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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 이요
넷째동생 용성대군은 6살때 죽었고
인조이후 왕들은 전부 적자를 1명씩만 둬서 세자로 바로 책봉되었기 때문에 대군으로 책봉된 왕자는 인평대군이 마지막
병자호란 삼전도의굴욕 이후 14살의 나이로 청나라에 형들 (소현세자 봉림대군)과 함께 끌려갔지만 나이가어려 1년후 다행히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음
둘째 형 효종 즉위 후
청나라에 갔다와본적 있고 왕자라서 위신이서는 인평대군이 청 사신들을 상대했음
청나라에 13번이나 다녀오고 조선에 오는 사신들 접대도 도맡아 하다보니 청나라 사신들의 홀대와 무시로 스트레스가 심했다고함
오죽하면 보다못한 송시열이 이런 상소도 올림
"선왕께서 동생 잘 챙기라 신신당부를 하셨는데, 형이 되어가지고 어찌 그리도 뻑하면 호랑이굴에 보내면서 쉴 새 없이 혹사를 시키십니까???"
물론 그렇다고 효종이 동생 홀대한건 아님
동생이 궐에 올때마다 버선발로 환영하고 서로 물건을 두고 내기하며 노는 등 우애가 깊었음
왕자라서 이런저런 무고 사건에 휘말린 동생을 자주 쉴드쳐줌
역모 모함을 받을때도 적극적으로 보호해줬는데
인평대군이 처남 집에서 열린 파티에 참석했는데
승지 유도삼이 술에 취해 들어와 거만한 자세로 앉아 행패를 부림
보다못한 참석자 왈
"님아 여기 대군 자가(大君自家)께서 계시거든여;;;"
유도삼은 깜짝 놀라서 일어나 절을 함
"소신의 불찰입니다"
* 자가自家 : 왕의 아들, 딸 등을 부르던 존칭
이때 문제된게 "소신"이라는 말이었음
오로지 왕에게만 스스로를 신하라 칭할 수 있었으므로
서변이라는 사람이 이 말을 전해듣고 공을 세울 요량으로 효종한테 이름
"전하, 오정일 허적 원두표가 인평대군이랑 역모 꾀하는듯!!"
보통 예상하는 왕들의 반응
"뭐라?? 당장 저들을 잡아들여 국문하라!!"
하지만 효종의 반응
"..? 그걸 누가믿음? 너 무고죄"
물론 효종이 믿지않은건 동생에 대한 신뢰도 있었지만
원두표는 서인, 나머지 두사람은 남인이라
셋이서 역모 모의할리가 없었기때문
대사간 유철이 마지막 불씨를 지피지만
"유도삼이 신하라 칭한 거 아무 뜻 없이 한 말이긴 한듯ㅇㅇ 근데 사적으로 대군을 만나는건 국법에 어긋난데요?? 유도삼 파면하시져"
이걸 들은 내 반응
오.. 듣고보니 그렇긴한듯ㅇㅇ
하지만 효종 반응
"감히 하나뿐인 내 친동생을 없애려들어?? 너 서변한테 사주받았지?? 너 귀양가라."
유철은 결국 귀양감
인평대군은 "하멜 표류기" 하멜의 생명의 은인이기도 함
하멜 일행이 압송당했을때 청나라 사신단에 뛰어드는 등의 돌발 행동으로 조선은 이들은 죽이려 했음
당시 조선에 정착한 네덜란드인 벨테브레도 이렇게 말함
"당신들이 만약 앞으로 3일만 더 살 수 있으면 살 것이네"
즉, 앞으로 3일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는 뜻
그런데 마침 인평대군이 거길 지나갔고
하멜일행이 인평대군을 보고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함
(효종을 알현하는 하멜일행 삽화...)
측은지심이 든 인평대군이 효종에게 간청해 전라병영으로 유배보내는 것으로 마무리 지음
하멜도 기록에 이렇게 씀
'국왕과 국왕의 동생 덕에 우린 목숨을 건졌다'
안타깝게도 인평대군은 35살의 나이로 병사함ㅠ
이때 효종은 동생 집에가서 우느라 나오질않아 신하들이 사정사정해서 궁으로 데려오고
심지어 직접 동생 제사를 주관하겠다고해서 신하들이 겨우 뜯어말림
인평대군의 가계가 조선의 마지막 혈통이기도함
고종이 혈통상으로 인평대군 장남 복녕군의 7대손이기때문
조선 최후의 왕통은 인평대군의 후손으로 이어진것
(고종 할아버지가 사도세자 셋째아들 양자로 들어가면서 고위 왕족이 되면서 고종의 왕위가 가능해짐)
인평대군은 예술적 기질도 뛰어나 그림과 글을 많이 남기기도 했음
그중 하나로 글 마무리함
작은 동산에 핀 많은 꽃떨기에 나는 나비들아
향내를 좋이 여겨서 가지마다 앉지 말아라
해질 무렵 음흉한 거미는 그물을 매어놓고 엿보고 있다
- 소원 백화총에
첫댓글 안타깝다ㅠ
오...
신기하다... 조선 후기에 대군이 없다는것도 처음알았어 인조 아들이 마지막 대군이었다디 개신기
손이 정말 귀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