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
작가 ; 아니 에르노(1940 ~ )
초판 ; 1991
2022년 노벨 문학상 수상
<줄거리>
한 여인의 사랑 이야기이다. 외국인이고, 유부남인 A라는 남자에게 푹 빠진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자전적으로 쓴 내용이다. 성의 묘사도 하고, 불륜이다.
‘한 남자를 기다리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고 고백하듯이 A라는 남자를 만나서 나누는 사랑은 폭풍 같았다. 사랑을 다루는 일반적인 소설과 비교하여 남자를 기다리는 자신의 감정을 너무 생생하게 표현하였다. 이야기를 구질구질하게 이끌어가지 않고 간결하게 표현했다. 소설을 읽으면 너무 솔직하여 두려움마저 느껴질 정도이다.
1인칭 기법으로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너무 낱낱이, 생생하게 고백함으로 편집증이나, 정신병적인 증상이 느껴질 정도이다. 이야기 내용을 도덕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 왜냐면 사랑 이야기이지만, 도덕적 관점에서 보면 불륜이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너무 솔직하여 오히려 거부감이 느껴졌다. 아마도 나는 이렇게 쓸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지만, 따라서 이 작품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수필이라는 기분이었다.
이 소설은 일반 소설처럼 줄거리를 만드는 구성이 아니었다. 유부남을 기다리는 자신의 사랑 감정을 1인칭으로 토로하는 형식이어서, 수필에 더 가깝다는 인상을 받았다.
자신의 내면을 표현해야 하는 수필작가가 이처럼 솔직하게 쓰고 있을까? 소설이라는 장르로 들어가면 사실의 이야기도 허구로 생각해주기 때문일까.
참고로 A와 헤어지자 33세의 년하의 남자와 5년 간 사랑을 나누었다.
<작가, 아니 에르노>
아버지는 방직 공장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식료품점과 카페를 운영했다. 어머니는 밧줄 제조 공장에서 일했다.
1940년에 태어나서 1960년에 루앙 대학교에 입학하여 문학을 공부했다.
1964년에 낙태를 경험했고, 나중에 소설로 발표하였다.
1964년에 필립 에르노를 만나 결혼했고, 18년을 함께 살다가 이혼했다.
이후에 그녀는 자전적 소설을 꾸준히 발표했다.
1991년에 A를 다시 만나면서, ‘단순한 열정’을 출간했다.
그는 사회학자인 부르디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녀는 프랑스에서 에르노 문학상이 만들어 질 만큼 이미 유명한 작가였다.
2022년에 노벨 문학상의 수상자가 되었다.
<해설>
문학사에서는 지난 세기말부터 지금까지 ‘자아의 글쓰기’라는 용어가 유행처럼 나타났다. 문학이론가는 이것을 ‘자서전’ ‘자전소설’이라 했다. 또 자전적 내용과 허구가 혼합하였다 하여 ‘오토픽션(autofiction)이라는 학술용어가 만들어졌다.
개인의 삶을 작품으로 만드는 전통적인 자서전과는 다르다. 그는 사건을 묘사하기 보다는 경험할 때 느꼈던 감정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서, 철저하게 객관화 하여 그려냈다. 수필에서는 일반적으로 자기의 감정을 주관화 하여 표현한다. 아마 객관화 하였으므로 소설로 분류하였는지는 모르겠다. 따라서 에르노의 작품을 두고 ‘자서전도 아니며, 그렇다고 소설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 말에서 그의 작품 경향을 알 수 있다.
문학사에서 자전적 글쓰기가 유행하는 두 가지 요인을 꼽을 수 있다.
1. 거대 담론의 붕괴
국가를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또는 노동자를 위하여, 평등사회를 위하여, 등 우리가 귀가 아프도록
듣고 있는 시끄러운 구호들이 소리가 낮아지면서 시들해졌다.
2. 일상의 의미를 새롭게 바라보고, 해석하기 시작했다.
거창한 구호들이 이제는 시끄럽게 들리면서 우리를 오히려 피곤하게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문학은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개인에게 눈을 돌렸다. 개인의 삶에 진정성을 담아서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 소소한 개인의 내면을 표현하였다.
세기말에는 개인의 성공담과 청춘예찬이 유행했으나(우리 세대가 젊었을 적에는 교과서에도, 베스터 셀러의 책도 이런 내용이었다.) 이제는 한 물 간 내용이 되어 버렸다. 오늘에 와서 다시 복고풍의 이야기가 나타났다. 그렇다고 하여 자화자찬적인 성공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개인의 아픔을 독백적으로 고백하는 양식이다. 성공적인 삶을 산 결과 오늘을 이루어 냈다고 생각하면서, 유년시절의 어렵고, 아팠던 이야기를 고백함으로 독자에게 희망의 메시지는 전하는 역할도 물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신경숙의 ‘외딴방’이나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는가’도 자전적 소설이다. 그러나 자신의 경험을 얼마나 솔직하게 표현하였는가는 우리가 생각해 볼 문제이다. 왜냐면 에르노의 소설과는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소설이기 때문에 사실과 허구를 어떻게 조합하느냐의 문제는 작가마다 해결하는 방식이 다를 것이다.
참고로 스웨덴 한림원이 에르노를 노벨상 수상자로 결정하면서‘사적 기억 덮개를 벗긴 용기’라고 하였다. 작가 자신도 ‘나는 1인칭으로 고백하는 자전 형식의 글을 쓴다.’ 라고 하면서 ‘내 이야기가 전혀 부끄럽지 않다’고 했다.
내가 자료를 찾아보니 놀랍게도 우리나라에서 그의 작품이 17권이나 번역되어 있었다. 그녀가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발표하자 나는 교보문고에 그녀의 책을 구하러 갔다. 그러나 이미 출판사 단계에서 품절이라고 하였다. 아마도 출판사에서 필리지 않으니 폐기하였는지 모르겠다.
이번에 신간 소식이 있어서 책을 샀다. 문학세계에서 발간한 ‘단순한 열정’이다. 소설의 길이가 60페이지도 안 되는 짧은 소설이었다. 재미를 느낀 것도 아니고, 지적 호기심을 채워줄 만한 내용도 아니었다. 그래도 끝까지 읽은 것은 노벨상 작가의 작품이어서 였다. 그러나 내가 느낀 것은 자신이 겪었던 경험을 단순히 이야기로 풀어 쓴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을 뱉아내고 있었다. 이것은 수필적이다.
우리 수필도 시도해 볼 만하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의 시대 경향이 수필쓰기에 딱 좋은 시기인데도, 수필작가가 시대를 활용할 줄 모른다는 생각이다. 왜? 내 생각으로는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낼 자신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