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21. 10. 24. 일요일.
날씨는 온화했다.
오후에 서울 송파구 잠실 석촌호수 서호로 나가서 동호 쪽으로 나아갔다.
한 바퀴를 쉬엄쉬엄 도는데 왜그리 호수가를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많은 사람이 오고 가는 곳에는 '코로나19' 병균 접촉 가능성도 많기에, 나는 겁이 나서 산책로가 아닌 일반도로로 올라선 뒤에 한 바퀴를 천천히 돌았다.
귀가하면서 길 건너편 삼전동 쪽을 바라보았다. 대로변에는 큰 건물이 줄지어 서 있고, '산림조합중앙회' 건물 앞에서 임산물 판매장을 임시로 개설한 것을 보고는 그참 길을 건너서 야외 매장에 들어섰다.
대추, 버섯, 헛개나무를 잘게 잘라서 뽀갠 나무토막, 산수유 열매 말린 것 등 다양한 임산물이 있지만 나는 그저 실속이 있는 알밤이나 눈여겨보았다.
구석에서 거의 다 팔고는 조금만 남은 푸대자루를 보았다. 1kg 10,000원이란 팻말을 보고는 밤을 사겠다고 말했다.
판매업자는 정말로 짠돌이처럼 얄밉게도 조금만 담으려고 애를 쓴다. 저울 눈금 하나조차도 야박하게 헤아리며 ...
별로 크지도 않은 밤톨이지만 나중에 시골로 가져 가서 종자용으로 밭흙에 묻을 요량이었다.
밤 한 톨을 손으로 집어올리면서 '싹을 내서 묘목으로 심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매판하는 노인은 '안 됩니다. 개량종 밤은 알맹이가 커도 묘목으로 심으면 밤알이 정말로 잔챙이만 나옵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속으로 '이게 공연히 샀네...' 하면서도 지갑 속의 지폐를 꺼내서 내주었다.
별 수 없다. 그냥 삶아서 그냥 다 먹어야 할 터.
나는 더 생각하기 시작했다.
'개량종'은 무엇일까?
시장에 나온 임산물들은 눈으로 보면 겉모양새가 크고, 굵직하고, 잘났다. 그런데도 씨앗(씨) 종자로는 그게 아니다? 개량했다는 뜻은 못난이 불량 품종만 나온다는 뜻인가?
집에 와서는 아내한테 말했다.
'시골로 가져가서 밭흙에 묻어서 싹을 튀운 뒤에 심으려고 샀어. 그런데 개량종은 잔챙이 밤만 나온다고 하기에 그냥 다 삶아서 먹어야겠어.'
아내의 잔소리가 길어졌다.
'당신 .... 시골 텃밭에 가득 찬 나무들은 어떻게 할 거예요? 그거 다 소용없어요. 다 베어내세요. 그리고 당신 나이가 얼마인데 ... 과일나무를 심는다고요?!'
할 말이 없다.
시골이 아닌 서울 아파트에서 사는 내가... 할일이 없어서 날마다 무기력하게 아파트 안에서만 빌빌거리는 내가 무슨 말로 대꾸하랴.
<월간 국보문학>카페에는 ' 제사상 과일의 숨겨진 의미/제사상에 올리면 안되는 과일' 제목이 떴다.
제사 지낼 큰 상 위에 올려놓은 과일인 대추, 밤, 배, 감 등에 대해서 어떤 이치를 설명하는 글이 떴다.
대추씨는 하나이기에 이는 왕을 상징하며, 밤송이에는 밤이 세 개가 들었는데 이는 삼정승(영의정 좌우정 우의정)을 뜻하고, 배는 씨앗이 6개여서 6조판서를 뜻하며, 감은 씨앗이 8개라서 조선팔도 관찰사를 뜻한다는 내용이다. 이들 과일로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마치 조선왕조와 조선조 관직에 빗대였다.
나는 더 자세히 알려고 인터넷으로 검색했고, 아래 내용도 보았다.
"한국인에게 무엇이 있는가"(전 고려대학교 총장 홍일식박사 지음/정신세계사; 1996년판)에 소개된 내용을 각색해서 소개.
'대추나무는 꽃 하나가 피면 반드시 열매 하나를 맺고서야 떨어진다. 아무리 비바람이 치고 폭풍이 불어도 열매를 맺기 전에는 절대로 꽃으로만 지는 법이 없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으로 태어 났으면 반드시 한 가정을 이루어 자녀를 두고(그것도 많이...), 그 자녀를 통하여 조상에게 효를 실천하고 가문이 이어지는 영원성을 의미한다.
밤나무는 밤 한 알이 뿌리를 내리고 가지가 나서 아름드리가 되어도 씨밤은 절대로 썩지 않고 남아있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애초의 씨밤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이 부분은 저자가 직접 확인한 것이라고 함)그러므로 밤은 아득한 조상과 나, 그리고 먼 후손과의 영원한 연결성을 의미한다. 자손이 몇백 대를 내려가도 조상은 언제나 후손과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밤나무로 신주를 만드는 것도 밤나무의 상징성 때문이다.
감나무는 한강 이북에서는 대체로 서식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한국인은 함경도건 평안도건 제사에는 반드시 감(곶감)을 올린다. 왜 감을 꼭 쓰는가. 감의 묘한 생리 때문이다. 속담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난다"고 하지만 감 심은 데서는 절대로 감이 나지 않는다. 아무리 튼실한 감씨를 심어도 고욤나무가 나온다. 감나무가 되려면 3~5년쯤 뒤에 고욤나무의 가지를 째고 감나무를 접목시켜야 한다. 만약 장난으로 줄기가 아닌 가지에 접을 붙이면 한쪽 가지엔 감이, 다른 가지엔 고욤이 열린다.
감나무의 상징성은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모두 사람이 아니다. 가르침을 받고 배워야 모름지기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가르침을 받고 배우는 데는 가지를 째고 접을 붙이는 것처럼 커다란 고통이 따른다. 이를 극복해야 비로소 진정한 사람이 될 수 있다.
.... .... 이처럼 우리 조상들은 제물 하나를 차리는 데도 이토록 자손에 대한 가르침을 염두에 두었다.'
위 내용 가운데 감나무에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감나무는 씨앗이 8개이다. 이 씨앗을 심으면 싹이 트는데 오로지 '고염나무'만 나오는가? 하는 의문이다.
누가 철저하게 실험했고, 식물 유전학으로 조사했나?
감 씨(씨앗)를 심으면 오로지 <고염>이 열리고, 감은 전혀 열리지 않는가?
내가 보기에는 황당한 내용이다.
감나무와 고염나무의 열매는 크기 맛 등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십여년 전에 내가 감나무 묘목을 180그루 심었다가 완전히 실패했다.
그 텃밭 안에는 저절로 자생하는 감나무 몇 그루가 있다.
아마도 내가 감을 먹고는 씨앗을 아무 데나 내뱉었고, 씨에서 싹이 나와 자라면서 못난이 땡감나무가 되었을 터.
저절로 자생하는 감나무 몇 그루가 있다. 땡감나무에는 감이 열리지만 크기는 대체로 작고 모양새도 오종종하다.
나무의 크기와 열매인 감(홍시)는 적당한 크기이다.
이처럼 분명한 것은 <고염나무>은 아닌 감나무다. 땡감나무의 일종이다.
감나무를 속성 재배하는 방법은 있다.
뿌리가 튼튼하며 냉해에도 견디는 고염나무를 대목으로 삼고, 여기에 감나무의 어린 가지를 접목해서 성목으로 키우는 방법이다. 이들이 점차로 크게 자라면서 접목한 나뭇가지에서 큰 감이 열린다.
그런데도 위 자료에서는 감-씨앗을 심으면 '고염나무만 나온다'고 한다.
이게 유전학상으로는 맞는가?
나한테는 황당하며, 아니올씨이다.
.... ....
* 60여 년 전, 내 아버지는 사과나무 과수원을 조성하려고 대전으로 트럭으로 묘목을 사다가 시골 텃밭 세 자리에 심었으나 관리부재로 실패했고, 그 아들인 나는 퇴직한 뒤에 시골로 내려가서는 감나무, 석류나무, 모과나무, 매실나무 등의 묘목 400여 그루를 심어서, 과수원을 조성하려고 했으나 나도 실패했다.
지금은 서울에 올라와 있기에 더욱 그렇다.
내 아내는 시골생활 부적응자인가? 남편인 내가 시골에서 사는 것을 심하게 반대를 한다.
나는 죽은 뒤 '다음세상'에나 과수원을 가꿔야 하는지.. 내 나이 벌써 74살이기에 시골로 내려가서 나 혼자 살겠다고 우길 수도 없다.
..... 이하 생략.
또 하나의 글감이다.
위 <자유게시판방>의 '제사상 과일의 숨겨진 의미/제사상에 올리면 안되는 과일' 제목의 글에서 나는 많은 생각한다.
조상에 대한 제사가 많은 나는 위 글을 거듭 읽으면서도 고개를 갸우뚱한다.
위 글 요지가 지나치게 비과학적이며, 비논리적으로 억지를 부린다는 느낌이다.
조상에 대한 제례문화(설, 한가위, 기제사(초상, 대상, 삭망 등), 시향/시제, 묘제, 단오제 등)가 무척이나 많고, 또 제사를 지내야 하는 본래의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꼬리를 문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상숭배에 대한 제사(고사)는 언제적부터 시작되었을까?
역사 이전인 선사시대, 고조선, 3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중 제사 가운데 초기는 언제적부터 처음으로 시작했으며, 제례문화는 어느 정도껏 성행했을까?
시기적으로는 고대에도 천신을 받드는 제사가 있었으나 이씨 조선조(1392년 ~ 1910년)부터 제사 제례문화를 크게 확대해서 지냈을 것 같다.
고려말 서기1388년 압록강으로 군대를 이끌고 옛고구려 땅인 만주를 회복(요동정벌)하러 간 최영장군과 부장인 이성계장군.
아쉽게도 부장인 이성계는 압록강 위화도에서 군사반란을 일으켜서 상장인 최영장군을 체포하고, 군대-머리를 되돌려서 고려 개성으로 되돌아왔다. 최영장군을 감금했다가는 1년 뒤에 개성에서 목을 잘라 참수했고, 4년 뒤인 서기1392년에는 고려를 멸망시키고, 이씨조선을 개국했다.
고려조 수도인 개성을 버리고는 남쪽인 한양으로 내려와 수도를 새로 열었다. 오늘의 서울이다.
* 최영장군의 묘소는... 아쉽게도... . 최영장군의 고향인 충남 홍성 용봉산에는 사당이 있음
* 이성계 무덤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위치
새로 개국한 이태조(이성계) 이하 왕(조선조 27대)들은 통치 목적상 어떤 정책이 필요로 했을 게다.
그게 바로 삼강오륜에 바탕을 둔 <충효사상>이었을 터.
여기에 주자학, 이황, 이퇴계의 유교 유학사상도 가미해서 조상에 대한 제례문화를 철저히 이행하도록 했을 터.
그 결과 온나라 만백성(천민 등을 포함)까지도 거창한 제례문화를 요구했을 게다.
이씨 조선조가 일본에 의해서 1910년 8월에 멸망했고, 일본제국주의가 세계2차대전의 실패로 1945년 8월에 끝났고, 1948년 8월부터 대한민국 이승만 정권이 들어섰다.
서기1949년 1월생인 나. 내 어렷을 적(1950년대 후반)에는 무덤들이 잔뜩 있는 고향 앞산인 상전산에 올라가서 본 시향/시제는 거창했다. 세 명의 산지기들이 운반해서 차린 제례 음식상은 푸짐했다. 갓 쓰고, 도포 입은 시향꾼들이 득실벅식거렸고...
서해안 산고라당의 서민이었던 내 조상들이 뭐 그리 대단하였다고 이토록 제례문화가 거창했으니..
이씨조선 시대에는 조선 8도가 다 이랬을 게다. 이조가 유난스럽게 충효사상을 강요했기에.
위 제례문화의 어떤 상징성을 엿본다.
제사상에 올리는 과일의 씨(씨앗)을 확대해석해서 이씨왕조와 결부시키는 괴상한 논리를 전개하지는 않았을까?
대추 : 씨는 1개. 곧 하나뿐인 왕을 상징 : 절대적인 충성을 뜻하고(반란을 일으키지 말하는 암묵적인 뜻)...
밤 : 씨는 3개. 조선조 관직의 최고인 3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빗대어서...
배 : 씨는 6개. 조선조 조요 관직인 6개의 판서(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감 : 씨는 8개. 조선 팔도의 관찰사를 상징
* 조선조 초기에는 왕족/양반들은 전체 인구 가운데 10%, 40%는 평민, 50%는 상놈(노비 천민 등)이었다.
마치 전체 인구들이 다들 관직에 등용할 수 있는 것처럼 표현했다. 최하류층 상놈들이 어떻게 과거시험을 볼 수 있으며, 상놈들이 위 3정승, 6조판서에 오를 수 있었던가? 개뿔이다.
.... ...
2020년대를 사는 내가 지내는 설/추석 차례, 기제사와 시골에서 지내는 시향/시제 등에는 위 과일 이에도 다양한 과일/열매를 진열한다. 대부분은 서양과일이다.
'포도, 수박, 참외, 토마토, 귤, 바나나, 멜론, 망고, 키위, 석류, 파인애플, 딸기, 앵두, 아카보드, 무화과, 머루' 등
위 과일들은 이조시대의 충효사상, 최고위 관직 등으로 빗대여 해석하면 도대체 어떤 내용과 뜻풀이로 해석해야 되나?
전통 제례문화에 유식한 당신이 어디 한번 설명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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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보탠다.
2021. 10. 24. 일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