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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서 “얍복강 나루터에서 밤새 씨름하는 장면”을 통해,
“나는 나의 고난이 축복”이란 걸 주님께 감사로 고백한다.
[창32:1]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창32:2]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그런데 우리가 살펴볼이 메시지는,
“전통적인 해석의 틀을 완전히 깨부수는 시각을 제시”한다.
“야곱의 씨름”은, “한 인간의 자아가 철저하게 부서지고 깨지는 파쇄의 과정”으로 본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가 겪어야 할 영적 전쟁의 예표”라고 할수있다.
“우리의 목표는 바로 이것”이다.
“이 고대의 이야기”가 어떻게 “내가 깨져야 진짜 승리지자”가 된다는,
“이 역설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지 “그 숨겨진 영적 코드”를 하나씩 풀어본다.
이기는 것이 아니라 “깨지는 것이 승리의 조건”이다.
그럼 “그 처절한 파쇄의 현장,브니엘의 씨름”부터 시작해 본다.
이 메시지는 “야곱이 홀로 남았다”는 이 구절에서부터 다른 의미를 찾아본다.
[창32: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이건 단순한 “외로움과는 다른 훨씬 깊은 의미”가 있다.
이건 “강요된 고립”이라고 봐야 한다, 이 부분을 상상해 본다.
야곱은 형 에서를 만나기 직전에 자기 모든 재산 사랑하는 가족들까지,
전부 강건너로 먼저 보낸다. 이제 그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창32:6]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가로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인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창32:7]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한 종자와 양과 소와 약대를
두 떼로 나누고
[창32:8] 가로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
“기댈 사람도, 의지할 재물도, 도망칠 수단”도 없다.
“바로 이 순간, 인간적인 모든 수단과 방법이 완전히 차단”되는,
오직 “하나님과 일대 일로 독대 해야만 하는 신성한 시간으로 묘사”한다.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 만,
“비로서 시작되는 과정”이다. “모든 버팀목이 사라진 상태”다.
[창32:11]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 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
[창32:12]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창32:13] 야곱이 거기서 경야하고 그소유 중에서 형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그렇게 “내몰린 상황에서 이제 정체 불명의 존재와 씨름”이 시작되는데,
가장 극적인 장면은 “야곱의 환도뼈 허벅지 관절이 부러지는 부분”이다.
[창32:25]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당시 유목민”에게 다리를 전다는 건 거의 “사형 선거나 다름 없었을 것”이다.
바로“그 지점이이 메시지의 핵심”,“환도뼈가 단순히 신체의 한 부분이 아니다”.
이것은 “야곱의 혼(지,정,의)의 생명”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생 [하야:살아있는], 령(혼)[네페쉬:영혼,생명,숨쉬는 존제]
[창1:20]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네페쉬: 피조물(존재)사람+짐승+식물]
[요삼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헬) [프쉬케:영혼,목숨,생명](프쉬코:숨쉬다,바람 불다)
평생 의지해 왔던 “자기 자신의 힘,경험,지혜, 그 모든 잔꾀의 근원”을 상징한다.
“야곱”은 자기 힘으로 모든 걸 이룬 “자수성가의 아이콘 같은 사람”이다.
이렇게 아내도 얻고, 엄청난 재산도 모으고,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던 그것”,
“자기 능력의 중심부가 바로 이 환도뼈”라는 것이다.
[창32:10]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
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이 환도뼈는 바로 “혼 생명”이라는 개념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아나 에고”와는 비슷하면서도 조금 더 “깊은 개념”이다.
[계1: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알파:헬라어 알파벳의(첫 문자), 오메가:마지막 글자(24번째)]
[에고:나는/ 에이미(라):본질,삶,실존,상태가~이다(현능직단1)
“에고”가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나 의지”를 말한다면,
환도뼈는 “혼”(지,정,의)의 생명은 그것을 포함해서 “나의 경험,지식,감정,의지,
즉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모든 ”인격적인 힘을 총칭”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내 힘으로 살아가게 하는 모든 동력”같은 것이다.
바로 그 “혼 생명의 중심이 부러졌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영적인 탈골” 사건이다.
자기 힘으로 살아가던 “삶의 방식이 완전히 끝나는 순간”인 것이다.
[창32:25]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카프:손(발)의 바닥,우묵한 곳,권세,지배](비유적:권세,지배)
(카파프:손바닥,발바닥,손의 우묵한 곳이나 평평한 부분)
[야카:탈구하다,소외시키다,어긋나다,소원하게 하다,매달다]
[출33:22]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하나님의 손바닥 권세,지배)
[왕하4:34] 아이의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 입에, 자기 눈을 그 눈에,자기
손을 그 손에 대고 그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그런데 보통 “이 씨름을 포기하지 않는 기도의 힘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이 축복 안해 주시면 절대 안놓습니다”라고, 끈질기게
“매달리는 모습”으로그런데, “그 전통적인 관점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간다.
“호세아 선지서 12장의 기록을 아주 중요한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야곱이 그 자리에서 울며 간구”했다고 나온다.
[호12:3] 야곱은 태에서 그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호12:4]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이 통곡의 의미가 중요”하다. “야곱은 그 씨름하는 시간동안 깨달았던”것이다.
“내가 그토록 두려워하고 비난했던 형 에서보다 더 교활하고 악한 존재”구나.
“이것은 축복을 달라고 때를 쓰는 기도가 아니었다”.
“자신의 실체를 깨닫고 터져나온 처절한 회개의 통곡”이었다.
“자신의 모든 의로움과 잘남”을 다 내려놓는 “완전한 자기 부정의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요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자신이 무너지는 회개”였다는 것이다.
“그 처절한 자기 파쇄 끝에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는다.
“영적인 신분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뜻을 보통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라고 알고 있는데,
그런데 그 해석을 넘어선다.
히브리어 어원을 좀 더 깊이 파고 들어서면,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 거하시며, 그를 통해 친히 싸우시고 다스리신다는 의미”다
[창32:28]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내 힘으로 하나님과 싸워 이기는 야곱”에서,
이제는 “하나님이 나를 통해 싸워 주시는 이스라엘로의 완전한 전환”이다.
[이스라엘:하나님이 투쟁하신다,통치하신다]
(엘:전능하신 하나님 과 ,동사 사라:다투다,힘을 가지다)
“주체가 바뀐”, 싸움의 주체가 “나에서 ⇒ 하나님”으로 바뀐다.
이 변화를 설명하기 신학적 개념,“의롭다”하심,“영화로움”의 단어도 사용한다.
[창6: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찻디크:의로운,공정한,올바른]
[출16:7]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관대 너희가 우리를
대하여 원망하느냐 [카보드:풍부,다량,다수,부,영예,영광]
[요17: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독사조:찬양하다,영화롭게 하다]
“이 두 단계의 차이”를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비유를 들어 설명해 보겠다.
“야곱의 단계가 예수님을 믿고 죄를 용서”받아서,
“법정에서 당신은 이제 무죄”라고 “선고받는 의롭다 하심의 단계”라고 한다.
“법적으로 의인이 된 상태”, 내 안에는 여전히 “죄의 속성이 좀 남아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단계”는 거기서 한 차원 더 나아간다.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보고도 살아 남아서, 이제는 ”그분의 영광을 거울처럼
반사하는 존재“가 되는 ”영화로움의 단계”에 이른 것을 상징한다.
[독사조:찬양하다,영화롭게 하다]
“죄를 용서받은 수준”을 넘어서,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이 나를 통해 그냥 드러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진정한 승리의 의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내 자아”가 완전히 박살나서 이 세상의 어떤 영적인 어둠의 세력도 감히
“나를 건드릴 수 없는 그런 존귀한 자”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승리”다.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자체가 나의 무기가 되는 상태”,
그것이 “승리의 본질”인 것이다,
이제 “야곱의 내면의 전쟁”은 끝나고, “이스라엘”이 되었다.
[창32:28]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이스라엘:하나님이 투쟁하신다,통치하신다]
하지만 “현실의 위협 즉 400 명의 군대를 이끌고 다가오는 형에서”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야곱의 내적 변화가 외부의 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여기서 부터 “영적 투영이라는 아주 파격적인 개념이 등장”한다.
[창32:6]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가로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인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에서”는 단순히 야곱을 미워하는 “외부의적”이 아니라,
사실은 “야곱 내면에 있던 그림자”,
“그의 육체적이고 교활한 자아가 외부 세계에 투영된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미움, 시기, 분노" 같은 그것들이 "외부의 적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데, “에서가 바로 그런 존재였다”는 것이다.
“에서가 야곱 내면의 그림자가 투형된 존재”라는 해석이다.
“우리가 현실에서 겪는 갈등의 본질을 완전히 다르게” 봐야 한다는 뜻이다.
야곱이 브니엘에서 “자기 안의 옛사람(혼의 생명)”즉,
“야곱이 영(혼의 생명)을 꺾고 승리”하자 그와 연결되어 있던,
“에서를 붙들고 있던 악한 영”,“미움과 복수심의 영이”이다.
“그 영이 힘을 잃고 떠나갔다는 해석”이다.
“내 안에 진짜 적”을 이기니까, 밖에 있던 “적의 실체도 변해 버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야곱이 20년 만에 만난에서”에게 형님의 얼굴을 보니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습니다”, 라고 한 고백이 살아남기 위한 아부나 처세술이 아니다.
그건 “야곱의 진심의 고백”이었다. 왜냐하면 “브니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본 야곱 자신이 이제 “하나님의 빛을 반사하는 거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거울을 통해 보니 원수 같던 형의 얼굴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있게 된”
것이다, “이 빛이 20년간 쌓였던 에서의 분노”가 눈 녹듯이 녹아서,
그 “극적인 화해”를 이끌어낸 것이다.
그래서 “내면의 변화가 외부 세계를 변화시킨 극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겠다.
“한 사람의 개인사”가 이렇게 “깊은 영적 원리를 담고”있다, 그런데 야곱의 이야기
를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주는 예언적 메시지로 까지 확장”된다.
야곱의 “가족 드라마”가 그럼 어떻게 “인류 역사의 마지막 거 연결”되는 건가,
그 연결고리가 되는 “중요한 단서”가 바로 마하나임이다.
야곱이 에서를 만나기 전 “자기 가족과 가축을 두 때”로 나눈다.
“마하나임이 두 개의 군대라는 뜻”이다.
[창32:7]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한 종자와 양과 소와 약대를
두 떼로 나누고
[창32:8] 가로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
이것은 단순히 “위험을 분산시키려는 인간적인 꾀”가 아니었다.
“이 두 군대”를 마지막 때에, “유대인 성도들과 이방인 성도들”이 연합해서
하나의 새로운 사람 즉, “거대한 영적 군대를 상징”한다고 본다.
마지막 “영적 전쟁을 치룰 하나님의 군대에 대한 예표”라는 것이다.
야곱이 나눈“두 때가 미래에 연합할 두 영적 군들을 상징”하며 우주적으로 커진다.
“에서의 후손인 에돔 족속에 대한 오바댜서의 예언도 등장”하는데,
오바댜서는 성경에서 “가장 짧은 책 중 하나지만 아주 강력한 예언”을 담고 있다.
[옵1:1] 오바댜의 묵시라 주 여호와께서 에돔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니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소식을 들었나니 곧 사자가 열국 중에
보내심 을 받고 이르기를 너희는 일어날찌어다 우리가 일어나서
그로 더불어 싸우 자 하는 것이니라
[옵1: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를 열국 중에 미약하게 하였으므로
네가 크게 멸시를 받느니라
[옵1:4]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찌라도 내가 거기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마지막 때에 “야곱 족속은 불이 되고, 에서 족속 즉,
에돔 족속은 지푸라기 초개가 되어서 심판받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결국 “시온산에서 야곱 족속이 최종 승리할 것이라는 그림”을 보여주고 있다.
[옵1:18] 야곱 족속은 불이 될 것이요 요셉 족속은 불꽃이 될 것이며 에서 족속은
초개가 될 것이라 그들이 그의 위에 붙어서 그를 사를 것인즉 에서 족속
에 남은 자가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니라
[말1: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말1: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이것은 “야곱과 에서의 개인적인 갈등”이 인류 역사의 마지막에 있을,
“빛(이스라엘)과 어둠(야곱)의 영적 전쟁의 축소판이자 원형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 개인의 씨름(자아)에서 시작”해서, 두 민족의 운명, 그리고
“인류 역사의 마지 막 영적 전쟁까지 관통하는 거대한 그림”이 그려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메세지를 통해 우리들에게 전하려는 핵심”은,
“혹시 지금 우리의 삶”이 모든 것이 끊어진 “얍복강 나루터”처럼 느껴지는가?”
“인생에서 도무지 이해할수 없는 혹독한 시련” 즉,
“야곱의 밤(자아와 싸움)을 통과하고 있나?,
그렇다면 그것은 ”저주가 아니라는 것”이다.
“야곱의 밤(고난)”이 그냥 힘든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나를 이스라엘이라는 영광스러운 영적 승리자”로 다시 본래
이스라엘로 “재 창조” 하시기 위해 “필수 과정”이라는“일종의 통과 의뢰”인것이다.
“그 고통의 밤”은 나를 “부숴트려서 더 큰 그릇”으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초대장”이라는 그런 “격려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내 힘과 내 의”가 완전히 박살나는 그 자리에서 비로써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기 시작”한다는 위로의 메세지다.
[이스라엘:하나님이 투쟁하신다,통치하신다]
(엘:전능하신 하나님 과, 동사 사라:다투다,힘을 가지다)
“얍복강 나루터에서 시작된 한 남자의 처절한 씨름”이 “인류 역사의 마지 영적
전쟁까지 이어지는 장대한 그림”은, “야곱의 부서짐은 결코 패배가 아니다”.
오히려 “낡은 정체성을 버리고,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얻고,
“원수와 화해”하며, 더 나아가 “예언적인 운명을 성취하는 위대한 출발점”이었다.
“진정한 영적권능”은 더 강하게 버티고 더 많이 성취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완전히 부서져 항복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 철저한 무력함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대신 싸워 주시는 이스라엘이라는
영광스러운 새 이름이 탄생”하는 것, “에서를 야곱 내면의 거울”로 보여 주셨다.
“나의 삶”에서 가장 힘들게 하는 사람이나 해결되지 않는 어떤 문제의 상황은,
“내 안에서 반드시 깨어져야 할 나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를 기다리는 브니엘”은 ,“나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리기 위한 장소”,
그래서 “하나님으로 채워지기 위한 거룩한 장소”라고 말씀은 말하고 있다.
[창32:29] 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창32:30]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페누엘:하나님의 얼굴](파님:얼굴들과 엘:하나님)
[출33:20] 또 가라사대 네가 내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자가 없음이니라
[대상4:4] 그돌의 아비 브누엘과 후사의 아비 에셀이니 이는 다 베들레헴의
아비 에브라다의 맏아들 훌의 소생이며(유다 사람으로 그돌의 아버지)
[대상8:25] 이브드야와 브누엘은 다 사삭의 아들들이요(베냐민 사람 사삭의 아들)
“나는 이 말씀을 연구 하면서, 나의 힘으로, 머리로, “혼적 생명”으로 하는 모든
“환도뼈를 부러트리시는 하나님”, 이 모든 환경에서 겪는 “얍복강 나루터의 고난”이
나를 하늘 나라 안에 이미 있는 그 이스라엘로 초대하시는 그“하나님의 초대장”으로,
이끌어 주시는 그 사랑의 주 하나님께 이 글을 통해 감사를 올립니다”.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생 [하야:살아있는], 령(혼)[네페쉬:영혼,생명,숨쉬는 존제]
[창32:25]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카프:손(발)의 바닥,우묵한 곳,권세,지배](비유적:권세,지배)
(카파프:손바닥,발바닥,손의 우묵한 곳이나 평평한 부분)
[야카:탈구하다,소외시키다,어긋나다,소원하게 하다,매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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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
제가 왜 이렇게 힘들까?, 말씀을 통해서 분석하고자 연구하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임을 깨닫고 목사님에 대한 이해할수 없었던 그 긴 고난의 어두운 터널속에서 이제 탈출해 빛으로 나가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어두웠던 제 마음의 감정들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감사드립니다
아멘아멘 귀한깨달음을 고백하신 김사랑목사님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김사랑목사님은 사랑의목사님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ㆍ 주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목사님 바쁘신데 또 댓글을 다셨네요.
저는 누가 댓글을 달든 안달든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앞에 내 자신을 그냥 올려드립니다
그러나 이렇게 다신 목사님 감사합니다
와 김사랑 목사님
설교가 삼층천 레벨이세요 최고
제신음에 응답인듯 귀한 말씀 감사드립니다
자신의 실체를 깨닫고 터져나온 처절한 회개의 통곡”이었다.
“자신의 모든 의로움과 잘남”을 다 내려놓는 “완전한 자기 부정의 순간”이었다.
시작이 이거부터
감사합니다
아마 이 말씀을 못알아 듣는분들이 계실거라 예상이 되어집니다
이 고난의 터널을 거쳐나오며 모든 환란을 거치면서 자신의 자아가 처절히 부서지며 바닦을 쳐보지 않았다면 못알아 들어요.
그런 고난을 통과한 분들은 보는 시야가 넓고 깨닫는 깊이가 달라요. 그런 분들에겐 "생명이고 복음으로 무릎을 치며 맛다"라고 하실것입니다
이렇게 고백하시는 사람은 환란풍파와 싸우며 처절히 아무도 모르는 그 고통속에서 죽음이 눈앞에 온것을 본자만이 알아들을수 있어요
왜 나를 깊은 어둠속에 홀로 두시는 지
어두운 밤은 왜 그리 길었는지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세상 어디도 기댈곳이 없게 하셨네
광야 광야에 서 있네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주님만 내 빛이 되시는
주님만 내 친구 되시는 광야
성령이 내영을 다시 새롭게 하는 곳
광야 광야에 서있네
내 자아가 산산히 깨지고
높아지려 했던
내 꿈도 주님앞에 내려 놓고
오직 주님 뜻만 이루어 지기를
나를 통해 주님만 드러나 시기를
광야를 지나며
“죄를 용서받은 수준”을 넘어서,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이 나를 통해 그냥 드러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저주가 아닌 초대장을 받은 재창조의 시기
하나님의 빛을 반사하는 거울
박시아가 되겠습니다
아멘 바로 이것,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끄시는 초대장이며 영적 축복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