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70수년의 세월이 뇌리를 스친다
보리고개를 겪어면서 자라온 산골 소년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가까운 도시의 명문고인 부산고,경북고 진학의 꿈을 접고 국비로
무료로 공부하고 졸업후 취업을 시켜주는 교통고등학교(철도고 전신,서울 용산소재)로 전국의
가난한 수재들이 재수를 해가면서 응시한 학교인데 어려운 경쟁속에 합격하여 어린 나이에
몹씨도 기뻤다
그렇게 3년간 기숙시에서 동료들과 침식을 같이하며 열심히 공부하고 졸업과 동시 성적 우수자로
특차 발령을 받고 철도인이 되어 전국 최연소 기관사로 근무하다가 1960년대 중후반부터 삼성 Group
선대 회장님께서 (고 이병철 회장님)창설하신 울산 소재 석유화학 제조회사에 공채시험을 통해 입사하여
공무원들의 사무관 서기관 시험보다 더 어렵다는 사내 승진시험을 연달아 합격하고 (고졸 출신으로
서는 첫기록) 대졸자와 어깨를 나란히 경쟁하며 셀러리맨의 꽃이라 할수있는 괴장에 승진하고
총무과장으로 보임 되었을때 모두의 축하를 받으면서 아내는 감격해서 내손을 잡고 울었다
고졸자로서는 아무리 장기간 근무해도 사내 승격시험을 합격하지 못하면 승격은 없고 대신 호봉은
올라서 급료는 올라가는데 1300 여명 사원의 90%는 고졸자 이다
삼성에 입사하여 결혼을 해서 사택에서 살아왔기에 아내도 회사의 실정을 알고 내가 이 어려운
길을 걸어온것을 지켜 봤기에 기뻤고 부인회에서 아내에게 아무나 할수없는 어려운 일을 이루었다고 축하해 주었다
간부사원으로 여러 부서를 거쳐 55세 정년무렵 근속 27년에 母회사의 子회사 (협력회사) 대표로
선임되어 9년간 사장으로 연임하다 (3기^3년) 60대 중반에 은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래도 불리한 여건속에서 온몸으로 야망과 열정을 불태우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 절반은 성공했다고
자부하면서 항시 감사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1950년대는 6.25 사변의 참혹한 전쟁과 피난행렬을 목격하면서 초 중 고의 어려운 배움의 시기를 거쳐
전쟁의 폐허가 극심한 어지러운 혼란속에 암울한 사회상, 변변한 산업시설 하나없는 이땅에서 가난에
벗어나려 몸부림치던 절망의 시대였다
같이 자란 동네 친구 들은 가난한 시골에서 입이라도 하나 들고,견문을 넓히려고 대도시인 부산,대구로
가서 철물점,세탁소, 잡화상의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앞날에 대한 꿈을 꾸는것 조차 사치였던 시대였다
그렇게 울산에서 40 여년을 살아오다가 2000년대 후반에 수도권 평촌으로 (4호선,1기 신도시 -안양)
이사를 했습니다
보통 이 나이에는 산수 아름답고 한적한 시골로 귀촌울 해야 하는데 아내의 간곡한 바램으로 "손자들을
자주 볼수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는 념원을 1년넘게 버텨오다가 결국 들어주기로 하였습니다
세 아들이 울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대학은 전부 서울에서 다녀 서울권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반듯하게 자라서 큰아들은 명문 S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회계사로,둘째 아들은 H대학
의과대학을 나와 모교 대학병원에 전문의로 근무중이고 막내는 응석받이로 키워 형들보단 공부는 조금
못해도 k 대학을 나와 지금 외국기업체 과장으로 재직중이다
아이들이 차례로 명문대학에 합격하고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축하를 받으면서 지방에서 서을대
경영학과를 합격한 쾌거였기에 화재가 되었고 부부는 그럴때마다 두손을 마주잡고 좋아서 웃고 기뻐서
울었다, 내가 살아오면서 항시 가슴에 응어리진 회한도 대리 만족으로 풀었습니다
모두 착한 며느리와 예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처음 이사를 왔을때 분당 정자동에 살고있는 큰아들이 (00회계법인 간부)자기들과 같이 살자는 제의를
거절하고 아내는 "이 나이에 며느리 시집살이 할려고" ( 큰며느리는 명동 소재 00은행 본점에 근무 ,2년
전에 과장으로 승진되었슴) 하면서 평촌에 새로운 주거공간 APT를 마련하고 아침마다 S 대학병원 약사로
출근하는 둘째 며느리가 출근때 손자를 데리고와서 할머니에 맡기고 저녁 퇴근시에 와서 자기들 집으로
데리고 갑니다
이사이후 부터 낮에는 할머니의 손에 키워진 손자가 지금은 초등학생 3학년이 되어 학부모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육아가 보통 힘드는게 아닌데 할머니는 손자의 재롱에 푹빠져 신나고 보람있게 보내고 지금은 손자와
친구하는 재미로 보살피고 있습니다
그게 핏줄의 당김이겠지요, 손자의 주민등록을 할머니의 동거인으로 옮겨 집근처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나는 이제 인생살이에서 한발 물러나 어떻게 하면 보람된 노후를 보낼가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사온 평촌에는 친구도 없고 ,오라는데도 갈곳도 없는 안방신세를 면하고자 동해안 속초-삼척을 여러번
답사한후
동해의 푸른 바다, 넘실데는 파도, 장엄한 일출을 아침마다 볼수았고
길게 펼쳐진 연안을 한눈에 조망할수있는 동해시 묵호동의 조용한 바닷가 언덕배기 아파트에서 아련한
지나날의 추억을 회상하며 젊었을때 좋아했던 바다 낚시도 가고 작은 배낭메고 강원도 명소를 두루 섭렵
하면서(고성 전망대, 화진포, 거진 ,속초 ,설악산 울산바위, 38선 휴게소, 양양 하조대,남애,주문진 ,연곡 오대산,
강릉,삼척,울진등...)그렇게 신선놀음에 도끼 자루썩는줄 모른다고 4년을 넘게 소일하다가 아내가 동해까지 이동거리가 너무 멀다고 가까운 지역으로 옮기면 주말에는 손자는 제에미가 돌볼니까 매 주말마다 오겠다고 나를 회유했습니다
서해안 보령 서천 태안 당진등을 둘러보니까 바다물이 너무 흐리고 겨울에는 눈이 잦고 횡사가 직선거리로 가깝워 망설이다가 청풍명월 호반도시 이곳 제천으로 일년전에 이주를 했습니다
지인 하나도 없고 아무 연고없는 이곳으로 이주를 감행한 내 용기에 스스로 실소를 하면서 번잡한 도시보다 조용한 소도시에서 전원생활을 하고싶어,이제는 강가에서 피리 꺽지낚는 강태공으로 변신하여 산하를 즐기고 있습니다 . 단양,영월 충주, 원주를 30분내에 가볼수있고 평촌에는 1;30분으로 갈수있어 딱 적당한것 같습니다
남자는 아침식사가 끝니면 무조건 밖으로 나와야 부인도 자기 시간을 갖고 마음의 여유를 갖는다는 지론으로
그렇게 40 수년을 살아왔는데 갑자기 안방신세가 되어 3식이가 되기도 싫고 서로 간섭없이 잔소리 안들어
좋고 노년의 주말 부부로 살아보니까 재미았군요
손자의 학부모 노릇으로 별거를 하고있지만 노년의 주말 부부로 아내는 손수 Drive 를 하면서 바깥구경을 해서 좋고 내가 좋아하는 밑반찬을 해가지고 토요일 일찍 와서 이곳 가까운 지역으로 손잡고 관광도 가고 온천도 다녀
오고 월요일 부터 손자의 등교를 돌보러 일요일,또는 월요일 새벽에 돌아갑니다
마누라 왈 "각본에 의한 별거가 아닌데도 주말부부로 만나니까 반갑고 정감이 나서 새롭단다 ,매끼니 신경쓰지 않고 주말 부부로 만나니 신혼처름 좋겠다고 동료 할매들이 나를 부러워 한다" 면서 얼굴이 발그레 화색이 돈다
처음 동해로 갈때는 얄미웠는데 지금은 참 잘했다고, 당신의 판단이 옳았다고 나를 치켜 세우면서 당신같이 노년을 즐기는 사람은 없을거라면서 충분히 즐길 자격이 있다고 부추깁니다
중학교 3년 동안 밀양 읍내에서 자취를 했는데 그 경험이 이렇게 쓸모있을 줄이야 ,조석으로 아무 불편이 없고
내가 먹고싶은데로 거의 조리가 가능하고 불가능한것은 E,L 대형 마트에서 구입하고, 월례 행사처름 한달에
한번씩 서울근처에서 한정식, 중국집,가든등에 예약을 하여 온가족이 전부 모여 흐뭇한 가족 사랑을 확인하고 아이들은 형제간의 우의를,며느리들은 동서간의 친목을,손자들은 4촌간 어울려 재미있게 노는 시간을 갖는다
이모든 일정, 예약 ,연락은 우리집 분위기 메이커인 막내 아들이 하고 제형들은 동생이 하자는데로 잘 따른다
나는 3대걸쳐 여아의 탄생이없는 희안한 내력입니다
아이들은 고모가없고 며느리는 시누가 없고 우리는 손녀가 없는 세아들이 전부 손자만 있는 ,인륜으로 어쩔수
없다고 체념은 하지만 손녀가 하나만 있어도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할텐데 퍽 아쉽습니다
오늘은 날씨도 좋고하니 저녁에는 이곳 내토시장에 가서 메말묵에 막걸리 한잔을 곁들이면서 우리네
서민들의 살아가는 정취에 흠뻑 젖어 볼거나 ~ ~
청풍호반 / 제천 우거에서
첫댓글 월악산님 함마디로 멋지게 사십니다
한편의 인생 드라마를 보는것 같이 지루하지 않게 잘 보았습니다
드라마처럼 인생 후반은 그야 말로 happy ending이 네요
노후를 청풍호반에서 보내시면서 부인과는 주말 부부 정말 신혼처럼 사랑이 꿈처럼 흐르는것 같습니다
월악산님에 행복이 가득한 글에 머물다 갑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 하십시요
노을풍경 님
멋진 격려의 말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비망록에는 지난날의 살아온 단편들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가끔 졸작이지만 올리겠습니다,사랑방 이야기로 치부하시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월악산님 !
이글은 그냥 읽어드릴수가 없군요
한턱쏘셔야 겠읍니다
한은 그냥 들어 줄수도 있지만
이렇케 뭐하나 부족함 없는 자랑은
그냥 들어드릴수가 없군요
제가 남자라면 당장 술이라도 내라고 하시것구만
처지가 처진지라
아쉽습니다
부락산 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어려운 시대를 살아온 아픔은 있어도 억울한 한은 없습니다
지금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것도 아니요 강남 신흥재벌 처름 부가 있는것도 아닙니다
제 자랑으로 비쳤다면 죄송합니다
살아온 과정을 사실데로 풀어낸것 뿐입니다
언재든지 이곳으로 오시는 기회가 있어 기별 주시면 한턱 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