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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레스테이아 3부작-아이스킬로스
오레스테이아(Ὀρέστεια)는 고대 그리스의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3부작을 말한다. 《아가멤논》,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코이포로이)》, 《자비로운 여신들(에우메니데스)》의 세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인공 오레스테스에서 그 이름이 유래하였다. ‘오레스테이아’(Oresteia)는 ‘오레스테스 이야기’라는 의미이다. 이 3부작은 기원전 458년에 사티로스극인 《프로테우스 (Proteus)》와 함께, 비극 경연 대회인 디오니소스제에서 공연하여 우승을 한 작품이다. 다만, 《프로테우스》는 사라져 현존하지 않는다. 아이스킬로스의 당시 우승은 그의 13번째이자 마지막 우승이었으며, 그의 나이 68세였다.
“인간은 자신의 죄과에 대한
신의 응징과 고난을 통하여 지혜에 도달한다”
아이스퀼로스는 저주받은 가문의 역사를 작품의 줄거리로 삼아 그의 근본 사상인 “인간은 자신의 죄과에 대한 신의 응징과 고난을 통하여 지혜에 도달한다”를 표현했다. 인간의 죄과에 대한 신의 응징은 반드시 당대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아들 손자 대에 가서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본 사상이 가장 원숙하게 드러나는 작품이 바로 오레스테이아 3부작이다.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아트레우스 가문과 특히 오레스테스 및 엘렉트라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 이야기를 중심으로 「아가멤논」,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자비로운 여신들」 등의 세 작품이 내용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아이스퀼로스는 아트레우스 가문의 혈족 살해의 저주와 복수 이야기를 비극의 형식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신과 운명, 국가와 개인의 문제에 깊은 성찰의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아가멤논」: 트로이아 원정을 떠나기 위해 자신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친 아르고스의 왕 아가멤논은 트로이아를 정복한 후 귀향한다. 딸의 희생에 분노한 아내 클뤼타이메스트라는 정부 아이기스토스와 계략을 꾸며 아가멤논을 살해한다.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추방당했던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가 귀향하여 누나 엘렉트라를 만나고, 계략을 세워 아이기스토스와 클뤼타이메스트라를 살해해 아버지의 복수를 한다.
「자비로운 여신들」: 어머니를 죽여 복수의 여신들의 추격을 받게 된 오레스테스는 아폴론 신의 명령대로 도시 국가 아테나이로 가서 아테나 여신에게 탄원한다. 오레스테스는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 구원된다. 복수의 여신들은 재판 결과에 분노하지만, 아테나 여신의 말에 설득되어 자비로운 여신들로 변모한다.
현존하는 유일한 그리스 비극 3부작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기원전 458년 대(大)디오뉘시아 제전에서 공연되어 13번째 우승을 거둔 작품으로, 아이스퀼로스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이 3부작은 신의 뜻을 단순히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의 절대적인 규범에 속박당하면서도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 존재의 근본을 장엄한 극으로 창조해 낸 작품이다. 아버지가 딸을, 아내가 남편을, 아들이 어머니를 살해하는 패륜적인 사건들이 연속되지만, 누가 옳고 그른지 즉 정의의 문제에 대해 진지한 물음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오레스테이아 3부작에 나타난 이야기 유형들은 전통 신화에서는 물론 비극 장르에서도 반복되고 변주되는 유형이다. 이 이야기 유형은 귀향, 발견, 계략, 복수, 희생, 추방, 탄원, 구원의 유형을 말한다. 이러한 유형들이 결합하여 오레스테이아 3부작의 플롯이 구성된다. 여기에는 반전과 전도의 원리가 가장 중요하게 작용한다. 정복자가 패배자가 되고, 계략을 사용한 자가 계략에 당하고, 희생시킨 자가 희생 제물이 되고, 복수한 자가 복수당하고, 그리고 탄원하는 자가 구원받는 자가 된다.
영국 시인 스윈번(A. C. Swinburne)은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인간 정신의 최대의 성취”라고 극찬했고, 괴테(J. W. von Goethe)는 훔볼트(K. W. Humboldt)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가멤논」을 “예술품 중의 예술품”이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짜놓은 양탄자”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유일한 그리스 비극 3부작으로 3부작의 대표적인 본보기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아이스퀼로스는 3부작의 형식으로 우주적 힘을 상징하는 신들의 갈등과 투쟁, 가문의 저주와 실현, 국가의 위기와 왕가의 멸망, 문명 제도의 설립 등과 같은 거대한 주제를 다루었다.
이번에 을유세계문학전집으로 출간된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그리스·로마 원전을 연구하는 정암학당의 젊은 고전학자 김기영 박사가 그리스어 원전을 새롭게 번역하여 그리스 비극의 진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비극 특유의 영역이 인간의 비참함을 가장 암담한 상태에서, 그리고 인간의 위대함을 가장 찬란한 상태에서 보여 주는 것이라면, 아이스퀼로스는 비극의 창조자일 뿐만 아니라 모든 비극 작가 중에서 가장 진실하게 비극적이다. 그 누구도 인생의 불협화음으로부터 그처럼 울려 퍼지는 음악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아이스퀼로스의 극작품에는 체념이나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위대한 정신이 위대하게 재앙을 마주 대했다.” ― 이디스 해밀턴
아이스퀼로스 Aeschylos
아이스퀼로스는 기원전 525/524년 아티카의 데모스 엘레우시스에서 에우포리온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장기에 아테나이에서 참주 정치가 민주 정치로 바뀌는 정치적인 급변을 경험했으며, 기원전 490년 마라톤 전투에, 그리고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 해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비극 시인이자 정치사상가로서 아이스퀼로스는 서정 시인 핀다로스, 비극 시인 코이릴로스와 소포클레스 등과 교류했다. 시칠리아에 건립된 식민 도시로 외유를 떠나 그곳 엘리트들과 교류하기도 했다. 쉬라쿠사에는 히에론 1세의 초대를 받아 두 번이나 여행했다. 기원전 476/475년의 첫 번째 방문 때는 「아이트네의 여인들」을 무대에 올려 도시 국가 아이트네의 창건을 경축했다. 두 번째 방문 때는 기원전 472년 공연한 「페르시아인들」을 다시 무대에 올렸다. 기원전 458년에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공연하고 나서 다시 시칠리아를 방문했다가, 기원전 456/455년 겔라에서 사망했다. 그곳에 세워진 묘비명을 읽어 보면, 놀랍게도 아이스퀼로스가 위대한 비극 시인이라는 사실은 빠져 있고 마라톤 전투에서 싸웠다는 사실만 적혀 있다.
아이스퀼로스는 기원전 499/498년에 비극 작가로 정식 데뷔했다. 데뷔하고 나서 15년 만인 기원전 484년 비극 경연 대회에서 처음으로 우승했는데, 이는 소포클레스가 20대에 우승한 것과 비교하면 늦은 나이에 첫 우승을 거머쥔 셈이다. 한 전거에 의하면, 대(大)디오뉘시아 제전의 비극 경연에 19번 참여하여 13번 우승했다고 한다. 아이스퀼로스가 사망한 후에 도시 국가의 결의로 그의 비극이 살아 있는 작가의 비극들과 경연되기도 했다. 아이스퀼로스는 70~90편에 달하는 작품들을 창작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는 작품은 모두 7편으로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제외하면 「페르시아인들」, 「탄원하는 여자들」, 「테바이를 공격한 일곱 장수」, 「결박된 프로메테우스」가 있다.
갑녀는 내연관계에 있던 남성과 공모하여 자신의 남편 을을 살해하였다. 갑녀와 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병은 아버지 을의 복수를 위하여 어머니 갑녀를 살해하였다. 이 경우 병의 죄책은?
현행 대한민국 형법의 관점에서 보자면 지극히 간단한 사안이다. 병의 행위는 존속살해죄의 구성요건에 해당하고, 사적 제재는 허용될 수 없으며 그 밖에 위법성 조각사유나 책임 조각사유도 없으므로 존속살해죄가 인정될 것이다. 다만 아버지의 복수라는 동기가 구체적 사정에 따라 양형요소로 참작될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와는 다르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위 사안은 고대 그리스의 극작가 아이스킬로스(BC 525?~BC 456)의 비극 『오레스테이아』 3부작에서 가져온 것이다. 여기서 을은 트로이 전쟁의 그리스군 총사령관으로 유명한 아가멤논이며, 갑녀와 병은 각각 그의 아내와 아들인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오레스테스다.
익히 알려진 신화로부터 소재를 차용한 『오레스테이아』는 「아가멤논」,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자비로운 여신들」의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것은 제3부 「자비로운 여신들」로서, 오레스테스의 행위를 심판하기 위한 신들의 재판이 묘사되고 있다. 신이 인간을 심판하기 위해 재판을 연다는 발상도 재미있지만(국내에서 웹툰과 영화로 크게 흥행한 『신과 함께』가 떠오르기도 한다), 재판 과정에서 오가는 변론들이 현대인과는 다른 고대인의 사고방식을 반영하면서도 그 나름의 논리를 갖추고 있어, 신선한 지적 자극으로서 음미해 볼 만하다.
제1부와 제2부의 줄거리를 간단히 소개하자면, 아가멤논은 트로이 원정에서 돌아온 직후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와 그녀의 내연남 아이기스토스에 의해 살해당한다(그들이 아가멤논을 살해한 데는 간통 이외에도 복잡한 동기가 있지만 이는 제3부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으므로 생략한다). 이에 오레스테스는 아버지 아가멤논의 복수를 위해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를 살해한다.
사적 제재가 정당행위로 간주되던 시대였으므로 아이기스토스를 살해한 행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클리타임네스트라는 그의 아버지의 원수인 동시에 그의 어머니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어머니를 살해한 패륜의 대가로 오레스테스는 머리칼이 뱀으로 되어 있고 눈에서 피를 뚝뚝 흘리는 무시무시한 복수의 여신들에게 쫓기게 된다. 「자비로운 여신들」은 오레스테스가 아폴론의 신전을 찾아가 구원을 비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폴론 신은 오레스테스를 지켜 주겠다고 약속하고, 그를 넘기라는 복수의 여신들의 요구를 완강히 거절한다. 결국 신들은 오레스테스를 둘러싼 시시비비를 재판에서 가리기로 한다. 신화의 세계에서 형사재판이 개시되는 셈이다. 복수의 여신들이 검사의 역할을 맡고, 아폴론이 변호인의 역할을 맡는다. 지혜의 신인 아테나 여신이 재판장이 된다. 아테네 시민들이 배심원으로 참여한다.
이제 복수의 여신들과 아폴론의 변론 공방이 펼쳐진다. 사실관계나 법리가 주된 쟁점이 되는 현대의 형사재판과 달리 여기서는 윤리적 쟁점이 부각된다. 핵심 쟁점은 “아버지가 더 중요한가, 어머니가 더 중요한가” 하는 것이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하고 유치원생에게나 던질 질문 같지만 양측은 자못 심각하고 치열하게 논쟁한다. 마치 대법원 판례를 인용하듯, 권위 있는 신들의 행적에 관한 다른 신화 속 사례를 논거로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강화한다.
(이하 본문 인용은 천병희 역 『아이스퀼로스 비극』,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8 출판본에서 발췌)
“그대의 말에 따르면, 제우스는 아버지의 죽음을 더 중시하는데, 그 자신은 연로한 크로노스를 묶지 않았던가요? 그대는 그대의 말이 이 사실과 모순된다고 말하지 않겠소?”
복수의 여신들은 제우스가 자신의 아버지 크로노스를 묶어서 감금한 사례를 인용함으로써, 아버지가 더 중요하다는 아폴론의 주장을 반박한다. 이에 대해 아폴론은 “크로노스 신은 족쇄를 풀 수 있지만, 사람은 한 번 죽으면 다시 소생할 수 없다”며 위 사례를 사안에 적용할 수 없다고 재반박한다. 그리고 아폴론의 기상천외한 변론이 이어진다.
“어머니는 그녀가 자기 자식이라고 부르는 자의 생산자가 아니라, 새로 씨 뿌려진 태아의 양육자에 불과하오. (중략)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내가 증거를 대겠소. 어머니 없이도 아버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오. 저기 올륌포스 주신(主神)의 따님이 우리의 증인이오, 그녀는 자궁의 어둠 속에서 양육되지 않았으니까요.”
어머니 없이 아버지만으로 아이가 태어날 수 있다니.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황당하다 못해 해괴한 소리지만, 유럽에서는 이 작품의 창작 연대보다 훨씬 후대인 중세에도 아기는 남성의 정자 속에 이미 완전한 형태로 들어있으며 여성의 태내에서 단순히 크기만 자라나는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연금술사들은 정자를 인공적으로 배양해서 여성의 개입 없이 생명을 탄생시키려는 어처구니없는 실험에 매달리기도 했다.
하물며 바로 그 변론을 듣고 있는 재판장 아테나 여신이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났다는 신화까지 논거로 제시하니, 신화의 세계에서는 그것도 나름 설득력 있는 주장이 될 수도 있겠다.
변론은 그쯤에서 종결되고, 배심원들의 투표에 의해 판결이 내려진다. 결과는 유죄의견과 무죄의견이 동수. 아테나는 유죄의견이 과반에 못 미침을 이유로 오레스테스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결과가 그렇게 나온 것은 인간의 지혜로는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문제임을 의미한다는 후대의 해석이 있다.
아테나는 재판이 열린 장소인 아레오파고스가 앞으로도 도시의 정의와 질서를 지키는 재판정으로 기능할 것임을 선언한다. 아레오파고스는 실제로 고대 아테네에서 사법과 행정을 전담하던 평의회가 열리던 장소였으며, 오늘날 그리스 대법원은 그 자리에 있지는 않지만 여전히 같은 이름으로 불린다. 결국 『오레스테이아』는 인간 사회에서 재판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그 기원을 설명하는 신화인 것이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비롯한 다른 문헌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고대 그리스는 현대 사법제도가 기초적인 형태를 갖추고 태어난 요람이었다. 『오레스테이아』는 사법제도의 기원을 신화적 상상력으로 흥미롭게 재구성하면서, 논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를 좋아하던 그리스인들의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게 해 주는 걸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