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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유(臥遊)
누워서 유람한다는 뜻으로, 집에서 명승이나 고적을 그린 그림을 보며 즐김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臥 : 누울 와(臣/2)
遊 : 놀 유(辶/9)
출전 : 송서(宋史) 卷93 종병(宗炳)
이 성어는 중국 남북조시대 송나라의 화가 종병(宗炳)의 일화에서 얻어진 말이다. 종병(宗炳)은 자는 소문(少文)이다. 허난성 난양[南陽] 출신으로 후베이성 장링(江陵)에서 살았다. 일생 동안 벼슬하지 않고 징산(荊山), 우산(巫山), 헝산(衡山) 등 각지의 명산을 돌아다녔다.
어진 이는 산수를 통하여 형(形)으로서 도(道)를 아름답게 한다고 하여 산수화론에서 명산명천(名山名川)의 생활화를 주장하였다. 즉, 산 속에 도가 있으니 산에 살고 산수화 속에 신(神)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노년에 병이 든 이후, 젊은 시절 돌아다녔던 산수를 벽에 그려 놓고 즐긴 '와유(臥遊)'의 일화가 유명하다. 저서에 '화산수서(畵山水敍)' 등이 있다.
有疾還江陵, 嘆曰: 老疾俱至, 名山恐難徧覩, 唯當澄懷觀道, 臥以游之.
종병(宗炳)이 나이 들고 늙어 강릉(江陵)의 집으로 돌아온 뒤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늙음과 질병이 함께 이르니 명산을 두루 보기 어려울까 두렵도다. 오직 마음을 맑게 하여 도를 관조하면서 누워 그 곳에서 노닐리라."
와이유지(臥以游之)에서 '와유(臥遊)'라는 유명한 말이 유래했다.
와유(臥遊)의 시대
꽃바람이 콧구멍을 간질이는 춘삼월, 이러한 때 집 안에만 있자니 속이 답답하다. '와유(臥遊)'라는 말이 떠오른다.
와유(臥遊)는 중국 송나라 때의 문인 종병(宗炳)이 늙고 병들어 명산대천을 유람하지 못하게 됐을 때 마음을 맑게 하고 도리를 살피면서 누워 유람할 수밖에 없다고 탄식한 데서 나온 말이다. 늙고 병들어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것이나 바이러스 창궐로 집 밖에 나서기 어려운 것이나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으니, 와유(臥遊)라는 말이 더욱 가슴에 와닿는다.
17세기 조선의 매운 선비 박세당(朴世堂)은 와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호사가들이 온 천하를 다 유람하기가 이처럼 어려운 것을 보고, 또 그러한 힘을 갖추지 못한 것을 근심하여, 그림으로 명산을 그려 눈앞에 펼쳐놓고 이로써 천하의 산수를 감상하는 멋을 붙이고는 이를 와유라고 하였으니, 이는 자신에 맞는 방편을 취한 것일 뿐이다."
박세당이 이른 와유(臥遊)라는 방편을 우리도 따를 수 있다. 와유(臥遊)는 추억과 상상을 바탕으로 한다. 가본 곳을 사진으로 다시 보면서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고, 가지 못한 곳을 책이나 텔레비전으로 보면서 상상으로 즐길 수 있다.
중국 송나라 학자 소강절(邵康節)은 "문 밖을 나서지 않고도 곧바로 천지와 만난다(不出戶庭, 直際天地)"고 했다. 영남 출신의 학자 장현광(張顯光)이 "천 리를 순식간에 정신으로 구경하고 만고의 세월을 삽시간에 눈으로 본다(神千里於瞬息之間, 目萬古於須臾之頃)'고 한 말도 그 뜻이 다르지 않다. 와유(臥遊)는 병이나 늙음에 구애되지 않고 돈과 시간이 들지도 않으니, 요즘 세상에 가장 맞는 여행이다.
실학자 이익(李瀷)도 와유에 대해 멋진 글을 남겼다. "와유(臥遊)라는 것은, 몸은 누워 있지만 정신은 노닌다는 뜻이다. 정신은 마음의 신령함이니 그 신령함은 어디든 가지 않는 곳이 없다. 온 세상 곳곳을 훤하게 비추어 보고 만 리 먼 곳을 순식간에 달리면서도 어떤 다른 교통수단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눈이 먼 사람은 꿈을 꾸지 않는다. 사물의 형태를 인지하는 것은 시각기관에서 담당한다. 처음부터 시각이 없으면 생각 또한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꿈속에 어슴푸레하게 나타나는 것들도 어느 하나 눈으로 직접 보지 않은 것은 없다."
이런 편리한 상상의 여행도 더욱 생생한 기억을 위해 필요한 것이 있으니 자신의 추억이다. 자신이 직접 보고 겪은 체험이 있어야 기억이 또렷해진다. 꿈의 여행지를 소개한 책이 서점에 넘쳐나고 텔레비전만 틀면 바로 여행 프로그램을 만날 수 있지만, 자신이 그곳에 가본 추억이 없다면 남의 일일 뿐이다.
이어지는 글에서 이익은, "글과 그림이 와유의 방편이 될 수 있겠지만 자신이 직접 가서 본 것이 아니라면 그 경치를 마음속으로 상상할 수는 있지만 실제의 광경을 사실 그대로 떠올리지는 못한다"고 했다.
나의 추억을 가지고 나의 와유를 즐기고 싶다. 이제 좋았던 시절의 사진을 펼쳐놓을 때다. 다만 사진은 시각을 통한 기억의 매개에 그치는지라 그 시절의 마음은 기록되지 못했다. 바깥 출입이 꺼려지는 요즘 빛바랜 사진을 찾아 흐릿한 추억을 떠올려 본다는 이들이 많다.
이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 사진 귀퉁이에 한 줄 글이라도 남겨놓았으면 그 추억이 좀더 또렷할 텐데... 나 자신도 실천하지 못했지만 남들에게 늘 하는 말, 사진만 찍지 말고 그 사진 속에 담긴 마음을 글로 함께 남겨 보시라고...
더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 지금이라도 빛바랜 사진을 찾아 글을 적어보는 것이 요즘 같은 때 하기 좋은 일인 듯싶다. 집 안에서 가족들과 사진을 함께 보면서 한 줄씩 글을 붙여보는 놀이를 하면 혹 바이러스로부터 망외의 소득을 얻지 않을까. 지금은 추억과 상상을 바탕으로 누워서 노니는 와유(臥遊)의 시대다.
와유(臥遊)
와유(臥遊)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는 현대에도 되살릴 필요가 있다. 예나 지금이나 산수화와 유람기에는 '와유(臥遊)'라는 제목을 쓴 것이 적지 않다. 처음 이를 접한 사람들은 '누워서 노닌다'는 뜻을 의아하게 여길 것이다. 이 말에는 그럴만한 함축적 의미가 도사리고 있다.
고려시대 이규보는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라는 기행문을 쓴 바 있다. 1199년 전주목(全州牧)의 사록겸(司錄兼) 장서기(掌書記)로 온 그는 전주 등 전북 곳곳을 여행하며 접한 특이한 견문거리를 시와 산문으로 기록하여 두었다가 노년이 되면 젊어서 견문한 기록을 펼쳐보고 그 답답함을 풀겠노라고 했다.
조선 중기 이후 산수유람의 기회와 기록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김종직의 '유두류록', 고경명의 '유서석록', 홍백창의 '동유기실'은 하나의 산을 유람한 기록이 단행본으로 편집돼 널리 읽혔고, 홍인우의 '관동일록', 성해응의 '동국명산기' 등은 여러 산의 유래와 명승에 관한 인문 지리서 성격까지 지니게 됐다.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
내 발자취가 미친 모든 곳의 높낮이를 차례로 매겨본다면 두류산이 우리나라 제일의 산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만일 인간 세상의 영화를 다 마다하고 영영 떠나서 돌아오지 않으려고 한다면 오직 이 두류산만이 은거하기에 좋을 것이다. 이제 돈과 곡식과 갑옷과 무기와 같은 세상 것들에 대해 깊이 알아 가는 것은 머리 허연 이 서생이 다룰 바는 아니리라.
유몽인의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은 그가 관직을 사임하고 남원의 수령으로 내려가 있던 1611년 봄 두류산을 유람하고서 쓴 기행문이다. 이는 지리산을 말하며, 두류산의 의미는 '백두대간(頭)이 흘러왔다(流)'라는 의미이다.
유몽인은 두류산 곳곳의 경물을 눈에 보듯 실감나게 묘사했으며, 천왕봉에 올랐을 때는 그곳 매 사냥꾼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삶을 동정하기도 하여 치자로서 백성의 고통을 느껴 보고자 하는 마음도 드러나 있다.
임훈은 1552년 '등덕유산향적봉기(登德裕山香積峰記)'을 남겼으며, 김창협의 '동유기'를 보면 "덕유산 멀리로, 진안의 중대산, 금구의 내장산, 부안의 변산, 전주의 어이산, 임피의 오성산, 함열의 함열산, 용담의 주줄산(운장산)이 그 서쪽을 둘렀고, 용담의 기산은 주줄산 안에 있다. 고산의 대둔산은 북쪽에 비껴있다"고 했다.
심광세 '유변산록(遊邊山錄)'이 변산 유산록으로는 최초의 기록라고 한다. 부안현감으로 부임(1607년)한 지 넉 달 만인 5월에 바쁜 일정 중 시간을 내어 변산을 유람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가 그렸다 두루마리 화첩은 지금 전하지 않는다.
옛사람의 글을 통해 갈 수 없는 아름다운 땅뿐만 아니라 개발 등을 통해 이미 사라져 버린 산과 물까지 함께 즐겨 보는 건 어떠한가? '와유(臥遊)'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는 현대에도 되살릴 필요가 있지 않을까.
조선시대 와유(臥遊) 문화
조선시대 문인들은 인공의 산을 만들거나 산수 유람의 글을 읽고 산수화를 걸어두는 등의 방법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자연을 감상하고자 하였으며, 이를 '와유(臥遊)'라는 용어로 규정하였다.
고려 및 조선시대 문헌에서 사용된 '와유(臥遊)'는 크게 세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첫째 종병(宗炳)이 처음 이 말을 사용한 대로의 회화, 둘째 인공의 산인 가산(假山), 셋째 산수 유람의 기록이 그것이다. 여기에서는 우리 문화사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와유(臥遊)의 세 양상을 살폈다.
조선전기 이래 원림의 경영과 함께 유행한 것이 석가산(石假山)이다. 조선시대 가산의 조성은 기본적으로 와유(臥遊)를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직접 체험할 수 없는 자연을 즐기는 방법으로 가산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산수화 역시 와유(臥遊)의 수단으로 널리 애용되었다.
산수화를 걸어두는 것과 가산을 만들어 세우는 것은 체험이라는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 그림으로 진짜 산수를 대신하기는 어렵다. 그림보다 생동하고 핍진한 것이 바로 가산(假山)이다.
그러나 가산은 가짜 산이다. 가산은 진짜 산에 비하여 규모가 작고 산수의 진면목과 거리가 있다는 한계가 있다. 산수화는 생동감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손쉽게 산수를 방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기에 가장 선호된 방법이었다. 조선 전기에는 관념적인 산수화를 내걸었으나, 17세기 무렵부터 실재의 산수를 그린 것이 와유의 자료로서 유행하게 되었다.
산수 유람을 대신할 가장 확실한 방법 중의 하나는 와유의 글, 곧 기행문이다. 특히 17세기를 전후한 시기 산수기행이 크게 확산됨에 따라 산수유기 역시 성황을 이루었다.
와유산수(臥遊山水)
요즘은 소파나 침대에 '편하게 누워' 손가락만 까딱하면 다양한 미디어로 세계의 명소를 감상할 수 있다. 옛 사람들이라고 이런 생각을 안 했을리 없다. 다만 수단이 달랐을뿐 여러 고상한 방법이 있었다.
조선후기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성호전집에 와유첩발(臥遊帖跋)이란 제목의 글이 실려 있다. 와유첩(臥遊帖)이란 그림책을 보고 '와유(臥遊)'란 말을 풀이한 글이다.
臥遊者, 身臥而神遊也.
(와유자, 신와이신유야)
와유(臥遊)라는 말은 몸은 누웠으나 정신이 노니는 것이다.
神者心之靈, 靈無不遠.
(신자심지령, 영무불원)
정신은 마음의 영(靈)이요, 영은 이르지 못하는 곳이 없다.
故光燭九垓, 瞬息萬里, 疑若不待於物. (고광촉구해, 순식만리, 의약불대어물)
이 때문에 불빛처럼 세상을 비추어 순식간에 만리를 갈 수있기에, 사물에 기대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와유(臥遊)란 직역하면 '누워서 유람한다'는 뜻이니, '편안하게 누워 두루두루 구경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누워서 무엇을 구경했을까. 바로 방안에 걸린 그림속 산수(山水)를 감상한다는 뜻이다.
중국 남북조시대의 화가 종병(宗炳)은 젊은 시절 천하명산을 돌아다니다 병들게 되자, 고향인 강릉에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산수의 아름다움을 잊을 수 없어 묘안을 짰다. 산수를 그림으로 그려 방에 걸어두고 지난날 여행한 장면을 회상하는 방법이었다. 송사(宋史) 종병전(宗炳傳)에 다음과 같이 실려있다.
老病俱至, 名山恐難遍睹.
(노병구지, 명산공난편도)
늙어 병이 함께 오니 명산을 두루 구경하기는 글렀구나!
唯當澄懷觀道, 臥以游之.
(유당징회관도, 와이유지)
오직 마음을 닦고 도를 관조하기 위해 그림을 벽에 걸어두고 누워서 명산을 유람하리라.
여기에 나오는 징회관도(澄懷觀道), 와이유지(臥以游之)란 간단한 말이 후대 예술가들의 의식을 사로잡게 됐고, 와유산수(臥遊山水) 또는 와유강산(臥遊江山)이란 말이 유래했다. 줄여서 와유(臥游 / 臥遊)라 한다.
종병(宗炳)이 살던 시대는 끊임없는 전쟁과 권력투쟁으로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시기였다. 이 때문에 당시의 지식인들은 불안한 현실보다는 평화로운 자연에서 삶의 위안을 찾았다. 종병(宗炳) 역시 고향인 강릉으로 돌아온 까닭이기도 하다.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에서 이러한 와유의 정신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산수 유람에 관한 시문을 모아 편찬한 와유록(臥遊錄)이 유행했다. 실제 유람에 참고하는 여행안내서 구실도 하였지만 그보다는 시문을 통해 간접적으로 유람하는 용도로 많이 읽혔다. 종병 이후 '와유'라는 말이 그림뿐만 아니라 여행기까지 아우르는 의미로 확장돼 쓰인 셈이다.
서양화 가운데 특히 풍경화는 20세기이후 큐비즘(Cubism 입체파)이나 엥포르멜(Art informel 추상표현주의)이 성행하기 이전까지는 원근법이 근간이었다. 그렇다면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 어땠을까.
중국에 명대후기 동기창과 현대의 리커란(李可染)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조선시대 겸재 정선과 지금의 정진용이 있다. 이들은 모두 서양의 원근법과는 달리 전통적인 '이대관소(以大觀小)'의 미학적인 기법으로 그림을 그렸다. '큰 것으로 작은 것까지 본다'는 시각에서 세계를 해석한 것이다.
화가 자신을 세상을 굽어보는 거인 혹은 까마득한 하늘 위에서 마음의 눈으로 대자연의 전경을 상하사방 자세히 살펴 한 폭의 생동감 넘치는 작품으로 완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찌보면 현상의 이면까지도 보려고한 피카소의 큐비즘과도 닮았다 할 수 있다.
겸재는 평생 여러차례 금강산을 유람하여 100여폭에 이르는 금강산 그림을 그렸다. 59세에 그린 금강전도는 국보 제217호로 지정될 정도로 빼어난 걸작이다.
금강산의 수많은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오도록 부감법(俯瞰法)을 써서 구도를 잡고 뾰족한 암봉은 수직준법(垂直皴法)으로, 나무숲이 우거진 토산은 미법(米法)으로 표현했다. 토산이 암산을 감싸안은 듯한 구성은 음양의 원리를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림 오른쪽 위에는 '從今脚踏須今遍(종금각답수금편) 爭似枕邊看不慳(쟁사침변간불간)'이라는 제시(題詩)를 달아 '와유'의 의미를 보태고 있다. '발로 밟아서 두루두루 다녀본다 하더라도, 어찌 베갯머리에서 이 그림을 마음껏 보는 것과 같겠는가'라는 뜻이다.
정진용은 예술의 기본은 '해체'라 주장한다. 심지어 그는 '해체가 결여된 작품을 만드는 이는 예술적 뿌리가 약한 기술자에 지나지 않는다'라고도 말한다.
해체해서 쪼개더라도 겸재의 금강전도는 금강전도처럼 보이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금강전도의 획 하나하나를 수평으로 늘어놔도 금강전도다. 해체는 동시에 조합이 이루어져야 한다. 정진용은 겸재의 금강전도를 해체해서 해와 달, 학, 소나무 등 십장생을 조합하여 '일월오악금강전도'라는 작품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이익의 말처럼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정신이라면, 그 정신은 어디라도 갈 수가 있다. 비록 우리는 육체라는 굴레에 갇혀있지만 정신만은 온 세계, 아니 저 우주 끝까지 이르지 못할 곳이 없다.
▶️ 臥(누울 와)는 ❶상형문자로 卧(와)의 본자(本字)이다. 人(인)과 臣(신)의 합자(合字)이다. 사람이 내려와 보고 있는 모양을 본떴다. 내려와 본다는 뜻이 전(轉)하여, 눕는다는 뜻이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臥자는 '엎드리다'나 '눕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臥자는 臣(신하 신)자와 人(사람 인)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臣자는 고개를 숙인 사람의 눈을 그린 것이다. 臥자의 금문을 보면 臣자와 人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人자가 마치 바닥에 누우려는 듯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여기에 臣자가 결합한 臥자는 잠자리에 들기 위해 바닥에 눕는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臥(와)는 ①눕다, 엎드리다 ②누워 자다 ③쉬다, 휴식(休息)하다 ④넘어지다 ⑤엎다, 그만두다 ⑥숨어 살다 ⑦잠자리, 침실(寢室) ⑧잠, 휴식(休息)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앉을 좌(坐)이다. 용례로는 베개의 위를 와상(臥床), 병으로 누워 있음을 와석(臥席), 병으로 누워 있음을 와병(臥病), 누워서 봄을 와견(臥見), 잠자리에서 일어남을 와기(臥起), 침실 안을 와내(臥內), 일을 하지 아니하고 받는 급료를 와료(臥料), 잠을 자도록 마련된 방을 와방(臥房), 잠을 자도록 마련된 방을 와실(臥室), 놀고 먹음을 와식(臥食), 누울 때 쓰는 제구를 와구(臥具), 다달이 갚지 아니하고 본전과 함께 한꺼번에 갚는 변리를 와변(臥邊), 누워 있는 용이란 뜻으로 앞으로 큰 일을 할 사람의 비유 또는 때를 만나지 못한 큰 인물을 이르는 말을 와룡(臥龍), 고단하여 드러누움 또는 깊이 든 잠을 곤와(困臥), 깊이 잠듦 또는 깊이 든 잠을 감와(酣臥), 한가로이 누워 있음 또는 속세의 뜻을 버리고 편안하게 묻혀서 삶을 한와(閑臥), 쓰러져 눕거나 잠을 부와(仆臥), 높이 누움 또는 벼슬을 하직하고 한가하게 지냄을 고와(高臥), 혼자서 누움을 독와(獨臥), 병으로 누워 있음을 병와(病臥), 술이 취해 누움을 취와(醉臥), 가로 또는 모로 누움을 횡와(橫臥), 섶에 눕고 쓸개를 씹는다는 뜻으로 원수를 갚으려고 온갖 괴로움을 참고 견딤을 이르는 말을 와신상담(臥薪嘗膽), 누운 용과 봉황의 새끼라는 뜻으로 누운 용은 풍운을 만나 하늘로 올라 가는 힘을 가지고 있고 봉황의 새끼는 장차 자라서 반드시 봉황이 되므로 때를 기다리는 호걸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와룡봉추(臥龍鳳雛), 별 곤란 없이 편하게 천하를 다스림 곧 태평 시대를 비유해 이르는 말을 와치천하(臥治天下), 이부자리 위에서 죽음을 뜻하여 제 수명에 죽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와석종신(臥席終身), 동산에 높이 누워 있다는 뜻으로 속세의 번잡함을 피하여 산중에 은거함을 일컫는 말을 동산고와(東山高臥), 베개를 높이 하고 누웠다는 뜻으로 마음을 편안히 하고 잠잘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고침이와(高枕而臥), 원룡이 높은 침상에 눕는다는 뜻으로 손님을 업신여김을 이르는 말을 원룡고와(元龍高臥), 불을 안고 섶나무 위에 눕는다는 뜻으로 점점 더 위험한 짓을 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포화와신(抱火臥薪) 등에 쓰인다.
▶️ 遊(놀 유)는 ❶형성문자로 游(유)의 본자(本字), 逰(유)는 통자(通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책받침(辶=辵; 쉬엄쉬엄 가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斿(유)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斿(유)는 기가 펄럭이고 있다, 물건이 흐르는 모양을 나타낸다. ❷회의문자로 遊자는 '놀다'나 '떠돌다', '여행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遊자는 辶(쉬엄쉬엄 갈 착)자와 斿(깃발 유)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斿자는 깃발이 나부끼는 모습을 그린 㫃(나부낄 언)자와 子(아들 자)자가 결합한 것으로 '깃발'이라는 뜻이 있다. 斿자에는 '놀다'라는 뜻도 있는데, 斿자가 마치 깃발 아래에서 어린아이가 놀고 있는 듯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아이가 노는 모습으로 그려진 斿자에 辶자를 결합한 遊자는 '길을 떠나 놀다' 즉 '떠돌다'나 '여행하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游(유)는 물위를 흘러가다, 헤엄침, 어슬렁어슬렁 산책하다, 나다니다, 놂 등의 뜻으로, ①놀다 ②즐기다 ③떠돌다 ④여행하다, 유람하다 ⑤사귀다 ⑥배우다, 공부하다 ⑦사관(仕官)하다, 벼슬살이하다 ⑧유세(遊說)하다 ⑨놀이 ⑩유원지(遊園地) ⑪벗, 친구(親舊) ⑫유세(遊說) ⑬까닭, 이유(理由)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희롱할 희(戱)이다. 용례로는 각처로 돌아 다니며 자기 또는 자기 소속 정당 등의 주장을 설명 또는 선전함을 유세(遊說), 일정한 방법에 의하여 재미있게 노는 운동을 유희(遊戱), 두루 돌아다니며 구경함을 유람(遊覽), 따로 떨어져 있는 것 또는 그 일을 유리(遊離), 타향에 가서 공부함을 유학(遊學), 거처를 정하지 않고 물과 풀을 따라 이주하며 소나 양이나 말 등의 가축을 기르는 일을 유목(遊牧), 흥취 있게 놂을 유흥(遊興), 휴식 삼아 거닒을 유보(遊步), 물 속에서 헤엄치며 놂을 유영(遊泳), 유람차 각처로 다님을 유행(遊行), 운행이나 기능을 쉬고 있음을 유휴(遊休),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새를 유금(遊禽), 공중이나 물 위에 떠 다님을 부유(浮遊), 멀리 가서 놂을 원유(遠遊), 물고기가 알을 낳기 위하여서나 또는 계절을 따라 정기적으로 떼지어 헤엄쳐 다니는 일을 회유(回遊), 공부 또는 유람할 목적으로 외국에 여행함을 외유(外遊), 서로 사귀어 왕래함을 교유(交遊), 두루 다니면서 놂을 여유(旅遊), 하는 일 없이 편안하고 한가롭게 잘 지냄을 우유(優遊), 유람을 하며 즐겁게 놂을 오유(娛遊),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제멋대로 놂을 일유(逸遊), 두루 돌아다니면서 유람하는 것을 주유(周遊), 이곳저곳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놂을 경유(經遊), 거문고 소리가 하도 묘하여 물고기마저 떠올라와 듣는다는 뜻으로 재주가 뛰어남을 칭찬하여 이르는 말을 유어출청(遊魚出聽), 먼 곳에 갈 때는 반드시 그 행방을 알려야 한다는 뜻으로 자식은 부모가 생존해 계실 때는 멀리 떠나 있지 말아야 하고, 비록 공부를 위해 떠나 있을지라도 반드시 일정한 곳에 머물러야 함을 이르는 말을 유필유방(遊必有方), 아무 일도 하지 아니하고 놀고 먹는다는 말을 유수도식(遊手徒食), 하는 일없이 놀고 먹는 백성이라는 말을 유식지민(遊食之民), 하는 일없이 놀면서 입고 먹는다는 말을 유의유식(遊衣遊食), 편안하고 한가롭게 마음대로 즐긴다는 말을 우유자적(優遊自適), 하는 일없이 한가롭게 세월을 보낸다는 말을 우유도일(優遊度日), 고기가 솥 속에서 논다는 뜻으로 목숨이 붙어 있다 할지라도 오래 가지 못할 것을 비유하는 말을 어유부중(魚遊釜中), 느긋하고 침착하여 서둘지 않는다는 말을 우유불박(優遊不迫), 촛불을 들고 밤에 논다는 뜻으로 경치가 좋을즈음 낮에 놀던 흥이 미진해서 밤중까지 놂을 이르는 말을 병촉야유(秉燭夜遊)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