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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행령 통치' 정권마다 반복, 국회 패싱 이대로 괜찮나
박세인 기자 sane@hankookilbo.com 우태경 기자 taek0ng@hankookilbo.com - 58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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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정부가 국회를 거치지 않고 행정입법을 통해 주요 국정과제를 추진하는 이른바 '시행령 통치' 사례가 두드러지고 있다. 경찰국 신설이나 검수원복(검찰 수사권 원상 복구) 시행령이 대표적이다. 국회에서 다수를 점한 야당을 설득하거나 정면돌파가 어려운 상황에서 손쉬운 우회로를 택한 셈이다.
'시행령 통치' 정권마다 반복, 국회 패싱 이대로 괜찮나© 제공: 한국일보
지난 5월 26일 오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윤석열 정부의 법무부 산하 인사검증 업무를 위한 ‘인사정보관리단’ 신설과 관련해 한동훈 법무부 장관을 출석시켜 현안질의를 해야 한다는 더불어민주당과 필요 없다는 국민의힘이 설전을 벌였다. 여야 간 합의를 못 하고 정회를 하는 가운데 김승호 인사혁신처장이 ‘공직후보자 규정과 인사검증의 정보수집 범위’와 관련한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오대근 기자
행정입법은 법률을 실제 집행하는 데 필요한 세부 규정에 대해 대통령이나 행정부에 시행령이나 시행규칙 등을 통해 정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입법권이 국회에 있지만, 법률이 세세한 부분까지 규정하기 어렵고 사회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필요성을 감안해 일부 권한을 위임한 것이다. 다만 정부가 시행령에 과도하게 기댈 경우 국회와 갈등을 빚어왔는데, 이는 윤석열 정부뿐 아니라 역대 정부에서 반복되고 있는 현상이다.
'시행령 통치' 정권마다 반복, 국회 패싱 이대로 괜찮나© 제공: 한국일보
역대 정부별 대통령령(시행령) 공포 건수. 그래픽=송정근 기자
20대 국회 행정입법 중 '법 위의 시행령' 70%
국회사무처 법제실은 20대 국회에서 각 상임위원회의 의뢰로 분석한 행정입법 4,418건 중 101건에서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법제실의 지적 사항은 총 110건(복수 지적 포함)으로, 이 중 △상위 법률의 취지·내용과 불합치(60건) △위임근거 없는 권리제한·의무부과(15건) 등 '법 위의 시행령' 사례가 68.2%(75건)에 달했다.
21대 국회에서도 개선 조짐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지난해 말까지 114건의 행정입법에서 총 136건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 중 '법 위의 시행령' 사례는 57건이었다.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다수 의석(169석)을 차지한 가운데 윤석열 정부가 여소야대 구도를 시행령으로 돌파하려는 시도에 따른 결과로 읽힌다.
'시행령 통치' 정권마다 반복, 국회 패싱 이대로 괜찮나© 제공: 한국일보
국회사무처 법제실이 문제 삼은 행정입법 . 그래픽=송정근 기자
이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법제처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노무현 정부 당시 시행령 공포 건수는 2,722건에서 △이명박 정부(3,746건) △박근혜 정부(3,649건) △문재인 정부(4,602건) 등으로 증가했다. 윤석열 정부도 출범 후 5개월(5월 10일~10월 12일) 동안 304건에 이른다.
특히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실을 폐지한 윤석열 정부가 인사 검증 기능을 법무부 인사정보관리단으로 이관하는 시행령을 내놓은 것은 최근 조응천 민주당 의원이 시행령 통제 강화를 위한 국회법 개정안을 내놓는 계기가 됐다. 이후 정부는 경찰국 신설, 검찰 수사권 조정 국면에서도 상대적으로 손쉬운 시행령을 택했다. 최근에는 정부가 시행령을 통해 중대재해처벌법도 무력화하는 게 아니냐는 논란이 일고 있다.
'시행령 통치' 정권마다 반복, 국회 패싱 이대로 괜찮나© 제공: 한국일보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1일 오전 제주도청 4층 탐라홀에서 열린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의 제주도 국정감사에서 질의하고 있다. 제주=뉴시스
여야 잦은 이견에 '시행령 시정' 요구 난망
여야 간 이견이 큰 쟁점 시행령이 아니어도 문제 지적 후에도 개선이 이뤄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일례로 대부업법은 광고할 때 과도한 대출의 위험성을 알리기 위한 경고 문구를 삽입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그러나 시행령을 통해 지면광고에서 광고면적이 150㎠ 미만인 경우 경고 문구를 생략할 수 있게 했다. 시행령이 오히려 법률에 규정한 대부 이용자 보호장치를 비껴갈 수 있는 길을 터준 셈이다. 일부 행정기관은 시행령을 통해 법에 없는 수수료 규정을 둬 타지역 관할 서류를 발급할 때 더 비싼 수수료를 부과하는 경우도 있다.
국회사무처가 이러한 문제점을 전달해도 정작 상임위가 이를 꼼꼼히 들여다보지도 않는다. 눈에 띄지 않는 시행령을 손볼 바에야 다른 입법에 나서는 게 의원들의 지명도를 높이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장승진 국민대 교수는 국회입법조사처 정책연구용역보고서에서 "상임위는 소관 법률에 대한 업무 처리만으로 업무량이 과중해 행정입법에 대한 충분할 검토를 수행할 인력이나 시간적 여유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정부에 시행령 시정을 요구하려면 본회의 의결이 필요한데 여야가 합의에 이르기가 쉽지 않다. 국회사무처가 20대 국회에서 문제가 있다고 본 행정입법 101건 중 국회가 수정을 요구한 것은 2건에 그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다.
국회의 시정 요구도 강제력이 없어 행정부가 이를 무시하면 그만이다. 장철민 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 2000년 국회법 개정 이후 국회가 시정을 요구한 행정입법 209건 중 34건(16.3%)만 수정이 이뤄졌다. 정부는 이 중 76건(36.4%)은 시정 관련 계획조차 내놓지 않았다.
野일 땐 '통제 강화'서 與 되면 대통령 눈치 보기
역대 정부에서도 과도한 행정입법 활용으로 야당의 반발을 산 전례가 적지 않다.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 추진, 박근혜 정부의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규모 축소, 문재인 정부의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 등이 대표적이다. 이에 반발한 야당은 행정입법에 대한 통제 강화를 주장했다.
박근혜 정부 때인 2015년 여야 합의로 시행령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국회법 개정안이 본회의를 통과했으나, 박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무산됐다. 당시 야당과 합의한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에게 '배신의 정치'라는 꼬리표가 붙게 된 계기였다.
이처럼 통상 야당은 행정입법 통제 강화에 적극적인 반면, 여당은 대통령실(이전 청와대)의 눈치를 보느라 소극적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야당이 정권교체 이후 언제 그랬느냐는 듯 대통령실의 입장을 따르기에만 급급하다면 국회의 시행령 통제 시도는 향후에도 무위로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