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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 申采浩
요약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사학자·언론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에서 활약하며 내외의 민족 영웅전과 역사 논문을 발표하여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역사라는 것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라는 명제를 내걸어 민족사관을 수립, 한국 근대사학의 기초를 확립했다.
단재 신채호선생 동상
출생-사망 1880.11.7 ~ 1936.2.21
본관 고령
호 단재(丹齋)·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
별칭 필명 금협산인·무애생
국적 대한민국
활동분야 언론, 정치, 독립운동
출생지 충청남도 대덕군 정생면 익동 도림리(현 대전 중구 어남동)
주요수상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주요저서 《조선상고사》 등
주요업적 독립운동
출생과 학업
1880년 11월 7일 충청남도 대덕군 정생면 익동 도림리(현재 대전시 중구 어남동)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호는 단재·일편단생·단생 등을 사용했다. 그리고 필명으로 금협산인(錦頰山人)·무애생(無涯生) 등을 사용했다. 부친은 신광식(申光植)이며 모친은 밀양박씨이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신성우(申星雨)로 부터 한학을 익혔고, 1897년 신기선(申箕善)의 추천으로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이남규(李南珪)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그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관직에 나갈 뜻을 포기하고 낙향하였다.
언론활동
1905년 《황성신문(皇城新聞)》에 논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듬해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주필로 활약했으며, 내외의 민족 영웅전과 역사 논문을 발표하여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했다. 1907년 항일결사조직인 신민회(新民會)와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 등에 가입·참가하고, 이와 관련해 다수의 글을 발표했다. 이듬해 순한글 《가정잡지》를 편집·발행했다. 또한 《대한협회보(大韓協會報)》, 《기호흥학회보(畿湖興學會報)》 등에 논설을 발표하고 1909년 친일조직인 일진회(一進會) 성토에 앞장섰다.
독립운동
1910년 4월 신민회 동지들과 협의 후 평안북도 오산학교를 거쳐 중국 칭다오[靑島]로 망명, 그곳에서 안창호(安昌浩)·이갑(李甲) 등과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하고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조직된 항일단체인 권업회(勸業會)에서 발행하는 기관지인《권업신문(勸業新聞)》에서 주필로 활동하다가, 1914년 이 신문이 강제 폐간되자 그 해 남북 만주와 백두산 일대 부여, 고구려, 발해 유적지 등 한국 민족의 고대 활동무대를 답사했다. 1915년 상하이[上海]로 가서 신한청년회(新韓靑年會) 조직에 참가하고,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에도 힘썼다. 베이징으로 건너가 비밀결사단체인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을 창단하여 단장이 되었고, 신대한청년동맹(新大韓靑年同盟) 부단주(副團主)가 되었다.
임시정부 참가
1919년 상하이에서 거행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했으며, 의정원(議政院) 의원, 전원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나, 한성임정(漢城臨政) 정통론과 이승만 배척운동을 내세워 임시정부 공직을 사퇴하고 주간지 《신대한(新大韓)》을 창간하여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과 맞서기도 했다. 당시 임시정부는 소수의 의견만으로 소집되어 불완전한 상태이며 항일운동을 전개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조직구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승만은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주장했기에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부적절한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임시정부 탈퇴
1923년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서 민중의 폭력혁명으로 독립의 쟁취를 부르짖으며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조직을 만들자는 창조파(創造派)의 주동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안창호, 이동휘를 중심으로 하는 임시정부 개조파와 대립하여 임시정부의 존폐문제를 논했으나 논의는 결렬되고 말았다. 신채호는 다시 베이징[北京]으로 건너가 항일비밀단체인 다물단(多勿團)을 조직에 가담하여 지도했으며, 본국의 《동아일보》,《조선일보》에 논설과 역사논문을 발표했다.
무정부운동
1925년경부터 무정부주의를 신봉하기 시작, 1927년 신간회(新幹會) 발기인, 무정부주의 동방동맹(東方同盟)에 가입, 1928년 잡지 《탈환》을 발간하고 동지들과 합의하여 외국환을 입수, 자금 조달차 타이완으로 가던 중 지룽항[基隆港]에서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旅順] 감옥에서 복역 중 1936년 옥사했다. 향년56세. 적과 타협없이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동안 ‘독립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 이와 같은 견해가 곧 그의 역사연구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고조선(古朝鮮)과 묘청(妙淸)의 난(亂) 등에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고 ‘역사라는 것은 아와 비아의 투쟁이다’라는 명제를 내걸어 민족사관을 수립, 한국 근대사학의 기초를 확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