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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 기황후 貢女 奇皇后
“모진 비바람에 쓸리고 할퀴어 마모된 돌멩이가 더욱 야물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74
속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저절로 발길이 닿은 곳은 역시 황제궁이었다. 문을 열면 곧 그가 있는데, 은은 들어가지 못하고 한참 서 있었다. 문 앞을 지키는 궁인들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황제의 방 안에서는 두 사람 분의 다정한 목소리, 두 사람 분의 행복한 웃음이 문틈으로 새어나왔다.
“미리 연습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십시오, 폐하.”
“이렇게 할 필요까지는 없다는데도 고집을 부리는구려.”
“소원이었습니다. 꼭 한번 이렇게 해 보는 것이.”
“이런 일을 어찌 소원이라 하시오.”
“그러니 아- 해 보시옵소서. 깎아놓고 이리 오래 두면 맛이 없어집니다.”
“황후가 먼저 드시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냥 눈을 감고 아- 하시면 됩니다. 폐하.”
은의 표정에 아무것도 묻어있지 않은 것이 궁인들을 더 당황케 만들었다. 넋을 잃은 사람처럼 무표정하게 한참 문 앞에 그렇게 서 있던 은은 천천히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런 행동들조차 너무 의미 없게 느껴질 정도라서 뒷모습엔 처연함도 없었다.
//貢女 奇皇后//
자신의 생활 반경이나 행동 양식을 읽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겸은 등청하고 퇴청하는 시간을 매일 바꾸었다. 오늘은 조금 이른 시각에 퇴청한 우겸이 막 대문을 넘어서자마자 상단주들이 머물고 있는 별채 쪽으로 향했다.
“별채에는 무슨 일로 가는가.”
“계셨습니까.”
등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진 대인의 목소리에 우겸은 놀랐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했다.
“퇴청이 이르군. 폐하께서 편찮으시니 자네도 한가해진 겐가.”
“황성 밖에서 알아볼 일이 있어 일찍 나왔을 뿐입니다.”
“도성 안에 무슨 일이 있는가.”
“요즈음 부쩍, 사막을 건너오는 대규모 상인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만, 대인께서 아시는 바는 없으십니까.”
우겸이 날카롭게 묻지만 진 대인은 요지부동이다. 조금의 동요도 없다.
“두문불출하는 중인데 뭘 알겠는가. 상인들에 관련된 일이라면 저자로 나서보는 것이 빠르겠지.”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진 대인은 버티고 서기라도 하듯이 걸음을 떼지 않았다. 우겸은 가볍게 목례를 건네고, 다시 저택을 나서려는 듯 걸음을 돌렸다. 한참 제자리에 서 있던 진 대인은 모퉁이를 돌아선 우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이후에야 발을 옮겨 별채로 향한다. 상단주들이 모여 있는 방의 문이 닫히는 것과 거의 동시에, 모퉁이에서 우겸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
“그 여인이 다녀갔습니다. 황실 꼴이 말이 아닌 모양이더이다.”
“그대들에겐 천재일우가 아니겠소. 기분 좋으시겠구려.”
말과는 다르게 굳어진 표정의 진 대인이 풀썩, 자리에 앉는다.
“앞을 못 보는 선장을 태운 배는, 곧 침몰하는 길 밖에 없겠지요.”
“일은 어찌 되어가고 있소.”
“모든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조금도 염려하실 것은 없지요. 다행히도 황성 안에서 도움을 많이 준 덕분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하하.”
“약속한 일 만큼은 꼭 지키시오. 특히, 장헌궁에 계신 황후의 안전만큼은 어떻게든 보장되어야 하오.”
“그야 두 말하면 입 아플 소리입니다. 황성 안에서 벌어질지 모르는 변수들만 확인해주십시오. 그 여인이 지금쯤 덜미를 잡혔을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모든 변수에 대응책을 가지고 있으니 걱정 마시오. 덜미가 잡혔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지.”
“다음 계획은 무엇입니까.”
“몇 십 년 째 이 황실을 맹신하고 있는 늙은이가 하나 있소. 우선 그 자를 불러다 캐낼만한 정보를 들어야겠소.”
짧은 순간, 진 대인의 얼굴에 미소가 스치고 사라졌다.
“명심하시오. 내가 황후의 발을 묶어두는 순간부터 바로 일을 시작해야만 하오.”
“이제 시간문제입니다. 그 동안의 협력에 감사드리지요.”
“그런 인사는 일이 다 끝난 뒤에 나누기로 합시다.”
“이곳에 새로 일어설 제국의 대승상으로 군림하실 날도 머지않았습니다, 대인. 하하.”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어, 그만 일어나겠소. 달리 부탁할 것은 없소?”
어둠속에 몸을 감추고 있던 주인공이 천천히 일어서 제 모습을 드러냈다. 제법 여유로운 웃음과 함께 입을 뗀다.
“뭐, 그럴 기회가 생긴다면 직접 말하고 싶습니다만. 황제에게 대신 전해주시겠습니까. 그 자리를 이리 쉽게 내어주는 것에 대해 이 ‘주원장’이 크게 고마워하더라고, 말입니다.”
//貢女 奇皇后//
“황후마마, 이제 돌아오시옵니까.”
처소로 돌아왔을 때, 제 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자정원의 궁인이 꾸벅- 인사를 건넨다. 아, 하고 뒤늦게 궁인을 알아본다. 장 상궁은 또 어딘가로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뭔가 알아낸 것이라도 있느냐.”
“예, 마마. 얼마간 유심히 살펴보니 매일 하루에 한 번은 꼭 황성 밖을 나서는 것 같았습니다. 다녀오는 시간은 길어야 반 식경. 주로 마마께서 저녁 식사를 하시기 전이었습니다.”
“지금이 딱 그 때로구나.”
은이 덧옷을 벗어내 거칠게 의자위로 내려놓았다. 기우이길 바랐는데 수십 년을 보아온 제 측근을 의심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니 속이 상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방을 뒤짐 해보았느냐.”
“예. 방에서는 이렇다 할 것을 발견하진 못했습니다.”
궁인의 말대로 일 것이라 믿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서는 좀 더 확실하게 해 둘 필요가 있다는 외침이 멈추지 않았다. 뭔가 조그마한 증거라도 남기지 않았을 리가 없다는 의심이 계속해서 은을 종용했다.
“따르거라.”
은은 궁인을 대동하고 장 상궁의 방으로 향했다. 저도 모르는 새에 매우 잰 걸음으로 걷고 있었기 때문에, 뒤따르는 궁인은 거의 뛰다시피 은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장 상궁의 방 가까이에 이르러서 은은, 궁인에게 자정원으로 가 환관들을 데리고 오라고 명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그들을 이 근처에 대기시켜둘 생각이었다. 궁인이 자정원으로 향하고, 은은 천천히 방의 문을 열었다.
물론 상궁의 방에 들어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단정하고 아담한 방이었다. 은은 초를 켜지 않은 채, 어둠에 익숙해진 눈을 의지해 아주 천천히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벽 쪽에 작은 침상 하나. 옷가지들을 정리할 수 있는 몇 몇 가구들. 그리고 먹과 세필 붓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탁상 하나. 은의 시선은 그 탁상 위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은은 작아서 얼마 되지도 않는 크기의 방을 몇 번이고 가만히 돌아다녔다. 아무 것도 의심할만한 것은 없는 작은 방.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계속 방을 서성이던 은의 발치에서 삐그덕- 하는 곱지 못한 소리가 났다. 걸음을 멈추고 소리가 난 곳을 유심히 살핀다.
“역시.”
마룻바닥을 손으로 가만히 쓸어보다 작은 홈이 패여 있는 것을 감지한다. 손으로 들어내자 작은 공간과 함께 곱게 접힌 서신이 나타난다. 적다 만 서신. 은은 몽고문자로 적힌 그 서신을 아는 한 열심히 해석했다. 그리고 얼마 못 가 서신은 은의 손에서 형편없이 구겨져버리고 만다.
...
조용히 장 상궁이 들어선다. 낮게 안도의 한숨까지 내쉬며 덧옷을 벗어 두고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초를 찾아 불을 밝힌다. 탁상 곁에 앉아있는 은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만다.
“ㅁ..마, 마마..!”
“못 볼꼴이라도 보았는가. 뭘 그리 놀라.”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채로 앉아있던 은이 태연스레 묻는다. 장 상궁은 여느 때처럼 자연스레 행동하려 애썼지만 그럴수록 어색한 태가 드러났다.
“어찌, 처소에 아니 계시고, 여기 계십니까.”
“자네는 어딜 다녀오는가.”
“잠시, 볼 일이 있어-”
“무슨 볼 일.”
추궁하듯 묻는 은의 어투에 장 상궁의 표정이 굳어진다. 어찌 그러시느냐고, 태연스레 되묻는다. 은이 앉은 앞 탁상 위에는 일개 상궁이 가지고 있기엔 너무 많은, 너무 화려한 보석들이 쌓여있었다. 은은 제 손에서 구겨진 서신을 장 상궁을 향해 거칠게 내던졌다. 다리를 맞고 떨어진 서신을 장 상궁이 주워들기 무섭게 은이 몰아붙였다.
“어찌 그랬느냐고 묻고 싶은 건 나겠지. 그 서신에 대해 솔직히 털어놓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황실의 상황과 폐하의 건강 상태까지 조목조목 적혀있는 그 서신으로 누구와 내통을 하였는지 묻고 있네..!”
은의 고함소리를 신호로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환관들이 우르르 들어섰다. 그들에게 양 팔을 붙들린 장 상궁은 궁지에 몰린 쥐처럼 당황하여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마마. 제게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자네가 이런 사람이었다니 나야말로 기절할 지경이군.”
은은 장 상궁의 손에서 서신을 빼앗았다.
“가서 문초를 당한 뒤에는 아마 솔직한 말이 나올걸세. 뭣들 하고 있느냐.”
“지금 누리시는 것들이 영원할 것이라 생각진 마십시오. 곧 후회하실 겁니다.”
뜻밖에도 장 상궁은 외려 은을 불쌍하다는 듯 바라보며, 환관들에 의해 멀어져갔다.
첫댓글 오랜만에 첫 댓글이네요!!ㅎㅎ 장 상궁이 은의 편이 되주어야 했을텐데 그들의 편이 되었네요. 아니, 처음부터 그들의 편이였을라나요. 어쨌든 은이가 힘냈으면 좋겠네요. 잘 보고 갑니다~
유리별미곰 님★ 은이가 힘내야 할 일들이 아마도 지금부터 잔뜩이네요. 계속 지켜봐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측근의 배신은 은이에게 또다른 불신감들을 심어주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ㅜ 부디 꼬인 일들이 잘 해결되기를 바래요
헤르티아 님★ 말씀처럼 이젠 꼬이기보다 풀어가야 할 단계죠. 은이 단단한 마음으로 이겨낼 수 있게 응원해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주원장이란 이름 되게 낯이 익네요 사극 소설이나 역사소설에서 많이 보던건가..
까불지마ㅋ 님★ 많이 들어보셨을거예요. 원의 몰락 이후 명나라를 세우는 명 태조의 이름이 주원장이죠. 잠시 등장시켜보았습니다. 다음화도 지켜봐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잘봤습니다
소하昭遐 님★ 다음화도 확인해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젬있게 보고가요~
소희 맘 님★ 다음화도 확인해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이야기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하네요~~
Tiare★ 님★ 이제 결말에 접어드네요. 계속 지켜봐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은의 앞날이 어찌 될지- 후아후아. : - D 아무튼 잘 보고 갑니다 ^.^//
라그리마 님★ 제가 괜히 떨리네요. 후아후아. 다음화도 확인해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아- 은이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걱정되네요.
진려우 님★ 걱정해주시는 만큼 잘 되기를 같이 바래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