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전지전능할 것이며 자비와 사랑 그 자체일 것이다. 그런데 이 신관은 국수주의자로서, 일본 이외에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이런 사람을 믿을 수 없었다. 자기 보존의 본능, 사상에 발목 잡혀 있는 신관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또 어느 해 4 월, 난생처음으로 종교 단체 방문차 나스로 갔다. 친구의 소개이다. 봄이라고는 하나 나스 고지의 아침은 추웠다. 나무의 어린잎들은 이슬을 머금고 싱그러웠다. 이따금씩 뻐꾸기가 울었다. 나는 친구와 한적한 산길을 걸어, 산 중턱에 있는 교단 본부의 붉은 문을 통과했다. 나의 얼굴을 간질이는 어린 나뭇잎에도 햇빛은 반짝이고 있었으며, 나는 그것을 신의 빛처럼 느꼈다. 마음은 편안해졌다. 본부에 명함을 전달하니 우리는 따뜻한 손님 대접을 받았다. 본당에는 용신이 모셔져 있고, 그날은 축제일이라 마을에서 많은 신자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도 실망을 맛보았다. 시주금에 관심이 집중되는 교조의 눈빛과 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연간(年間) 몇 안 되는 축제에서, 각 지방의 지부 책임자들이 시주금을 보고하고 있는데, 금액에 따라서 교조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이다. " 시주는 평소의 감사의 표시이다. 또 이익을 올리기 위해서 바치는 것. 적은 시주로서는 용신님은 기뻐하지 않으신다. 당신은 신심이 부족하다." 교조는 시주가 적은 것에 화를 내고 있다. 그런데도 신도들은 고마운 듯이 눈물을 흘리고 꾸중을 듣고 있었다. 자비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교조의 옆에 앉아있기가 민망하였다. 친구가 말했다. "이 살아 있는 신은, 언제나 보시 때문에, 축제 때는 흥분한다는 거야." 청정한 바깥 풍경과는 달리, 본전 안 교조의 아귀도(餓鬼道)에 나는 그저 기가 막혔다.
2박 3일, 친구의 안내를 받은 교단 견학의 이것이 실정이었다. 이런 것이 과연 종교라고 할 수 있을까. 아침 여섯 시부터 종교행사가 시작된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독경의 합창소리도 대북의 소리도, 이상한 괴물에 빙의된 비애의 노래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나는 이미, 본전 안에, 등이 희고 배가 분홍빛인 큰 뱀과. 등이 검은 큰 뱀을, 나의 영시(靈視)로 확실하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교조에게 그것을 말하니 " 이곳의 신이 용신이다." 하고 오히려 뽐내며 설명하는 것이었다. 본전 옆에 있는 사당에는, 이나리대명신을 모시고 있었다. 여기에는 흰 여우, 다갈색 여우, 큰 여우, 새끼 여우들이 영시(靈視)로 많이 보였다. 이곳의 신도들은 거의가 다 이러한 동물령에 빙의되어 있다. " 왜 인간이 동물령을 받드는 것일까." 나는 동물에 에워싸인, 신이라고 자칭하는 자를 믿을 수 없었다. 동물령이기 때문에 물질 경제에 집착을 가지고 약육강식하는, 처참한 모습을 나는 볼 수가 있었다. 정도를 잃고 헤매는 사람들은 동물과 동류가 되었기 때문에 자기 판단을 할 수 없는, 불쌍한 신도가 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신앙하지 않고 있는 나에게는, 이러한 종교를 광신. 맹신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다만 불가사의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는 창가학회의 젊은 회원이 섞여서, 신도들을 괴롭히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동물령에게 기도드리고 있는 맹신자에게는, 젊은 학회원들과 논쟁을 전개할 만한 능력자는 없었다. 나는 이 교단을 견학하고, 신도(神道)와 불교(佛敎)가 일체(神佛一體)인 것을 보고, 내가 어린 시절부터 계속 생각해 온 종교와 같은 것이라는 점만이 납득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신불일체(神佛一體)의 신리를 깨달으면 그것으로 좋은 것이다. 이 교단의 신도들을 본 바로는 아편의 무서움을 느꼈을 뿐이었다.
마음속의 마왕
그 후, 1953년에, 나는 약혼녀에게 나의 장래에 대해서, 48세까지의 일을 예언하고, 1955년 3월, 사업상에 큰 문제가 일어날 것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젊음 탓에 기고만장해 있던 나에게, 수표 부도라고 하는 문제가 일어나, 내가 예언한 해, 경제적 고통이 찾아왔다. 하지만 나와 약혼녀는 곧 구제되었다. 나의 거래처인 모회사의 사장이 도와주었으며, 나는 결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H 은행의 도움으로 경제적 원조자금이 생겨, 다시 사업도 햇빛을 보게 되었다. 실패의 원인은 나의 경영의 미숙에 있었다.
아내는 내가 말하는 신불에 대해서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나는 30여 년 하루같이 신불을 말하지 않은 날이 없이, " 또 한사람의 나"를 추구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결코 맹신도 아니고 광신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생활기반을 근본으로 한 신불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무렵 나의 자형은, 몸이 약해서, 누님은 늘 신불에게 구원을 빌고 있었다. 1953년경, 자형은 신장 결핵으로 소화 의대에서 대수술을 받고, 콩팥 하나를 제거했다. 그리고 인조방광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 때문에, 누님 부부는, 창가학회의 일련 정종의 가호를 입었다고 생각하여, 그 신앙생활은 광신적으로 되어갔다. 처음에는 열심히 교리를 공부하고 사념(邪念)이 없었으므로 올바른 자기자신의 마음으로부터의 신심이었다. 그래서 마음의 평안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기복 신앙이 광신화됨에 따라. 형제자매에게 칼날같은 아수라의 포교가 시작되었고, 그 때문에 나의 형제들은 거의가 신자가 되어 그쪽 교리를 공부하고 있었다. 다른 형제들은 광신적으로 되지 않고, 오히려 불교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 본인들을 위해서도 다행한 일이었다. |
첫댓글 벗님을 존경합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님께서는 꼭 성불하실 것입니다.
업장은 소멸되고,바른 깨달음얻어지이다.
원공법계제중생 자타일시성불도
나무아미타불 _()_
삼보에 귀의합니다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