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 분필가루다. 그걸 핥으라 하신다. 굵은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듯 했다. 두 손으로 감싼 얼굴은 얼얼하였고, 욱신거렸다. 눈까지 뜨거워져 볼때기가 벌게지는 느낌에 양손을 뗄 수가 없었다. ‘야, 이거 참, 엄마한테 청개구리 짓을 하다가 벌을 받는구나!’ ‘인제는 안 놀고 만화도 안 봐야지’ 이를 깨물고 결심을 하는 순간, 만화책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길창덕의 꺼벙이와 윤승운의 맹꽁이가 딱 떠올랐다. 기분이 좋아지고 순간적으로 미소가 번지려 했다. 어, 큰일 나는데. 입가에 맴도는 웃음기를 짓누르기 위해 입을 꽉 다물었다. 속으로는 웃음을 참으려고 모진 말을 해댔다. ‘야, 너, 이 엄숙한 순간에 웃음이 나와, 눈치도 없이!’ 일단 터지려고 마음먹은 웃음은 좀체 수그러들지 않으려 했다. 웃음이 조금씩 샐 때마다 어깨가 실룩거려 마치 울면서 들썩이는 것 같아 보였다. 식은땀이 다 났다. 뭐 이런 일이 다 있나. 다행히도 흑판을 마주하고 있는 나는 고개를 숙여 위기를 모면할 수가 있었다. 후유하고 한숨이 다 나왔다. 웃었다면 어쩔 뻔했을까. 터지려는 웃음을 참느라 내 딴에 똥을 쌌다.
그래, 이젠 벌을 받아야지. 특이한 메뉴라 기대는 되지만 그래도 쪼매 찝찝하다. 하긴, 더 터지는 것보다야 낫지. ‘이게 웬 떡이냐,’고 고맙게 생각해야 했다. 낯선 벌에 선뜻 나설 마음이 들지 않았다. 지켜보던 아이들도 혼란스러웠나보다. ‘나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도 그런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지엄한 분부를 어쩔 것인가. 오지기 맞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긴 했다. 맞은 놈은 ‘다리 뻗고 잔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었다. 어찌된 셈인지 부끄러워할 사람은 당당하고, 떳떳해야 할 사람은 부끄러운 상황이 되어버렸다.
겁먹은 교실은 얼어 있었다. 의지와 달리 난 이미 교단에 올라와있었다. 흑판 밑 받침대에는 회색 가루가 군데군데 보였다. 받침대 위에 두 손을 짚었다. 그리곤 코를 갖다 댔다. 긴장이 고조되자 몸이 부르르 했다. 고요 속에 묻힌 교실에서 나만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식순에 따라 먹어야 할 판이다. 아이들은 ‘자가 정말로 먹을까?’ ‘안 먹으면 또 터질낀데.’ ‘저걸 먹고 나면 또 무슨 벌을 줄까?’ 아마도 그런 생각을 하느라 간을 졸이고 쳐다봤을 것 같았다.
분필향기, 향기가 아니고 냄새가 맞다. 고약한 냄새였다. 벌써부터 속이 느글거렸다. 지금에야 비목나무가 생각난다. 향기로움에 두 번째 나무는 그 잎일 것이다. 녹나무과 비목나무는 적색의 열매도 아름답거니와 그 잎을 문질러 코에 대보면, “아” 소리부터 낸다. 무심결에 나오는 감탄사다. 그리곤 향기에 취해 깊은 숨을 연신 쉬게 된다. 산길을 걸을 때마다 손이 잘 가는 나무다. 어떤 이는 비목 노래를 들먹인다. 들을 때마다 가슴 뭉클한 노래 「비목」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하지만 연상이 되긴 한다. 그럼, 향기가 제일 좋은 잎은 어떤 나무가 달고 있을까? 아마도 가래나무과 호두나무 잎일 것이다. 옛날에 추자라고 불렀다. 우린 그 호두에만 관심이 있었지 그 잎은 여사로 보았다. 잘 생긴 잎을 비벼보면 이런 향기가 있을까 할 정도로 고급스런 향이 난다. 형언할 수 없어 유감이다. 아직도 적합한 말을 찾을 수가 없다. 그윽한 향에 젖을 때면 눈을 감고 음미할 뿐이다.
첫댓글 어쩌면 어린시절의 벌 받던 얘기를 이리 잘 표현을 하는지..
내가 벌 받는것 같아 마음이 조마조마 해지네요,ㅎ.
잘 보고가요 다음이 궁금해지네요
호도나무 입사귀에서 그런 향이 난다는건 처음 들었네요
상주 고향에는 호도나무가 귀했는지 한번도 본적이 없는것 같아요
천안 광덕산 가면서 본 호도나무가 참 신기해 보였던 생각,
다음에는 향을 한번 맡아봐야겠네.
좋은날 보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