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 위의 거미는 강박을 탐구하는 자세와 닮았다
품에서 솟아난 다리가 잠시 습기 속으로 잠길 때 뾰족한 발끝에 눅눅한 공기가 하나씩 터지며 밀려난다 저기, 하고 들어 보이던 그녀의 손가락과 창문과 한여름 감기와 알약이 거미의 발에 꿰어져 있다 거미가 몸을 일으킬 때
소나기는 다시 돌아오고
바람이 분다 남아 있던 빗방울이 거미줄을 따라가면서 야위어지듯 목숨을 부추기며 바람이 분다 현수막처럼 펄럭이는 거미의 집 거미의 집엔 창문이 많고 창은 모두 비어 있어서
열어놓은 창으로 비가 들이쳤다
도대체 가늘고 긴 거미의 다리가 매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가끔씩 조그만 털이 돋아나는 피부를 쓰다듬는다 그리고 어쩌면 내 편지가 가족을 슬프게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선 위의 거미는 잠시 머뭇거린다
그녀의 손가락은 공중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바람이 몰아오는 비린내 속으로 내 머릿속으로 그녀는 조심스레 손가락을 담근다 담갔다가 다시 뺀다 다이빙 선수의 도약처럼 완벽한 직선이다 저 완고한 자세가 그녀가 보여줄 수 있는 전부일지 모르지만
거미의 집에는 많은 창이 있지만
- 시집〈나를 지나면 슬픔의 도시가 있고〉 문학동네 | 2021 -
혜 화
이 동 욱
사랑한다고 말하고 그녀는 웃었다
성곽 아래,
유목민처럼 바람이 모여 있었다
큰 개를 데리고 다니는 사람들
그녀는 꽃나무에 걸린 팻말을 읽었다
손바닥으로 두드린
낮은 지붕과 담장
계단과 계단 사이에 긴 꽃이 피었다
그곳에서 오래 쉬었다
교차로 횡단보도를 건너다 문득 고개 돌리면
자동차들의 행렬 너머
아득한 구름이
전생을 감추고 있었다
고물상 앞 대로변에서
라면을 끓여먹는 부부
수녀와 경찰관이 나란히 걸어갔다
산책에서 돌아와
작은 우물을 생각했다
돌 사이로 스며드는 지하수
곧은 치열 사이로 파고드는
사랑한다고 말하고 그녀는 크게 웃었다
그녀의 성곽을 통과하는 바람
이미 전생을 각오한 듯,
그녀는 웃었다
- 시집〈나를 지나면 슬픔의 도시가 있고〉 문학동네 | 2021 -
사진 〈Pinterest〉
나를 지나면 슬픔의 도시가 있고
이 동 욱
조금 더 깊이 들어가야 됩니다
그는 앞장서며 말했다
발굴품은 전시실로 옮겼다고 한다
오래전 용암이 꿈틀대던 길을 거슬러
우리는 동굴 깊숙이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굽히고
낯선 한기가 우리를 지나친다
불을 밝히자 어둠이 저만치 물러난다
우리는 그만큼 나아간다
목숨이 그러하듯
길은 막힌 듯 끈질기게 이어졌다
당시엔 아무도 모르는 곳이라 했다
지금은 아무것도 없다
지나온 길을 거슬러
다시 밖으로 나오자 눈이 부셨다
파도소리가 비로소 맥박을 깨우고
새소리는 낮은 구릉의 윤곽을 그렸다
봄볕이 체온을 부추긴다
무엇을 보고 싶었을까
보고 싶은 게 있었을까
돌아본 그곳은
잊은 듯 어두웠다
나는 이내 무심해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네요
그는 담담하게 나를 돌아봤다
밝은 곳에 있으면 어두운 곳은 보이지 않는 법이지요
눈동자가 동굴처럼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