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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조계산(曹溪山)과 선암사(仙巖寺) <1>
蒙泉 추천 0 조회 91 12.11.05 18:29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조계산(曹溪山)과 선암사(仙巖寺) <1>

2007년 06월 09일 . 날씨 : 구름 많고 안개

 

 

 

 

2005년 11월 12일, 전라북도 장수의 영취산에서 바라지가 단독으로 400km가 넘는 호남정맥 종주를 시작하여 1년 7개월 동안 이 곳 조계산 구역까지 내려 왔으니 대단하지 않은가.... 오늘 종주가 끝나면 이제는 3번 정도의 산행으로 광양 백운산 정상에서 우리 회원들에게 호남정맥 종주 완료 보고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동안 몇몇 구간은 회원들과 같이 산행을 하기도 했지만 거의 전 구간을 단독으로 해낸 그 인내와 열정에 큰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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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 가는 길은 흐른 날씨에 안개까지 차올라 어둡기만 하다.

 

백운산에서 종주를 마치고 내친김에 기맥을 따라 망덕산까지 쫓아가 산자락이 섬진강 하구에 잠기는 걸 확인하려면 한두번의 산행이 더 필요하겠지만 그건 차후의 일이고 벌써부터 돌깻재나 버들이 들은 백운산 정상에서 종주완료 기념식을 계획하고 있고 아마도 그 날은 망덕포구에서 갓 잡아간 활어에 박주 한잔씩은 불가피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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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지의 오늘 종주 산행은 존제산 내려와서 만나는 석거리재에서 조계산을 넘어 22번 국도인 접재까지... 아침 7시 둘이서 떠나 바라지는 석거리재에 내려주고 나는 선암사 주차장에 차를 파킹하고 장군봉을 올랐다가 선암굴목이재와 송광굴목이재 사이에 있는 보리밥 집에서 만나 점심을 같이 하기로 약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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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밥 집은 조계산을 산행해 본 사람들은 거의 들려 볼 정도로 유명하지만 사실 우리 사는 곳에 비하면 형편없는 솜씨고 그냥 산행 후 배고픔으로 맛을 삼는 곳이다. 탁주 한잔을 곁들이는 맛에... 바라지는 정맥길에서 20분쯤 벗어난 곳에 있는 이곳에서 탁주 한잔 하자는 말에 두말도 없이 OK다. 6시간이 넘는 오늘 종주 산행에 피곤도 하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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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선풍의 대쪽같은 승풍을 고고하게 지켜 온 청정도장이며 천년고찰인 선암사는 한국불교 태고종의 유일한 총림으로 순천시 조계산 동쪽에 자리잡은 단아한 사찰이다. 백제성왕 7년인 529년에 선암사 비로암지에 아도화상(阿度和尙)이 선암사를 창건하였고 사찰명을 해천사(海川寺)라하고 산명을 청량산(淸凉山)이라 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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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도선국사가 현 가람 위치에 절을 중창하고 1철불 2보탑 3부도를 세웠다고 한다. 지금도 선암사에는 1철불 2보탑 3부도가 전해진다. 이후 선암사는 대각국사 의천이 선암사의 대각암에 주석하면서 선암사를 중창하였으며 또한 천태종을 널리 전파하는 호남의 중심사찰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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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국사 중창건도기에 의하면 그 때의 중창은 법당 13,  전각 12,  요사 26,  산암 19개소 등의 방대한 규모로 이루어 졌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고려시대의 기록은 보이지 않고 다만 김극기(1171-1197)의 시에 적막하고 고요한 수행의 사찰로 적고 있다. 조선전기의 선암사의 기록은 중종 35년인 1540년에 일주문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유일하다.
선암사도 다른 절과 마찬가지로 정유재란 때에 큰 피해를 입었는데 모든 전각이 불에 타고 철불, 보탑, 부도, 문수전, 조계문, 청측만이 남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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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선암사는 복구를 못하다가 1660년에 경준(敬俊), 경잠(敬岑), 문정(文正)의 세 대사에 의하여 대웅전을 세우는 등 8년간 괄목할 중수를 이루었다. 그러나 전쟁이전의 상태를 복구하는데는 무리였다.
선암사의 중창불사를 마무리하신 분은 호암약휴(護巖若休)스님이다. 호암스님은 승선교를 비롯하여 원통전 불조전 등을 만들었다. 중창이후 법당 8, 전사(殿舍) 12, 중료(中寮) 16, 산암 13, 부속암자로 선적암(善積庵), 도선암(道詵庵) 등에 이르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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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35년 1759년 봄에 선암사는 다시 화재를 만나 큰 피해를 입게 되었는데, 상월새봉(霜月璽封)과 서악(西岳)이 다음해인 1760년에 재건 불사를 시작하였다. 이는 아도화상이래 도선-의천-경잠-경준-문정-호암의 뒤를 이은 오창(五創)이라 할 수 있다. 상월새봉 스님은 중창불사 뿐만 아니라 화엄대법회를 1734-35년 두 차례에 걸쳐서 각각 선암사에서 개최하였는데 이때 참가한 1287명의 명단이 선암사 해주록(海珠錄)에 전해진다. 그리고 상월은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1761년 산 이름을 청량산, 사찰 명을 해천사로 개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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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13년 1789년에 정조가 후사가 없자 눌암스님은 선암사 원통전에서 해붕스님은 대각암에서 100일기도를 하여 1790년 순조가 태어나자 순조는 인천대복전(人天大福田)편액과 은향로, 쌍용문가사, 금병풍, 가마 등을 선암사에 하사 하였다. 순조 22년 1798년에는 승중문음(僧中文音)으로 유명한 해붕전령(海鵬展翎)이 칠전(七殿)을 중창하였다.  순조 23년(1823) 3월 30일 실화로 대웅전을 비롯한 여러 동의 건물이 불에 타자 다음해부터 해붕.눌암(訥庵).익종(益宗) 등이 제 6중창불사를 하여 현재의 가람의 규모를 갖추었다. 그리고 산명과 사명을 다시 복칭(複稱)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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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말기에는 호남을 대표하는 함명태선(涵溟太先)-경붕익운(景鵬益運)-경운원기(擎雲元奇)-금봉기림(錦峯基林) 등의 4대 명 강백을 배출하였다. 1919년 본발사법에 의하여 전국사찰을 30본산으로 지정했을 때 선암사는 전남의 4본산 중 하나로 지정되어 순천,여수,광주지역의 사찰을 관장하였다. 현재의 선암사는 태고종의 유일한 총림인 태고총림(太古叢林)으로서 강원과 선원에서 수많은 스님들이 수행을 하고 있는 종합수도 도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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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는 528년 아도화상이 비로암에 터를 잡은 이래 15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사찰이다. 사찰의 역사가 말해주듯 선암사는 도선국사, 대각국사, 침굉현변스님을 비롯하여 근대의 경운원기 선곡지우스님 등 수많은고승들이 선암사에 주석하시면서 선암사를 빛냈다. 선암사는 선종과 교종이 함께 발달한 몇 안되는 사찰중의 하나이다. 선쪽으로는 9산선문 중의 하나인 동의선문 혜철의 제자인 도선국사께서 선암사를 중창하신 뒤 선종사찰로서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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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국사 이후 수많은 선승들을 배출하였다. 선암사의 선방 수좌는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중국의 어느 사찰의 선방에서도 선암사 출신이면 아무 조건없이 입방이 허락되었을 정도로 전국적으로 명성을 날리었고, 선원의현판 또한 호남제일선원(湖南第一禪院)이라고 쓰고 있어 선암사 선방의 위상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교쪽으로는 조선후기에 선암사의 남암인 대승암에서 4대강백(함명-경붕-경운-금봉)을 배출하였으며,이때 학승들이 전라도는 물론이요 멀리 금강산의 유점사에 있는 스님까지 와서 공부를 하였다는 기록이 학계연록에 남아 있어 선암사의 교학 또한 융성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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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가 배출한 고승들의 면면이나 살펴보자. 먼저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의 법명은 도선이고 자(字)는 옥룡(玉龍), 호(號)는 연기(烟起)이다. 도선은 신라하대 선문(禪門) 중의 하나였던 동이산문 개산조 혜철의 직계제자로 광양의 옥룡사에 주석하면서 옥룡산파를 개산한 선승이었다.
도선은 고려중기의 최유청의「백계산옥룡사승겸선각국사사적비」에 의하면 그의 세속의 성씨는 김씨이며 영암출신이었다. 그 세계(世系)는 역사에서 그 기록을 잃었다고 하였고 혹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서자이라고도 한다. 그는 유년기에 불교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하여 15세에  월유산 화엄사에서 가서 승려가 되어 화엄교학을 공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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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400호인 선암사승선교(仙巖寺昇仙橋)

 

선암사의 부도(浮屠)를 지나 경내에 이르면 시냇물을 건너야 되는데 그 건널목에 놓인 다리가 승선교이다. 시냇물의 너비가 넓은 편이라서 다리의 규모도 큰 편인데, 커다란 무지개 모양으로 아름답게 놓여있다. 기단부(基壇部)는 자연 암반이 깔려 있어 홍수에도 다리가 급류에 휩쓸릴 염려가 없는 견고한 자연 기초를 이루고 있다. 다리의 아래부분부터는 길게 다듬은 돌을 연결하여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를 쌓았으며, 그 짜임새가 정교하여 밑에서 올려다보면 부드럽게 조각된 둥근 천장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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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예를 중심으로 양쪽 시냇가와의 사이는 자연석을 쌓아 석벽을 이루고 그 윗부분에도 돌을 쌓았는데, 모두 주변의 냇돌을 이용하였다. 다리 한복판에는 용머리를 조각한 돌이 밑으로 삐죽 나와 있어 장식적 효과를 주고 있는데, 예로부터 이것을 뽑아내면 다리가 무너진다고 전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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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후 불에 타서 무너진 선암사를 중건할 때 이 다리를 놓은 것으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 숙종 24년(1698) 호암대사가 관음보살의 모습을 보기 바라며 백일기도를 하였지만 그 기도가 헛되자 낙심하여 벼랑에서 몸을 던지려 하는데, 이 때 한 여인이 나타나 대사를 구하고 사라졌다. 대사는 자기를 구해주고 사라진 여인이 관음보살임을 깨닫고 원통전을 세워 관음보살을 모시는 한편, 절 입구에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를 세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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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모양으로 건설한 양식은 곧 벌교홍교(보물 제304호)와 같은데, 2개가 모두 지역적으로 가까운 곳에 있으므로 양식상 공통점이 있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다만 돌을 쓴 방식이나 마무리수법이 오래된 양식이며, 그 구조 또한 보다 웅장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미루어 영조 때에 만들어진 벌교홍교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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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에서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강선루

 

여기에서 도선은 당시 교종의 대표적인 교파인 화엄종에서 출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면은 당시의 대부분의 승려가 처음에 화엄학을 배운 뒤에 선종으로 개종하고 있었다는데 도선도 그와 같은 과정을 밟고 있는 것이다.도선은 관념적이고 현학적인 화엄교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선종으로 개종하여 동리산문의 혜철문하에 들어가 선법을 익혀 인가 받았다. 그 후 혜철문하를 떠나 15년간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수행을 하였고 전국방방곡곡에 3천8백여개의 사찰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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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 일주문

 

기둥이 측면에서 보아 하나라고 해서 부르는 이름이다. 이 일주문은 누문인 강선루를 지나 처음으로 들어서는 문으로 실질적인 사찰의 경역을 의미한다. 단층 맞배기와집으로 외 4출목으로 다포식 건물이다. 일주문의 양쪽으로 담장이 연결되었고 돌계단으로 층계를 연결한 형식이다. 일주문 입구의 현판에는 ‘조계산선암사(曹溪山仙巖寺)’라는 산명과 사찰명을 기록하고 있고 뒷면에 고청량산해천사(古淸?山海川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어 이 절의 옛 산명과 사찰명이 기록되어 있다. 다른 이름으로 조계문(曹溪門)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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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 또한 도선국사가 호남의 3암사를 비보사찰의 창건하였다고 선암사 사적에 기록되어 있다. 호남의 3암사로는 광양현 백계산의 운암사, 승평부 조계산의 선암사, 영암 월출산 용암사이다. 도선국사는 현재의 위치에 선암사를 초창하고 기를 보호하기 위해 1철불 2보탑, 3부도를 세웠다고 전해지는데 선암사 경내에 잘 남아 있다.  37세 되던 해 도선은 옥룡사로 주석처를 옮기면서 옥룡사를 중심으로 선암사, 금둔사, 징광사 등에서 선법을 크게 번창시켰다.  도선은 옥룡사에 머문 지 35년이 되던 해인 효공왕 2년(898) 72세로 입적하였는데 효공왕은 “요공선사(了空禪師)”란 시호(諡號)를 내려 주었다. 선암사에는 도선국사의 진영과 그의 부도로 전해지는 선조암지부도(보물1188호)가 있으며,  그의 유품으로 전하는 직인통 3점(지방문화재 21호)이 전하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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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2.11.06 00:38

    첫댓글 거촌선생님! 너무 반갑고 갑사합니다. 선암사가 제고향입니다.
    그림으로 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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