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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 에쉐브: 그리고 돌아오다
“바(그리고)”는 “앞에 사건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야곱이 그 주술을 푸는 그 얍복 강가의 씨름”을 가르쳐 주셨다면, 이 말씀은
“요셉이 온갖 일을 겪는 데도 끝까지 생명을 다해서 끝까지 사랑”하는 얘기다.
주술: 초자연적인 존재나 신비로운 힘을 빌려 여러 가지 현상을 일으키어 인간의
길흉화복을 해결하려고 하는 기술이다.
예배란 “회개하고 만군의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그 하나님이
온 땅을 다스리도록” 우리는 “하나님을 초청해야 되는 걸 예배”라한다.
요셉의 그 이야기가 사실은 “우리 각자의 영적 성장을 위한 심오한지도”이다.
이것은 우리가 알던 “요셉이 완전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단순히 오래된 성경 이야기를 그 차원을 훌쩍 뛰어 넘는다.
“슈브”라는 단어, 우리말로 하면 “돌아옴”인데,
[슥1:3] 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슈브:(되)돌아가(오)다,회복하다]
“이 단어 하나의 개념을 열쇠 삼아서 우리 내면의 가장 깊은 곳으로 떠나는
그런 영적인 여정”과 같은 “돌아옴”이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양자 얽힘”이라든지, “심층 심리학” 같은 “현대적인 언어”를 가져오면,
이 “고대의 지혜를 오늘 우리의 삶에 정말 생생하게 되 살려”낸다.
양자 얽힘: 두 개의 입자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하나의 입자에 변화가
생기면 다른 입자도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현상이다.
이 “만남이 어떤 통찰”을 만들어 내는지,
따라가 보는게 “오늘 우리의 목표”라고 할 수 있겠다.
“바 예쉐브”가 “그리고 거주했다”는 뜻인데,
[창37:1]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 아비의 우거하던 땅에 거하였으니
그런데 “바 야샤브의 어근을 보면 슈브”라 단어다.
[야샤브:앉다,머무르다,살다,거주하다]
이게 또 “돌아오다는 의미의 슈브”하고 연결 된다는,
그 출발점부터가 예사롭지 않은 놀라운 “재 해석의 세계”로 들어가 보려로 한다.
[슥1:3] 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슈브:(되)돌아가(오)다,회복하다]
“내가 돌아간다는 뜻도 있지만, 내가 회개한다는 뜻”도 있다.
이 “동사”가 이 모든 이야기의 “문을 여는 열쇠 바로 그 슈브라는 개념”부터
집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이 단어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회개와 다른 차원의 의미”를 갖는다고 강조한다.
보통 “회개하면 무릎 꿇고 눈물 흘리면서 제가 잘못했다고 고백”하는 장면을
떠올리는데, “슈브”는 그런 감정적인 이유를 가르침과는 결이 좀 다른 단순히
잘못을 바로 잡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리부팅 같은 그런 개념”으로 봐야 한다.
“슈브”는 하나님과의 “최초의 온전한 관계 그 근원으로 돌아가는 본질적인 회귀”를 의미한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씨름하다가 마침내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본 것처럼”,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상처,불신,두려움 같은 것들을 허물어 버리고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는 수준”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영화로움의 회개라고 까지” 부른다.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직접 보는 경지까지 돌아간다는 뜻”이다.
[욥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일종의 장벽이나 자기 내면의 깊이 뿌리 박힌 부정적인 신념 같은 의미”다.
오랜 시간 동안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서 “마치 성벽처럼 나를 둘러 쌓아 버린
생각의 패턴, 감정의 습관, 상처로 인한 방어 기재 같은 것들”이다.
나 스스로는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것들이
“하나님과의 소통을 가로막는 견고한 진”이 되어 버린 것이다.
“슈브는 바로 이 진을 무너뜨리는 데서 시작”된다는 핵심적인 진단이다.
내 안에 “장벽을 허물고 하나님과의 직통 터널을 복구”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돌아움이라는 말씀”이다.
이 “거대한 슈브라는 개념이 요셉의 삶을 통해서는 어떻게”드러나는지 살펴본다.
“요셉은 꿈 자랑하다가 형들한테 미움받고 구덩이에 던져지는 철없고 눈치없는
인물로 시작”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가 가진 통념을 완전히 뒤집어” 버린다.
[창37:2]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 칠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
[창37:4]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
[창37:5]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요셉은 미성숙한 소년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늘과 직접 연결된 존재”,
즉 “하나님의 선물이자 이 땅에 하나님의 계획을 구현해 낼 창조의 원형”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요셉의 꿈은 개인적인 야망이나 자랑”이 아니다.
그건 “하늘의 청사진을 이 땅에 미리 보여주는 신적인 계시”였다.
“요셉은 땅의 현실 논리가 아니라 하늘의 주파수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그 꿈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부분이 “우리가 새로운 관점으로 돌아가야 할 부분”이다.
요셉의 행동이 미성숙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너무 높은
차원의 영적 주파수에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요셉이 입었던 그 채색옷”은 아버지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에게 특별히
만들어 입힌 화려한 긴 겉옷, 히브리어 원어는 “케토네트 파심”이라 불린다,
[창37: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소매 외투)
[파스(채색):손이나 발의 평평한 바닥/ 케토네트:긴 옷]
케토네트 파심: 그를 위하여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소매 외투를 지었다 뜻이다.
이는 “족장의 후계자임을 상징”하는 “장자권”의 표식, 형제들의 질투를 유발한 원인이 되었고,
이는 사랑과 권위, 하나님의 섭리를 담고 있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옷이었다고 하는데,
요셉의 파란만장한 삶을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물이었다.
“케토네트 파심”라는 단어가 성막과 같은 거룩한 공간(성막)의 덮개를 의미하는
단어랑 깊은 연관이 있다.
이걸 근거로 “채색 옷을 단순한 옷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하심과 임재를 상징하는
움직이는 성막”으로 해석을 한다.
“장막에서 거하면서 말씀을 묵상할 때 입었던 옷”이었다,
이게 “예수님의 나중에 계시록 19장에 보면 그 신부들에게 입혀주는 하나님의 세마포 옷”이다,
[계19: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계19: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계19: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 이라
하기로
“그 신부들에게 허락하신 옷” 그 옷이 하나님의 “의로운 행위”, “야곱도 아들이
열둘”이 있었는데, “에서는 들 사람“이 되고, ”야곱은 장막에 거해서 늘 번제“를
이렇게 ”자기 죄를 제사를 지내면서 예수께 옮겨놔서 그는 온전해 졌다”는 의미이며,
또 하나 의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요셉을 너무 사랑해서 “그를 악한 세상으로부터 지키는 보호의 장막을
입히셨다는 상징”인 것이다. 그러니까 “요셉은 움직이는 성막”인 것이다.
“장막에 거하는 옷”그것을 입고 “그 말씀이 내면화 돼 버린”것 이다.
그런 의미에서 “채색옷은 하나님의 보호막”이었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그 후에 나오는 “보디발 아내의 유혹 사건”도 완전히 다르게 해석 될 수밖에 없다.
보통은 요셉의 강한 의지력, 신앙심을 칭찬하는 이야기로 받아 들인다.
하지만 요셉이 유혹을 이겨낸 것은 참고 버티는 차원의 저항이 아니었다.
요셉의 이름 뜻: 더하다,풍성하다는 의미를 가진다는 점이 중요해진다.
[요세프:하나님께서 더하실 것이다]
[창39:3]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찰라흐:앞으로 나가다,발전하다,형통하다]
그래서 “형통하다 그 뜻도 채색 옷을 입은 자들의 특징이 모든 것을 다 통과하다 뜻”이이며,
어떤 문제도 “말씀이 있으면 통과”한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돼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다”, 이건 “초막절”이란 뜻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초막절에 탄생”하셨다, “모든 것을 뚫고 통과하다” 뜻이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돼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의 미움도 통과”하셨다.
그리고 “초막절에 왕으로 또 천년왕국을 다스리실”
예수님이 “그 예표로 요셉이 채색옷을 입었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이었다”는 것이다.
말씀이 유신이 되셔서 “어느 누구하고 타협을 안하시고 모든 고난을 통과”하신다
그리고 “요셉은 갑절의 이 상소권”을 받게 된다, 항상 “장자들이 받는 것을 갑절의 상소권”을
말한다. “욥이 하늘의 상소권을 받았다는 의미”지 갑절의 복이 아니다.
[42:10]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욥도“자신의 내면에서 근원적인 슈브”,“하나님께로의 완전한 돌아옴”을 의미한다.
요셉은 이미“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로 충만해서 영적으로 흘러넘치는 상태”였다.
요셉이 유혹을 싸워서 이긴게 아니라 “아예 유혹이 비집고 들어올 틈 자체가 없었다”,
“결핍이 있는 사람이 무언가를 갈망하고 유혹”에 흔들리는데,
“요셉은 이미 영적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세상에 헛된 욕망이 요셉에게
아무런 매력도 주지 못했다,결핍이 없으니 외부 자극에 흔들릴 필요가 없다.
이것이 바로 “하늘과 연결된 자,슈브를 이룬 자의 모습”이라는 핵심 이미지다.
세상의 것으로 채우려는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가득 채워져서 세상의 것이 들어올
자리가 없는 상태, 그것이 진정한 승리”라는 것이다.
양자 얽힘:두 개의 입자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하나의 입자에 변화가 생기면
다른 입자도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현상이다.
“고대의 영적인 이야기를 설명하는데 과학자 개념까지 동원”된다.
“우리의 영적인 실체”를 설명하기 위한 “탁월하고 현대적인 비유”이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두 개의 자아(야곱과 이스라엘)가 공존”한다고 말한다.
하나: 이 땅에서 고난 받고 씨름하는 야곱으로서의 자아 이고.
둘: 이미 하늘보좌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는 이스라엘로서의 본질적인 자아다.
양자 얽힘: 두 개의 입자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하나의 입자에 변화가
생기면 다른 입자도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현상이다.
“땅에서 고통받는 나 즉 야곱과 이미 하늘에서 완성된 나 이스라엘이 사실은
시공간을 초월해서 서로 연결된 하나의 존재”라는 걸 설명한다.
이 “두 자의 연결이 강해질 때, 즉 양자 얽힘 상태”가 될 때,
“하늘의 계획과 능력이 땅의 내 삶의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요셉이 바로 그 완벽한 모델 인셈”입니다.
“요셉”은 땅에서는 “노예로 팔리고 감옥에 갇히는 최악의 상황”을 겪고 있었지만
그의 “본질은 하늘의 이스라엘과 강하게 얽혀 있었기에”하나님의 거대한 계획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셉 하나가 변화되므로 세계를 진동시킨다.
그“거대한 그림”으로 보면, “요셉의 고난이 그냥 불쌍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 실행되는 과정 그 자체”다.
그렇게 “하늘과 완벽하게 동기화 된 요셉”의 이야기가 한참 진행되다가
“성경은 갑자기 화면을 돌려서 그의 형 유다와 며느리 다말”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이건 “흐름을 깨는 완전한 탈선 처럼” 느껴지는데,
이것은 “의도적인 문학적 교차의 편집”으로 본다.
“하늘의 길을 걷는 요셉의 여정”과 다른 “땅의 길로 추락하는 유다의 여정을
극명하게 대비시켜 보여주는 장치”라는 것이다, “유다는 형제들을 팔아 넘긴
죄 책감과 리더십의 실패”로 “가나안 땅을 떠나 세상 속”으로 내려간다.
이것은 “거룩한 언약 백성의 영적 타락을 상징하는 중요한 장면”이다.
“한쪽에서는 하늘의 계획이 이루어지고, 다른 한쪽에서는 언약 백성이
타락하는 모습을 동시”에 보여준다. 그런데 “놀라운 반전”이 일어난다.
바로 “그 타락의 현장에서 이방 여인이었던 며느리 다말을 통해 메시아의 계보가
이어지는 역설이 발생”한다.
“다말이 시아버지인 유다에게서 그의 신분을 증명하는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담보물로 받아내는데, 이 담보물이 “장차 우리의 죄를 위해 스스로 담보가 되어 주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강력한 상징”이라고 해석한다.
“가장 부끄럽고 실패한 인간의 역사 속”에서,
오히려 “구원의 계획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특히 “다말이 낳은 아들 베레스의 이름 뜻이 터트리고 나오다”.
[대상2:4]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 유다로 말미암아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으니
유다의 아들이 모두 다섯이더라
[페레츠:터짐,헤치고 나옴]
즉 “돌파를 의미한다는 점이 정말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시아버지 “유다와 동침하여 낳은 쌍둥이 아들 중 첫째”아들,
성경 족보에 기록된 중요한 인물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는 인물이다.
[마1: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파레스:깨뜨림]
[눅3:33] 그 이상은 아미나답이요 그 이상은 아니요 그 이상은 헤스론이요
그 이상은 베레스요 그 이상은 유다요
“우리의 실패 속에서도 이런 영적 돌파가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준거 같다.
그래서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는 단순한 막장 드라마가 아니라 인간의 가장 깊은 타락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 은혜를 통해 일어나는 돌파를 보여주는 복음의 축소판”인 샘이다.
“요셉”의 길과는“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은 또 다른 구원의 길”을 열고 계셨다.
“하늘과 연결된 요셉의 이야기,땅으로 추락했다가 돌파를 경험한 유다의 이야기”.
이 모든 것을 통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바로 영적 교차로”,
즉, 이 모든 이야기가 결국 우리에게 무엇을 선택하라고 말해 주고 있다.
그것은 지금이 바로 “우리 각자의 내면에서 근원적인 슈브”, 즉
“하나님께로의 완전한 돌아옴을 선택해야 할 결정적인 순간”이라는 메시지다.
우리 “각자가 하늘과 연결된 요셉 세대가 되어서 앞으로 다가올 영적 기근의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는 사명”을 일깨워 준다.
“이 시대를 마치 죽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마른 땅 같은 현실 속에서도 생명을
키우고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감옥에서 요셉 덕분에 살아나고 복직”했지만,
2년 동안이나 요셉을 까맣게 잊고 지냈던 그 술맡은 관원장 이야기를 기억하자.
그 모습이 어쩌면 “오늘날 교회의 모습일 수 있다”할수 있다.
“구원의 은혜는 받았지만 다시 오실 주님 즉 재림의 긴급성을 잊어버리고
세상의 즐거움과 안정의 취해 안주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경고”인 것이다.
그래서 “이 말씀은 우리를 향해 외치는 것”이다.
우리의 본질이,우리의 사명이 무엇인지 잊지 말라고 강력하게 촉구하는 것이다.
“성경의 낡은 문자에 생명을 불어넣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자
또 미래를 안내하는 영적인 지도”가 될 수 있는지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다.
요셉이 겪었던 “구덩이와 감옥이라는 최악의 고난이 사실은 그의 신적일 부르심을 이루기
위한 가장 정확하고 완벽한 경로”였다.
만약 우리도 “하늘에 있는 우리의 진정한 본질, 그 이스라엘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면,
“지금 내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역경과 이해할 수 없는 고난 또한 결국은
가장 완벽한 길 위에 있음을 믿어도 좋다는 강력한 위로와 격려”를 주는 것이다.
“세상의 시끄러운 소음보다 우리 내면의 영적 주파수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우리의 삶을 이런 관점”으로 다시 한번 들여다 본다면, 지금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직접적인 소통을 가로막고 있는 우리의 견고한 진”은 무엇,어떤 것인가???
그리고 “나의 삶에서 베레스, 즉 영적 돌파”는 어떤 모습으로 찾아올까?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이 작업을 하고 계신다.
[대상2:4]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 유다로 말미암아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으니
유다의 아들이 모두 다섯이더라
[페레츠:터짐,헤치고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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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원어로 풀어낸 목사님의 설교에 큰공부가 됩니다
양자 얽힘의 상태에서 늘 이스라엘의 심령을 간직하는 모습은 그리스도인의 근원적 자세여야 겠습니다
사람마다
다른 삶속에서 본의아닌 실수나 실패는 하나의 오점이 되겠으나 페레츠적인 과정이 되어 진정한 슈브로 정립 될수있으니
그 인도하심이
감사합니다
준비되어진 요셉의 삶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감동하며
다말의 초월된 심령이 많은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어느날 들려주신
주님의 음성이
" 이땅에 부요함은
그리 중요치 않으니 하늘을 바라며 나를 바라봄이 옳도다"
하셨는데
그말씀은 하늘의 이스라엘이 되어 가도록 슈브에 대한 확신과 누리는 평강의 은혜를 확인 시켜주신 말씀이 아니 였을까 하는
생각을
조심스레 해보았습니다
전도사님의 은혜 받은 글에서 저도 은혜를 받습니다
저 자신 때문에 연구하게 된 글이지만 우리 모두의 길이기에 은혜를 공유하고 주님께 영광돌려 드리길 위해서 입니다
@베들레헴교회 담임 김사랑목사 감사합니다 목사님~♡
@소율전도사
야.. 아주 좋아요..
나중에 성경세미나 같은 것을 하시면 좋겠네요
그러신가요?
네,목사님 감사합니다
그러면 더 깊히 연구가 들어가죠
아멘아멘아멘
할렐루야
김사랑목사님
요셉 이야기 풀어서 올려주시니
넘 무도 은혜가됩니다
감사드립니다
네안의 남아있는 견고한진뿌리가 성령님 불로 테우노라 아멘
목사님 축복합니다
사랑합니다
아멘,아멘 목사님 성령의 불로 태우노라 글읽을때 제 심령에도 불이 임합니다
목사님 불로 다 태우시고 하늘의 이스라엘이 되세요.
축복합니다
아멘아멘 할렐루야
말씀이 날마다 새롭게 변화되시니
은혜위에 은혜입니다
사랑하며 주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 ♥️ 💘
아멘 모든것이 은혜입니다
나의 고난이 하나님의 사랑이었고 제게 주실 축복이었습니다.목사님 감사합니다
@베들레헴교회 담임 김사랑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