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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미래를 여는 나의 집 § 원문보기 글쓴이: pinetree
평화와 주권을 수호하며 급변하는 전쟁 패러다임 속에서 미래전장을 주도한다! 강인한 정신력과 첨단무기체계로 세계로 도약하는 대한민국 국군, 국가에 대한 헌신, 민족을 지키는 책임감, 그 군인정신의 맥을 찾아 역사의 현장을 누비는 현역 군인들, 나라 잃은 국민의 울분과 설음, 그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독립의 갈망, 독립투사들의 열정을 찾아가는 국군의 뿌리찾기 대장정이 시작된다.
국군의 뿌리를 찾기 위해 선배 군인들이 누볐던 역사의 현장을 찾아나선 답사단, 오직 하나의 열망은 조국독립, 그것을 위해 뜨거운 피를 흘렸던 의병, 독립군, 광복군들, 러시아 브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군인 답사단,
박민석 육군소령/2017 참 군인대상: 이제 만주 지역하고 좀 다르게 연해주 지역에 대한 우리 과거 독립군들의 발자취를 찾아왔다는 것에 설렙니다.
러시아 극동지역의 항구도시 블라디보스토크, 군사요충지에서 교통, 산업, 문화의 중심지로 급부상하고 있는 도시다. 옛 연추지역인 크라스키노로 가던 중 갑자기 차를 세우고 한 가게로 들어가는 답사단, 꽃집에는 무슨 일로 들른걸까.
박민석: 안중근 의사 단지 동맹기념비에 가기 전에 저희가 꽃이라도 한 송이 바쳐야 될 것 같아서 꽃을 구매하러 왔습니다.
조국을 위해 한 몸을 불사른 독립투사들에 대한 감사와 존경하는 마음을 다 담기에는 꽃 몇 송이가 한없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가는 도중 우연히 발견한 꽃집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한말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던 연추지역, 안중근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1907년 러시아 연해주로 와 의병활동에 참가한다 (안중근 단지 동맹기념비, 러시아 크라스키노).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독립 대상으로 백여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박성욱 해병중사/한국광복군 외손자: 이 자리에서 단지동맹이라는 것을 결성했고 그 이후에 이 동맹으로 인해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사실을 오늘에서야 다시 한번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1909년 1월, 동지 11명과 죽음으로서 구국전쟁을 맹세한 安重根, 그는 손가락을 끊어 결의하며 단지회를 결성했다. 넷째 손가락 마디가 잘린 安重根의 손도장에 가만히 손을 대보는 후배들, 그의 결기가 어땠을지 짐작만 해볼 뿐이다.
박민석: 과거엔 하지 못했지만 선배 군인의 후손들인 현역 간부들이 이런 연해주 지역에서 태극기를 한번 꺼내서 함께 과거의 독립군들을 기리면 좋을 것 같아서 태극기를 준비해 왔습니다.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붉은 피로 맹세한 결의, 안중근(1879~1910) 의사 독립운동가, 이후 안중근은 한반도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로 결심하고 중국 하얼빈으로 향했다. 이토 히로부미(1841~1909), 1909년 10월 26일 아침, 하얼빈역에서 의장대를 사열하는 이토를 세발의 총을 쏜다. 안중근은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현지에서 체포된다. 이 사건은 이범연, 홍범도, 유인석 등 의병장들이 13도 의군을 편성해 공격을 추진하는 도화선이 된다.
박민영 책임연구원/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국내외 항일의병세력을 하나의 통일된 단일 군단으로 편성함으로써 대일 전면전을 구상했다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해외에서 진행된 이런 대일 항쟁들을 독립전쟁을 계속 수행해 나갈 수 있는 에너지가 되었다. 연해주 독립군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
한시준/단국대 사학과 교수: 최재형 선생 사시던 집이라 라고해서 표지석을 세워 놨지요.
러시아 우수리스크, 러시아 독립군의 대부로 통했던 최재형, 그의 마지막을 지켜 본 우수리스크 집은 지금도 그대로 보존돼 있다. 노비였던 아버지, 기생이었던 어머니, 가난을 피해 연해주로 와 뛰어난 사업 수완으로 엄청난 부를 일군 최재형은, 별명이 패치카, 즉 난로였을 정도로 주변 사람들을 배려했다.
김 니꼴라이 관장/고려인 문화센터: 옛날의 구조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기 때문에 어떤 난방장치를 사용했는지 알 수 없지만 여기에 난로도 있었습니다. 여기 보이세요? 여기에 굴뚝이 있었습니다. 여기에도 난로가 있었습니다.
집은 기념관으로 만들기 위해 지금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최재형(1860~1920),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했던 최재형, 그는 홍범도(1868~1943), 이상설(1870~1917), 엄인섭(1875~1936) 등과 함께 勸業會를 조직해 항일구국운동을 펼쳤다. 언뜻보면 경제단체로 보이지만 항일구국운동이 목적인 勸業會는 권업신문을 창간해 교민들의 단결과 민족정신을 고양시켰다.
김 니꼴라이: 밤에 일본군이 이 건물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최재형 선생은 여기서 탈출하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떠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떠나면 나머지 사람들이 체포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일본군에게 잡혀갔습니다.
최재형은 바로 이 집에서 일본군에 체포됐다.
박민석: 최재형 선생님께서 마지막까지 생활하셨던 이런 집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 우리 후손들에게는 과거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좋은 교육장소라고 생각합니다.
진권용 공군대위(진)/미하버드대 전체수석졸업: 최진형 선생님께서 어떤 독립활동을 하셨는지 보여줄 수 있는 기념관으로 다시 탄생한다는 게 참 다행입니다.
김현진/러시아 항일유적지 해설사: 이 아파트 자리가 예전에 勸業會와 권업신문을 발간하던 장소이고 이동휘 선생님이 살던 집터가 되겠습니다.
한인 사회의 경제문제와 항일문제 등에 관여했던 勸業會는 독립군을 양성해 독립전쟁을 구현해 나갔다. 그리고 1914년 망명정부의 효시였던 대한광복군 정부를 건립했다. (제1차 세계대전, 1914년~1918년간 벌어진 전쟁, 영국-프랑스-러시아 등 연합군과 독일-오스트리아 동맹국간의 전쟁).
한편, 1914년 7월 유럽에서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은 세계정세를 급변시켰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식민지였던 체코는 제1차 세계대전에 오스트리아군의 일원으로 참전한다. 러시아 전선에 투입돼 전투를 벌이던 중 1918년 종전과 함께 독립을 맞게 된다. 청산리 지구전투에서 이름을 떨친 이범석(1900~1972)은 그의 책, 우둥불에서 만주 독립군들의 무기가 누구로부터 왔는지 밝히고 있다. 무기거래를 성사시킨 사람은 체코군단의 최고사령관 라돌라 가이다와 북로군정서 군무부장 조성환, 라돌라 가이다(1892~1949) 체코군 사령관, 조성환(1875~1948) 독립운동가,
오스트리아와 항가리로 부터 오랜 식민지 통치를 겪었던 체코는 비슷한 처지의 한국에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 가이다 장군은 한국 독립군을 만난 자리에서 독립군들에게 체코군이 가지고 있던 무기를 넘겨주기로 흔쾌히 동의했다. (라돌라 가이다의 체코 프라하).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과 여비라도 보탤 생각으로 체코군은 비교적 헐값에 무기들을 독립군에게 넘겼다.
야로슬라브 올샤/前주한 체코대사: 1918년, 약 300년 만에 새로운 체코슬로바키아가 탄생했습니다. 이전에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독립을 하게 된 체코슬로바키아 군인들은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습니다.
당시 체코군의 무기는 세계 최고수준을 자랑했다. 무기를 확보한 독립군들은 일제와 제대로 된 전쟁을 치를 태세를 갖추게 됐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해 북로군정서 사령부가 있는 지린성 왕칭현까지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을 넘고 일본군의 감시를 피해야 하는 험난한 길, 독립군들은 밤에 산길을 이용해 무기를 운반했다. (왕칭현 서대파-동녕-훈춘-블라디보스토크), 강인한 투지에 체코군의 무기로 화력을 보강한 독립군은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통쾌하게 패전시켰다.
비노그라드노예 러시아 하산, 한민족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지역인 연해주, 이곳에 한인들은 언제 이주한 걸까.
한시준: 우리 한국인들이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 와서 제일 처음 정착한 곳입니다. 地新墟 옛터. 1863년 이후 러시아에 이주해온 한인들이 제일 먼저 모여산 마을, 地新墟, 지금은 사유지라 들어갈 수 없었다.
박민석: 여기서 한 20분 정도 더 들어가면 최초 한인들이 정착했던 곳을 볼 수 있는데 그걸 보지못해서 무척 아쉽습니다.
한시준: 지신허 마을에 가면 한국사람들이 살았던 흔적들이 있잖아요. 흔적 중에 가장 상징적인 게 어디 가든지 맷돌이 있다는 건데 거기에는 맷돌이 남아 있어요.
함경도 출신 농부 열세가구가 처음으로 터잡은 地新墟 마을로부터 연해주 고려인의 역사가 시작됐다.
진권용: 저희 선배님들, 선조들의 유적지가 있는데 저희가 가지 못하는 게 많이 아쉽습니다.
멀리서 라도 마을을 보고 싶은 마음에 지신허 마을이 들어다 보이는 고지대로 차를 몰았다. 저 멀리로 보이는 지신허 마을, 당시 지신허 마을은 항일 의병들의 활동무대이기도 했다. 갑자기 한국으로 전화를 거는 김도현 대위, 안녕, 잘 살고 있나? 보고 싶은 얼굴을 보니 답사의 피로도 풀리는 거 같다. 한국에 있는 젖먹이 아들에게도 이 감동이 전해질까.
김도현 해군대위/김좌진 장군 증손자: 지금 여기가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장소기도 하고 마침 정상에 올라와서 경치도 좋기 때문에 영상통화로 좀 보여주고 싶어서 영상통화를 했습니다.
그날 오후 피아노가 있는 곳을 수소문해 찾아간 답사단, 답사중에 독립군가를 계속 연습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피아노가 준비되어 있는 공간이 협조가 돼서 피아노 연주에 독립군가를 제창해 보기로 했습니다. 중국 답사에서부터 꾸준하게 연습한 박성욱 중사, 1절, 2절만 같이 해보는 거로 합니다.
블라디보스토크 해안가, 초가을 블라디보스토크의 푸른 하늘을 느끼며 바닷가로 향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온 한인들이 제일 먼저 이 바닷가에서 터 잡은 것은 부두노동에 일자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선조들이 여기서 흘렸을 땀과 눈물, 그 무렵 겨울에도 얼지 않는 블라디보스토크항은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을 위한 요충지로 떠오르게 된다.
안쪽으로 들어와서 그런데 저 방향이 태평양과 연결되는 곳이죠. 한인 마을이 확장되는 것을 막기 위해 1911년 러시아 당국은 콜레라를 구실삼아 바다 한인 정착지를 강제 폐쇄한다. 한인들은 어쩔 수 없이 바다가에서 4킬로미터 떨어진 산비탈에 새로운 마을 신한촌을 조성한다. 1999년 광복절날 3.1독립 선언 80주년을 맞아 신한촌에 세운 기념비, 남한과 북한, 고려인을 상징하는 세개의 큰 비석이 답사단을 맞는다. 100여년전 신한촌을 중심으로 수많은 항일독립지사들이 활약했으며 1919년 만세물결도 이곳으로 밀려왔다.
한시준: 3월 17일날 연해주에 살고 있던 한국인들이 여기에 모여서 독립선언을 발표한 것이죠.
하지만 망국의 민족이 타국에서 살아가는 것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한민족의 아픈 역사가 서려있는 또 하나의 현장, 라즈돌리노예역 러시아 나테즈딘스키군, 1937년 우리나라 간이역 정도 크기의 이 역에서 고려인들은 강제로 중앙 아시아행 기차에 올라야 했다.
김현진: 저쪽 넓은 지역에 고려인들이 분포해 있었는데 그 고려인들을 다 여기에 모아서 여기에서 기차로 해서 중앙 아시아로 보내게 됩니다.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결정으로 17만 여명의 고려인들이 피해를 입었다.
현지인: 1905년 경에 지어진 건물이고 1910년 쯤에는 여기에 러시아 군인들이 많이 있었어요. 한인들은 주로 우수리스크에 많이 살고 있었지요.
블라디보스톨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인 우수리스크, 러시아 한인 이주 140주년 기념관, 이곳은 고려인들이 가장 많이 살았던 지역으로 지난 2009년 한인이주 140주년을 기념해 고려인 문화센터가 세워졌다. 고려인 역사관 러시아 우수리스크. 고려인 이주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역사관, 최근에 새단장을 해 깔끔하고 고려인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자료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잘 정리돼 있었다. 현재에도 러시아 전역에서 살고 있는 고려인들, 갖은 역경을 이겨내면서도 뿌리를 잊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고려인이 걸어온 아픈 역사가 답사단들에게 울림을 준다. 1919년 무렵 러시아에 살고 있는 한국인은 20만명 정도 그들은 독립의 끈을 놓지 않고 이국의 생활을 견뎌 나갔다.
한시준: 헤이그 밀사는 이상설, 이준, 이위종 이잖아요. 이위종이 바로 초대 러시아 공사 이범진의 아들이에요. 이상설과 이준이 갈 때 이위종이 통역 역활을 한 거죠. 이범진은 을사늑약 때 외교권을 박탈 당해서 소환되지만 소환을 거부하고 러시아에 끝까지 버티고 있다가 1910년에 나라가 완전히 망하니까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목을 매 자결하죠.
고려인의 강제이주 역사는 곧 우리 민족의 고난사, 나라를 지켜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들의 고달픈 삶이 말해 주고 있다.
김 발레리야 부관장/고려인 문화센터: 전체 연해주 고려인 인구의 반이 우수리스크에 살았는데 그때 당시 고려인들이 많이 살았으니까 그곳에서 독립운동 하는 것이 더 의미 있었어요.
힘없는 약소국을 침략하며 제국주의가 칼날을 마구 휘두르던 1909년대초, 나라를 잃은 한민족 청년들은 때로는 러시아 전장에서, 일본군 막사에서 또 광복군이 되어 모진 운명을 이겨 내야만 했다.
경상북도 성주의 한 주택, 1940년대 활약한 한국 광복군의 후손이 소중하게 보관해오던 자료들을 꺼내 보여준다. 행여 훼손될까 보자기에 잘 싸놓은 것은 작은 아버지의 젊은 시절 사진들, 학교 다닐 때 찍은 사진입니다.
빛 바랜 흑백사진의 주인공은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 한지성 대장,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서 신체조건과 어학능력을 고려해 뽑은 9명 가운데 한명이었다.
한옥동/인면전구공작대 한지성 대장조카: 고등학교 시절부터 영어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져서 우수한 영어실력과 외교 중심을 위한 광복운동의 일환으로서 홍콩 등지에서 활약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마 영국군의 요청도 있던 바, 인면전구 공작대의 대장에 가장 적임자라 생각되어 선출되지 않았나 생각하는 바입니다.
대구에서 특별히 온 할머니는 인면전구 공작대 박영진 대원의 아내, 당시 갓 결혼식을 올린 상황에서 박영진 대원은 결혼 6개월만에 전쟁터에 나갔다.
이애선/인면전구 공작대 박영진 대원아내: 거기서 영어를 좀 배웠답니다. 광복군으로 활약하다가 해방 후에는 6.25 전쟁에도 참전한 박영진 대원, 그는 아내를 두고 전쟁터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이애선: 애 많이 먹었어요. 살면서 온갖 일을 다 했어요. 인면전구 공작대 라는 이름도 생소한 한국 광복군 부대, 그들의 기억을 찾기 위해 미얀마로 가봤다. 곳곳에 불교유적지가 눈에 뜨이는 동남아시아의 대표적인 불교국가 미얀마, 과연 그들의 흔적은 어디에 있을까? 제2차 세계대전 기간중, 일본군과 연합군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현장에는 지금도 그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안내자를 따라 간 곳에 있는 한 비석, 당시 전쟁터에서 전사한 일본군과 연합군 전사자들을 한꺼번에 묻은 후 무덤을 만들었다. 緬甸方面彼我戰歿諸精靈 For all Japanese, Myanmars and English victims of the war, we pray for their souls to rest in peace here forever. 전쟁터에서 사망한 일본인, 미얀마인, 영국인 희생자들의 영혼이 여기서 영원히 평화롭게 쉬기를 기도합니다.
1942년 전투가 시작돼, 일본 패망직전인 1945년 7월까지 계속된 포화의 현장,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은 1942년 미얀마로 진격해 왔다. 그리고 그해 3월 수도 랭군을 함락한 후 영국군을 북쪽으로 밀어내며 미얀마 전역을 장악했다.
싼유아웅 교수/만달레이 역사학과: 그때 당시에는 일본군에 밀려 막혀 있는 이 동굴로 도망왔다가 폭탄이 터지는 바람에 많이 죽었어요. 나중에 일본사람들이 찾아와서 돈을 주고 자기 나라 선조들의 묘지를 만든거에요. 당시 미얀마는 중국으로 연합군 물자를 수송하는 전략적 통로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이 지역을 점령함으로써 연합군은 매우 힘든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일본군에 밀려 인도와 중국 국경 인근에 퇴각해 있던 연합군은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전환점이 시급했다.
미얀마 탈환작전을 계획하던 연합군은 대적선전과 첩보수집을 위해 중국에서 활동하고 일본어를 구사할 줄 아는 한국인을 떠올렸다. 영국군이 충칭의 영국대사관을 통해 한국 광복군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임시정부 입장에서도 연합군에 속해 전쟁에서 이기면 전승국의 지위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요청을 받아 들였다. 일본군과 연합군간의 밀고 밀리는 격전 속에서 미얀마 안에 있는 무수히 많은 건물들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왕궁만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영국군과 일본군은 번갈아 이 왕궁을 차지했다.
싼유아웅: 왕궁을 정복했다는 것은 승리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파괴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기록을 보면 64개 정도의 건물이 있었다고 합니다.
중요한 순간에 미얀마 전선에 투입된 9명의 한국 광복군 소속, 인면전구 공작대는 1943년 8월 인도에 있는 영국군 동남아 전구사령부에 배속됐다. 먼저 인도 뉴델리에 도착해 영어와 방송기술을 교육받고 3개월간 영국군 부대에 분산 배치되었다가 1944년초 임팔 전선에 투입됐다.
싼유아웅: 여기서부터 영국군은 천둔강을 건너 임팔 지역으로 후퇴를 했어요.
임팔은 당시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었던 연합군의 미얀마 탈환 작전에 격전지였다. 광복군은 이 전선에서 대적선전 공작의 임무를 맡았다. 인면전구 공작대원들은 기본적으로 영어와 일본어 등을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적진 교란방송, 일본군 포로심문 등 심리전에 투입됐다. 인면전구 공작대가 가장 큰 활약을 보인 것은 영국 17사단이 일본군에 포위된 상황에서 습득한 일본군 작전일지를 분석해 영국군을 무사히 탈출시킨 일이었다. 그 사건은 영국에 소개됐고 영국왕실에서도 인면전구 공작대에 고마움을 전했다. 그렇다면 인면전구 공작대는 총을 들고 싸우지는 않았을까?
심헌용: 당시 위급한 상황으로 봤을 때는 모든 병사들이 무기를 소지했던 것은 당연한 것이고 일정한 상황에서는 전투를 벌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한국 광복군 인면전구 공작대가 투입됐던 임팔로 가는길,
우꺼레이/前미얀마 역사문화연구원: 1941년 영국이 빠져 나갈 때 이용했던 길과 같은 길입니다.
영국군은 인도군을 비롯해 중국군, 한국광복군과 함께 일본군에게 총반격을 개시했고 1945년 5월 수도 랭군을 탈환했다.
우꺼레이: 이곳이 바로 전투지역이었습니다. 영국이 1940년대에 임팔까지 뚫었습니다. 오래 전에는 탱크로 싸웠던 흔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흔적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이로써 한국광복군은 활동범위가 인도와 미얀마 전선으로까지 확대됐으며 연합군과 공동작전을 펼치는 과정에서 다양한 실전경험도 쌓게 됐다. 그리고 독립항전을 전개하는 자신감도 얻을 수 있었다. 미국 진주만을 폭격하며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에게 미얀마 전선은 양보할 수 없는 전장이었다. 연합군과 대적하는 현장으로 일본군 병력과 무기들이 총집결되는 상황, 한국인 위안부들도 그곳으로 보내졌다. 미얀마 지역은 3200여명의 일본군 위안부가 집중파견된 곳으로 그중 2800여명이 한국에서 간 여인들로 추측되고 있다. 전선을 따라 이동하는 여인들은 일본군이 패하자 포로가 됐다. 이 과정에서 위안부를 국내로 안전하게 수송하는데 한국 광복군이 참여했다.
김우전 96세/생존 광복군: 제가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 했었는데 제 자서전에도 쓰여져 있지만 이분이 김학규 장군이에요. 충칭에서 1940년에 한국 광복군을 설립했을 때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제3지대장을 맡은 김학규(1900~1967) 장군, 제3지대는 중국 전역에서 광복군을 모집하는 활동을 주도적으로 진행했다. 미얀마에서 포로가 된 한국인 위안부들은 위난성에 설치된 포로수용소에 억류됐다. 이때 이들을 상대로 심문을 하는데 한국 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 장군의 부관인 김우전이 이 과정에 참여한 것이다.
김우전: 1940년 9월 17일날 충칭에서 광복군이 창설되어서 장군들 중에 기라성 같은 분들이 많았어요. 의병출신, 만주 독립군 출신 등 쟁쟁한 분들이 많았습니다.
우리나라 호국의 역사와 평화의 소중함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전쟁기념관, 답사단은 이곳에서 생존 광복군 김영관(96세) 지사를 만났다. 여기 김도현 대위 외조부께서 한국광복군으로 실제활동을 하셨습니다.
김영관 96세/생존광복군: 반갑습니다. 옛날에 선배로서 만나서 반갑습니다.
김도현: 실제로 광복군을 뵈니까 개인적으로 영광스럽습니다.
스무살 때 일본군 학도병으로 탈출해 한국 광복군 제1지대에 소속됐던 김영관 지사, 6.25 전쟁에도 참여하는 등, 구국정신을 이어온 지사는 후배들에게 생생한 역사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김영관: 오늘 국군의 뿌리는 대한제국군에서 의병으로 이어지고, 의병의 정신은 독립군으로 이어지고, 독립군의 정신은 광복군으로 이어지고, 광복군의 정신은 오늘날 국군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답사단은 생존 광복군을 만나며 국가에 헌신했던 삶과 그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됐다.
박성욱: 사실 지금 한편으로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실제로 광복군 활동을 하셨던 선배님을 뵈니 저희 외조부님께 못받았던 사랑, 따뜻함, 그런 것을 느낄 수 있는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한국광복군 OSS 훈련터 중국 시안, 이곳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한국 광복군이 특별한 훈련을 받았던 장소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향하던 1945년 당시 미중앙정보국 CIA의 전신인 전략첩보부대 OSS와 한국광복군은 극비리에 국내진공을 위해 손을 잡았다. OSS가 전략상 중요하게 여긴 것은 한반도였다. 일본군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는 일본 본토를 단절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OSS는 한국 광복군을 훈련시켜 적후방을 공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바로 독수리 작전이었다. 김구 주석과 OSS 도노반 소장, 1945년 8월 OSS 총책임자였다. 도노반 소장과 김구 주석은 시안에서 만나 훈련받는 대원들을 국내로 침투시키는데 합의했다.
심헌용: 한반도의 후방작전에 투입할 병력의 필요성을 인정받았고요. 그 과정에 한국 광복군 제2지대 지대장인 이범석 장군이 나름대로 이 역할을 하면서 OSS 작전을 펼치게 됩니다.
한국 광복군 제2지대 대원들은 서전트 대위의 주관으로 훈련을 받았다. 무전교신과 게릴라 활동을 위한 일종의 특수훈련인 OSS첩보훈련, 훈련내용은 첩보 및 통신훈련, 독도법과 무전교신 등 정보통신에 관한 기본교육 외에도 사격술, 폭파술, 도강술과 같은 야전훈련이 포함됐다. 일본의 패망으로 비록 독수리 작전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그 역량은 후일 건군과정에서 큰 힘으로 작용했다.
충청남도 천안시 독립기념관, 국군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를 실감나게 느낄 수 있는 독립기념관을 찾은 답사단, 투지로 똘똘 뭉쳐 독립전쟁의 서막을 열었던 독립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로 최고 승리의 순간까지 지속적인 항전을 준비한 한국 광복군, 그 역량이 모여 광복의 역사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한시준: 서간도, 북간도 이 일대에서 독립군을 조직해서 활동했던 사람들, 실제로 지휘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고, 또 임시정부에 있던 청년들, 청년뿐만 아니라 임시정부 요인들 중에 딸들 있잖아요. 딸들까지 군복을 입혀서 우선 광복군을 만들었습니다.
현지 답사를 통해 체감한 터라 그들의 구국정신이 더 실감나게 다가온다. 독립기념관에서는 독립군이 되어 훈련을 체험해 볼 수 있는 공간도 마련돼 있다. 결전의 날을 목표로 훈련했을 그 때의 독립군 처럼 훈련터를 누비는 답사단들,
김도현: 여기는 독립기념관에서 청소년들 체험용으로 만들어 놔서 아무래도 좀 난이도를 낮게 만들었지만 실제로 실전을 치르는 독립군들은 훨씬 더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이것보다 훨씬 더 넓고 위험한 시설에서 훈련을 했을 거로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박민석: 훈련장을 만들어서 훈련시켰다는 것 자체가 구국에 대한 마음이 정말 크지 않았나.
그런 생각에 답사 내내 손에서 카메라를 놓지 않았던 박민석 소령, 인상적이었던 곳, 꼭 기록해야 할 유적지 등을 촬영해서 틈틈히 동영상을 만들었다.
박민석: 영상 같은 것을 간단하게 만들어서 기록으로 남기는 걸 좋아합니다.
남겨놓지 않으면 금방 잊어버릴 수 있는 감동의 순간,
박민석: 그 순간에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이 다시 돌아봤을 때 새로운 감정으로 느껴질 때가 있고 그때 답사를 하면서 우리 단원들과 있었던 에피소드 같은 것들도 생각이 나고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잔상이 남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박민석 소령이 제작한 답사 동영상.
무후손 선열 광복군 합동묘역 서울특별시 강북구, 서울 강북구 수유리 북한산 자락에는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한국 광복군들이 잠들어 있다. 후손이 없거나 유해조차 찾을 수 없어 유품만으로 합장돼 있는 17위의 선열들, 광복군 전사상, 후손이 없는 묘의 주인을 대신해 종종 이곳을 찾는 다는 김일진씨, 아버지와 함께 중국에서 苦樂을 같이 했을 선열들을 떠올리며 묵념을 한다. 김일진씨의 아버지는 한국 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 장군이다.
김일진/한국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 아들: 추석을 맞이해서 광복군 출신 선열들을 위해서 제가왔습니다. 지금 광복군이었던 분들중 생존지사는 얼마 안계세요. 그래서 후손으로서 그리고 3지대 대장이셨던 김학규 장군의 아들로서 이곳에 왔습니다. 지금 민영주 선생님의 요양병원에 가고 있습니다. 김일진씨의 어머니는 여성 광복군이었다. 민영주 지사님은 저희 어머님인 오광심 여사와 같이 독립운동을 하셨습니다. 여성 광복군으로 같이 하셨기 때문에 잘 알고 있죠.
파주의 한 요양병원, 1942년 임시정부 내무부 요원이었으며 1945년에는 한국 광복군 제2지대 소속으로 활동한 민영주 지사, 김준엽(1920~2011)씨는 한국 광복군이었으며 前고려대학교 총장, 그녀는 故김준엽 선생의 부인이며 독립운동가인 민필호 선생의 딸이기도 하다.
민영주 95세/생존 여성광복군: 지청천 장군께 태극기 갖다 바친게 나예요. 그때 어렸을 때예요. 미국인 서전트 그 사람 밑에서 지출, 수입 등을 영어로 적었어요. 그때 인재가 없었거든요.
전국에 생존 애국지사 가운데 여성은 세명뿐이다.
김홍규/여성광복군 민영주아들: 나라를 잃어버린 설움을 아주 뼈저리게 느끼셨던 분이예요. 중국말로 ‘꺼리망즈’가 있어요. 꺼리는 고려거든요. 망즈는 잃어버린 사람, 다시 말하자면 나라를 잃어버린 자,. 중국사람들이 한국 사람들한테 욕을 할 때 ‘꺼리망즈’라고 그랬대요. 그래서 나라가 소중하다고 말씀을 하셨어요. 한국 광복군이 창설되었을 때 여성들도 참여했다. 이들은 주로 사령부에서 비서사무나 선전사업 분야에서 활약했다.
민영주: 할머니는 집에서 중국말을 못하게 했어요. 나라도 빼앗겨서 마음이 상해 죽겠는데 왜 집에까지 와서 중국말을 하느냐고 민족의식을 강조하고 그랬어요.
부모님간에 인연이 있었던 터라 자주 병원을 방문하는 김일진씨, 1945년 광복의 날이 왔을 때 중국에 있던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끝까지 애썼던 한국 광복군들, 김학규 장군과 오광심 지사는 부부 광복군으로서 탈출한 한인 학도병을 광복군으로 편입시키는 등 함께 활동을 펼쳤다.
김일진: 이거는 어머님이 첩보공작을 할 때 여대생으로 변장을 해서 단발머리를 하고 치파오를 입고 중국인 여학생 처럼 변장을 한 사진이에요. 저희 어머님은 주로 첩보, 연락 이런 것들을 맡으셨어요. 작년말 독립기념관장으로 취임한 이준식 관장,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지청천 장군의 외손자 여성광복군 지복영 아들: 어머니께서 생전에 회고한 원고를 써놓으셨는데요. 여든 아홉살에 돌아가셨는데 사실은 완성을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여성 광복군 지복영 지사다.
1941년 새해를 맞아서 군복을 입고 찍은 사진입니다. 거수경례를 하는 사진인데 이 사진을 찍을때만 하더라도 어머니는 당신이 광복군 입대해 활동하면서 아마 목숨을 잃을 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을 하신 것 같습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로 망명한 지청천(1888~1957) 한국 광복군 총사령관, 신흥무관학교 교육대장,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사령관을 지낸 지청천 장군, 지복영(1920~2007) 지청천 장군 딸, 그의 딸 지복영 지사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항일운동을 결심한다. 지복영 지사는 아버지 지청천 장군에게 광복군 입대결심을 전하고 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지자 당시 가장 급한 임무였던 선전활동에 투입된다.
이준식: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할 때 헌법을 만듭니다. 그 헌법에서 남녀평등을 제정합니다. 그러니까 대한민국의 남녀는 모두 동등한 권리와 동등한 의무를 갖는다. 군대에 들어가는 것도 일종의 의무라고 한다면 남성도 여성도 모두 군인이 될 의무를 갖고 있다고 규정을 합니다.
한국 광복군에 여성의 입대가 가능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임시정부 수립후 한국 여성들이 국내외에서 남성 못지않은 전투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만주로 망명해 강인한 무장독립활동을 펼친 남자현(1872~1933) 여성독립군, 임산부의 몸으로 평안남도 경찰국 청사에 폭탄을 던진 안경신 (1888~미상) 여성독립군, 여성들의 활약은 여성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놓았다.
부산 차이나 타운 인근에 위치한 화교학교(부산화교 중-고등학교 부산광역시 동구), 이곳에 근무했던 한국 광복군이 있다며 선생님이 사진을 보여 준다.
고길경 교장/부산화교 중-고등학교: 자료는 별로 없고요. 학생 앨범 안에 사진을 찾았어요. 사진의 주인공은 지복영(1920~2007) 지사다. 여성광복군, 이 분은 우리 학교에서 2년 정도 근무하셨습니다. 지복영 지사는 광복군의 정신을 이어 직접 한국어교재를 만드는 등 적극적으로 교육활동을 펼쳤다.
남녀의 구분 없이 신분의 차이 없이 나라를 위해 구국전선에 거침없이 뛰어든 독립운동가들, 현역 군인으로 구성된 답사단은 독립운동가들의 정신과 숨결이 머물렀던 유적지에서 그들의 뜨거운 각고와 의지를 체험해 볼 수 있었다. 불굴의 항전, 그 꺼지지 않는 불씨로 조국을 되찾은 것은 조국에 헌신한다는 군인정신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시준: 대한민국의 국군은 바로 의병, 독립군, 광복군에 이어서 성립된 것이 대한민국 국군이다. 경남 진해 잠수함 사령부(Submarine Force Command),
김도현: 여기에 제 증조부님 존함을 딴 잠수함이 있다고 해서 왔는데요. 지금까지 있다는 것만 알고 실제로 제가 가까이서 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보려고 왔습니다.
해군 주력잠수함 214급 김좌진함은 지난 2015년 전력화되어 우리의 바다를 지키고 있다. 특히 장거리 정밀 타격이 가능한 국산 순항미사일을 탑재하고 있어 우리 국군의 강인함을 느낄 수 있다.
이지구 해군대위/김좌진함 음탐관: 충성심과 애국심을 본받기 위해서 김좌진함으로 명명하게 되었습니다.
만주 벌판을 호령하며 일본군과의 항전에서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던 김좌진 장군의 기개, 할아버지의 혼이 서려있는 잠수함을 타보고 또 만져보며 자신의 안위보다 국가를 먼저 생각했던 위대한 정신을 새겨본다. 해군은 독립운동가들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항일독립운동에 공헌한 이들의 이름을 214급 잠수함명으로 사용하고 있다. –안중근함, 윤봉길함, 유관순함, 도산안창호함. 죽음을 무릎쓴 의병정신은 독립군과 한국광복군으로 이어졌고 40년에 걸친 독립전쟁을 통해 민족적 에너지로 분출됐다. 국군의 발자취를 따라가본 여정, 그 길에서 우리 국군의 어제 그리고 내일을 만날 수 있었다.
진권용: 우리 대한민국이 독립국으로서 누리는 주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박민석: 과거에는 빼앗긴 주권을 찾기 위해 독립운동가께서 열심히 활동하셨다면 현재는 우리의 국방을 지키고 우리의 국방력을 지켜나가기 위해 임무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박성욱: 과거에 우리 독립군이 싸웠던 전투에서 얻어지는 기개와 용기가 느껴져서 상당히 좋았습니다. 끝. (KBS 국군의 날 특집다큐 건군 70년 국군의 뿌리를 찾아서 “2부 독립전선, 구국의 빛을 찾다” 에서 정리).
①1905년 을사늑약 때 초대 러시아 공사였던 이범진은 외교권을 박탈 당해서 소환되지만 소환을 거부하고 러시아에 끝까지 버티고 있다가 1910년에 나라가 완전히 망하니까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목을 매 자결했다. 헤이그 밀사는 이상설, 이준, 이위종인데, 이위종이 바로 이범진의 아들이다. 이상설과 이준이 갈 때 이위종이 통역을 하였다.
② 1909년 10월 26일 아침,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안중근(1879~1910)은 한반도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1841~1909)를,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향하여 세발의 총을 쏜다. 안중근은 현장에서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체포된다. 이 사건은 이범연, 홍범도, 유인석 등 의병장들이 13도 의군을 편성해 항일공격을 추진하는 도화선이 된다.
③ 체코는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독립을 맞게 된다. 체코군의 라돌라 가이다 장군은 한국 독립군을 만난 자리에서 체코군이 가지고 있던 무기를 흔쾌히 넘겨주기로 동의했다. 독립군은 비교적 헐값에 무기들을 샀다. 당시 체코군의 무기는 세계 최고수준이었다. 독립군은 이 무기로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통쾌하게 패전시켰다.
④ 연해주 한국인의 역사는 1863년 부터 지신허 마을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했고, 현지인들은 이들 한국인을 코리안의 러시아어인 카레이스키, 즉 고려인이라고 불렀다. 그후 1937년 스탈린의 연해주 한인 강제이주정책에 의해서 17만 여명 한인들은 중앙아시아행 기차에 올라야 했다. 연해주 고려인들의 강제이주 역사는 나라를 지켜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말해 주고 있다.(KBS스페셜 4회<고려인이주 80년 특별기획-사샤의 아리랑>, 7회<강제이주 80년, 4대의 유랑> 참조).
⑤ 세계 제2차 대전중 연합군은 대적선전과 첩보수집을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한국 광복군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 9명의 한국 광복군이 미얀마 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들 인면전구 공작대는 인도 뉴델리에서 영어와 방송기술을 교육받고 3개월간 영국군 부대에 분산 배치되었다가 1944년초 임팔 전선에 투입됐다.
⑥ 당시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었던 임팔은 연합군의 미얀마 탈환 작전에 격전지였다. 광복군은 이 전선에서 대적선전 공작의 임무를 맡았다. 인면전구 공작대원들은 적진 교란방송, 일본군 포로심문 등 심리전에 투입됐다. 인면전구 공작대가 가장 큰 활약을 보인 것은 영국 17사단이 일본군에 포위된 상황에서 습득한 일본군 작전일지를 분석해 영국군을 무사히 탈출시킨 일이었다.
⑦ 제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향하던 1945년 김구 주석과 미국 전략첩보부대 OSS 도노반 소장은 OSS 훈련받는 대원들을 국내로 침투시키는데 합의했다. 한국 광복군 제2지대 대원들은 서전트 대위의 주관으로 훈련을 받았다. 무전교신과 게릴라 활동을 위한 일종의 특수훈련이었다. 그러나일본의 패망으로 작전은 실현되지 못했다.
⑧ 한국 여성독립운동가로는 만주로 망명해 강인한 무장독립활동을 펼친 남자현(1872~1933), 임산부의 몸으로 평안남도 경찰국 청사에 폭탄을 던진 안경신 (1888~미상), 강원도 춘천지역에서의 윤희순(최초의 여성의병장, 1860~1934) 등이 있다. 해군은 독립운동가들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그들의 이름을 214급 잠수함명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들의 이름은 안중근함, 윤봉길함, 유관순함, 도산 안창호함이다.
⑨ 1934년 윤봉길 의거를 계기로 1940년 한국 광복군이 성립되었는데, 총사령관 지청천, 참모장 이범석에 4개지대 편제로, 제1지대 지대장 이준식, 제2지대 지대장 김학규, 제3지대 지대장 공진원, 제5지대 지대장 나월한, 그런데 나월한은 1942년 3월 시안에서 부하들에게 암살당하였다고 한다. 1945년 6월 광복군은 3개지대 편제로 제1지대 지대장 김원봉, 제2지대 지대장 이범석, 제3지대 지대장 김학규로 구성되었다.
⑩ 1945년 제헌국회 당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했으나 제기능을 다 하지 못하고 해산됐다. 50년전 젊었을 때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 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사회정의를 바로 세우지 못했다. 그러나 2005년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재산환수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서 상당한 친일재산을 찾아내어 재판을 통해 1천억원을 거의 환수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국가 보훈처는 독립운동가들과 그들의 3대 후손들이 적어도 생활고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없도록 특별히 보살펴야 한다.
⑪ 충청남도 천안시 한국독립기념관 관장에 관해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까, 윤봉길 의사의 손녀, 윤주경씨가 10대 관장을 수행했고, 후임으로, 한국독립군 총사령관(1930)을 지낸 지청천(1888~1957) 장군의 딸 지복영 지사의 아들, 이준식씨가 2017.12.18.에 임기 3년의 11대 관장으로 취임하였다 라고 나와있다.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