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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디오와 컴퓨터 원문보기 글쓴이: 管韻
02. 태평양 전쟁-임팔 작전(1944년)
5. 우호작전(ウ号作戦)
일종의 조공으로 버마 남부에서 1944년 2월에 행해진 작전은 하호작전(ハ号作戦)이라 한다.
이것도 역시나 보급 부족으로 박살났다. 게다가 애초에 해당 방면은 한쪽이 바다고 다른 한쪽이 험준한 지형인지라 방어하는 쪽이 100% 유리한 곳이었으므로 결국 조공의 의미도 없었다.
그런데 하호 작전을 앞두고 신통하게도 94식 산포가 영국군의 허리케인 전투기를 격추하는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다. 하호 작전 준비를 위해 여념이 없는 55 산포 연대의 진지를 향해 방심한 채 일직선으로 달려들던 허리케인의 총격에 1개 소대가 영거리 사격으로 대응하여 박살을 내버린 것이다. 이 사건은 즉각 버마 방면군에 보고되었으며 지휘부는 임기응변의 훌륭한 사례로 전군에 하달하고 적 항공기 내습시에는 가능한 모든 화기를 사용하여 적극적으로 대응하도록 지시했다. 물론 그 이후에 명령대로 공습시 모든 화기를 쏟아부은 부대는 모두 전멸했다. 차라리 그냥 참호에 처박히는 편이 나았다고 한다.
당시 일본군 보병의 주력화기인 아리사카 소총은 느려터진 볼트액션 방식에 후기형 99식이라 가정해도 사용탄이 미군의 .30-06탄(7.62x63 mm)보다 살짝 약하다는 걸 감안하면 피격 후 생존성에 대한 고려가 충분한 연합군 비행기를 격추한다는 것은 더더욱 가능성이 희박한 이야기다. 참고로 독일군은 분당 1,200발 발사속도인 MG42 기관총을 3~4개 이상 결합해 만들거나, 한술 더 떠서 20 mm, 30 mm, 37 mm 등의 강력한 대공포를 다수 배치해 화망을 구성해 쏘았고 미군이나 소련군은 12.7 mm M2HB나 DShk 중기관총을 4연장씩 묶기도 하고 20 mm, 23 mm, 40 mm 등의 다양한 대공포를 쏘아댔다. 그럼에도 육안 조준하던 당시 대공포 단독으론 수백킬로 이상 속도로 탁 트인 하늘을 날아다니는 적 전투기를 격추하는 것은 굉장히 힘들었기 때문에 그냥 쫓아내거나 특정 구획의 접근을 방어하는 목적에 무게를 더 두었을 지경이다.
더구나 임팔에서는 무타구치가 터트린 보급문제로 인해 소지한 탄약과 중화기의 양도 적었기 때문에 앞뒤 안가리고 부대 단위로 비행기에 쏴댈 정도로 풍족한 상황도 아니었다. 독일군의 경우엔 앞서 말한 고성능 기관총인 MG42를 결합한 지상 대공포론 전투기를 겨우 잡을 수준이라 더욱 흉악한 파괴력을 자랑하는 20mm Flak 30, 38 등의 4연장 대공포와 비행기보다 전차를 때려잡는것으로 유명한 88mm 대공포를 동원했고 20 m대공기관포들은 나름 전폭기들과 전투기들을 격추시키는데는 나름 어느정도 활약을 했지만 고고도 폭격기를 저지하는데는 그래도 나름 뛰어난 연사력과 위력을 바탕으로 성과를 거두긴했으나 저지하기엔 부족했고 88mm대공포역시 일반적인 대구경대공포가 그렇듯이 고고도로 폭탄을 쏘아올려 터지는 방식이었던 만큼 단순계산으로 한대를 격추시키기 위해 3천발이라는 어마무시한 탄환을 쏘아올려야 된다는 결과가 나와 히틀러가 동부전선에 대전차용으로 던져주라고 소리칠정도로 명중률이 높진 않았다.
그래서 임팔서 연합군의 대형 폭격기나 수송기를 보병들의 소화기로 격추하는 것은 꿈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고, 근접 지원을 위해 저고도를 날아다니고 폭격기보다 맷집이 약한 전투기라도 연사력 부족에 화력조차 안 나오는 일본군의 소화기로는 쉽게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연합군 전투기의 맷집은 38식 아리사카 소총의 6.5×50 mm탄 몇 방으로는 건드리는 수준이었고 후기 99식 아리사카의 7.7×58 mm이라 쳐도 유효한 수준이 아니다. 참고로 제로센과의 공중전에서도 연합국 비행기에게 큰 타격을 줄 만한 유효탄이 나오려면 20 mm 99식 기총, 아무리 약해도 13 mm 3식 기관총 이상으로 쏴야 했는데 정글을 행군한 알보병 부대가 그런 장비가 풍족할 턱이 있나. 대전차 소총은 한 발씩 쏘면 이론상 맞출 경우 타격은 줄 수 있지만, 대공포를 비처럼 뿌려도 맞네 마네 하는 비행기에 정확하게 명중시킬 수나 있을지는 뻔한 거고. 그리고 조종사나 엔진, 기타 중요 부위에 직격하지 않는 이상 동체에 대전차 소총을 한두 발 맞춰봐야 큰 타격도 아니다.
결국 개판인 일본군 장비니 독일군의 몇 배의 탄환과 노력을 투입해도 임팔서 연합군 비행기 1대를 격추할까 말까 한 상황이라 보면 된다. 그래서 앞서 나온 사례도 자세히 보면 보병의 개인화기가 아닌 94식 산포가 럭키샷으로 격추한 것이니...
최종 요약하자면 격추하기도 힘들지만 운 좋게 떨어뜨려도 이미 그 전에 너덜너덜하게 얻어 맞았을 게 뻔했다.
5.2. 우호 작전 개시
윙게이트 병단의 공격으로 일본군 후방이 어지러운 가운데 우호작전(ウ号作戦)은 개시되었다. 아무튼 무타구치는 이런 구상을 하달했다.
1. 제31사단은 남쪽에서 재빨리 국경을 돌파하여 북진, 연합군을 견제하면서 임팔로 향한다.
2. 그동안 제15사단과 제33사단은 기습적으로 친드윈강을 도하, 국경으로 향한다.
3. 견제당하고 있는 연합군의 허를 찔러 제15사단은 직선으로 임팔 동북부에 진출, 연합군을 포위한다.
4. 제31사단은 북진하여 코히마를 점령, 북쪽에서 임팔로 향하는 연합군 증원부대를 저지한다.
5. 코히마의 저지 작전에 성공하면 제 31사단의 일부를 임팔의 주전장으로 돌린다.
6. 이 공략 작전은 20일 이내에 끝내기로 하고 전체의 작전 개시일은 3월 15일로 하되 그 중 제33사단의 행동 개시일은 3월 8일로 한다.
이 임팔 작전의 기한은 병사 개개인이 휴대할 수 있는 식량에 맞춰서 작전 기한을 정한 것이다. 당시 병사들에게 분배된 짐은 소총탄 240발, 수류탄 6발, 그리고 20일 간의 식량, 조미료까지 총 40 kg. 현대전 들어와서 병참이 작전의 중요 요소를 넘어 작전의 한계나 성패를 좌우하는 수준인데, 현대전에 걸맞게 보급수준에 맞춰서 작전목표를 정하는 것도 아니고 미군처럼 작전목표에 맞춰서 보급을 해주는 것도 아니라 보급이 안 될 걸 알면서도 작전목표는 무리한 수준으로 정해놓고 알아서 실행하라는 전근대식 개념으로 회귀한 것이다. 옛날 군대는 변수가 워낙 많다보니 요행이라도 기대할 수 있지 2차 대전 시점에서 그런 게 될 리가 있나. 일본군 내부에서도 보급 이야기가 나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결국 조직 전체적으로는 보급이라는 개념이 무시당했으니 몇몇 사람이 말을 꺼낸 정도로 일본군의 멍청함이 덮어지지는 않는다.
당연히 시작부터 좋지 않았다. 친드윈강을 건너면서 각 사단은 사단이 데리고 있던 동물의 약 1/3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아라칸 산맥으로 접어들자 병들어 죽고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고 포격에 놀라 도망가고 하면서 동물의 손실 수는 계속 늘어났다. 결국 제31사단의 경우 친드윈 강 도하 이전에는 소 125마리가 있었지만 있었지만 21일 후 코히마에 도착했을 때는 겨우 5마리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에 그 동물들이 죽는 바람에 도착한 개인 탄약의 양은 계획의 절반뿐이었다. 더구나 병사들이 짊어진 무게가 일본인들의 평균 체격 기준으로 벅찬 40 kg에 육박한지라 정글에 몰래 무거운 장비를 조금씩 버렸는데, 문제는 이 버려진 물건들 중 화력지원을 담당할 산포나 중화기의 부품이나 포탄들이 상당수 있었다는 것. 저걸 다 갖고 있어도 빈약한 화력의 일본군인데 약간이나마 갖고 있던 중화기조차 포기한 꼴이다.
이 임팔 작전에 참가한 3개 사단 중 가장 약체로 평가되는 것은 제15사단이었다. 태국에서 도로건설 작업을 하다가 미얀마까지 자력행군 해온 데다가 중화기를 비롯한 각종 화기도 부실하여 야포라곤 31식 산포 18문을 보유하고 있는 게 전부였다. 게다가 사단 전체가 작전에 투입된 것이 아니어서 임팔 작전에 나선 사단장이 자기 사단의 병력을 전부 장악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작전 개시 직전에 사단의 중추인 작전주임참모와 보병단장이 서로 보직을 맞바꾸는 괴상한 인사이동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무타구치의 질타와 독촉에 못 이겨 무리한 돌진을 강행, 3월 28일 임팔의 북면에 가까스로 도달했다. 이것은 코히마와 임팔 사이를 차단하는 것이며 연합군 보급에 큰 위협이 되는 것이었다.
5.3. 강태공 영국군의 낚시질과 낚인 일본군의 오판
영국 제14군 사령관 윌리엄 슬림 중장은 즉시 대비책을 마련했다. 슬림 중장은 우선 아캡 방면에 있는 제15인도군단 중에서 제5, 제7인도사단을 빼내어 임팔과 디마푸르에 파견하는 동시에 제33인도군단에서도 제2사단과 제50인도전차여단을 증파하는가 하면 제14군의 예비대 인도전차사단도 이 지역에 투입했다. 그리고 현지의 제4군단에게도 임팔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제4군단 예하의 제17인도사단은 이미 일본군에게 퇴로가 끊겼고 제23인도사단도 우크룰 남쪽에서 포위당하고 말았다. 이어 제23인도사단은 암호문서 등을 소각한 뒤 그 일부가 탈출에 성공했으나 일본군 제33사단의 사사하라 연대와 대치중인 제17인도사단은 좀처럼 퇴로를 발견할 수 없었다. 제17인도사단은 개전 초부터 일본군 제33사단과 맞서 싸워왔으며 지난 2년 동안에는 무려 30회 이상이나 교전한 경험 많은 베테랑 부대였기에 인도 주둔 영국군 총사령관 해군 원수 마운트배튼 경도 부대의 탈출을 독려하려고 했다.
이때 제4군단장 스컨즈 중장은 이 사단을 철수시키고자 기발한 구상을 하였다. 제23인도사단 중 1개 연대만을 철수시킨 후, 나머지 병력으로 제17인도사단의 구원 작전을 시작한 것이다.
3월 14일, 토이톰 고지의 어느 산허리에 진을 치고 있던 해당 연대 철수 지시가 내리자 연대는 수많은 트럭과 전차를 이끌고 임팔로의 철수를 시작했고, 바로 그 철수 행렬이 산허리를 거의 통과하고 있을 때 일본군 정찰부대가 그것을 발견했다. 정찰부대가 이 사실을 곧 연대 본부에 보고하자, 연대장 사쿠마 대좌는 제33사단장 야나기타 중장에게 보고했다. 영인군이 총퇴각했다고.
그 말에 사단 사령부는 전선 근처까지 이동했고 철수했다던 제17인도사단은 철수는커녕 압도적인 포화를 퍼붓고 있었다. 많은 전차가 전차포로 일본군의 최일선 진지를 쑥밭으로 만드는가 하면, 날아드는 보고는 '영인군의 증원부대가 계속해서 전선에 도착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던 3월 23일 밤, 야나기타 중장은 사사하라 연대로부터 문제의 전보를 받았다.
"본 연대는 암호서류를 소각하고 군기를 파기한 후 전원 옥쇄의 각오로 분투하고 있음."
이 전보를 보고 야나기타 사단장은 "연대 전멸이구나!"라고 생각해 철수를 명령했지만 사실은 "죽을 때까지 싸워보겠음"이라는 의미였다. 그 덕에 영국군은 무사히 철수했다.
5.4. 반성 전보
인도군의 철수를 알게 된 무타구치는 길길이 날뛰었고 27일에는 야나기타 중장에게 후일 반성전보라고 불리게 될 전보까지 받았다.
"본 사단은 군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었던 것을 유감으로 생각함. 그러나 다른 사단 방면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도록 근본대책을 강구해주시기 바람."
①본 사단 방면의 정보는 거의 대부분이 비보이며 금후의 작전은 극히 곤란할 것이 예상됨. 따라서 20일 만에 임팔을 공략한다는 것은 절망적 상태임. 우기의 도래와 보급의 곤란은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것임.
②아군의 편성과 장비는 극히 열세에 있고 적군과 비교한 종합적 전력이 불충분하므로 헛되이 인명을 소모할 뿐이라고 판단됨. 이제 임팔 공략은 불가능에 가까운 상태에 이르고 있으며 설령 그 공략이 성공한다 하더라도 금후의 방어는 어려울 것임.
③미토키나 방면에 적의 공정부대가 투하된 것은 거의 진공 상태에 이르고 있는 미얀마 본토를 위태롭게 할 것임.
즉 '이건 미친 짓이야. 당장 중단해야 해.' 하는 의견인데 당연히 이 의견을 무시한 무타구치는 자신의 감정이 그대로 실린 명령문을 보냈다. 이 전문을 받은 야나기타 중장도 감정적으로 거부의 답문을 보냈다. 야나기타의 답문을 받은 무타구치는 분노하여 다시 전진을 명했다. 야나기타도 지지 않고 자기 주장을 고집하는 답문을 보냈다. 작전 이전부터 무타구치는 자기 의견을 따르지 않는 사단장들을 무시했고 심지어 도상훈련 때는 사단장 없이 참모들로만 훈련을 했다!
결국 명령을 받은 대로 전진을 계속했다만 그는 부대를 3대로 나누어 선대가 먼저 목적지를 정찰하고 중대가 따라가고 후대는 선대와 중대가 떠난 뒤 얼마동안 남아서 후방을 살피는 안전 위주의 전진이었고 결국 4월 22일, 무타구치는 격노하여 직접 제33사단을 찾아 사령부에 뛰어들어 참모들의 눈 앞에서 일반 사병을 대하는 식의 거친 말투로 야나기타 중장을 몰아붙였다!
결국 분노게이지가 폭발한 무타구치는 야나기타 중장을 해임시키고 그 후임으로 자신의 명령에 절대 복종할 인물인 다나카 중장을 제33사단장으로 앉히기로 결정했고 이런 사태가 전개되자 버마 방면군 사령관 카와베 마사카즈 중장은 난처해했다.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사단장을 교체하는 이런 일이 있어도 되는가? 하지만 전선 사령관인 무타구치의 의견을 중시하기로 하고 5월 15일자로 야나기타 중장을 해임하고 다나카 중장을 그 후임에 임명했다. 그리고 제15사단 야마우치 사단장 역시 해임하고 그 후임으로 시바다 중장을 임명했다. 야마우치 중장이 해임된 이유는 그가 앓고 있는 폐병이 표면적 이유였지만 실제로는 무타구치의 작전에 은근히 반대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5.5. 비센푸르(Bishenpur) 전투
가까스로 33사단은 임팔 평야의 입구까지 도달했지만 비센푸르 요새에 부딪친 제33사단은 우선 남아있는 소형 전차를 앞세워 요새를 돌파하고자 했으나 영국군의 포화 앞에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자 신임 다나카 중장은 남아있는 화력을 모두 집중하여 요새를 격파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제33사단의 포병 화력은 불과 150 mm 유탄포와 100 mm 캐논포 몇 문이 고작이었고 그것도 영국군의 포화 앞에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심지어 반자이 어택으로 이불 속에 수류탄 여러 개를 싸서 전차 밑으로 기어들어가는 공격을 했지만 아무 효과도 없었고 마침내 비센푸르 요새의 언덕을 일본군의 시체로 메워 그것을 엄폐물로 삼아 진지를 공략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러일전쟁 당시의 노기 마레스케의 전법, 즉 203고지의 재현이 시작됐던 것이다. 결사대가 모집되어 자살 돌격을 감행했지만 비센푸르의 방어선은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았다. 6월로 접어들자 포탄이 바닥나고 병사들은 굶주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동안 영국군의 병력은 눈에 띄게 늘어나 있었다. 보급 물자를 실은 수송기가 영국군 진지의 상공에 대편대를 이루어 왕래하는 모습이 일본군의 눈에도 띄었다.
결국 다나카 중장은 SOS를 쳤지만 대본영은 이런 반응을 보였다.
"전투기 24대를 미얀마 전선에 파견할 것임. 단, 10일간만 사용 후 즉시 원대로 복귀시키도록 할 것."
제2차 세계대전의 상황에서 전투기 24대란 적이 오지도 않는 후방에서나 경비로 쓸 수준이지 일선에서는 제대로 된 전력도 되지 않는 한 줌의 병력에 불과하다. 이런 수준의 지원을 지원이랍시고 시간 제한까지 주면서 준다는 것 자체가 대규모 작전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공군의 지원을 배제하고 싸워왔다는 소리다. 뭐 이미 무타구치의 '정글에서 비행기를 어디에다가 쓰냐?'는 말에서 짐작한 사람이 많았겠지만... 근데 그동안 영국군이 항공기로 보급하는 걸 몇 번이나 봤을 텐데 이걸 전투기로 방해할 생각도 안한 건가... 설상가상으로 이미 연합군의 비행기는 3천 기가 넘어갔다.
5.6. 코히마 점령과 테니스 코트의 전투
그런 와중에 임팔 작전의 최우익을 담당한 제31사단의 임무는 2가지였다. 코히마의 점령과 임팔로의 증원군 저지이다. 이 코히마는 인도 아삼주의 수도 디마푸르과 친스키아 방면에서 오는 도로가 합쳐져 임팔로 향하는 요지이다. 따라서 코히마를 점령하는 것은 임팔로의 길을 차단하는 것이다.
사토 고토쿠 중장이 이끄는 제31사단이 친드윈 강을 건넌 것은 3월 15일이었다. 여기에서 좌익 돌진대인 제31보병단장 미야자키 시게사부로 소장이 지휘하는 제58연대로 구성된 '미야자키 지대'가 4천명의 병력으로 코히마를 향해 본대와 나뉘어 돌진했다. 미야자키 부대가 아라칸 산맥으로 접어들었을 때 미야자키 소장은 병사들의 불안을 달래기 위해 기상천외한 발상을 해냈으니 그것이 바로 염불이었다. 인도로 가는 원정길이니 염불을 외며 산을 올라가라는 그의 명령에 일본군은 염불을 외며 아라칸 산맥을 넘었다.
미야자키 부대가 코히마 외곽에 도달한 것은 4월 5일이었다. 여기서 휴식한 미야자키 부대는 6일 새벽 4시 반에 코히마를 기습하였고 코히마를 지키던 영국군은 자신들의 계산보다 2주일이나 빨리 일본군이 나타난 것에 당황하여 코히마에서 부근 고지로 철수했다. 이때 미야자키 연대장은 부하들의 총을 몽땅 버리게 한 다음 노획한 영국군 무기를 장비시켰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아주 현명한 조치였다. 사실상 아리사카 제식소총의 탄약 보급은 끊긴 상태로 상대가 흘린 보급물자를 주워다 싸우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나마 탄약 보급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당시 일본에서 적에게 노획한 대다수 무기는 가져가서 사용하는 게 금기였으며 심하면 군법으로 처벌받는 경우까지 있었으니 미야자키가 얼마나 파격적인 결단을 내렸는지 알 수 있다.
그 와중에 유명한 테니스 코트의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테니스장 양 끝에 서로 참호를 파고 서로 총격전을 벌이고 수류탄 던지기 경쟁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게 그 테니스 코트의 전투(위키피디아)가 벌어진 곳.
이 회전이라고 부르기도 뭣한 전투가 중요한 이유는 안습했던 임팔 전투에서 처음이자 유일하게 제대로 싸웠다고 할 만한 전투를 했기 때문이다. 즉 이 외의 전투는 전부 일방적인 학살이나 자멸이었다는 것.
결국 압도적인 영국군의 화력에 부대는 밀려버렸고 공방전 10일 만에 일본군은 절반으로 줄었고 식량도 다 떨어졌다. 일본군은 이제 영국군의 수송기가 뿌리는 보급 낙하산이 자기네들 쪽으로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형편이었다. 보급이 사실상 사라진 일본군은 이것을 처칠 급여라고 불렀을 정도다. 그러나 처칠 급여의 양 자체가 사단급의 인원에게 충분하지 않았고, 험준한 지형에 뿌려진 보급품을 주우려 적의 눈을 피해서 수색하고 수거하는 과정이 집에서 받아보는 택배처럼 녹록할 리가 절대 없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고 연합군도 바보가 아닌지라 눈에 불을 켜고 보급품을 주우려는 일본군을 찾아다녔고, 아예 적당한 위치에 떨어진 처칠 급여 주변에 숨어 기다리며 저격 등으로 인간낚시를 시도하는 경우들도 많았다. 그러나 일본군은 보급품이 모자라니 저런 상황이 예상되더라도 목숨을 걸고 필사적으로 주워야 했다는 것이 함정. 심지어 저격이 들어오는 와중에 처음부터 일정 숫자가 죽을 걸 예상하고 러시안 룰렛처럼 여러 명이 동시에 달려나가 주워와야 하기도 했다.
더욱 불쌍한 것은 저렇게 병사들의 목숨으로 대가를 주고 처칠 급여를 받아와 식량이나 약품을 예상하고 열어봤더니... 못 먹는 탄약이나 무기라도 나와주면 그나마 다행인데, 쓸모없는 연합군 모자나 피복, 텐트 등이 상자 가득 나타나 멘붕을 초래하는 일도 자주 벌어졌다. 더구나 일본군 병사 상당수가 학력이 낮고 귀축영미를 주장하며 외국어 교육을 금지한 영향으로 영어를 모르는 까막눈이 많아 라벨을 읽어보고 선별해 주워오는 일 같은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물론, 읽을 수 있었더라도 주우러 가자마자 총알이 빗발치는데 선별할 시간이 있었을 리 없다.
결국 굶주림과 백병전으로 미야자키 부대는 전멸해버린 중대가 3개나 있었다. 미야자키 부대의 병력은 5월이 되자 원래의 1/4로 감소한 형편이었고 사토 사단장은 미야자키 부대의 자살 돌격을 금지하면서 방어 태세로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6. 재앙의 도래
6.1. 공격 중단
전선 보급로는 완전히 막혀버렸고 제5비행사단장 다조에 중장에게는 사토 중장으로부터 애처로운 전보가 날아들고 있었다.
"탄약 1발, 쌀 1톨도 없이 적의 식량을 탈취하여 전투를 계속 중. 이제 최후의 기대를 공중수송에 걸고 있을 뿐임."
이어서 제15사단장인 야마우치 마사후미 중장이 병을 얻어 지휘를 못하자 지휘권을 이양받은 시바타 중장의 전보도 날아들었다.
"이제 본 사단은 호우와 진흙탕 속에서 굶주림과 질병 때문에 전투력을 상실하고 있음. 제1선 부대로 하여금 이런 지경에 빠지게 한 것은 실로 제15군과 무타구치의 무능이 그 원인임."
4월 28일, 무타구치는 랑군에서 파견된 방면군 군수참모 우시로 소좌 앞에서 마침내 이 작전의 불가능함을 시인하게 된다. 이윽고 우기가 닥쳤으나 제15군 예하 병력에게 총탄 한 발, 쌀 한 톨마저 보급할 수 없었다.
4월 29일, 쇼와 덴노의 생일인 천장절이었다. 무타구치는 이날까지 임팔과 코히마를 점령하고야 말겠다고 이야기했으나 현실은...
4월 30일, 우시로 소좌는 랑군으로 돌아가자마자 전선시찰을 목적으로 대본영에서 파견한 스기다 참모에게 임팔 전선의 상황을 보고했다. 그리고 임팔 전선이 가망없음을 보고한 후 5월 말까지 작전을 계속하되 그 뒤에도 전황에 변화가 없다면 작전을 중지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카와베 등 방면군 사령부의 막료들이 말한 임팔 전선의 승리 가능성과는 반대되는 의견인지라 스기다는 우시로에게 자세한 현지상황을 듣고 나서야 그의 말을 믿고 대본영에 보고했다.
그러나 이 보고를 듣고 현지로 파견된 방면군의 주임참모와 남방총군의 작전주임참모는 작전수행 가능이란 대답만을 들었을 뿐이다. 즉, 무타구치 렌야는 속으로는 임팔 작전의 성공 가능성을 의심했지만 상급부대 앞에서 허세를 부렸던 것이다.
6.2. 연합군 반격
일본군이 이런 곤란에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스장군이 지휘하는 중국군 제38사단과 제20사단은 천천히 카마인에서 모가운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선발대인 제5307연대는 5월 17일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미티나 비행장을 탈환했다. 이와중에 윙게이트 장군이 비행기 사고로 전사했지만 윙게이트 병단은 전의를 잃지 않았고 제14여단을 증원하여 육상으로 남하하는 제16여단과 호응하여 철로 폭파와 함께 핀봉 부근의 일본군 군수품 창고를 불살랐다. 일본군의 혼란을 확인한 마운트배튼 제독은 5월 11일, 제14군 사령관 슬림 중장에게 일본군 제15군에 대한 총공격을 명했다.
이때 일본군들은 이런 노래를 불러댔다.
1절: 낮에는 비행기 밤에는 박격포, 비처럼 쏟아지는 포탄 아래로
육탄공격대는 오늘도 나가는가, 나라를 위한 일이지만 아아 코히마
2절: 비 내리는 아라칸을 끝도 없이, 어깨에 들것 메고 방황하지만
굶주린 배를 채워줄 보급이 없어, 오늘도 끼니를 찾아 이동한다네
(후렴구) 이거 정말 고생이에요.
일본 본토에서 도조는 5월 17일, 쇼와 천황에게 "작전진행은 순조로우므로 불굴의 정신을 다하여 건투에 임하겠나이다." 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미 4월 말에서 5월 중순에 걸쳐 남방전선을 시찰하고 돌아온 하타 히코사부로 참모장이 '임팔 작전의 미래는 극히 곤란해 보인다.'는 시찰 보고를 올렸지만, 도조는 이 보고를 듣자마자 '나약한 생각'이라며 버럭 화를 냈다. 일본 본토에 화려하게 전해졌던 작전 초기의 성과는 전황의 악화로 정권이 오늘내일하던 도조에게는 유일한 희망이었고 임팔 작전의 성공 여부에 도조의 정치 생명이 달려 있었으므로 하타가 시사한 작전 중지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6.3. 제31사단장, 항명 선언
뼈만 남은 부하들이 굶어 죽어가면서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하는 노래를 부르는 참상을 본 31사단장 사토 고토쿠 중장은 결국 폭발, 제15군에 식량보급을 요청하는 전보를 치고 곧이어 이번 작전의 잘못을 낱낱이 열거하고 즉시 작전중지를 요구하는 전보를 쳤다. 이 전문에는 사토의 감정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그러나 제15군의 답신에는 보급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없이 단지 공격을 계속하라는 명령만 있을 뿐이었다.
보급을 이유로 철수를 요청한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음. 무슨 일이 있어도 현 위치를 사수할 것. 임팔 점령 후, 본 군은 반드시 귀 사단이 코히마를 점령한 노고를 보상해줄 것임.
이에 사토 중장은 이런 전문을 보냈다.
공격 계속 명령 접수했음. 그러나 명령만으로 병력이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귀하의 사고 방식이야말로 이 작전을 실패로 이끌어 가는 중대 요인이 되고 있음. 눈앞의 본 사단 1만 장병은 아사 직전 상태에 놓여있음. 탄약은 고갈되어 맨손의 병력으로 화해버렸음. 사태가 여기까지 이른 것은 모두가 귀 제15군에게 그 책임이 있음. 귀군은 이상 사실을 판단, 반성하여 본 작전을 즉시 중지함으로써 폐하의 적자들을 개죽음으로 이끄는 일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과감한 조치를 강구하기 바람.
이렇게 전문이 계속 오가자 15군 참모들이 5월 28일 사토 중장을 달래기 위해 찾아왔지만 오히려 "너희들은 무슨 낯짝으로 여기 왔느냐! 우리들의 적은 영국군이 아니야. 바로 너희들 제15군이란 말이다!"라고 길길이 날뛰면서 규탄하는 바람에 찍소리도 못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결국 사토 사단장은 독단적으로 철수하기로 마음 먹고는 참모진과 부하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질러 버린다.
"지금 우리 사단의 위에는 3개의 머저리 집단이 있다. 제15군과 미얀마 방면군과 남방총군이다. 이런 머저리들 믿고 기다리다간 우리 사단이 전멸하고 말 것이다. 이에 본 사단의 퇴각을 본관 책임하에 독단 결행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5월 31일 밤, 영국군은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했고 코히마를 지키고 있던 마지막 부대가 최후를 알리는 고별 무전을 보내오자 사토는 마침내 결심을 굳혔다. 먼저 부상병 1,500명의 후송을 명한 뒤 좌익부대장이었던 미야자키 시게사부로 소장에게 병력 600명을 맡겨 후퇴 엄호를 명한 다음 6월 3일 사단 내 각급 간부를 소집하여 퇴각 명령을 내렸다. 이때 미야자키 소장은 전혀 일본군스럽지 않은 작전을 통해 31사단을 무사히 탈출시켰고 엄호부대도 탈출에 성공했다.
그렇게 제31사단의 독단 퇴각이 시작되었다. 제31보병사단의 중앙돌파부대인 제138연대장인 토리카이 츠네오 대좌는 코히마 방면에서 철수할 당시 피로로 인해 무거운 소총을 버리는 병사 뿐만 아니라 군복 단추까지 뜯어 무게를 줄이려던 병사들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남겼다.
그나마 31사단의 후퇴가 다른 사단에 비해서 순탄했던 것은 31사단이 전진할 때 주민들을 약탈하지 않고 교섭을 통해 정당한 방법으로 대가를 지불하고 물자를 입수한 덕이었다. 그때문에 31사단이 패퇴할 때도 원주민들은 그들을 가엾게 여겨 약간의 식량을 제공해주거나 휴식처도 내주었지만 다른 사단들은 진군 과정에서 원주민 마을을 약탈하여 식량을 획득했기 때문에 철수 과정에서 도움을 받기는 커녕 그들의 습격을 받기도 했다.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퇴각이었던 것이다.
이 사토 고토쿠의 독단 퇴각은 옛 일본군 역사에서 항명 1호 사건으로 꼽힌다. 사토 고토쿠가 얼마나 극적인 결단을 내렸는지 잘 알 수 있다.
6.4. 항명의 충격
31사단 병사들에겐 사토 고토쿠의 퇴각 결정이 희소식이었지만 무타구치 렌야에겐 날벼락이었다.
6월 6일, 버마 사령관 카와베 마사카즈가 무타구치를 찾아왔지만 둘 다 아무 말도 못했고 달라진 것도 없었다. 그 이유가 뭐였는고 하니...
카와베 : "무타구치 중장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초조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구태여 캐묻지는 않았다."
무타구치 : "나는 카와베 장군의 참된 심중은 작전 지속에 대한 나의 생각을 떠보기 위한 것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그것을 장군에게 실토할 수 없었다. 나는 다만 먼지투성이인 내 풍모를 보고 장군이 알아차려 주기만을 바랐다."
카와베 : "나는 랑군으로 돌아왔다. 내 눈에는 귀기 어린 빗속에서 일선을 지키고 있는 장병들, 특히 파렐 전선에서 악수를 나눈 인도 국민군 장병들의 모습이 역력히 떠올랐다. 만일 냉정하게 이 전황을 판단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나는 이미 이때 작전 중지를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작전에는 나의 생각 이외에보다 더 큰 성격이 있었다. 어떤 방법이든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이 단 하나라도 남아있다면 그것으로 최후까지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카와베 : "이 작전은 내 시야를 벗어나 뭔가 커다란 의미가 있다. 이 작전에는 일본과 인도 양국의 운명이 걸려있다. 찬드라 보스와 함께 죽을 수밖에 없다고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당장 현장에선 병사들이 소득도 없이 죽어나가는 한시가 시급한 상황에서 누가 곤란한 말을 먼저 꺼낼 것인가를 두고 서로 미루기만 하고 있느라 달라진 게 없었던 것이다.
이런 떠넘기기는 할힌골 전투 참가 부대였던 23사단에서 벌어진 바가 있다. 일본군은 이런 짓을 반복한 것이었다. 무타구치 렌야는 실제로 상황을 파악하러 온 대본영의 장군 앞에서 알랑한 가오 하나 때문에 차마 후퇴하겠다고 말도 못하고 후퇴하라고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다가 말을 못했다는 엄청난 위대함을 자랑한다.
그리고 사토 고토쿠 중장은 후퇴지에도 식량과 탄약이 없자 분노를 거듭하며 계속 후퇴했고 무타구치 렌야는 사토 중장이 자신을 만나러 오자 자결해버리라며 단도를 남겨두고 정작 자신은 숨어버리는 추태를 보였으니 사토 고토쿠 중장은 "이 칼로 무타구치의 배때기를 쑤셔버리겠다"며 그 칼을 갖고 이를 갈며 나가버렸다.
결국 6월 20일, 무타구치 렌야는 사토를 해임해 버렸지만 사토 중장은 이미 각오하고 있던 일이고 군사 재판이 열린다면 그때 제15군과 무타구치의 잘못을 낱낱이 규탄할 작정이었다. 근데 그에게 돌아온 것은 정작 정신병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연금당하는 것이었다. 이유는 무타구치 렌야가 사토 고토쿠의 입을 막기 위해 상부에다 정신병에 걸렸다고 보고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당시 일본의 관료 제도의 특성상 사토 중장의 지위에 대해 정식으로 영향을 미치기도 어려웠던 것도 있다.
사토 고토쿠는 1959년에 죽을 때까지 '독단으로 철수한 불명예스러운 군인'이자 '임팔 작전 패배의 원인'이라며 높으신 분들로부터 비난받았지만 31사단의 부하들은 그가 자신들을 살렸다며 감사의 뜻으로 추모비를 바쳤다. 그리고 현재 그 항명 행위는 비난받을 짓이 아닌 부하들을 살린 행동으로 평가받는다. 항명 행위가 범죄가 아닌 정당한 행동으로 평가 받았으니 이건 뭐...
여담으로 전후 무타구치는 미군의 심문을 받으면서 이렇게 진술한다.
"저는 작전이 실패했음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상부에 보고를 할 수 없었기에 작전을 그대로 진행하면서 명령이 하달되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타구치를 심문하던 미군 헌병은 이 말을 듣고는 빵 터져서 5분이나 웃어댔다고 한다. 그리고 이 내용을 토대로 언론에 공개했고 그 결과 전미가 웃었다.
6.5. 작전 중지와 백골가도
5월 말. 임팔 북부를 공략하던 일본군 제15사단도 병사들이 인근 마을을 약탈(할 수 있던 일본군 부대는 차라리 운이 좋았을 정도)하거나 보급품을 자체 조달하기 위해서 진지를 내버리는 일까지 발생했다. 그리고 6월 22일 33인도군단이 포위망을 뚫고 임팔의 제4군단과 상봉함으로서 일본군의 우호작전은 사실상 끝이 났다.
일본군(정확히는 무타구치 중장)은 이 엄연한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일본군 제33사단에 보충병 1개 연대를 보강시켜 인도군 제17사단 지역을 돌파하려 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일본군 제15사단과 야마모토 부대도 더 이상 공격을 펼칠 능력도, 의지도 남아있지 않았다.
6월 말, 마침내 무타구치는 작전 중지를 결정하고 그 뜻을 방면군에 올렸다. 그러나 방면군은 "이런 소극적인 의견을 접할 줄은 몰랐다"면서 오히려 제15군에 계속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그 이유가 정말 가관인데 무타구치가 절망과 죄책감에 자살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한 카와베 방면군 사령관이 일부러 공격 명령을 내려 무타구치의 기분을 맞춰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무타구치가 아무리 명령을 내려도 부대가 움직이지도 않는 사태에 직면한 상황에서 작전 중지 외에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없었다. 방면군은 마닐라에 주둔하고 있던 남방군에 고급 참모를 파견하여 작전 중지의 의향을 전달했다. 7월 2일, 마침내 남방군은 임팔 작전의 중지를 방면군에 명령하게 된다. 결국 작전 개시 4개월이 지난 7월 3일 우호 작전을 중지하고 투입했던 부대를 모두 철수시켰다. 카와베에 따르면 작전 중지를 생각하기 시작한 지 무려 2개월이 지난 후였다고 한다. 가져갈 수 없는 무기와 장비는 모두 내버려졌으며 심지어는 움직일 수 없는 중상자와 병자도 버리고 철수했다.
퇴각에 임한 병사들은 굶주림에 허덕이며 육상과 공중에서 영국군의 공격을 받았으며 보급이 끊긴 지 오래되어 병약해진 탓에 말라리아와 장염에 걸린 환자들이 차례차례 일행에서 낙오당했다.
영국군의 기동병력이 추격하자 퇴각로는 점점 더 많은 무수한 전사자와 아사자, 병사자의 시체와 백골들이 쌓여갔는데 열대 우림의 습하고 더운 기후 때문에 시체는 3일만 방치해도 피부가 다 썩어서 육탈(肉脫)되었다.
운이 좋았는지 나빴는지 영국군은 전염병 창궐을 우려하여 추격을 멈추었고 생사를 불문하고 석유를 끼얹어 길가에 널부러진 일본군들을 소각처리했다.
비바람에 씻겨 하얀 뼈가 드러난 동료들의 시체들을 보고는 병사들은 백골가도(白骨街道) 또는 야스쿠니 가도(靖國街道)라고 불렀다. 전사자의 이름은 모두 야스쿠니 신사의 영새부에 남으니까 죽어서 야스쿠니로 가는 길이라는 뜻이다.
7. 작전 결과
일본군은 전사자 3만 2천 명, 병사 및 아사자 4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고 이는 각 사단마다 90%에 가까운 손실로 전멸을 넘어 소멸했다. 반면 연합군의 피해는 사상자 17,500명이었다.
임팔 작전의 실패로 인해, 그 전까진 호각지세였던 일본군의 버마-벵갈 전선은 붕괴해 1945년 3월에는 아웅 산 장군이 이끄는 버마국방군이 일본군을 몰아내는 결과를 초래한다. 당시 버마를 책임지고 있던 스틸웰 장군도 무타구치 만큼은 아니지만 전투 태세도 갖추지 못한 채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일관하며 일본군을 얕잡아보고 무리한 공세를 추진하다가 1941년에 버마를 날려버리고 걸어서 버마 국경을 넘어 달아나는 추태를 보인 무능한 인간이었고 이 치욕을 씻겠다고 중국군 예비대 수십만을 멋대로 차출해와서 이를 갈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놈의 오만한 근성 어디 버리질 못하고 버마의 일본군이 얼마 되지도 않는다고 주장하며 멋대로 공격했는데 실제로 버마의 일본군은 스틸웰 주장의 3~5배에 달했다. 하지만 때를 맞춰 무타구치가 자폭해준 덕분에 그는 역사에서 까일 거리를 겨우 하나 줄이게 되었다.
작전 책임자인 무타구치는 15군 총철수 이전에 퇴각로 '시찰'을 명목으로 먼저 도망간 사실이 드러났지만 겨우 예비역에 편입되는 경미한 징계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육군 예과 사관학교 교장으로 승진했다. 또한 그의 상관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 자리를 유지했으며, 더러는 승진까지 했다!
당연히 사토 중장은 군법재판에 회부되었는데, 사토 중장은 오히려 재판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재판장에서 무타구치와 그 일당의 추태를 낱낱이 까발릴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판 결과는 사토 중장에게 정신병 판결을 내렸고, '''"정신적으로 하자가 있는 자에게는 작전 실패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며 예편시켜버렸다.자신도 병을 얻어 후송된 야마우치 마사후미 사단장은 임종하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공격할 탄환도 없고 지금은 호우와 진흙 속에서 병과 기아에 전투력을 상실했다. 제1선부대가 처한 이런 현실은 군과 무타구치의 무능 탓이다."
종합하자면 임팔 작전이 참패로 인해 버마-뱅갈전선의 일본 육군 전반을 상실했음에도 실질적으로 지도층은 개선의지를 느끼지 못했다.이는 제15군, 버마방면군 등 상부조직과 군 장성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 결과적으로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임팔 작전의 실패 책임과 소재를 육군 상부가 스스로 감추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 결과 이 이후 일본 육군은 위신은 보전하는 대신 필리핀 탈환전부터 오키나와 전투에 이르기 까지 식민지에 배치된 일본 육군 전체가 산산조각 나면서 괴멸당하고 만다.
8. 여담
8.1. 무타구치 렌야의 각종 일화
• 임팔 전선의 전황이 악화되던 당시 자신은 전선 지휘부 옆에다 기생집을 차려놓고 무조건 오후 5시 땡~ 하면 업무 마치고 기생집에 들어가서 술 마시며 노느라 나오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전황이 한참 악화되자 전선 지휘도 제대로 안하는 주제에 사령부 옆에다가 제단을 쌓아두고 신불에게 이기게 해달라고 비느라 그나마 주간에 하던 업무 처리조차 전부 뒤로 미뤄버렸다.
• 휘하 병사들은 그에게 "적보다 무서운 바보 대장" 혹은 "귀축 무타구치"라는 별명을 붙여주었고 "각하가 좋아하시는 건 첫째가 훈장, 둘째가 여자, 셋째가 기자" 라는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 임팔 작전으로 9만 2천명의 병사를 전투도 제대로 하지 않고 1만 3천명으로 줄여버린 그 어떤 연합군 장성도 못해냈을 희대의 업적을 달성한 무타구치 렌야는 "아놔 책임감 느낀다. 콱 자결해 버릴까?"라는 상투적 발언을 내뱉었다. 그러나 수석부관 후지와라가
"옛부터 나 죽어 죽어 하는 사람치고 진짜 죽고 싶어서 죽은 사람은 없습니다. 사령관님이 저한테 할복하겠다고 말씀하셨으니 저는 부관의 책임으로 일단 '형식적'으로라도 말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령관으로서 정말 책임을 느끼신다면 그냥 닥치고 배를 가르십시오. 아무도 안 말립니다. 신경 쓰지 마시고 배를 가르십시오. 이 작전의 실패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라며 권총을 내밀자 무타구치는 그를 노려보고는 살아갈 의지를 곧추세웠다.
• 게다가 겨우 살아 돌아온 생존자들이 간신히 안전지대에 들어오자 장교 전원을 집결시켜 1시간 넘게 훈시를 하는 바람에 영양실조 상태에 있던 장교들이 쓰러져 기절하거나 심지어 사망한 사례조차 있었다. 아무리 영양실조 상태였다지만 일반 병사도 아니고 그래도 사정이 좀 나았을 장교들이... 그리고 이때 한 연설에서...
"사토 그놈은 무기가 없어서, 총알이 없어서, 쌀이 없어서 도망쳐왔다. 이게 말이 되는가. 총이 없으면 대검이 있다. 대검이 없다면 이빨이 있다. 야마토 정신을 잊었는가. 일본은 신이 지켜주는 나라다!"
라는 말이 나온다.
• 15사단장도 31사단장과 비슷하게 작전 취소를 건의했다고 경질되었는데 새로 임명된 15사단장이 장교들의 군도를 검사하니 전부 녹이 슬어있다고 화를 냈다. 하지만 장교들이 살고 있던 곳은 항상 물이 차있는 참호였으니 녹이 안 슬래야 안 슬 수가 없었다. 보급품이 부족해 비가림도 못했다. 녹이 스는 건 둘째치고 그 물바다 위에서 어떻게 살 수 있었는지 참... 참고로 임팔이 위치한 마니푸르, 나갈란드, 아삼 일대는 몬순 기후와 히말라야 산맥과 아라칸 산맥의 영향으로 인해 지구 전체에서도 비가 많이 오기론 손꼽히는 지역이다.
• 전쟁 이후 영국군이 그래도 임팔을 친 건 연합군의 의표를 찌른 좋은 발상이었으며 임팔 전선이 유지되었으면 연합군으로서는 매우 고전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물론 당시 일본군이 임팔을 점령할 능력도 전선을 유지할 능력도 없었다는 것을 빼면"이라고 말하며 조롱했다.
• 임팔 전선에 투입된 부대 중에는 남방 전선(남태평양 지역)에서 이동된 부대도 있었는데 그 중에는 과달카날 전투에서 굶어 죽을 뻔한 부대도 있었다. 지못미. 과달카날과 임팔에서 모두 살아남는데 성공한 운 좋은 병사는 "과달카날보다 더 끔찍하다!"라는 말까지 남겼다. 그도 그럴게 과달카날에서는 어떻게든 보급해보려는 노력이라도 했다만 임팔에서는 그런 거 없었다.
• 무타구치는 죽을 때까지 임팔 작전의 의미가 '공격은 최선의 방어'라는 교훈을 얻은 것에 있다고 하였다. 즉 1944년의 임팔 작전이 없었다면 동남아 전선의 붕괴는 더 빨랐고 더 파멸적이었을 거라는 말씀. 그러나 1945년 영인군의 버마 진공은 원래 계획에 없었다. 다시 말해 임팔에서 일본군이 다수의 정예사단을 말아먹은 덕분에 급하게 진공 계획을 세웠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약체 일본군의 저항과 우기에 대한 우려로 버마 진공 역시 간신히 성공시켰다는 점에서 오히려 임팔 전투 때문에 동남아 전선의 붕괴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확하다.
• 전쟁이 끝난 뒤에 임팔 전투의 일본군 전몰자 유족들이 위령제를 지낼 때 그 자리에 나타나서 <임팔 전선의 패배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부하들이 잘못 싸운 것>이라는 유인물을 나눠주려다가 물세례를 받았다. 이후로 이 전선에 참여한 부하였던 사토 고토쿠나 미야자키 시게사부로 같은 옛 부하가 죽었을 때도 장례식에 출몰하여 똑같은 짓을 저지르다가 유족들에게 욕설과 함께 멱살을 잡히고 바깥으로 내쫓겼던 적도 있었다. 심지어는 죽기 전 마지막 남긴 말도...
"나는 잘못이 없어. 부하들이 잘못한 거야!(私は悪くない、部下が悪い!)"
...였으며, 이후 자기 장례식에서조차 유족들에게 "임팔 전선의 패배는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 다른 놈들이 못나서 실패한..."이라는 유인물을 돌리게 했다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대단하다, 정말.
대한민국 임시정부 직속 군대인 한국 광복군 대원 9명이 미얀마 전선에 투입되었을 때 영국군과 함께 바로 이 임팔 전투 당시 활동하였다고 한다. 주로 심리전을 전담했으며 포로의 심문이나 통역, 일본어 번역, 선전물 제작 등을 맡아 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대장 한지성, 부대장 문응국, 대원 최봉진, 김상준, 나동국, 박영진, 송철, 김성호, 이동수. 부대의 명칭은 인면전구공작대(印緬戰區功作隊)이다. 명칭의 뜻은 '인도-미얀마 전선의 공작부대'라는 의미이다.
이들은 영국 육군 중~대위 계급을 부여받고 피복 또한 영국 육군 장교와 동일한 것을 착용했다. 인면전구공작대 역시 이러한 대우에 걸맞은 활약상을 보여줬는데, 이들은 1943년 8월 영국군 총사령부가 있는 인도 캘커타에 도착하여 4개월간 교육 후 1944년 3월 임팔 전선에 투입되었고, 1944년 5월, 포위된 줄 알고 현지에서 죽을 각오로 싸우려던 영국 육군 17사단에게 포위망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문응국 대원이 감청을 통해 알아내어 통보해, 퇴각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전력을 보전케 하는 등으로 호평을 받았다. 또한 인면전구공작대 파견 대원들은 기본적으로 영어와 일본어 모두 구사할 수 있었으며 적진 교란방송, 일본군 포로심문, 문건 번역 등 심리전에 투입되었다. 실제로 일본 육군 15사단 조선인 군속들이 선무공작방송을 듣고 단체로 투항하거나, 육군 소위 한 명이 소대원들 일부와 함께 항복하러 오는 일도 있었다. 이들은 또한 일본 육군의 소총 사거리 내에서 직접 선무 방송을 하는 등 최전방에서 다른 영국군들과 함께 뛰었다.
이후 영국군은 루이 마운트배튼 제독이 직접 이들을 치하할 만큼 호평하며 지속적으로 충칭의 임시정부에 인원 증파를 요청하였으며 중화민국 정부에 의해 불허된 인원을 제외한 나머지 대원을 임시정부 차원에서 1945년 3월 파견하려 했지만 중화민국 정부가 거부하여 무산되었다. 남은 공작대원들은 1945년 5월, 연합군의 랑군 탈환전에 종사하였으며 1945년 9월 10일 전원 충칭의 광복군총사령부로 복귀하였다. 영국군은 이들이 종전 이후에도 업무를 맡아주길 희망할 정도로 인면공작대를 끝까지 신뢰했다.
시기상 다른 광복군은 실제 전투를 겪지 못했기 때문에, 이들이 광복군 내의 유일한 실전 참가 부대이다.
임팔 작전에서 무다구치 렌야의 삽질이 워낙 화려하다 보니, 한국의 역덕후/밀덕후 사이에선 이 인면전구공작대와 연결해서 반농담삼아 아예 렌야를 '일본군 내에서 교란 작전을 편 인면전구공작대 소속 스파이'로 설정하는 드립도 유행하였다.
2017년 8월 25일 NHK에서 방영된 "전율의 기록-임팔". 위의 야마모토 히로시의 다큐멘터리 이후 거의 30여년만에 만들어진 임팔작전 다큐멘터리다. 직접 미얀마에서 인도 임팔까지의 작전지역을 로케이션해 해당지역의 소수민족 목격자들을 직접 인터뷰했으며 당시 전투에 참여했다가 간신히 살아남은 극소수의 생존장병들도 인터뷰했다. 인터뷰를 한 사람중에는 무타구치 렌야의 손자도 있다!그외에 14000여명의 전사자 명부를 입수해 지도에 작전날짜에 따른 전사자의 위치등을 표시하기도 했으며 영국이 전후 임팔 작전에 관여한 전 계통의 인물들을 심문한 기밀문서도 입수하기도. 이 다큐멘터리의 최고 하이라이트는 무타구치 렌야의 부관이었던 소위인데, 이 사람은 말라리아에 걸렸다는 이유로 무타구치에게 버림받고 혼자 힘으로 친드윈강까지 왔다가 결국 연합군에게 포로로 잡혀서 겨우 생존했다. 그의 마지막 말이 압권.
"우리 군인이 5천명쯤 죽으면 적 진지를 얻을 수 있다." 당시 일본군 상층부가... 분하지만... 군대에 대한 생각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