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해진(臨海津) 벼랑으로
어제는 물 부족이 심한 우리 지역에 흡족하지 않았지만 모처럼 귀한 단비가 내렸다. 비가 그치니 기온이 부쩍 내려간 시월 첫째 수요일이다. 근교 강변을 걷기 위해 날이 덜 밝아온 새벽에 길을 나섰다. 인적이 드문 강변은 식당 사정이 여의치 못해 배낭에 도시락을 챙겨 나감은 기본이렷다. 원이대로로 나가 창원수영장 맞은편에서 대방동을 출발해 본포로 가는 30번 버스를 탔다,
대방동 기점을 출발한 첫차 버스는 도심에서 충혼탑을 거쳐 명곡교차로에서 도계동 만남의 광장을 지나도록 승객은 나를 포함 세 명뿐이었다. 용강고개를 넘어간 버스가 주남저수지를 돌아가는 즈음 동녘을 바라보니 낮은 구름이 낀 여명의 들녘이 드러났다. 창원 대산면 본포는 낙동강 강가의 포구였으나 이제는 나루터도 사라지고 창녕 부곡의 학포로 건너는 본포교가 놓여 있다.
주남저수지에서 봉강을 지나면서 다음 정류소가 본포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그즈음 이십여 년 전 같은 학교 근무했던 선배의 얘기가 떠올랐다. 그분은 수학을 가르쳤지만 동읍 출신으로 향토사에 관심이 많아 지역 사정에 아주 밝았는데 세계적 소프라노 조수미의 가족사도 훤했다. 조수미의 조부와 외조부는 일제 강점기 본포 인근 유지로 면장과 수리조합장을 지낸 분이라 했다.
기사는 나를 본포 마을회관 앞에 내려주고 차를 돌려 북면 마금산 온천을 향해 떠났다. 민물 횟집이 한 채 있는 강둑으로 나가다 마당귀의 주렁주렁 달린 붉은 석류에서 계절감을 느낄 수 있었다. 민물횟집 들머리에서 강둑으로 오르니 본포교 아래 수산 방향으로 흐르는 유장한 강물이 드러났다. 창원 시민들의 일정 부분 식수를 감당할 양수장 곁으로 난 본포교를 건너 학포로 갔다.
학포는 의령 남씨들의 집성촌으로 알려진 창녕 부곡의 강마을이다. 수십 년 전 경기도 이천에 있던 정순공주와 부마 남휘의 무덤이 도시 개발에 밀려 남씨 문중에서 그곳으로 이장해 왔다. 태종의 딸로 세종대왕과는 남매간인 정선공주는 남이장군의 할머니이기도 했다. 학포에서 구산으로 가는 국도변에 정선공주와 부마의 무덤이 있고 그 아래는 남이장군 사당과 동상이 세워져 있다.
본포교를 건넜더니 날이 밝아와도 하늘은 흐려 햇살이 비치지 않았다. 나는 국도가 아닌 강변 지방도를 따라 노리로 올라갔다. 학포에 딸린 작은 마을 노리는 정남향으로 벼량 길을 지나면 청암리 임해진에 이르는데 강 건너편은 창원의 최북단인 명촌이었다. 노리 길섶에는 개비라고 하고 개로비로도 불리는 빗돌이 서 있는데 탁본으로 떠봐도 마모가 심해 글자 판독은 불가라 했다.
옛날 옛적은 오늘날처럼 토목공사 중장비가 없었고 바위 벼랑을 뚫을 공법이 있을 리 없던 시절이다. 청암리 임해진에서 학포리 노리 사이 천 길 낭떠러지 강변은 사람이 다닐 수 없었는데, 두 마을 사이 정분이 난 개가 오가면서 벼랑에 길이 트였다. 견공이 길을 튼 이후 사람도 내왕하게 되어 개를 기리는 무덤과 개비를 세워두었다. 개비는 견비(犬碑)이며 개로비(開路碑)였다.
창녕 부곡 임해진은 내륙에서는 드물게 바다 해(海)자가 지명에 들어 있었다. 우리 선인들은 거기서 배를 타면 바다로 나간다는 경험칙이 낳은 나루터였다. 다대포에서 거슬러 오르면 낙동강이 발원한 태백 황지까지는 1300리고, 뱃길이 가능했던 상주까지는 700리로 알려져 있다. 자동차와 철길에 밀려난 수운은 흔적이 없어졌지만 그나마 4대강 사업으로 자전거길은 남아 있었다.
학포 수변공원에서 물억새가 내민 이삭에서 가을 정취에 젖어봤다. 임해진 벼랑을 따라가니 소우정이 나왔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근심을 지우려는 벽진 이씨 도일이 말년에 은거했던 곳이었다. 추수를 끝내고 마늘을 심어둔 길곡면 들판 강둑 바깥은 노고지리 공원이었다. 창녕함안보를 건너 전망대에서 도시락을 비우고 내봉촌 광심정을 지나 오곡에서 재를 넘어 내산으로 갔다. 22.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