띠리리리리리 띠리리리리리 바람이 외팔이 소년의 손 없는 팔에 퉁퉁 불린 소매를 달아준다(중략) 덜렁덜렁해진 모가지로 끄덕끄덕하며 나는 호주머니에서 연필을 꺼내 외팔이 소년의 혀를 꾸욱 하고 찍어버린다

-김민정,「엄마,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 나는 안닮고 나를 닮은 검은 나나들3」


항문을 뚫고 들어온 쇠꼭지 달린 팽이가 지금 막 내 관자놀이를 관통하는 중이니까요(중략)당신은 물에 날 타 마시고 차츰 나 없는 내가 되어가겠죠

-김민정,「아멘! - 나는 안닮고 나를 닮은 검은 나나들4」


   이와 같은 잔혹한 이미지는 실재를 바탕한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잠재된 잔혹한 영상이미지들이 시적으로 변주되어 나온 혐의가 짙다. 복제의 복제를 통해 생산된, 실재를 상실한 가상의 잔혹한 이미지는 소실되어가는 자아의 복부를 가르고 쏟아지는 이드의 내장과도 같은 것이다. 이처럼 이미지에 걸린 문제는 장 보드리야르의 말을 빌리자면, “항상 자기자신의 모델인 실재를 죽이는 이미지의 살상력”14)이다. 이는 이미지 증식으로 인해 비롯되는 실재와 자아상실의 문제를 다시 한번 각인시킨다.


   자물쇠 단단한 철창 안에서만 잠들 줄 아는 날 내다 팔기 위해 오늘도 아빠는 포수로 그림자를 갈아입는다 나는 도망치지만 발빠르게 헛돌아가는 외발자전거는 땅속 깊이 층층 계단으로 쌓아 내린 뼈 마디마디를 뭉그러뜨리며 또 다른 사각의 메인 스타디움 안에 발 빠진다 끝도 없이 페달을 감아대는 레이스 끝에 홈스트레치에 접어들자 관중석마다 빽빽이 들어차 있던 나들이 일제히 일어나 박수로 내 나침반을 겨냥한다 어서어서 속력을 더 내렴, 너만 도착하면 완성된 퍼즐 속에서 우리들 되살아날 수 있을 거야

- 김민정,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부분


  이 시는 일관된 의미를 도저히 발견할 수 없는 장광설에 불과하다. 일종의 무의미한 지껄이기, 혹은 ‘수수께끼’다. 작품의 수수께끼적 성격은 삶의 실재를 잃어버린, 현대적 삶의 국면을 잘 드러내준다. 수수께끼적 삶과 마찬가지로, 수수께끼의 예술은 감성적 반응이 불가능하다. 이것은 ‘해석’을 필요로 한다. 예술작품의 수수께끼적 성격 해명은 작품과의 거리를 유지한, “사상이나 철학 혹은 작품의 규율 등등 모든 형태의 매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15) 그러나 실재와 자아의 상실이라는, 현대시가 빠져버린 미궁은 쉽사리 헤어나올 수 없다. 이 미궁의 탈출방법은 오로지 “외발자전거”의 무한질주뿐이다. 그러나 이 무한질주를 통해서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퍼즐이 완성된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 “우리들”이 “되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소망은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가상 속에서 “나”는 “이미죽은나”이기 때문이다.  


이미죽은나는 삶은 무처럼 연하고 물렁물렁해진 엄마아빠를 세발자전거에 태우고 꿈 밖으로 페달을 밟아 나간다 이미죽은내가 기다리고 섰던 내 앞에 엄마아빠를 내려놓는다 이미죽은나는 홀로 세발자전거에 올라 내 눈 속으로 달려든다 이미죽은나를 눈알 속에 잠재우고 나는 잠든 엄마아빠를 등에 업은 채 다시 오븐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 김민정, 「살수제비 끓이는 아이」부분

   

  부모는 “나”의 생물학적 근원이다. 그런데 “엄마아빠”가 “삶은 무처럼 연하고 물렁물렁해”진 것이 아닌가? 소실되어 가는 이 실재의 덩어리를 “세발자전거에 태우고 꿈 밖으로 페달을 밟아 나가지만”, 바깥에는 “이미죽은내”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이미죽은나”는 망실된 실재로서의 자아를 암시한다. 게다가 “이미죽은나는 홀로 세발자전거에 올라 내 눈 속으로 달려든다”는 구절 또한 의미심장하다. “이미죽은나”와 “내 눈”은 자아의 실재/가상이라는 변별적 대립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아의 실재는 이미 죽어버린 것이다. “내 눈”은 모든 사물이 빨려들어가는, 시뮬라크르를 복제하는 ‘괴물’의 눈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이미죽은나를 눈알 속에 잠재우고 잠든 엄마아빠를 등에 업은 채 다시” “오븐”이라는 물화되고 기계적인 삶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이다. 이처럼, 이 시는 ‘가상현실’이라는 불가피한 탈현대적 삶의 국면을 충격적으로 환기시킨다.

 

  황병승은(유형진과 마찬가지로) 다른 시인들과 달리, 부친 살해로 인한 죄의식으로부터 해방되어 있다. 이것은 황병승의 시가 매우 발랄하고 거칠 것이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시는 『여장남자 시코쿠』라는 이반적이면서 왜색풍인(일본증오에 근거한 민족관념에도 불구하고) 시집제목이 암시하듯이 트랜스젠더, 게이, 드랙퀸, 크로스드레서라는 비주류의 성도착자들이 자기충족적으로(어떤 망설임이나 자기균열조차 없이) 즐겁게 활보하는 공간이다. ‘성도착자’라는 억압적인 말조차도 이미 분쇄되고 추방당한 공간이며, 여기에는 탈중심․ 탈권위의 해체와 전복(顚覆)의 동력으로 비주류 하위문화를 넘나드는 매우 발랄한 이미지들로 넘쳐난다. 그의 시는 ‘여장남자 시코쿠’가 “똥이 막 나오려고 하는 순간의 감정”(「밍따오 익스프레스C코스 밴드의 변」)으로 “악기를 연주하고” 부르는 노래와 같다.


  태양남자 애인 하나 없이 46억년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지구를 비췄다 왜, 무엇 때문에, 무슨 영화(榮華)를 누리겠다고. 여름, 일 년에 한 번 나 자신을 강렬하게 책망했다


  늙은 나무들 과수원 바닥에 사과 배 대추 감, 열매들이 떨어질 땐 너희들이 먹어도 좋다는 게 아니고 우리들이 또 한번 포기했다는 뜻이다, 가을


  미스터 정키 어떤 계절은 남녀를 가리지 않을 정도로 뜨겁고 또 어떤 계절은 순식간에 싸늘해져서 남자도 여자도 그 어느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정도로 뿌리부터 차가워지지


  힙합 소년j 친구들은 늘 우정이 어쩌구 선후배가 어쩌구 떠들어대지만 스윗 숍(sweet shop) 앞을 지날 때면 부모형제도 몰라봅니다 친구들은 커서 달콤한 가게의 핌프(pimp)가 되겠죠

  나는 다릅니다 나는 생각이 있어요 붓질을 잘하면 도배사 하지만 글을 배워서 서기(書記)가 되지는 않을 거예요


  이소룡 청년 차력사인 아버지의 쉴새없는 잔소리에 머리가 늘 깨질 듯이 아팠다 쌍절곤 휘두를 힘도 없다 가끔 정키 씨를 불러 리밍을 시켰다


  저팔계 여자 벽을 따라 게처럼 걸었죠(중략)


  깊은 밤이었고 눈이 내렸다

  스윗 숍에서부터 시작된 불길은 에로틱파괴어린빌리지 전체로 번져나갔다

- 황병승,「에로틱파괴어린빌리지의 겨울」부분


  이 시의 등장인물은 실존인물(이조차도 시뮬라크르화되어 있다)과 가상인물이 뒤섞여 있으며, 대화내용(이것이 정말 극시 형태라면) 또한 파편적이고 단절되어 있다. 따라서 이 시는 의미 자체가 해체되어 있으며, 형식 또한 전통시의 범주를 벗어난다. 관계가 전혀 없는(실존인물, 가상인물, 정체불명의) 인물들의 대화내용 배열은 비유기적인 환유체계의 시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전혀 무의미한 각 내용의 배열 전체를 아우르면, 하나의 의미망이 형성된다. 파편화되고 단절된 대화는 탈현대적 개인주의의 일상을 드러내는 것에 다름 아니며, 그 최소한의 의미조차 순식간에 휘발해버리는 무가치한 삶이라는 허무주의적 ‘우수’가 바로 그렇다. 이 시는 일종의 몽타주 기법으로 자유롭고 발랄하게 실재와 가상을 넘나드는 동시에, ‘포괄적 결속’에 의한 의미함축에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시어 하나에 함축된 의미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상징적 의미 자장을 넘어 이야기 속을 질주하는 순간”16)이다. 환유체계를 질주하며 드러내는 거대한 기계로서의 세계의 전체상이 중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이들의 시는 비유기적인 형식의 환유성을 띠고 있다. 환유는 시간적․공간적 인접성, 혹은 논리적 인접성에 근거를 두지만, 김준오의 지적대로 현대 해체시의 환유체계는 ‘인접성의 혼란’17)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영화기법의 ‘환유적 몽타주’18)를 환기시킨다. 여기서 현대시학의 새로운 가능성이 발견된다. ‘환유적 몽타주’는 추상적 개념 아래 다양한 영역을 포괄하는 ‘포괄적 결속’으로서 개별들의 합을 통한 새로운 의미 창출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5. 유희와 숭고 - 부정성의 시학

 

  아도르노에 따르면, 몽타주는 현대예술의 미학적 변화를 수용한 결과다. 아도르노는 예술은 후기자본주의의 총체성에 대한 자신의 무기력을 인정하고 이러한 총체성을 제거하기 시작하였으며, 몽타주는 “이질적인 것에 대한 예술의 미학 내적 굴복”이라고 말한다. 실재에 대한 사실성을 포기함과 아울러, 종합에 대한 부정이 예술형상화의 원칙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몽타주는 모순적이고 파편적인 부분들의 결합(몽타주)을 통해 새로운 의미의 총체성을 실현한다.19) 여기서 아도르노는 현대예술의 숭고함을 발견한다. “숭고함의 근원은 잠재적인 모순들을 은폐하지 않고 자체 내에서 철저히 극복하려는 예술의 욕구와도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 예술의 숭고함은 현대사회에서 공허하게 울릴 뿐이며, 끊임없는 유희와 함께 다시 무의미로 퇴행하는 양상을 보인다. 다시 말해, “현대 예술은 숭고함과 유희가 일치하”20)는 것이다.

 

  아도르노의 논의는 진리의 계시를 허락하지 않는 현대사회의 거대한 무의미성에 포획되는 동시에 저항하는 현대시의 역설적인 미학으로 충분히 수용할 만한 것이다. 현대시의 해체적 양상은 매우 유희적인 것이지만, 그 안에는 예술의 부정을 통해 예술의 진리를 드러내고자 하는 숭고함의 미학적 원리21)가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 현대시의 유희는 숭고함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적 태도를 설명하는 데 매우 유용한 근거가 될 만하다.

 

  유형진의 「미끄럼을 타는 m」, 「쿠오바디스;날치 알은 왜 날지 못하는가」,「애주가i」,「인어횟집」과 같은 시들은 매우 가볍고, 세속적이고, 타락하고, 무미건조한 인물들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구체적인 삶의 풍경은 증발해 버린 채, 환영같은 인물들이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삶을 그려내는 시적 태도는 매우 유희적이다. 미끄럼의 끝이 어디인지 모른 채 끊임없이 계속 내려가는 “미끄럼 타기 좋아하는 m"이 그렇듯이 이들은 매우 희희낙락하거나 진지하지 못한 인물이다. 「쿠오바디스」에 등장하는 인물 역시 매우 문제적인데, 전대미문의 9․11 테러 앞에서 “지구의 북반구 어느 반도에 사는 아줌마”는 한가롭게 마늘만 까고 있을 뿐이다. 9․11 테러조차 영상매체에 걸러져 하나의 ‘가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삶의 파편성에 매몰되어 전체성에 이르지 못하는 현대인의 초상이다. 부표처럼 가상의 공간에 떠도는 듯한 현대인의 삶은 그만큼 가볍고 허무한 것이 된다. 그리고 아래 시에서 일어나는 이미지의 증식을 보라!


   ⓐ한 아이가 거울을 보고 울고 있네

  꿈에서 막 깨어난 한 아이가 거울을 보며 울고 있네

  벼랑 끝에 서 있던 꿈에서 막 깨어난 한 아이가 거울을 보며 울고 있네

  붉은 사자가 달려오는 벼랑 끝에 서 있던 꿈에서 막 깨어난 한 아이가 거울을 보며 울고 있네

  여름 해변처럼 타오르는 갈기를 매단 붉은 사자가 달려오는 벼랑 끝에 서 있던 꿈에서 막 깨어난 한 아이가 거울을 보며 울고 있네

  모래밭에서 알을 낳는 옥색 치마의 어머니를 집어삼키던 여름 해변처럼 타오르는 갈기를 매단 붉은 사자가 달려오는 벼랑 끝에 서 있던 꿈에서 막 깨어난 한 아이가 거울을 보며 울고 있네

울고 있는 아이가 눈을 뜨는 모래밭에서 알을 낳는 옥색 치마의 어머니를 집어삼키던 여름 해변처럼 타오르는 갈기를 매단 붉은 사자가 달려오는 벼랑 끝에 서 있던 꿈에서 막 깨어난 한 아이가 거울을 보며 울고 있네

  중천의 해만큼 키가 자라버린 한 아이가 거울 속에서 혹은 거울 밖에서 울고 있는 아이를 보며 울고 있네

- 이민하, 「한 아이가 거울을 보며 울고 있네」전문(밑줄, 알파벳; 인용자)


  이 시는 ⓐ의 문장이 ⓑ의 문장으로 확장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확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무한대로 뻗을 수도 있다. 이것은 동시에 증식적(增殖的)이다. 동일한 통사구조의 확장적 증식!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성(진리)에 이르고자 하는, ‘무한한 복제’의 확장적 증식은 전체성(진리)에 결코 이를 수 없다. 이미지의 무한한 생산과 증식은 동일자의 무한한 복제를 통해서 거대한 기계로서의 이 세계를 공허하게 채울 뿐이다. 거울 앞에서 울고 있는 아이는 시뮬라크르의 세계 속에서 전체성(진리)과 실재로서의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의 초상인 것이다.

 

  이미지의 무한한 증식은 「사방물결무늬」(이민하)와 같은 모니터의 바탕화면과 같은 세계의 모습으로도 드러난다. 이 세계는 단지 “또 다른 오늘로 넘어가”고, “축제는 시작되지 않”으며, “끝나지도 않”고, “자정은 영원히 오지 않”으며(“축제는/자정에 시작한다”) 실재와 무관한, 그것 자체로 ‘자족적’인 가상현실인 것이다. 시뮬라크르의 세계 속에서 세계의 본질이나 총체성은 발견되지 않는다. 세계는 다만, 중심을 빗겨가면서(중심에 대한 자의식조차 없이) 끊임없이 지속되는 “시뮬라크르들의 自轉”22)일 뿐이다. 그것은 세계의 총체성을 강요했던 ‘육체’의 아버지가 소거된 공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세계는 “끝도 없는” “이야기”(이민하, 「이야기」)처럼, 진리에 이르지 못한 채 그것 자체로 복제되고 순환될 수밖에 없는 는 것이다.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세계에서 발견되는 이 ‘시뮬라크르의 자전’은 끊임없이 시의 형식을 파괴하면서 이미지의 번식을 자행한다. 그것은 가상현실로의 자유로운 탈주를 통해 우리 삶의 제도화된 억압, 금기, 폭력의 분쇄라는 시적 의미를 획득한다. 시뮬라크르의 칼날을 손에 쥔 시인은 실재 이미지와 언어의 질서를 교란하는 동시에 수평적인 가치 계열을 따라 한없이 미끄러짐으로써 육체의 아버지를 상징적으로 살해하고 비웃고, 그것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의미한 이미지들의 ‘포괄적 결속’은 개별적 부분들의 총화 이상, 다시 말해 전체성을 향해 치닫는 역설적 의미를 내포한다. 결코 전체성에 이를 수 없는 파편적 개별자들의 끝없는 증식과 확장(환유적 몽타쥬)은, 결코 다다를 수 없으며 가득 채울 수 없는 ‘거대한 기계’로서의 이 세계상의 잠재태를 역설적으로 표상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미학적 의미는 이들 젊은 시인들의 시세계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부정성의 시학’으로서 현대시의 새로운 미학적 가능성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것이다. 


6. 시뮬라크르의 칼날 - 시(詩)의 돌연사(突然死)를 넘어, 새로운 시학을 위하여

 

  이 글에는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세계에 대한 비판과 우려에서 비롯된 대타의식의 반작용이 작용한다. 이로 인해 이 글은, 비평 주제에 비해 제한적인 논의 대상범위(2005년 상반기)라는 한계와 아울러, 다소간의 논리적 비약이라는 한계를 안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최근의 시인들이 시적 진정성의 상실과 표피성으로 말미암아 시의 타락을 조장하고 있다는 비판 역시 전통 시학에 매몰된 편협한 아집에 지나지 않음을 또한 지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의미의 부박함과 파편성, 마음대로 찌껄이기식의 요설, 그리고 영상중독에 의한 실재와 가상의 무분별은 전통시학의 관점에서 시의 위기의식을 가중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시학(미학)은 언제나 변한다. 미학이론의 ‘초역사성’이라는 나르시스적인 확신조차 역사적 검증을 통과하면, 그 이론 자체가 탄생한 시대의 특성을 분명히 지니고 있다는 점23)은 자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 명제는 시학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젊은 시인들의 성장이 인터넷․영상매체를 중심으로 한 대중문화의 세례를 벗어날 수 없었다는 사실은 시의 표피적인 변화를 설명하는 데에만 겨우 고려될 뿐이다. 영상문화의 문학에의 침투는 이젠 보편적이다 못해 진부한 일이기도 하며, 더 이상 시의 충격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여전히 ‘시의 타락’이라는 편협한 잣대 속에서, 외면할 수 있는 문학의 부면(部面)으로만 치부될 뿐이다. 이런 현상은 오래되고 경색된 미학적 ‘관습’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들에 대한 깊이 있는 미학적 평가와 시학적 원리 변화에 대한 논의는 엄두도 못낼 일인 것이다. 그러나 영상과 인터넷매체 세대로서 젊은 시인들의 세계관에 심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다시 한번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하지만 지금까지 이런 지적은 얼마나 많이 있어 왔던가!) 인터넷과 영상매체로 인한 가상현실의 체험은 이들에게 삶의 새로운 리얼리티를 제공하고, 이는 젊은 시인들의 실존적 정황 변화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은 이들에게 전래에 없던, 혁신적인 시적 정황이 된다. 다시 말해 실재/비실재의 구분조차 가상현실 속에서 화학적으로 순식간에 융합되어 버리는 이 ‘시뮬라크르’의 세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시뮬라크르’라는 ‘탈현대성’은 전통시학이 담아낼 수 없는 새로운 삶의 질적 변화다. 그런 점에서 최근 젊은 시인들의 새로운 시적 감수성에 대한 평가는 시학의 혁신이라는 관점에서 재정립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전래의 미학‘만’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고수는 폐쇄적인 자기기만의 예술작품을 생산할 뿐이며, 결국 삶의 변화를 통찰하는 예술적 비전을 망실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고립된 미학의 왜곡된 지평 속에서 예술은 파멸과 소외의 과정을 밟아나갈 것임에 분명하다. 

 

  따라서 문제는 예술이 아니고 예술가다.(마찬가지로 문제는 시가 아니라 ‘시인’이다) ‘해석’이 보다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현대예술의 경향은 생산자로서의 예술가뿐만 아니라, 해석자로서의 예술가의 지위를 요구하고 있다. 명민한 해석자로서의 예술가는 이 세계에 대한 정서적 감응을 넘어 새로운 미학적 지평을 열어보인다. 예술생산에 앞서 미학적 지평을 담지한 예술가는 보다 복잡해진 ‘탈현대성’에 ‘균형적’으로 대응하는 전위예술가로서의 입지를 획득할 수 있다. 해석자의 자질을 갖추지 못한 예술가는 예술을 통해 자신의 폐쇄적이고 본능적인 욕망을 배설할 뿐이며, 결국 미학으로부터 추방당할 수밖에 없는, ‘이드(id)의 포르노’ 제작자로 전락하게 된다.

 

  이는 시학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문제다. 시뮬라크르의 칼은 양날의 칼이다. 시뮬라크르의 칼날은 시(예술)정신 속에서 사이비 진리, 권위, 중심, 제도의 폭력이 부당하게 지배하는 타락한 현실을 겨냥하는 동시에, 시(예술) 스스로를 겨냥하기도 한다. 문제는 젊은 시인들의 시적 비전과 철학이다. 이들의 시가 감각 속으로 무단침입한 이미지들의 즉각적이고 무사유적 배설에 불과할 뿐이라면, 이는 시의 죽음과 다르지 않다. 과도하게 쏟아내는 이미지가 미학적 전략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단지 “욕망의 직접적 표출로서의 동물적 표현의 범람”24)에 지나지 않는다면, 시의 창조가 아닌 욕망의 배설에 불과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미지의 배설은 자기혁신도, 저항도 아닌 자기파괴 혹은 개인의 황폐화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의 돌연사(突然死)와도 같다. 인터넷게임에 중독되어 가상현실에 몰입한 청소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처럼, 미학적 전략 없는 언어와 이미지의 배설적 발산은 시의 존립 자체를 위태롭게 한다. 따라서 “시의 영악한 시뮬레이션, 시의 상상임신으로 인한 헛구역질, 시의 화려한 할리우드 액션”과 같은 장석주의 절망감은 이 젊은 시인들의 극복과제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시인의 꾸준한 시학적 자의식을 통해서만 극복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현대시인의 시학적 자의식은 내적 필연성을 지닌다. 이는 시인으로서의 최소한의 책무이자, 새로운 시를 기다리는 전통시학의 결핍과 공허를 설레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모리스 블랑쇼의 어법을 빌려 다시 한번 말해보자. 이제 시(詩)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렇다. 시는 자기 자신을 향해 가고 있다. 시(詩)의 본질, 즉 시의 소멸을 향해. ‘시뮬라크르의 칼’을 높이 치켜든 젊은 시인들은 시의 타락과 황폐화를 극복함으로써, 현대시의 새로운 미학을 위하여 끊임없는 시의 죽음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는 아무것도 할 말이 없으면서도 바로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을 말하면서, 불꽃처럼 ‘죽어 가는’ 동안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시뮬라크르의 칼’을 손에 쥔 시인들의 시적 운명이 존재하며, 새로운 전위시학의 미래적 선취가 도사리고 있다.

  


1) 김준오, 『현대시의 환유성과 메타성』(살림, 1997), p.152


2) 2005년 상반기에 간행된 신진시인들의 시집 중에서 유형진, 황병승, 이민하, 김민정, 이영주, 박진성의 시집을 주로 검토하였다. 검토 결과, 박진성을 제외한 이들 시인들에서 가상현실 이미지의 몽타주 환유체계라는 공통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를 논의 주제로 설정함으로써, 매우 주목받을 시편들에도 불구하고 박진성은 논의 대상에서 제외할 수밖에 없었다. 박진성에 대한 평(評)은 다른 기회로 미루고자 한다. 


3) 황종연 외, 『90년대 문학 어떻게 볼 것인가』(민음사, 1999) p.25~26


4) 장석주,〈스타일과 상상력 - 새로운 시인을 기다리며〉《현대시학》2005년 4월호, p.151


5) 권혁웅, 〈미래파 - 2005년, 젊은 시인들〉《문예중앙》2005년 봄호, p.79


6) 이장욱, 〈꽃들은 세상을 버리고〉《창작과 비평》2005년 여름호, p.70


7) 김준오, 앞의 책, p.319


8) 이장욱, 앞의 글, p.80


9) 칼 하인츠 보러(최문규 역), 『절대적 현존』(문학동네, 1998) p.179


10)  실재에 기반하지 않은 기이한 이미지로 가득한 최근의 시들을 일러 ‘환상시’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토도로프에서 캐서린 흄에 이르는 환상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결과이다. 그러나 과거의 환상이론은 ‘가상현실’이라는 탈현대적 삶의 국면을 고려할 수 없었으므로, 환상이론의 문학적 적용은 가상현실과의 역학관계 속에서 재정립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해, 문학 속에 드러나는 기이한 환각의 이미지들을 가상현실과 환상현실로 변별하여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영상매체 시뮬라크로 인한 가상현실의 대두는 기존 환상문학담론 지형의 큰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11) 김진석, 『이상현실․가상현실․환상현실』(문학과지성사,2001) 참조.


12) 장 보드리야르(하태환 역),『시뮬라시옹』(민음사, 1994) p.54


13) 스튜어트 유웬은 ‘스타일은 에고가 이드에게 바치는 충성의 맹세와 같다’는 정신분석의(醫) 조엘 코블의 말을 인용하며, “스타일은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욕망에 말을 건넨다. 사람들로 하여금 주관적인 자기체험의 조건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것을 약속한다”고 말한다.  스타일은 무의식적 충동이자 성적 에너지인 이드(id)를 발산하기 때문에, 정보의 한 형태로서의 사고를 방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스튜어트 유웬(백지숙 옮김), 『이미지는 모든 것을 삼킨다』(시각과언어, 1996) p. 330 참조.


14) 장 보드리야르, 앞의 책, p.25


15) T.W.아도르노(홍승용 역),『미학이론』(문학과지성사,2000) p.201


16) 이장욱, 「체셔 캣의 붉은 웃음과 함께하는 무한 전쟁(無限戰爭) 연대기」, 황병승『여장남장 시코쿠』(랜덤중앙하우스, 2005) p.187


17) 김준오, 앞의 책, p.203


18) 일반적으로 몽타주는 은유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로만 야콥슨은 영화기법을 통해 은유와 환유를 소개하면서 “은유적 몽타주 수법”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몽타주에는 다양한 층위가 있다. 볼프강 가스트는 몽타주를 일곱가지 기본유형으로 나눈 쿠헨부흐의 이론을 소개하고 있다. 그 중에서  환유적 몽타주는 ⅰ) 추상적 상위 개념 아래 다양한 영역을 포섭하기(포괄적 결속 ; 메츠의 용어) ⅱ) 기호학적으로 표현하자면, ‘기호+기호= 초월기호’의 형태를 한 몽타주, ⅲ) 개별적 부분들(쇼트들)의 합은 새 것을 탄생시키며, 개별적 부분들의 총화 이상인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미지의 ‘기호+기호’ 관계는 환유적이며, ‘기호+기호=초월기호’의 관계는 은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김욱동, 『은유와 환유』(민음사,1999)p.259, 로만 야콥슨(신문수 역), 『문학 속의 언어학』(문학과지성사,2001)p.113, 볼프강 가스트(조길예 역), 『영화』(문학과지성사,1999)p.120 참조


19) T.W. 아도르노, 앞의 책, p.247


20) T.W. 아도르노, 앞의 책, p.308


21) 숭고는 우리가 대상의 크기, 그것도 어떤 무한한 크기에 대하여 느끼는 심미적 정서이다. 그것은 대상의 질서있고 조화로운 형상이 아니라 도리어 혼란과 무질서에 의해 유발된다. 따라서 숭고의 체험은 대상의 무제한성에 관계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감성적 표상 능력의 부적합성과 무능력을 통해, 즉 감성적인 것은 어떤 경우에도 이성적 것의 참된 표현일 수 없다는 부정적 의식 속에서만 이성의 이념이라는 진리는 자기를 드러낸다. 이것이 숭고의 부정성(Negativität)이다. 김상봉, 「칸트와 숭고의 개념」『칸트와 미학』(민음사,1997) 참고


22) 장 보드리야르, 앞의 책, p.13


23) 페터 뷔르거(최성만 역), 『前衛藝術의 새로운 이해』(심설당,1986)p.24


24) 유평근.진형준, 『이미지』(살림,2001) p.236


                                                                                             <비평과전망> (2005, 하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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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06.10.23 10:59

    첫댓글 에고 이게 왜 여기로 스크랩 되었을까요. 게시판이 영...이 곳은 아닌데요.

  • 06.10.23 13:36

    ㅎㅎㅎ 암튼 고마워요 빡시게 공부시켜 주셔서요. 잘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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