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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조계산(曹溪山)과 선암사(仙巖寺) <3>
蒙泉 추천 0 조회 73 12.11.05 18:28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조계산(曹溪山)과 선암사(仙巖寺) <3>

2007년 06월 09일 . 날씨 : 구름 많고 안개

 

 

 

 

선암사의 가람 배치 형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양한 영역과 축선이다.사찰의 규모가 크고 불전의 수가 많으니 주축 외에도 여러 개의 축을 설정하여 둘 이상의 주불전이나 영역을 통합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주축 상에 위치한 대웅전 영역의 건물군 외에도 원통전 영역, 응진당 영역, 각황전(覺皇殿) 영역 등 경내 전체를 네 개의 영역으로 건물들이 배치되는데  대웅전 영역의 중심축에서 약간씩 비켜 서 있다. 특히 이러한 소 영역들은 서로 분리되어 어느 정도 독립성을 유지하며 축대로 쌓여진 각각의 서로 다른 단 위에 펼쳐져 있다. 선암사는 예부터 6방(房) 살림을 살았다고 한다.여기서 6방이라하면 상선원.하선원.강원.정읍원.도감원.염불원을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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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선원은 지금의 칠전으로 하선원인 심검당에서 어느정도 수행을 한 납자들이 참선수행을 하는 공간이다.  하선원은 심검당으로 수행납자들이 처음 선방에 들어와서 수행을 하는 공간이다. 강원은 천불전으로 스님들이 부처님의 경전을 공부하는 공간이다. 정읍원은 무우전으로 밀교계통의 다라니를 외우는 공간이다. 도감원은 창파당으로 절의 사무를 관장하는 곳이다. 염불원은 설선당으로 아미타불을 계속해서 독송하는 공간이다. 이런 6방 살림은 예불, 공양 등을 따로 분리하여 각각의 독립된 공간에서 독자적인 살림을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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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의 제5차 중창주인 대사의 법명은 약휴이며 호암은 호다. 속성은 오(吳)씨이고 본관은 해주였다,

12세에 선암사에 들어가 경준장노(敬俊長老)에게 출가했다. 그 다음해 머리를 깍고 침굉대선사에게 수계를 하여 사미(沙彌)가 되었다. 조금 문자를 알아 대략 경전을 섭렵하게 되었다. 뒤에 장성하게 되어 위인(偉人)이 호매과감(豪邁果敢)하여 모두 “석문영웅(釋門英雄)”이라고 했다. 이때 선암사는 정유재란 때 당우가 모두 소실되어 50년간 산의 대덕(大德)인 경잠(敬岑)ㆍ경준ㆍ문정(文正) 3화상이 법승(法僧)을 이끌고 힘을 합해 복구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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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스님은 그 유지를 이어 받아 숙종 23년(1697) 무인(戊寅)년 관음상을 조성했고, 그 다음해인 1698년에 원통전을 중창하였다. 그 이듬해 불조전을 세우고 총 60불을 조성하였다. 또 3년 후 도선ㆍ대각의 2창건주의 영각을 세우고 1704년에는 소요태능, 침굉현변 2조사(祖師)의 영각을 만들어 제사를 모셨다.한편 도내 각 사찰이 법강(法綱)이 해이하게 되자 혼자 경사(京師)에 올라가 예조에 건백(建白)하여 전라도에 도승통제(都僧統制)를 창설하여 법강을 바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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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굴목재

 

영조 12년(1726) 병진년 조정에서 호암당에게 명령을 내려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을 삼고 자헌대부겸장진승군대장(資憲大夫兼壯鎭僧軍大將)을 삼았다. 그는 임무를 받아 북한산성에 부임하여 중흥사의 대웅전ㆍ산경루(山景樓)를 중건했으며 태고보우국사의 영각, 비석을 세워 중수하였다. 이때가 남북 양진의 승정을 징역(徵役)했는데 각사(各寺)의 그 고역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는 조정에 건의하여 신역(身役)을 혁파하여 정승(定僧)에게 향전(香錢)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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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조과(條科)를 삼엄하게 하여 법서를 재정하였는데 「백장청규(百丈淸規)」를 모방하여 “호암청규(護岩淸規)”라 명명하였다. 늘그막에 침굉문하에 점향(拈香)하여 일실을 정소(淨掃)하고 염경범향(念經梵香)하였다. 또한 법화경 7축을 1字에 3拜하면서 사경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선암사에는 호암의 부도가 서부도전에 전하고 그의 진영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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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월새봉 스님의 법명은 새봉, 호는 상월이며 자는 혼원(混元), 성씨는 손씨(孫氏)로 순천사람이다. 숙종 13년(1687)에 태어나 11세에 선암사에 들어가 극준장노(極俊長老)를 의지하여 출가하였다. 15세에 머리를 깍고 이듬해 세진당(洗塵堂) 문신대사(文信大師)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18세에 월저도안(月渚道安)의 고제(高弟) 설암(雪岩)에게 수학을 하고 도가 이미 통하여 의발(衣鉢)을 전해 받고 이어서, 벽허(碧虛), 남악(南岳), 환성(喚醒), 연화(蓮花) 등 제산(諸山)의 노장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그들로부터 모두 인가를 받았다. 무용수연(無用秀演)이 한번 보고 감탄하기를 “지안(志安)이후 제일인야(第一人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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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월새봉은 둥근 얼굴에 큰 귀였으며 그 목소리가 홍종(洪鍾)과 같았으며 앉음새는 니소(泥塑)와 같이 흔들림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자야(子夜)에 반드시 북두에 절을 하였으며 명료한 강론, 군더더기 없는 풀이, 마음가짐으로 실천, 지혜로의 입증으로 가르침을 삼았다. 또 처음 배우는 사람이라 하여 깨달음의 길을 소홀히 하지 않도록 했으며 재주가 높다하여 계율을 함부로 범하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지도하였다. 더욱이 옛 사람들의 주석과 해석에 얽매이는 것을 특히 걱정하여 반드시 배우는 이로 하여금 문자에 얽매이지 말고 문자가 가르치는 참 뜻을 가려내 본래의 미미를 알도록 지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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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배우는 사람으로서 만약 스스로 되돌아보는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비록 아무리 좋은 말을 많이 외운다 해도 자신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상월새봉은 영조 10년(1734) 봄과 동왕 30년(1754)에 각각 선암사에서 대대적인 화엄강회(華嚴講會)를 열었다. 선암사에 「해주록(海珠錄)」1권이 전해졌는데 거기에는 1754년의 화엄강회에 참석한 명단이 적혀있는데 대중이 무려 1287명이 참석하였고, 기간 또한 3월 16일 시작하여 4월 3일 마쳤다. 영조 24년(1748)에 선교양종도총섭국일도대선사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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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43년(1776) 10월 상월새봉은 몸에 가벼운 질병증세가 나타났는데, 한 게송(偈頌)을 읊조리기를 “물은 흘러서 바다로 돌아가고(水流元歸海) 달 져도 하늘을 떠나지 않도다(月落離天)”라고 태연하게 순세(順世)하였는데 나이가 81세였다. 다비하여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으나 탁준(卓濬)이 유골을 받들고 관서의 묘향산에 가서 초제(醮祭)를 지내려고 할 때 구멍난 구슬 3개가 출현하니 오도산(悟道山)에 그 중 하나를 모시고 나머지 둘은 선암사와 대둔사에 각각 안치하였다. 그의 비는 선암사와 대둔사에 세워졌고 진영이 선암사에 소장되어 있다. 그의 문집으로는 「상월대사시집(霜月大師詩集)」1권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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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고승 눌암식활은 휘(諱)는 식활이며 호가 눌암이다. 속성은 전씨(全氏)이고 순천(지금의 여수시) 율촌면 삼산리 사람이다. 그는 집이 본래부터 가난하여 배울 수가 없었다고 한다. 17세 되던 어느 날 그의 아버지가 가까운 마을의 양반집에서 볼기를 맞아 욕보이게 되었다. 그가 이 소식을 듣고 형에게 말하기를 “아버지를 욕보였는데 보복하지 않겠는가?” 하니 형이 “목소리를 낮춰라, 목소리를 낮춰라”하며 “우리는 천하고 그 쪽은 귀한데 계급이 다르니 어찌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겠는가”하였다. 그가 듣지 않고 큰 몽둥이를 들고 양반집으로 달려가서 큰 소리로 죽이겠다고 하니 하인들이 모두 놀라 흩어져 버렸다. 바로 방에 들어가 주인 된 양반을 붙들어 넘어뜨리고 두들겨 패서 마당에 끌어내렸다. 이처럼 스님의 담력은 대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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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부터 탄식하여 말하기를 “대장부로 태어났는데 남에게 비굴하게 꼼짝을 못한다면 차라리 나비처럼 세상을 떠돌아다닌다면 이것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출가하여 선암사에 들어가 머리를 깍고 승려가 되었다. 이 때가 영조 44년(1768) 무자(戊子) 12월이었다.  스님이 된 후 상월의 법손인 혜암윤장(惠庵玧藏)의 선법을 이었다. 멀리 제신을 유려하고 두루 선지식을 찾았다. 배움은 삼장(三藏)을 다하였으며 불조의 징묘(徵妙)한뜻을 심구하였다. 금강산의 마하연 들어가 활구(活句)를 참구(參句)하기도 하였으며 6-7년 뒤 묘향산의 법왕봉에 들어가 바위에서 좌선(坐禪)하기도 하였다. 이 때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3년간 외호(外護)하였다고 전해진다. 도가 이미 통하게 되자 원근(遠近)에서 승려.세속인이 구름같이  몰려와서 법문을 청했다. 이때 평안감사 윤사국(尹師國)또한 스님을 존경하여 스승으로 받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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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13년(1789) 기유(己酉)년 봄 금강산에서 선암사로 돌아 왔다. 이때 윤사국은 예조판서로 있었는데, 정조가 후사가 없어 걱정을 하자 선암사에 게시는 눌암스님에게 100일기도를 부탁하였다. 이에 눌암스님은 선암사 원통전에서, 해붕(海鵬)스님은 대각암에서 100일기도하여 2년 후에 순조임금을 낳으셨다. 이에 정조가 눌암화상의 충직을 생각하여 〈국일도대선사(國一都大禪師) 대각등계홍제존자(大覺登階弘濟尊者)〉의 첩지와 쌍용문가사, 순조의 어필인 대복전(大福田)현판, 금병풍, 은향로, 가마 2축을 하사하였다. 순조가 즉위한 원년(1801)에는 인(人), 천(天)현판을 내리셨다. 지금도 선암사에는 가사와 인.천.대복전현판, 가마가 전해져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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눌암스님은 칠전선원의 정문에 “호남제일선원(湖南第一禪院)”이라는 현판을 걸고 “선원12조례를 정하고 실행하였으며, 전국의  고명한 수행자들이 와서 참선수행에 진력(盡力)게 함으로서 대회상(大會上)을 열었다. 또한 스님은 동국진체에 능해 명필로 전국방방곡곡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1823년에 대웅전ㆍ대루(大樓)ㆍ동ㆍ서각요사ㆍ지장전 등 수백간(數百間)이 불타버렸는데 눌암스님이 급히 경사(京師)에 알리어 수년이 지나지 않아 옛날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는데 간고지공(幹蠱之功)이 심히 많았다. 화상은 항상 청련암(淸蓮庵)에서 연좌(宴坐)하셨는데 자주 패경(貝經)에 빠졌다. 스님은 청련암에서 열반에 드셨고 스님의 부도와 진영이 선암사에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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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붕전령 스님은 강백이자 유명한 선승이다. 휘는 전령이며 자는 천유(天遊)이고 호는 해붕으로 순천사람이다. 선암사로 출가하였으며 묵암최눌의 법인을 받았다. 선교에 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장에도 뛰어났으며 호남의 7고붕(高朋)의 하나였다. 호남의 7고붕으로는 초의선사, 노질(盧質), 이학전(李學傳), 김각(金珏), 이삼만(李三萬), 해붕, 심두영(沈斗永) 이다. 또한 속칭에  백곡처능(栢谷處能), 무용수연(無用秀演), 해붕전령은 승중문장(僧中文章)이라고 한다. 1823년의 화재로 선암사가 큰 피해를 입자 노구에도 불구하고 눌암, 익종(益宗)등과 함께 선암사의 육창을 이끌었다. 당시의 명인인 추사, 다산, 초의선사 등과 깊은 친분이 계셨다. 선암사의 스님의 진영이 전해지는데 찬문에 추사가 돌아가시기 5개월 전에 쓴 친필찬문이 남아 있어 스님과 추사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스님의 저서로는 「장유대방록(壯遊大方錄)」1권이 전해지고, 스님의 부도와 진영이 선암사에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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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혜언 스님은 스님의 법명은 혜언이고 법호는 용암이며, 성씨는 조(趙)씨이다. 율봉청고의 사법(嗣法)제자이며 호암체정의 증손자뻘 법제자이다. 용암스님은 조선조 정조 7년(1783), 전남 나주에서 태어나 선암사에서 출가하였다. 그 후 율봉.청봉스님의 문하로 들어가 가르침을 받았다. 용암스님은 뛰어난 재능을 지녔던 탓인지 수행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산이란 산은 모두 답습하고 물이란 물은 모두 맛보았으며 경전이란 경전은 모두 배우고 계율이란 계율은 모두 철저히 지켜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인격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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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이미 밝아지고 귀가 또한 익숙해지매 용암스님은 스승 율봉스님으로부터 ‘무뎌진 손도끼’를 전해 받고 명실 공히 한 시대의 정신적 지주로서 교화를 위한 설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스승으로부터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도 좋다’는 인정을 받고 나자 용암스님은 대중들이 요청하면 곧 가서 가르침을 펴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 들어주는 등 대중교화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스님의 교화활동은 동쪽으로 통도사ㆍ해인사, 서쪽으로는 구월산ㆍ묘향산, 남쪽으로 조계산ㆍ지리산, 북쪽으로 금강산ㆍ오대산, 중서부의 삼각산ㆍ용문산에 이르기까지 두루 전개된다. 머물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고 교화는 전국에 고루 미쳤다. 또한 선암사가 1823년 실화로 대웅전영역 등이 타자 금강산에서 수행을 하던 중 내려와 해붕ㆍ눌암ㆍ익종스님을 도와 선암사를 중창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으며, 용암스님이 지은 선암사 제6창건기가 선암사에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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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암천여 대선사의 휘는 천여이며 호는 금암인데, 세칭 “여보살(如菩薩)”이라고 했다. 속성은 나씨이고 나주사람이다. 15세에 선암사에 들어가 물암대사(勿庵大師)에게 출가하여, 17세에 머리를 깍고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처음에 제문(諸門)을 두드려 마가행상승(摩訶-上乘)에 계합(契合)하였다. 법화경을 읽고 칠보채화백복엄신(七寶彩畵百福嚴身)에 이르렀다. 마침내 회백(回白)하여 모두 성불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기뻐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것 역시 대비이제지행(大悲利濟之行)이라고 하면서 금파당도일화사(金波堂道鎰畵師)를 좇아 비수법(毘首法)을 배웠다. 그림으로 입신(入神)을 생각한 것이다. 정유(丁酉)년(1837)에 불조전 53불을 일신도금(一新鍍金)하였으며 팔상전ㆍ원통전ㆍ대웅전 등을 단청하였다. 또한 전답을 사들여 불전에 헌납하여 향화(香火)를 보태었다. 이와 같이 스님은 자모승록(自募勝綠)하여 불사를 일으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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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己亥)년(1839) 운수암 별총(別叢)에 앉아서 대비주(大悲呪)를 염송(念誦)하였다. 평생의 소원이 천불을 도와 도금하는 것을 서원(誓願)했는데, 팔도총섭의 불사에 응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한다. 나아가 늙어서도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도행(道行)을 흠모(欽慕)해 마지않았다. 1878년 허단선사(虛丹先師)에게 가서 심묘사의 개금불사를 하였는데 이때 대선사의 나이 85세였다고 한다. 가마를 타지 않고 500여리를 걸어서 불사를 하였으며 명성이 경사(京師)에게까지 알려져 궐내로부터 향폐(香幣)를 내렸는데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고 한다. 청련암에서 1878년 9월 14일 입적하셨다. 스님은 주로 선암사를 중심으로 송광사, 태안사, 흥국사 등 전라도 지역의 사찰을 중심으로 수많은 불화를 남기고 있는데 대표작으로는 선암사대웅전삼장탱, 선암사향로암관음탱, 청련암신중탱 등이 있다. 선암사에 스님의 진영이 남아 있으며, 미타전(彌陀殿)과 무우전(無憂殿)현판의 글은 스님의 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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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2.11.06 18:00

    첫댓글 멋진경치 잘 감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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