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 5500억 달러 따낸 트럼프, 한국의 1000억 달러 투자로는 불만인가 / 7/25(금) / 한겨레 신문
일본이 미국과의 관세 협상에서 5500억 달러(약 80조엔) 투자 약속 등으로 돌파구를 마련한 가운데 한국의 막판 협상 과정에서도 투자 계획이 중요한 쟁점으로 떠올랐다. 한국 정부는 1천억 달러(약 14.6조엔) 규모의 투자 계획을 마련했지만 미국 측은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정부는 삼성, SK, 현대차, LG, 한화 등 국내 10대 그룹을 중심으로 투자 계획을 취합해 미국 측과 협의할 것으로 24일 전해졌다. 투자액은 합계 1천억 달러 이상의 대규모가 될 것이라고 한다. 우리 정부는 미국이 요구하는 비관세장벽 해소에 호응하면서 구입·투자를 통해서도 관세 인하를 유도할 방침으로 협상에 임해왔다.
이재명 한국 대통령이 잇따라 대기업 총수들을 만나는 데는 투자 문제 등으로 대미 협상의 돌파구를 찾으려는 의도도 깔려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이 대통령은 이날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만찬을 갖고 경제 현안을 논의했다. 이 대통령은 앞서 정의선 현대차 회장, 구광모 LG 회장, 김동관 한화 부회장, 최태원 SK 회장과도 잇따라 만났다.
그러나 상호관세 발효 예정일(8월 1일)이 코앞인데도 협상이 진전되지 않고 있는 것은 일본이 약속한 5500억 달러의 투자펀드가 선례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1천억 달러도 크지만 일본이 그 몇 배의 펀드를 발표해 한국의 협상력을 약화시켰다는 해석이다. 앞서 미국은 일본에 3천억 달러 규모의 펀드 조성을 요구했다는 보도가 나왔었다. 미국은 이후 4천억 달러로 요구액을 늘렸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막판에 5500억 달러로 다시 늘렸다.
그동안 무역불균형과 비관세장벽 해소, 시장개방을 관세협상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미국 정부가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을 상대로 거액의 투자금을 노골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 정부 관계자는 무엇을 더 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통령실은 이날 오전으로 2+2 통상협의가 미뤄지자 이 대통령이 직접 청사 내 은행에 민생지원 소비쿠폰을 신청하는 행사를 취소하고 긴급 대책회의를 열었다.
한국 정부는 일본식 투자펀드 조성도 저울질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블룸버그는 한국 정부가 이를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매체는 이에 앞서 하워드 라트닉 미국 상무장관이 한국에 4천억 달러의 펀드 조성을 제안했으며 한국 정부는 관세율 인하를 이끌어내려고 일본과 비슷한 성격의 펀드 조성을 고려 중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경제 규모가 일본의 절반에 못 미치는 한국에도 미국이 비슷한 규모의 펀드 조성을 요구한다면 그건 지나치다는 게 한국 측의 방어 논리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향후 펀드 조성과 운영 방식을 놓고도 논란이 재현될 가능성이 높다. 전날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정부계 금융기관이 출자, 대출, 대출 보증을 제공'하는 펀드에 일본국제협력은행 등이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발표액만큼의 투자가 이뤄지지 않아 대미 투자에 대한 정책금융 차원의 대출 보증 등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라트닉 장관 등은 펀드 운영을 미국이 주도해 언제든지 자금을 쓸 수 있다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대미 투자펀드를 만들면 국외 투자와 수출을 지원하는 한국투자공사, 한국수출입은행, 한국산업은행, 한국무역보험공사 등이 참여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