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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의 총 제목: 구원의 신비성(메시아 발견의 비결) | |||||||
욥의 질문과 교훈 |
의인의 고난 |
인내의 가치를 배우라 |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 ||||
고난 중에도 도우심을 바라며 용기를 가져라 | |||||||
사람이 죽으면? |
죽음 앞에서 겸손 하라 |
구속자 메시아를 발견하라 | |||||
생명과 죽음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 |||||||
질문의 대답 |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부활하심이 나의 부활이다. | ||||||
의인이신 예수님이 내 죄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심. | |||||||
경험의 계시 |
불가능 |
부귀와 재물로 불가능함 |
힘과 건강으로 불가능함 | ||||
가문과 자녀로 불가능함 |
애정과 아내로 불가능함 | ||||||
지식과 명예로 불가능함 |
두뇌와 지혜로 불가능 | ||||||
의리와 친구 세상 것으로는 불가능함(모두 상실·허무) | |||||||
가능성 |
생활의 경험 |
경건의 가능성 = 인내의 가능성 | |||||
신앙의 경험 |
인간의 죄악과 무능 = 겸손과 감사 | ||||||
아이의 교훈 |
1. 천국 입국의 우선권(마 18:2-5). 2. 기도와 사죄(42:8-10). 3.계시와 순종(42:8).4.회개와 겸손(42:6). 5.중생의 영적 의의(42:5). 어린아이와 같은 새사람은 말씀을 통해 중생한 사람이다. | ||||||
말씀을 통한 계시 |
영적인 새 사람으로 |
자유해방·천국입국 |
기도와 사죄·생사 | ||||
열납과 순종(피) |
회개와 겸손 | ||||||
중생(눈으로 주를 뵈었나이다. 42:5) | |||||||
깨닫게 하심 |
인간의 무지성 |
인간의 유한성 | |||||
인간의 무능과 비천함 |
인간의 죄악 성 | ||||||
말씀의 설교 : 엘리후 |
하나님의 섭리와 진리이신 예수님께 인도하는 하나님 말씀의 권유 |
책 망 의 말 씀 전 함 | |||||
하나님의 통치와 인간이 당하는 환란의 뜻 | |||||||
우리의 구원 앞에 위선과 형식은 무익하고 예수님의 공로가 있음 | |||||||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공의로 시판하시는 하나님 | |||||||
오직 우리의 구원은 중보자이신 예수님! 구속자의 기도 응답 | |||||||
참된 의와 지혜 자는 하나님 한 분 뿐임 | |||||||
말씀의 성격: |
비유로 |
음성과 소리 같이 사랑으로 다가옴. |
모두생명적임 |
욥기의 서론
동방의 우스 땅에 욥을 중심으로 최초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기록하신 내용이다. 이전에는 구전으로 말씀을 받아 믿고 순종했다면 욥을 통해서 말씀을 기록하고 우리로 큰 교훈을 주신 내용이다. 우스 라는 땅은 갈대아와 아라비아의 접경지대에서 유브라데에서 서쪽에 에돔 근처로 볼 수 있다. 그 곳에 순전한 사람이 있다. 신적인 완전히 아니라 인간들 속에서와 잠재적 완전을 의미한다. 동방이라고 말할 때 요단강 동편 쪽에 거주한 이방 사람들을 말하는데 즉 아람(창 29:1) 에돔, 모압과 암몬 사람들을 가리킨다(삿 6:3, 33. 사11:14; 렘49:28).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시려고(욥의 인내를 배우라) 의인 욥을 힘들게 하고 사탄을 시켜 그가 어떻게 시험과 환란을 이기는 가를 확실하게 보여주시며 사탄과 악인들의 잘못들을 드러내시며 의인들이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교훈을 준다.
욥의 친구들이 방문하여 하나같이 의인이 어려움을 당하는 일이 없다를 외치고 그가 회개하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욥은 자기의 순전한 믿음을 앞세우며 하나님의 무슨 뜻이 계심을 강조하고 자기 죄를 고백하지 않은 모습을 통해 인간의 의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잘못된 것임과 보이는 현실을 하나님의 뜻과 계획하심을 보지 못함이 위로가 되지 못함도 교훈하신다. 그러다가 폭풍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욥이 보면서 자기를 낮추며 시험과 환란이 마치고 갑절의 축복으로 맺는다.
욥기 주요 주제들
욥은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아무 이유도 없이 고난을 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삶은 성경에 기록할 만큼 완전하고 순전한 삶을 살았다. 1장 5절에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의 말씀을 보면 존경할만한 믿음의 소유자이다. 이러한 욥이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외국에 사는 친구들이 와서 자기들이 아는 하나님과 섭리를 얘기하며 차례대로 욥을 마음을 돌이키려 한다. 종말론적으로 선과 악을 심판하시는 섭리를 믿고 절대적인 순종과 충성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란 교훈을 제시한다. 욥기 신학을 공부하면서 우리들을 바라보는 기회가 되자.
1. 사탄의 간교함
사탄은 하나님과 욥을 이간시키려는 의도에서 욥을 어려움에 빠지게 했고 할 수만 있으면 넘어지게 하는 악한 세력을 동원하고 있는데 오늘 우리의 삶에도 항상 사탄의 노림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가? 참 잘한 일이며 하늘의 큰 축복이다. 하지만 사탄이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질까를 항상 조심해야 된다. 성도인 우리들을 포기하지 않고 유혹하고 혹은 까닭 없는 어려움이 온다는 것을 알고 믿음에 굳게 서야 한다.
2. 하나님의 주권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절대 주권을 가지신다. 따라서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은 면이 있다할지라도 하나님의 지혜를 믿으며 그 주권을 인정하므로 절대적인 순종이 있어야 한다.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의 태도를 보면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친구를 계속해서 설득하는 모습을 보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섭리 중에 사탄에게 너와 다른 욥과 그리고 재림 때까지 많은 종들에게 욥의 인내를 교훈하고 있음을 보지 못했고, 욥은 인간의 의를 하나님 앞에 내 놓을 수 없는 초라한 모습을 보지 못했다.
3. 의인의 승리
하나님께서는 상선벌악의 하나님이시다. 악은 철저하게 미워하시고 의인을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의인이 고난을 당할 수는 있으나 반드시 승리하게 된다.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런 믿음에 굳게 서 있다면 우리의 삶은 항상 기뻐할 수밖에 없다. 어떤 어려움이 올지라도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으며 그 하나님께서 손을 들어주시는 모습을 생각한다면 삶이 아름답고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세력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말자.
4. 인간 지혜의 한계
시간과 공간의 제한 속에 살아가는 인간으로서는 파악되지않는 신비가 많다. 이는 우리의 생각들이 옳다고 인정하거나 그 판단들이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유한되고 하나님은 무한하시는 분인데 감히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뜻이 옳다고 내세울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시시때때로 우리는 그렇게 산다. 그러나 인간들이 최종적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을 위해서 하늘의 보좌를 떠나셔서 이땅에 오셨고 우리들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로 재림의 소망을 주신 예수님밖에 믿을 자가 없다. 예수님 앞에서는 내 생각이나 내 뜻이 가치 없다는 것을 잊지 말자.
5. 위하여 기도
욥이 잘못된 생각으로 자신을 질타한 친구들을 위해 위하여 기도를 드린 것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중보기도이다. 시편 22편 1절에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 하시 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의 중보기도이다. 마태복음 27장 46절에 “제 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고 했다. 십자가의 고난 중에도 우리들을 구원하시는 분으로서 우리를 위한 중보기도를 잊지 않으시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던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아 위하여 기도 즉 도고의 기도를 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욥기의 구성과 변론의 전개
제 1 장 발단
의인 욥이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평화로운 삶 속에서 믿음을 지키는 모습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욥이 생각할 때 이유를 모른채 여러 가지 시험과 환란을 당하는데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것이었다. 욥기 1장 6절로 2장 10절까지의 내용은 참으로 힘든 상태이고 극에 달했을 때 아내도 그냥 죽으면 억울 할테니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릴 것을 권유한다. 이때에도 욥은 순전을 지키며 주시는 분도 취하신분도 하나님이신데 왜 우리가 흥분해야 되는가? 그리고 마땅히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분임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욥의 친구들이 도착하여 7일 밤과 낮을 함께 울면서 위로해 주면서 욥기서가 전개된다.
제 2장 전개
1차 변론
2장에서 사탄이 욥을 시험하고, 3장에서 욥의 독백으로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면서 전개된다. 그리고 엘리바스가 변론을 한다. 4장과 7장에서 계속 변론하고 욥이 항변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빌닷과 욥의 변론은 8장과 10장이며 소발의 변론과 욥의 항변은 11장과 14장이다.
2차 변론
엘리바스와 욥의 변론으로 15장과 17장이다. 빌닷과 욥의 변론은 18장과 19장이다. 소발과 욥의 변론은 20장과 21장이다. 이렇게 하여 2차 변론과 항변이 마치게 된다.
3차 변론
엘리바스와 욥의 변론은 22장에서 24장이다. 빌닷과 욥의 변론은 25장부터 31장까지이다.
변론 중재
람 족속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화를 내면서 중재한다. 욥에게는 하나님보다 네가 더 의롭다고 함을 부당하다고 지적해 주고 세 친구들에게는 욥의 말에 답변도 못하면서 욥에게 화를 내는 것이 잘못이라면서 지적할 때 답변을 못한다면 정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젊은 엘리후가 객관적인 입장에 서서 1차 변론은 33장이고 2차 변론은 34장이며 3차 변론은 35장이요 엘리후의 중재 결론은 36장에서 37장이다.
제 3 장 절정
하나님의 일차 메시지가 38장 1절로 40장 2절에 직접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욥에게 말씀하실 때 폭풍우 가운데에서 말씀하신다. 내용은 사람이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한다는 것이다. 입으로 맛을 알아본다면 귀로 말씀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욥이 또 1차 답변을 40장 3절로부터 5절에서 하였고, 하나님은 또 다시 2차 메시지를 40장 6절로 41장 34절로 욥에게 선포하신다. 그후 욥이 2차 답변을 42장 1절로 2절에서 한다.
제 4 장 결론
욥기서 42장 6절로 17절에 하나님이 욥의 친구 엘리바스와 두 친구에게 말씀하신다. 그 내용은 욥의 말처럼 너희들이 나를 가리켜 말함이 잘못이라고 하신다. 욥의 친구들은 순종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욥을 기쁘시게 받으신 내용이 42장 9절 말씀이다. 그 후에 10절에서부터 욥에게 복을 주시고 욥이 구한 친구들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
본 론
제 1장 1절로 5절: 욥의 소개
욥을 소개하고 원인을 모르는 가운데 고난을 당하는 중에 친구들과 지켜보는 참관자인 엘리후 앞에서 토론이 진행된다. 그들은 자기들 생각들을 얘기하고 상대들이 어떻게 이해하는가와 어떻게 수용하는지를 탐색해 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그 신비와 인간의 불완전성과 하나님의 궁극적 신실하심에 대한 인간의 순종 요구에 대한 심오한 진리가 들어 난다. 욥기의 핵심 부분은 3장1절로 42장 6절에 긴 변론과 항변으로 구성되었다.
6절로 22절: 욥의 1차 시험
욥을 가운데 놓고 하나님께서는 고난 후에 욥의 신앙의 승리와 갑절의 복을 예비하시고 사탄은 욥의 성숙한 신앙과는 상관이 없고 고난을 통해 변질될 것을 기대한다. 시작은 천상에서 회의하는 모습으로부터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허락을 받은 사탄은 자연과 인간과 질병과 친구들의 쓴 소리 등으로 계속적인 공격으로 욥을 넘어뜨리려고 했다. 동기는 하나님께서 욥을 축복해 주시려고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사탄은 물질을 그렇게 많이 받았는데 믿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형편은 어떤가? 우리는 어떤 복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문제는 영원히 변치 말아야할 신앙의 이유를 세상에 둘 것인가? 예수님 안에서 썩어질 것을 찾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하면서 내 모습을 살펴보자.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들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시험의 이유를 아는 것은 아무나 아는 것이 아니다. 시험이란 우리 앞에 야생 사자나 호랑이를 만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시험을 통해서 깨닫는 것이 있으며 시험을 통해 믿음이 굳건해진다면 축복이다. 시험으로 오는 고통이란 잠간이지만 시험을 이긴 후에 성도가 받을 기쁨은 영원한 것이다. 우리가 시험을 통해서 예수님께로 영광이 돌려질 수 있다면, 그리고 존귀를 얻게 된다면 축복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기쁘게 받아야 할 것이다. 사람이 겪는 고통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고통에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있음을 기억하자(벧전 1:7).
사탄의 시험을 이기려면(1장 11절)
사탄이 인간을 시험하는 목적은 한가지이다. 하나님을 대면하여 욕하도록 만들기 위해 얼마나 심한 재난을 주는가? 물론 하나님의 허락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험한 시험 속에서도 욥이 신앙의 순전을 지키고 승리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이다. 시험을 당할 때는 길고 긴 것이지만 통과 하면 짧은 것이다. 어리석게 원망한다면 시험에 빠지지만 승리하면 영원한 승리이다. 우리의 고난을 보면 힘들고 어렵지만 승리를 기다리시는 예수님을 보자. 우리에 주실 상과 아름다운 면류관을 주시려고 기다리신다. 영광과 존귀를 얻을 때까지 입술과 마음을 굳게 지키자.
2장 1절로 2절: 사탄의 활동
두루 돌아다니는 사탄은 성도들을 괴롭게 한다. 본문에서도 하나님께 허락을 받아 불신자는 믿지 못하게 성도는 시험을 통해 죄에 빠지게 한다. 인간의 약점을 알고 넘어뜨리며(고전 7:5) 유혹이 될 만한 것은 모두 끌어드린다. 또한 하나님의 능력을 모방하여 역사를 일으켜 성도들의 분별력을 잃게 한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 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9절에도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러한 사탄의 활동도 하나님의 허락 속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게 할 수는 있어도 완전히 넘어뜨릴 수은 없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성도를 끊을 수는 없다(롬 8:38, 39).
제 2장 1절로 13절: 질병의 2차 시험
욥에게 사탄으로부터 두 번째 시험이 왔다. 머리에서 발까지 성한 곳이 없는 몸을 친구들이 보았고 아내도 사탄에게 속아서 대립이 되었는데 차라리 죽음을 선택해라고 했다. 일주일동안 참담한 마음으로 울어주었지만 욥에게 위로 자가 되지 못했다. 우리는 지금 누구에게 위로를 해 줄 수 있는가? 말로 위로 받지 못할 고통에 있는 것은 불신자가 예수님을 영접치 못한 것보다 더 큰 고통이 있겠는가? 그들은 세상 어디에서도 위로받지 못하고 천국에도 가지 못할 자이다. 대화중에 상대의 입장을 모르는 사람은 결국 자기 말만 할 뿐이며 아픈 상처를 싸맬 수 없음을 알자.
3장 1절로 26절: 고난에 대한 탄식
본격적인 변론과 항변이 본문부터 42장 6절까지 시작된다. 주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섭리 앞에서 인간의 순종에 대한 긴 변론과 항변이 이어진다. 친구들이 오니 자기 모습을 보면서 친구들에게 자기 생일을 저주하면서 탄식을 한다. 이 저주를 통해 욥이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식으로 14장까지 일차 변론이 이어진다. 우리가 욥이 자기를 저주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면 우리가 어떤 어려움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으로 믿음을 향상시켜야 된다는 결심은 우리의 몫이다. 하나님께서 인정했던 욥이니까 절제했어야 했고, 우리도 나마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나를 포기하면 안 될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의지가 약하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작은 시험에도 쉽게 무너질 수 있는 것이 나라는 것을 잊지 말자. 우리의 주인은 누가 뭐라 해도 하나님이시다. 현대 사회의 잘못된 특징 중에 이기성이라는 것이 있다. 그래서 저마다 자기 입장만 보고 남의 입장은 무시한다. 우리에게는 예수님께서 우리 주인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나의 유익보다 모두의 유익을 구하며, 적은 것이라도 거기에 예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마음을 펼치도록 힘쓰자.
3장 19절: 고용주가 기억할 것
하나님 앞에서는 작은 자와 큰 자가 함께 있고 종과 상전도 함께 있다. 19절에 “거기서는 작은 자와 큰 자가 함께 있고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 했다.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고, 혹은 덜 주려고 밀고 당기는 것이 없다. 예수님이 주인이 되시면 종과 상전이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된다. 고용주가 의와 공평으로 베풀어야 기뻐하신다. 이는 모두의 유익을 위함이다.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됨을 기억하자. 잠언 22장 16절에 “이익을 얻으려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와 부자에게 주는 자는 가난하여 질뿐이니라.” 고했다.
3장 26절: 낙심을 이겨야 한다.
사탄의 계속적인 시험은 욥으로 낙심에 빠지게 하고 현실이 비참하니 출생부터 한탄에 이른다. 극심하게 고난이 가중되는 시험으로 말미암아 자기 존재에 대한 깊은 회의와 좌절로 거의 자포자기 상태에 있다. 욥은 그 고통 중에도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원망하는 등의 불신앙적인 자세는 흔적도 없었다.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도 마음을 다잡고 혀를 지켜서 죄악의 올무에서 자신을 지켜야한다.
4장 1절로 21절: 엘리바스 변론
친구 중에 엘리바스가 욥의 탄식 즉 믿음이 없음을 보고 탄식하면서 생일을 저주하는 모습을 보고 책망한다(1-6). 그리고 이어서 모든 어려움이란 죄를 통해서 왔다고 직언한다(7-11). 그리고 해석을 뒷받침 하는 환상의 인용을 한다(12-21).
5장 1절로 27절: 엘리바스 일차 변론 연장
5: 1절 고난에 대한 자세
고난 당 하는 욥에게 친구들의 말이다. 고난을 받으면 먼저 고난 속에 담겨진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혹 죄에 대한 형벌로 고난이 임할 경우에 자신을 돌아보아 회개해야 한다(고후 7:10). 그리고 모든 시험과 환란은 사탄이 와서 무너뜨리지만 하나님의 허락이라는 것을 잊지 않을 때에 반드시 이긴다는 확신이 온다. 고난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선하시고 의로우심을 믿고 회복을 기다려야한다. 그 고난은 우리를 성숙하게 하고 연단을 받아 정금같이 나오게 한다. 상급을 바라보자. 그래도 힘들 때에는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리고는 욥에 대해서 정죄한다(5:1-7). 정죄 후에는 욥을 향해 회개할 것을 촉구한다(8-27). 엘리바스는 생각에 욥이 범죄 해서 당하는 고통으로 보았다. 그러나 욥은 친구의 얘기를 듣고 정신적인 고통까지 왔다. 엘리바스는 위로를 하기 위해서 타국에서 여기까지 왔지만 욥의 고난을 가중시키고 있다. 하지만 욥은 믿음으로 받은 것은 잘 한 것이지만 자기의 의 즉 인간의 의를 앞세우므로 네 사람에게 충격을 준다. 지금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 보자. 우리가 많은 것을 소유했을 때 욥처럼 당당할 수 있지만, 또 다른 모습의 욥처럼 모든 것을 잃고 악창으로 고통 중에 있는 그 모습에서 순전한 믿음을 잃지 않음을 보자. 어쩌면 우리는 하루살이 인생이라 할 것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천성을 향해서 나아가기 때문에 날마다 죽는다. 혹은 죽으러 가는 것이다. 내일 일이나 내일의 세상이 불완전하여 참된 안식이 없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안식이요 예수님만이 우리 인생의 해답이다.
5장 8절로 27절: 약속 위에 서라
엘리바스는 욥의 고난의 원인을 잘못 해석한 견해이다. 많은 경우에 고통 중에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징계를 통해 복을 주시고 환난을 통해 기쁨을 주신다. 그런데 믿음 없는 눈으로 볼 때에는 죄의 삯으로 당하는 고통으로 보기 싶다. 우리들의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릴 때 약속의 말씀을 굳게 잡고 그 위에 선다면 어떤 시험이라도 반드시 이기고 승리할 것이다.
6장 1절로 30절: 욥의 1차 답변
엘리바스의 변론을 듣고 항변하는 모습이다. 철저하게 자기 합리화를 한다(1-13). 위로를 기대했으나 비난과 책망으로 회개를 촉구하니 욥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일이다. 자기의 고난이란 원인이 하나님께 있다는 주장이다. 하나님의 무슨 뜻이 있으시다고 자신 있게 말하니 친구들에게도 실망이요, 아직도 정신없는 친구 욥에게 문제라고 서로가 자기 생각으로 가득하다. 욥은 내가 승리한다는 것을 친구들에게 각인 시킨다. 무죄한 데서 온 고난이라고 한다(9-10). 절망 속에 있는 욥이 믿음 하나로 정금 같이 나올 것을 보고 있다. 그리고 자기변호에 빠르고 더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우리가 욥처럼 고통 가운데 있고 아무도 위로해 주지 않을지라도 예수님 사랑과 예수님의 위로로 만족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7장 1절로 21절: 욥의 호소
욥의 항변에는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호소가 있다. 인간의 허무함을 말하고(1-10), 자신을 향해 하나님의 징계가 끊임없이 내리는 현실 앞에서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과(11-19), 혹여 죄를 범했을지라도 용서해 주셔야 한다는 고백이다(20-21). 이는 원망과 불평보다 구원의 확신과 소망에 찬 신앙의 성숙이다. 그러나 이런 믿음이 친구들에게는 신랄하게 욥의 죄를 책망하는 원인이 된다. 우리가 고통 중에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도 원망하지 말자. 서로가 서로에게 용서를 구하는 세상을 만들어보자.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모든 소유의 개념은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화목 제물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불평불만 멀리하고 화목하면서 하나님의 약속과 섭리를 의지하면서 모든 일에 감사하자.
음부의 개념
원어로 스올이라 하는 음부를 구약시대에 선인이나 악인의 구별이 없이 가는 곳이라고 했다. 즉 망자가 가는 곳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 후 신약에 와서는 구분을 했는데 성도는 낙원으로 간다. 그리고 스올은 악이니 심판 받을 때까지 머무는 장소로 이해한다. 이처럼 음부의 개념이 구약시대보다 신약시대에 더욱 명확히 규정되었다. 구약적으로 스올은 어둡고 그늘진 곳(시143:7)이다.
8장 1절로 22절: 빌닷의 변론
빌닷은 정통적인 원칙론에 입각해서 도덕주의로 하나님의 공의를 강조한다. 특별히 사곡한 자라는 표현을 하면서 벌을 받고 순전한 자로 표현된 의인에게는 복을 받는다고 했다. 빌닷은 흑백논리로 욥을 공격했다(1-7). 그리고 위로부터 내려오는 전승의 인용으로 8절과 10절에서 공격하고, 공의에 대한 자연의 증거로 11절로 19절에 왕골 갈대 새 순 풀 등을 들었다. 20절로 22절에서는 인간에 대한 정죄는 유일한 심판자가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심히 인본주의적이고 악하며 교만한 일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에게 만일 고난이 있다면 그 고난을 극복해야 할 것이며 극복한 자에게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들이 예비 되어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축복이 없다면 고난 같은 것이 없다고 생각해보자. 만일 고통이라는 고난만 보인다면 축복들이 점점 작아질 것이다.
고난에 대한 오해
빌닷의 말에 의하면 욥의 고난은 필시 죄의 삯으로 임한 것이다. 그러나 의인에게도 고난이 온다는 것을 보이신다. 이러한 고난은 더욱 성숙한 신앙인으로 연단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빌닷의 지식이 얼마나 짧으며 또한 도식적인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도 빌닷 처럼 고난 받는 이웃을 내 판단으로 정죄한 일이 있는가를 살펴보자. 우리는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고통 속에 축복을 바라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9장 1절로 35절: 욥의 항변
자신을 정죄한 빌닷에게 반론을 제기할 때 오류에 빠진 빌닷의 흑백논리 앞에서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모든 사람들이 의를 주장할 수 없다고 하며 보다 발전된 신앙적 견해를 보인다(1-2). 특히 고난의 원인을 몰랐던 욥은 의인과 악인을 동일하게 취급하시는 하나님이 아닌가? 라고 잘못된 공의를 말한다(22-24). 본장이 완전한 욥을 소개하는 것은 아니다. 고통의 순간에도 점점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신앙의 성숙 과정을 보이신다. 하늘에 있는 천군천사들이 어떤 사람을 위해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 주었을지라도 그 율법에서 의가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 안에서 나온 것이다. 예수님께서 주신 믿음 안에서 자기 부인과 예수님을 의지함이 중요하다. 오염치 않은 믿음으로 나타나자. 30절에 “눈 녹은 물로”라는 말씀은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물을 말한다. 맑고 깨끗함을 유지한다면 항변은 없어도 된다.
성경적인 복
일반적으로 복을 부와 장수로 본다. 성경에서는 복의 근원이신 예수님이 복이시다. 그러므로 복이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진행될 때이다. 구약에서는 현세적인 것으로 보이시고 신약에서는 신의 성품에 참여가 복이다. 구약에서 천국과 내세에 대해 말을 아낌은 현세에 비춰서 내세를 보게 함이기 때문이다. 천국의 모형을 사모하라는 것을 지나 신약에서는 영적인 복을 더욱 사모하라고 가르친다. 구약에서 보였던 풍요와 안식이란 신약에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풍요와 안식이 보장된다는 교훈이다.
10장 1절로 22절: 고난에 대한 욥의 호소
욥은 무슨 죄가 있나요? 이 고난은 무슨 뜻인가요? 라고 죄없다는 생각 때문에 자신에게 임한 고난에 대해 하나님을 향하여 항의와 호소를 한다. 1절로 7절에서 이유를 질문한 후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상기시킨다(8-13). 그러다가 14절로 22절에서 하나님을 원망한다.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하나님께 우리 모습을 당당하게 보여줄 수 있는 담대함이 있는가? 혹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하는데 방해하는 요소는 없는지가 의문이다. 우리의 중심을 분초마다 보고 계신 하나님! 그분께서 우리에게 지금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호소보다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는데 힘쓰자.
11장 1절로 20절: 소발의 1차 변론
소발은 교리주의자이다. 학문이 높은 인물로서 욥이 무죄하다는 변호에 너는 하나님 앞에 불경건하다고 비난하며(1-6), 하나님의 섭리와 심판을 교리적으로 설명하고 욥의 항의를 반박한다(7-11). 그리고 회개와 그에 따른 축복을 욥에게 전하므로 간접적으로 욥을 정죄한다. 다른 친구들과 같이 고난의 근본적인 원인이 하나님 앞에 숨기려는 죄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욥의 회복을 위해서 회개를 강력하게 촉구한다. 그러나 틀에 박힌 공의 즉 선한 자에게 상을 주시고 악한 자에게 벌을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자기는 인본주의의 모습을 노출시킨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로하고 싶을 때 그 사람의 마음과 맞지 않을 때 오히려 상처를 입힌다는 것을 잊지 말자. 특별히 비난까지는 하지 말아야 한다. 왜 비난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 우리는 똑 같은 죄인이기 때문이요. 우리들도 불완전하며,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소발은 12절에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 그의 출생함이 들 나귀 새끼 같으니라.”고 비난했다. 이 뜻은 완고하고 거친 인간이란 뜻이다.
죄보다 경한 벌
하나님의 벌하심이 우리들의 죄보다 경하다는 이론으로 욥에게 질책한다. 목소리를 높인 것은 우리 들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단 한 번이라도 우리의 지은 죄의 값대로 벌을 내리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죄의 값이 사망이라는데 참으로 가슴 떨리는 일이다.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돌보시고 관대하신 사랑으로 구원하신다. 징계를 하실지라도 멸망이 아닌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큰 축복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들의 죄 값보다 가볍다는 것을 안다면 벌이 달콤한 설탕일 것이다.
12장 바람직한 상담
욥의 친구들이 먼 길을 왔고, 하나같이 친구를 위로하고자 힘쓰지만 결과는 변론을 하는 모습을 계속적으로 보여준다. 본 욥기를 통해서 신앙 상담은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상담은 신앙 경험과 지식이 풍부해야 한다. 이는 상담을 청한 자의 상황과 형편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크라이언트가 자신에게 처한 문제들을 편하게 얘기할 수 있도록 받아 주어야 한다. 상담에 들어가면 표면에 나타난 문제 외에 내면에 있는 근본적인 문제까지 발견하여야 하고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문제 앞에서도 앞으로 상담자를 찾기보다 해결하면서 다를 사람도 상담할 수 있도록 함이 바람직한 상담이다.
12장 1절로 13장 19절까지: 소발에 대한 욥의 답변
친구들이 자기의 형편과 처지와 하나님 앞에 바르게살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 자기 모습을 외면하면서 주관적인 논리로 자신을 정죄하는 세 친구에 대한 동시적인 반론이다. 소발에게만이 아니다. 이는 욥이 나도 하나님에 대해서는 너희만큼 알고 있는데 너희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혜가 극히 독선적이며 오류가 많다는 것이다(1-12).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과 지혜와 능력을 13절로 25절까지 설명한다. 편협하고 어리석음을 비난하고 오히려 잠잠할 것을 요구한다. 욥의 이 말로 인하여 세 친구의 갈등은 심각한 대립의 양상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고난에 대한 해석 차이에서 비롯된다. 즉 고난이란 무조건 죄의 삯이라는 도식과 고난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고 연단이나 축복일 수 있다는 생각이 합의를 보지 못하고 자기들이 옳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욥은 6절에서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자는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의 손에 후히 주심이니라”고 말하면서 해석을 요하는 것이다.
인본주의 판단의 근거: 세상 끝 날에 선과 악은 분명히 하나님에 의해 심판될 것이지만 세상에서의 이에 대한 판단은 극히 인간적이며 한계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사악함: 의인은 하나도 없고 모두 죄인뿐인 이 세상에서 죄인은 벌을 주시고 의인에게는 복을 주신다는 이론이 성립되지 않다는 결론이다. 모두가 죄인인데 누가 의인인가? 그러니 너희들이 구원의 섭리를 어떻게 알겠느냐는 것이다.
논리의 교만 성: 크시고 오묘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판단을 획일적으로 아는 유한된 인간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이런 자는 이렇게 저런 자에게는 저렇게 하신다는 짧은 지식을 버리고 피조물로 내려오라는 것이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갑론 을론 하는 것 자체가 교만이다.
13장 1절로 19절: 잠잠함의 지혜
슬기롭게 보는 눈
본문 욥기 13장에 친구들이 그동안 모든 것을 동원해서 욥에게 권고하고 비난하는 얘기를 듣고 욥이 항변하는 내용이다. 욥의 항변을 한마디로 말하면 그 정도의 지식은 나에게도 있다는 식이다. 하지만 그 지식으로 시험과 환난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욥은 이해되지 않은 현실을 볼 수 있는 슬기로운 눈을 원한 것이다. 즉 절대주권으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보면서 고난을 통해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은 것이다.
13장 이해하려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하나의 혀와 두 개의 귀를 준 것은 말하는 것만큼의 두 배를 듣게 하기 위함일 것이다. 즉 지혜가 없는 사람은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이 대단한 지식이라고 착각을 해서 그 것을 아무에게나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적절한 때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잠잠함의 지혜는 하나님께서 여러 성경에서 자주 말씀하신다. 잠잠할 이유는 먼저 남의 말을 듣기 위해서이다. 미련한 사람은 자신을 돌아보지 않은 상태에서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만 성도는 잠잠히 주의 깊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타인의 말도 자기를 돌아보면서 듣게 된다(약 1:19). 그리고 잠잠할 이유는 유익함을 위함이다. 한번 말을 했다면 취소할 수 없다. 그래서 신중하게 서로에게 유익이 될 수 있는 말만을 골라서 언어생활을 하자.
13장 20절로 22절: 고난보다 두려운 것
욥은 지금까지 까닭 없는 고난으로 인해 원망과 항의를 해오다가 본문에서 갑자기 그 태도를 바꾸어 큰 두려움으로 하나님께 두 가지를 간구하였다. 그 중 하나는 하나님의 위엄으로 자신을 두렵게 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부르짖음을 외면하시지 말고 응답해 주실 것을 간구한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이 세상의 핍박이나 고난이나 악한 세력들이 아니라 천지만물의 주재자 되시는 하나님의 위엄과 하나님께서 침묵하신 것이다. 이는 불신자가 가질 수 없는 성도의 특권이며 이 특권이 있는 자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면서 축복하는 것이 특권이다. 오늘 욥이 처한 하나님의 침묵은 섭리가 있어서 오는 것이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죄 때문에 오는 무서운 결과인데 이런 일이 오지 않도록 분초마다 자신을 돌아보자.
13장 20절로 14장 22절: 욥의 간구와 호소
엘리바스와 빌닷에 대한 항변은 원망과 항의의 성격이 강하지만 소발에 대해서는 간절한 애원의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친구들 앞에서 자기 의를 완고하게 주장하던 욥이 하나님의 위엄 앞에 두려움으로 간청하고 있다. 욥이 고난을 받는 중 어렵고 힘든 고난은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심이었다(14:1∼12)
본문에서 욥은 인생이 허무함을 깨닫는다. 자기의 연약함과 이를 주관하고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지금 너무나 힘 든다는 것을 호소하고 있다. 사후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14:10-15). 우리들에게 적용해보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독생자를 주시는 사랑이시다. 그리고 세상 모든 만물보다 사랑하는 사람이고 만물을 주시고 다스리게 하시고 구원까지 선물로 주시는 분이신데 왜 고난이 있을까? 지금 나는 어떤 고난에 있는가? 그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면 어떻게 받아야 하고 그 뜻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셨다. 감당하기 어렵다고 말하기 보다는 시험을 통해서 나쁜 버릇을 고치거나 바른 신앙생활에 전진하자.
시험을 이기는 비결 중에 인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내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을 살피고, 하나님께서 언제 시험을 거두실 것인가의 시기를 기다리자. 조급하거나 서두르지 말자. 마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에게는 시간이 더딘 것처럼 느끼지만 오래토록 침묵하시면서 만민이 회개하기를 기다리는 주의 선한 뜻을 바로 분별하여 인내하자.
15장 1절로 35절: 엘리바스의 2차 변론
15:1-6절: 욥의 변론에 나타난 문제점은 욥과 친구들 간의 변론에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고 계속 변론만 거듭된다는 것이다. 그 원인 중 첫째는 욥의 친구들은 세상사를 심은 대로 거둔다는 법칙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굴뚝에 연기는 불을 피울 때만 나타난다는 것이다. 사탄이 불을 피울 수 있음을 알지 못함이다. 욥도 마찬가지이다. 무죄한 자기가 어떻게 이런 고통을 당하는가이다. 의인에게 고통을 주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이다. 욥기 28장 8절로 13절이 욥이 사는 삶이다.
본문부터 21장 34절까지는 친구들과 두 번째 논쟁이 전개된다. 엘리바스가 1차 변론과 다른 것이 없지만 더욱 강경하게 격앙된 감정으로 신랄한 비난과 정죄를 한다. 욥을 지혜 없는 자와 불의한 인간으로 판단하여 옛 사람의 전통적인 도덕률에 근거하여(14-19) 공격한다. 그의 논리는 죄의 결과라는 것이다(20-35) 물론 보편적인 인간들에게 옳은 견해이지만 친구들이 모르는 하나님의 섭리가 욥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우리가 무심코 하는 대화중에 하나님의 섭리를 보지 못하고 단죄하거나 율법주의자들과 같이 자기를 보는 시간은 없고 남을 보는 시간만 있음을 인정하자. 교회 중직 자가 범죄 한 사실 때문에 고민에 빠진 적이 있는가? 그 일과 배후에 하나님께서 사건을 붙잡고 계신 것을 인지하고 감사했는가? 이 모두가 우리에게 주신 은혜일 것이다. 하나님이 보응하시는 원리 중에 행한 대로, 믿음대로, 말씀대로 심판하시지만 중심을 보시면서 행하신다. 대표적인 예로 니느웨를 심판하신다던 하나님이 구원하셨는데 이는 그 백성들의 중심을 보신 것임을 잊지 말고 섭리에 무조건적으로 따를 준비된 우리로 만들어 가자.
16장 1절로 17장 16절: 욥의 2차 답변
16장 1절로 6절: 위로자의 입이 열리며 말하기를 시작했으나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심한 고뇌와 비참함 가운데 빠져들게 되었다. 사람이 원죄가 있기 때문에 실상 위로한다고 해도 순수하게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기에 자기의 생각과 기준으로 판단하면서 힐난하기 쉽다. 진정한 위로 자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오 우리를 돌보시고 항상 이해하시고 책임지신다. 그는 창조주시오 우리의 생리와 체질의 어떠함을 아신다(시 103:14). 우리의 어떤 형편과 처지도 확실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분이기 때문에 진정한 위로자이다. 그러므로 위로받기를 원하는 자에게 사람에게서 돌이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께로 인도하여 예수님을 바라보게 해야 할 것이다.
친구들이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원칙론에 입각해서 차갑고 까칠하게 공격함에 대해 마음에 상처를 받고 채념한 상태로 답변을 한다. 1절로 5절까지 친구의 변론에 대한 불평, 6절로 17절에서는 자기 형편과 처지에 대한 절망, 18절로 17장 5절까지는 자신의 무죄함에 대한 증인을 하나님께 호소한다. 이 때 엘리후가 무슨 말을 할 수 있는데 그도 또한 침묵한다. 그는 세 친구들의 싸움이 절정에 이르자 욥에게는 하나님 앞에 인간의 의를 내세울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친구들에게는 욥의 말에 답변도 못하면서 무슨 말이 많은가로 문제를 풀어 나간다. 그가 처음부터 동석했지만 침묵하는 모습은 정말 존경스럽다. 다섯 명의 인물들은 우리로 많은 것으로 보답한다. 그리고 17장 6절로 16절까지 욥이 자기 현실에 대한 답답함을 호소한다. 친구들처럼 욥도 더욱 격앙된 감정으로 자신의 무죄함을 말함은 이제 너희들을 통해서 위로받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가 고난 중에도 신앙을 잃지 않으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탁월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우신다. 욥이 하나님께 중보자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증인을 달라고 호소한다. 디모데전서 2장 5절에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예수라.”고 하셨다. 그 중보자를 욥이 원하고 있다. 즉 예수님은 내 맘을 아신다는 것과 같다. 참담한 욥의 마음에 무덤에게 아버지, 구더기에게 어머니, 내 자매라고 할지라도 나의 희망이 어디 있으며 나의 희망을 누가 보겠느냐? 14절 15절에서 밝힌다. 우리가 누구를 위하면서 원리원칙을 따라갔다면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확실하게 배우고 실천하자. 데살로니가 2장 11절을 보면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라고 했다. 어떤 죄도 용서하는 마음으로 위로해야 된다. 상대의 사정을 잘 살피고 부정적인 말을 삼가면서 마음을 편하게 위로해야 할 것이다.
18장 1절로 21절: 빌닷의 2차 변론
빌닷도 감정의 동물이기 때문에 엘리바스처럼 더욱 격앙된 어조로 욥을 신랄하게 비판한다(1-4). 악인들에게 닥치는 고난들을 열거하면서 욥에게 경고와 정죄를 하면서 악인의 길은 파멸의 길로 정해졌다고 한다. 종말론적인 것을 현재 진행중인 욥에게 적용한다. 빌닷은 욥의 미련한 마음을 비유컨대 올무에 뛰어든 사나운 짐승으로 표현한다. 너에게는 아직도 더 많은 재앙이 있음을 분노한 감정으로 정죄한 빌닷에게서 다정한 친구! 보고 싶은 친구! 생각만 해도 마음이 편해지는 모습이란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불신자들이 받을 심판을 알고 있다. 그들에게 가장 큰 위로는 예수님의 품에 안기는 것이다. 우리 자녀들도 살펴보자. 말씀으로 양육되며 누구에게든지 위로할 수 있는 자로 성장했는가?
19장 1절로 29절까지: 빌닷에게 욥의 답변
19장 1절로 6절: 고난의 원인과 목적
빌닷이 보는 욥은 당하는 고난이 죄의 결과로 여기고 있는 친구의 말이다. 여기에 욥이 답변이 본문의 내용이다. 즉 네가 말하는 죄를 범한 일이 없다는 말이다. 즉 죄가 없는데 하나님의 무슨 뜻이 계셔서 일어난 고난으로 이해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율법에 불순종은 고난이라 하는데 욥은 성문율법이 있기 전에 사람이다. 욥은 죄가 없기보다 무슨 뜻이 있을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연단을 목적으로 오는 경우인데 욥과 같이 성숙된 신앙으로 승화된 고난이 있다.
1절로 6절에 친구들의 무정함을 책망하면서 나의 고난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다시 고백한다(7-12). 그리고 13절로 22절에 힘들고 외롭고 고통스런 내 처지에 대한 동정심을 눈물로 구하고 있다. 나 같으면 다시는 말도 안하고 싶지만 욥의 위대성이 이렇게 크고 놀라운 것이다. 친구들이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몰라서 그렇게 말한 것을 이해하고. 너희들도 나를 있는 그대로 보면서 불쌍히 여겨준다면 독설은 없을 것을 기대한 것이다. 그러면서 욥이 멀리 하늘을 보면서 구속자이신 예수님을 향하여 눈을 뜬다. 23절로 29절에 구속자만이 유일한 자기의 소망이었다. 친구는 번뇌케 하는 자요 학대하는 자이지만 예수님은 구속자이다. 욥은 친구!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고난이 내 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밝히고 싶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알아 줄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이 모두가 실패하자 변호인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향한 성숙된 믿음의 소유자가 된 것이다. 당시에 구속에 확신과 부활에 대한 확신은 대단한 믿음이다. 욥기 서를 보면서 고난에 처한 친구들을 위로할 때 형식에 얽매이지 말자. 사랑보다 앞세우지 말자. 위로하는 것 보다 다른 생각을 금하자. 참다운 친구가 누군가? 항상 함께하는 친구! 목숨까지 내어 주는 친구! 예수님밖에 없다.
20장 1절로 29절까지: 소발의 변론
소발이 자기 성찰을 하는 듯한 어투로 접근한다. 그러나 5절에서 욥을 악인으로 몰고 간다. 11절까지 악인의 허무함을 얘기한다. 12절로 19절까지는 악인이 파멸하는 것이 필연적인 것을 말하므로 상처를 내고 있다. 그는 자기 말로 인하여 욥이 위로를 받는다고 생각하거나 크게 깨달아서 자기에게 감사할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친구이고 옳은 말을 했으니까 이다. 신나게 얘기하던 소발이 20절로 29절에서는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법을 얘기한다. 소발이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는 박식하지만 욥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음을 보여준다. 배고픈 자에게는 밥이 먼저이지 왜 일을 안했느냐? 가난이 뭐가 좋아서 친구를 삼았느냐? 부자가 되어라 는 것은 나중 일이다. 그런데 친구들은 가난하면 이 모양이 된다는 말과 같다.
21장 1절로 34절까지: 욥의 답변
악인으로 보는 소발에게 이유를 모르는 고난을 당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말하고 그 답답한 마음을 호소하면서 나는 죄가 없어야 라고 무죄를 주장한다. 그리고 소발의 변론에 구체적으로 답변을 할 때 왜 세상에서 악인이 형통하는가에 대해서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7절에 생존하며 장수하며 강하냐? 후손들이 굳게 섬이 무엇이냐, 이 나쁜 놈들아,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욥이 불 신앙적으로 하나님의 공의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다. 친구들의 오해가 악인의 고난과 자기의 고난이 같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적함이다. 그리고 공의는 종말론적이라는 것이다. 종말에는 나쁜 사람들이 공의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지금은 종말이 아니니까 공존하고 있다. 예를 들면 도적이 훔치는 것은 종말이 아니다. 종말은 훔치는 동시에 심판이 임하여 범죄가 성립되지 못한 것이 심판이다.
22장 1절로 30절까지: 엘리바스 3차 변론
엘리바스가 변함없이 욥의 죄를 지적하면서 1절로 20절까지 비난한다. 그 후 30절까지는 욥에게 네가 살 길은 회개밖에 없다는 식으로 회개를 촉구한다. 회개를 돕기 위해 죄목을 알려준다. 마치 욥이 범죄 했을 때 옆에서 보았던 것처럼 목격자의 위치에서 지목한다. 우리가 들어야 할 엘리바스의 얘기는 우리가 회개할 때 하나님의 응답이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고난을 받음이 죄에 대한 대가라고 한다면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자가 누군가? 로마서 3장 23절과 6장 23절에 의인은 없고 죄의 삯은 사망이라 했다. 고난을 통해서 더욱 의롭게 되기를 원하시는 선하신 뜻을 분별하고 살아가자.
23장 1절로 17절: 엘리바스에게 욥의 답변
욥은 너희들의 판단해도 나는 무죄한 자이니 하나님의 심판 때까지 두고 보자는 것이다(1-9). 17절까지는 이 모든 섭리를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고 계신다는 것이다. 욥은 누가 뭐라 해도 나는 마지막 하나님의 법정에서 문제가 해결될 것을 소망하고 있다는 확고한 신념이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의 고난을 죄에 대한 징계나 심판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속에서 바라보며 그분의 선한 뜻을 믿고 기다리고 있으며 후에는 자기를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정금같이 되리라고 힘주어 말한다. 우리에게는 이런 면과 죄의 결과로 보면서 회개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베드로전서 1장 7절에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고 했다. 야고보 5장 11절에는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했다. 우리가 애가 타도록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다면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그런데 이미 응답했음에도 알지 못해 기도할 수도 있다.
24장 1절로 25절: 악인의 죄와 하나님의 섭리
1절로 16절에 악인의 죄악상에 대한 언급과 그 속에서의 하나님의 섭리와 최종적인 심판이 17절로 25절이다. 본문을 통해 자신의 고난이 악인의 고난과는 전혀 다름을 확실하게 주장한다. 그리고 두 가지를 더 보여주는 악을 미워하는 자신의 의로움과 미래에 임할 하나님의 공의라는 심판을 기대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의할 것은 하나님이 주신 악인의 형통이 그 행위를 인정하심이 아니요 방조하심도 아니라는 점이다.
25장 1절로 6절: 빌닷의 3차 변론
세 친구의 마지막 변론으로서 마음에 변화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지금까지는 욥의 잘못을 신랄하게 정죄하였다면 본문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인간의 비천함을 비교하면서 간접적으로 욥이 악하다고 슬며시 암시한다. 구더기나 벌레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 엎드려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라는 암시이다. 심은 대로 거둠의 법칙으로 마친다. 우리의 선이 다른 형제보다 낫고 다른 사람보다 흠이 없다고 생각하는 삶은 잘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 앞에 서는 것이 아니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다는 사실을 잊어 버리면 안 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자기성찰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기 때문이다. 여기서 먼저는 피조물임을 알아야 하고, 다음은 죄인임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죄인이 구원을 받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하기 때문에 높으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26장 1절로 14절: 빌닷에 대한 욥의 대답
빌닷이 말한 하나님의 위대성을 그대로 받아 더욱 자세한 하나님의 위대성을 열거함으로써 오히려 역설적으로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욥은 우주에 가득한 영광과 권능과 위엄을 바라보며 찬양하고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창조하신 사역에 경의를 표한다. 그러니까 빌닷이 막연하게 말했다면 욥은 구체적으로 얘기한 후에 간접적으로 자기변호를 한다. 이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극에 달한 고통 가운데 신앙을 지키고 자세를 낮추면서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 중에 최고는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지식인 것이다. 신지식이란 성도를 바른 신학으로 이끈다.
27장 1절로 23절: 욥의 첫 번째 독백
본장에서 31장까지는 욥이 세 친구들의 변론을 끝내면서 혼자 말이다. 성숙되어가는 신앙 과정을 나타내는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1절로 12절에서 자신의 의를 호소하고 13절로 23절에서 악인에 대한 궁극적 심판을 말한다. 비록 친구들에게 자신의 의를 주장하는 신앙적 한계를 드러내기는 했으나 이제 자기 의를 고집하지 않고 고난 속에서도 자신의 의와 순전을 지키며 인내하였다. 그리고 악인에 대한 3가지로 정의할 때 12절로 15절에서 후손이 희생되고 망함과 16절로 18절에 재물이 없어지며 19절로 23절에 비웃음을 삼고 고결한 삶을 살기 위해 고난마저도 끝까지 인내할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복 있는 자로 정의한다. 욥이 친구와 공감하는 일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다. 틀린 점은 친구들은 심은 대로 거둔다는 법칙을 욥에게 적용하는 것과 하나님의 뜻과 섭리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있다는 것으로 입장이 달랐다. 우리의 허물을 생각하면 사람들 앞에서 무엇을 자랑할 수 있을까? 불완전한 자신의 의인가 아니면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예수님이신가를 분명하게 해야 한다. 로마서 3장 28절에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고 했다. 세상에 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고 우리의 생명이나 자녀도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가진 것이 있다면 예수님뿐이다.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말씀을 실천하는 선한 행위가 있을 것이다.
28장 1절로 28절: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찬양
본문은 보석을 찾는 작업에 대하여 설명한다. 보석은 지혜이며 명철이다(1-11). 필요를 따라서 흙에서 그리고 돌에서 지하자원들을 찾는 것이다. 이는 영적으로 지혜와 명철을 동원해서 흙인 우리 몸에서 좋은 생각과 좋은 분을 모시는 것이다. 곧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최고의 명철이다. 그 어떤 것보다 고귀한 지혜의 설명이다(12-19). 그리고 지혜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증거 한다(20-28). 욥은 자기의 고난을 채광업자들이 온갖 고난을 통해서 채광작업의 어려움을 말하면서 끝까지 찾아내어 소유하는 인간의 인내력을 강조한다. 하지만 지혜는 이런 방법으로 찾을 수 없는 것은 근원이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모시고 신의 성품에 참여자가 지혜를 얻을 것이다. 이 지혜는 악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경외함을 교훈한다. 우리는 지혜와 명철을 어디에서 구하는가? 이 강단에서 구할 수도 있지만 유한한 인간이 만들어낸 세상의 지식이 완전한 지혜와 명철을 재공하리라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잠언 9장 10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했다.
29장 1-25절: 과거의 축복을 회상하는 욥의 마지막 말
29장에서부터 31장까지 욥의 독백이다. 27장과 28장의 독백은 친구에 대한 반론적인 성격이 강하고, 본장부터는 자신의 무죄한 고난을 호소하는 독백이다. 즉 고난에 대한 욥의 심경이 또다시 토로되고 있다. 29장에서는 고난 전의 유복한 모습, 30장에서는 현재 고난 받는 삶의 모습, 31장에서는 욥의 무죄함을 호소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본문에서 고난 이전에 누렸던 번영과 축복을 회상하고 있는 욥은 먼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호보하심으로 축복된 생활을 하였다고 고백한다(1-6). 그리고 축복을 받았던 시절에 자신이 소유를 이기적으로 사용치 않고 선한 사업에 사용함과 많은 이들의 칭송과 존경을 받았었다(7-25). 이는 욥이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은혜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친구들의 주장이 잘못되고 자기는 의인이라는 것이다. 욥의 친구들을 보면서 우리의 주변에 있는 친구들을 생각해보자. 어려움에 처할 때 우리의 편이 될 친구가 얼마나 있는가? 본장에서 교훈 받을 것은 물질에 관한 것으로서 하나님께로 왔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용한 점이다. 가장 바람직한 관리는 하나님께 드림이요 그리고 선한 일에 사용함이다.
30장 1절로 31절: 현재의 고난에 대한 호소
욥은 본장을 통해 화려했던 과거에 지금의 현실을 비교하면서 철저히 고난을 얘기한다(1-15). 참을 수 없는 고통의 괴로움에 대한 호소(16-19)와 부르짖어도 침묵하시는 하나님(20-23)과 무죄한 자기 고통에 대한 억울함의 호소(24-31)로 구성되어 있다. 욥이 겪는 육신의 악창에 대한 고통과 정신적으로 당하는 고통까지 당하고 있다고 호소한다. 욥의 비통한 표현과 고난을 볼 때 원망과 불평으로 이어질 것 같지만 욥은 주신 자와 취하신 자가 여호와이심을 고백한다. 힘겨운 현실에서 그는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기를 소망하고 있다. 여기서 일체되는 것은 심은 대로 거둔다는 법칙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친구는 똑 같은 법칙으로 죄를 회개하며 재촉하고 욥은 좋은 것을 심었으니 복이 임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26절에 “내가 복을 바랐더니 화가 왔고 광명을 기다렸더니 흑암이 왔구나!” 와 31절에 “내 수금은 통곡이 되었고 내 피리는 애곡이 되었구나!”하면서 고통을 당하는 이유를 모른 채 신음하고 있다.
31장 1절로 40절: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한 욥
욥은 1절로 15절까지 개인생활의 순전을 알리고 16절로 23절에서는 이웃과 형제에 대하여 베풀었던 선행을 말한다. 이 모두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으로 이어짐을 24절부터 40절이다. 욥이 자기의 의로움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근거로 삼고 있으며, 이러한 욥의 신앙은 이웃에 대한 사랑과 자비로 발전되어 나갔던 것이다. 특히 구약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보응하는 사상을(29-30) 뛰어넘는 원수에 대한 욥의 사랑은 하나님의 공의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으로도 인식한 수준 높은 신앙의 결정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여기서 욥은 자신의 의를 변호하는데 있어서 스스로 판단 받기를 자청하는 표현을 함으로 자신의 의에 대한 분명하고 자신감을 나타내고 있다(8, 40). 특별히 6절에 “하나님께서 나를 공평한 저울에 달아보시고 그가 나의 온전함을 아시기를 바라노라”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는 자는 하나도 없다. 신앙이 성숙할수록 영적인 교만에 빠지거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섬기게 된다. 넘어진 자들은 사람의 눈으로 봄으로 더 많은 죄를 범하게 된다. 우리가 욥보다 더 높은 수준의 신앙을 생활화했을지라도 우리의 장점을 내 입으로 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32장 1절로 22절: 엘리후가 욥의 3 친구에게 1 차 변론
본장에서 37장까지는 욥과 세 친구들의 싸움에 중재자로 엘리후가 처음부터 듣고 본 바를 생각하면서 4의 변론을 전개한다. 중재자가 볼 때 3 사람은 심은 대로 거둔다는 법칙을 벗어나지 못했고, 욥은 자신의 의로움과 어떻게 하든지 무죄함을 밝히고 싶은 교만한 자로 생각되어서 중재를 한 것이다. 엘리후의 중재의 노력은 편협한 인본주의적인 논리와 하나님에 대한 성숙한 신앙 지혜를 연결시켜 주는 중재이었다. 큰 틀에서 보면 엘리후는 심은 대로 거둠이 종말론적인 심판과 하나님의 긍휼에 의한 구원의 소망을 확신하는 것이며, 고난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고 연단하시는 중임을 인정하지만 본문에서 욥을 향하여 현재적 상황에 대한 이해와 사랑 없이 무죄함을 주장하는 욥을 신랄하게 정죄했다(35:8). 욥이 비록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며 약간의 불평을 했으나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목숨을 걸고 지킨다는 것을 위로하며 욥의 마음을 풀어주지 못했다. 여기서 배울 점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 앞에서는 누구도 자신을 내세울 수 없다는 것이다. 엘리후는 6절로 10절에서 어른 즉 연륜이 많은 자가 가르치라고 했지만 사람 속에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있는 자에게 깨달음을 주시니 내가 말하겠다. 로 중재를 시작한다.
32장12절에 “내가 자세히 들은즉 당신들 가운데 욥을 꺾어 그의 말에 대답하는 자가 없도다.” 라고 했다. 15절에 세 친구들이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힘주어 내가 사람에게 아첨하는 말이면 하나님이 자기를 데려가시라고 22절에서 밝히면서 친구들의 잘못을 지적한다.
33장 1절로 33: 엘리후가 욥에게 하는 1차 변론
1절로 12절까지 욥이 불평한 말들을 책망하였다. 이어서 13절로 33절까지 하나님의 뜻과 섭리와 은혜를 설명하는 부분으로 구성되었고 변론의 내용이 세친구의 것보다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통찰력을 가지고 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32장에서 세 친구들에게 하듯이 욥의 어려움과 고통과 처지와는 상관없이 잘못된 점을 지적하므로 욥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어서 위로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이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욥이 하나님 앞에서 죄 없다고 주장만 하니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한다(13-22). 엘리후는 성도에게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목적이 신앙을 성숙케 하며 더 큰 복을 주신다는 것은 인식하고 있다. 우리를 창조하시되 모태에서 눈과 입과 코를 지으시고 따로따로 만드신 것을 조립하셔서 지으신 예수님이다. 그 예수님이 사망과 생명을 주실지라도 무슨 이유가 있고 선택이 있겠는가? 십자가의 피로 구원하시고 성숙을 위해 연단을 시킨다는데 어찌 감사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엘리후가 신정론에 대한 답을 주고 있다. 현실의 부조리와 불합리, 불평등 등의 현상에 대해 하나님께 묻는 회의 섞인 원망의 질문을 하고 있다고 한다(시 37:1-40).
첫째: 현재의 모든 죄악과 고통의 책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범죄 이후 현재와 같은 모순과 고통이 비로소 시작되었던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정의로우시고 의로우시며 거룩하신 분이다. 다만 이 정의와 거룩을 이루어 가시는 섭리는 인간이 모두 이해할 수 없다.
셋째: 하나님은 반드시 세상 끝 날에 심판을 하실 것이며 지금 심판을 유보하고 계신 까닭은 한 사람에게라도 더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은혜이다. 로마서 2장 4절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갈이 참으심이 충성함을 멸시하느냐”라고 했다. 성도들에게 주어진 고난의 현실은 성숙할 기회를 제공하시기 위함으로 봄이 좋다. 시험을 당할 때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아도 이 세상에 실현되는 섭리가 하나님의 절대주권임을 알고 순종하는 성숙된 신앙을 갖자.
34장 1절로 37절: 엘리후의 2 번째 변론
음식의 맛은 분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을 비유하면서 하나님의 공의를 반대하는 듯이 보이는 욥의 발언을 1절로 9절에 제시하고 10절로 30절에서 공의에 대한 설명과 욥에 대한 정죄이다. 여기서 엘리후는 대상을 욥이나 친구가 아니라 세상의 총명한 자들로 바꾸어 논리를 전개한다. 21절로 25절은 심판, 27절까지는 인생의 정로를 가야됨이며, 26절로 28절은 악한 자를 벌하는 이유와, 31절로 37절은 엘리후의 간청으로 맺는다. 35절에 무식하게 말했으며 36절에서는 자기는 욥이 끝까지 시험받기를 원했다. 이유는 37절에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말을 많이 함이다.
엘리후가 말한 고난 의 자세
살다보면 갑자기 임한 고난에 대해 의아해 하며 하나님께 부르짖고 매달리는 욥에 반해 오히려 엘리후는 인간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감히 할 말이 무엇이 있겠느냐고 반박한다. 비록 엘리후의 편협한 마음으로 심은 대로 거둔다는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욥을 철저하게 정죄함이 세 친구와 같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대한 신앙인의 올바른 태도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우리 인간들은 한낱 피조물이다. 누구도 하나님을 헤아릴 수 없다. 엘리후가 짧은 지식으로 고통 받는 욥에게 잘못된 처방을 내리는 것은 욥에게 치료보다 오히려 악화될 수 있다. 치료자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그분의 은혜로 치유되도록 해야 한다.
35장 1절로 16절: 엘리후의 3 번째 변론
본장에서 엘리후가 19장 7절과 21장 15절에서 욥이 말한 대답을 놓고 반론과 비판을 가하는 세 번째 변론이다. 첫째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에게 아무 유익이나 관계가 없다고 단정하므로 욥이 말하는 의로움이 무용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엘리후 말대로 무용할지라도 선악을 중요시 하시며 이에 따라 최종적으로 심판을 행사하시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욥이 간구하여도 침묵하시는 문제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기도의 응답이 없는 이유는 교만하게 회개하지 않는 태도로 기도하기 때문이라고 원론적인 비난을 가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객관적인 통찰력보다 주관적인 공격으로 변한 것은 따뜻한 마음이 식어졌기 때문이다.
36장 1절로 33절: 엘리후의 4 차 변론
35장에 이어 공의와 주권적 섭리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1절 이하의 공의와 11절의 말씀을 청종하는 자세와 15절로 16절의 하나님의 자비, 24절의 겸손, 26절의 광대하심과, 27절로 33절의 자연계를 통한 하나님의 섭리를 밝힌다. 그러니까 엘리후의 지식에 대한 확신과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확신과 욥의 신앙에 대한 권고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엘리후는 욥이 끝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징계를 베푸신다고 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욥이 평안 중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후반부에 돌아오는 자를 향한 구원의 은혜를 말하고 있다. 우리가 돌이켜 보면 많은 시험과 환란을 겪었는데 그 때마다 우리는 어떤 유익을 얻었는가? 어떤 교훈을 받았는가? 그 후 무엇이 변했는가를 뒤돌아보자. 우리의 삶의 긴 역사를 볼 때 빚진 자이다. 남에게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았고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다. 이는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어려움이 신실하신 약속을 듣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허무한 변론
엘리후는 자신의 말에 진실을 확인키 위해 지식 있는 다른자의 판단을 듣고 있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 자신이 지금 하려는 말이 자기 자신의 지식에서 나오는 말일뿐 하나님께로 오는 말이 아님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욥도 마찬가지였다. 엘리후도 이처럼 자신의 생각만을 고집하고 실패하여 헛된 변론만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옳다고 동의하지 않으신다면 지식 있는 자가 아무리 많이 동의한들 그것이 어찌 진리일 수 있겠는가! 우리도 많은 경우 하나님의 진리와는 무관하게 우리가 가진 경험과 지식만으로 변론을 벌이기가 쉽다. 이에 우리의 생각을 논하고 설득하기 이전에 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며 진정 지금의 내 생각에 하나님께서도 동의하실지 심도 있는 검토가 필요하다.
37장 1절로 24절: 엘리후의 4차 변론이 이어진다.
1절로 13절에 겨울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와 여름을 통해 나타나는 섭리가14절로 18절에 나타난다. 19절로 24절에 하나님의 섭리에 초월성이다. 14절에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기묘하심, 22절에 두려운 위엄으로 하나님의 초월적 섭리의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엘리후는 본장에서 자연 현상으로 심판의 도구를 삼으시거나 축복의 도구로 삼으신다는 것이다. 변론을 끝내면서 하나님의 초월적 섭리와 공의를 나타낸다. 우리는 자연을 통해 어떤 음성을 듣고 있는가? 그리고 지금 우리들의 삶이 예수님의 것인가? 아니면 내 것인가? 우리의 마음이 항상 예수님만 바라게 하자.
신인 동형
37장 2절에 “하나님의 음성 곧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똑똑히 들으라.”는 신인 동형을 얘기 한다. 신인동형 곧 동성론적 표현인데 이는 해석할 때는 많은 주의를 요한다. 신인 동형 동설론은 무한하신 하나님을 유한한 인간적 용어로 표현한 것이므로 언제나 오해의 여지가 있다. 따라서 이런 표현을 해석할 때는 하나님은 무한하신 반면에 인간은 유한하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특히 동성론적 표현에 있어서 인간의 지, 정, 의는 순수치 못하며 복합적이므로 이로 인해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슬픔을 동성론적으로 묘사했을 때 이에 대해 인간의 슬픔이 갖는 연약함, 상실감, 분노, 좌절감 등을 적용해서 해석하면 안 되는 것이다.
38장 1절로 38절: 하나님의 현현과 말씀
욥기 3장에서부터 시작된 욥과 세친구들과 변론이 37장에서 모두 끝났다. 38장에서 41장까지는 본서의 핵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전개된다.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권능과 주권에 대한 말씀이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을 제시한다.
첫째: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해결될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 하나님은 반드시 때가 되면 당신의 공의로운 모습을 드러내시므로 우리들은 끝까지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잃지 말고 고대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문제의 해결에 대한 직접적 답변보다는 오히려 한계가 많고 연약한 인간으로서의 욥에게 도전적인 질문을 던지시면서 하나님의 신비한 주권적 섭리를 가르쳐 주신다.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자연의 신비와 주권자로서 섭리하심을 가르쳐 주시면서 욥과 네 명의 친구들이 무지의 한계를 맛보게 하신다.
그러나 알고 싶어 하는 욥의 고난을 말씀하지 않으셨다. 세 친구들은 정말로 욥이 의인이었다고 말씀 하실까? 을 기대 했거나 욥이 심한 책망을 들었으면 하는 마음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타나심은 단편적인 문제해결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섭리와 인간의 한계를 깨닫게 하는데 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따르며 믿음 생활을 해야 한다는 신앙적 자세를 교훈하심을 깨달아 절망하지 않음에 그 목적이 있다. 잠시 하늘을 보라! 높고 푸른 하늘, 넓고 넓은 대지! 항상 출렁이는 바다와 모든 만물이 하나님 손에서 떨어지지 않음과 전능하신 능력으로 섭리하심을 생각할 때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다. 전도서 3장 11절에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라고 말씀하신다. 모르게 하신 것은 번뇌치 않고 행복한 삶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천리 밖에서 기어가는 개미의 소리를 들으시는데 우리에게 그런 은사가 있다면 고막이 남아 있겠는가?
본장에서 하나님을 만난 욥은 하나님께 찬양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본장 7절에 별들도 노래하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해서 애타하던 욥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위대한 능력을 펼쳐 보이시면서 땅과 바다와 해와 달과 별로 밝히심을 알게 하신 본문이다. 이렇게 모든 것을 알고 자연의 위대한 법칙 앞에 무기력을 깨닫고 우주를 섭리하시는 하나님께 찬양해야 한다. 욥이 원망이란 잘못임을 알았으니 이제는 입을 연다고 해도 찬양만 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있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새로운 삶이 요청된다.
모든 존재의 근원은 창조이다. 그러므로 창조주를 알고 창조주의 의도대로 사는 것이 최선이다. 우주가 그렇듯이 우리가 창조를 받은 피조물이다. 이것이 과거이지만 현재는 창조하심 안에 숨 쉬며 만물을 바라보면서 살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먼 미래의 약속을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를 위하여 영광스러운 천국을 예비하신 것이다. 요한복음 14장 2절에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셨다. 19절의 말씀처럼 광명이 있는 곳의 길도 흑암이 있는 곳의 길도 모르지만 천국의 길은 분명하게 아는 것이다(요 14:6).
38장 39절로 39장 30절: 하나님의 일차 메시지 연장
하나님께서 직접 창조하셨던 동물들을 통해 당신의 섭리를 강조하고 계신다. 사자(38:39), 까마귀(41), 염소와 사슴(39:1-4), 들 나귀(5-8), 들소(9-12), 타조(13-18), 말(19-25), 매(26), 독수리(27-30),의 순서로 습성을 질문 형태로 설명한다. 온갖 동물들을 직접 다스리시며 습성과 활동방향을 설정하신다는 분명한 말씀을 듣고 욥은 자연계와 동식물에 대한 얘기 속에서 다시 한 번 무지함과 연약함을 깨닫고 머리를 숙인다. 생태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신비한 질서에 대해 아는 것은 미미한 것이었고 길들이기 힘든 나귀까지 다스리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것들의 삶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에 놀랐고 그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고난을 허락하신다고 생각할 때 왜 그러실까? 라는 잘못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39:26절로 30절: 공평한 은혜
자연은 하나님께서 질서와 조화로 선하게 움직이시므로 인간이 이러한 생태계를 변화시키는 것은 인간의 파멸을 초래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위해서 섭리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선물로 주신 자연의 환경을 보존하면서 보호해야 한다. 하나님은 공평하게 모든 동식물들에게 필요를 따라 적절하게 공급하신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살아갈 지혜를 주시고 동물들에게도 각각 살아갈 수 있는 방법과 지혜를 주신다. 또한 생육하고 번성케 하신다. 특별히 믿는 자들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약속으로 보증하신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공평하신 은혜와 섭리를 믿고 필요 없는 금심을 버리고 예수님 안에서 살아야 한다.
40장 1절로 14절: 욥의 답변과 하나님의 책망과 섭리하심.
본문에서 중요한 몇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 하나님이 욥에게 질문하시고(1, 2),
둘째: 욥이 자신의 미천함을 고백하였고(3- 5).
셋째: 욥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이다(6-14).
특히 하나님은 여기서 욥이 그동안 고난 중에서 불평과 항의를 거듭하던 불순한 행동과 자기 의를 고집하며 하나님의 공의와 섭리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고민하던 것에 대해 책망하고 계신다. 이는 욥으로 하여금 인간의 의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온전히 순종하도록 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지금 나는 불의를 허용하고 계시는 전능자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은가? 어찌 당신의 작은 머리로 위대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과 정하신 때를 판단하려 하는가? 로마서 11장 33절에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고 했다. 가장 무섭고 큰 죄는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판단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40장 8절: 하나님 앞에 의로울 수 있는가?
하나님은 스스로 의롭다 하며 고난 중에 불평한 욥을 향하여 책망하신다. 실상 이제까지 욥은 자신이 의인임을 입증하는 일에만 급급했지 필수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무슨 뜻이 계실 것인데 그 뜻을 깨달으려는 주의는 별로 없었다. 이는 욥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도 그럴 것이다. 다만 세상이 정해주는 기준과 자기 스스로 정한 기준에 따라 살면서 마치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 이는 착각으로서 우리의 오만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힐 수 있다는 것을 알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시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그 목적이 우리의 기준과 세상의 기준을 알고 그 방법대로 살라고 하신 것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창세전에 택하시고 구원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까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시면서 거룩을 향해 전진하기를 원하신다(fp 11:45). 그러므로 모든 일의 출발점은 예수님께로 가서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행해야 한다.
40장 11절로 13절: 교만하지 말라
안하무인이란 자기 눈 아래에 아무도 없다는 말이다. 이런 사람은 성질이 까칠하고 방자하고 교만하여 모든 사람을 무시하는 태도를 일컫는 말이다. 세상에는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한 사람! 자기만이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참으로 많다. 그런데 이 교만이 하나님 앞에 큰 죄악이다. 우리는 언제나 교만하지 않도록 힘써야 하는데 이유는 마귀의 도구가 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겸손하려면 모든 사람을 예수님으로 봐야 한다. 주께 하듯이 사는 대표적인 인물이 사라이다. 우리의 모든 자랑거리는 예수님의 은혜 때문이며 거기로부터 왔기 때문에 자랑의 근원! 겸손의 근원은 예수님이시다. 로마서 14장 8절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했다. 그리고 교만이란 우리를 멸망으로 이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자기를 신뢰하다보면 반드시 멸망이다. 잠언 3장 5절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했다. 이를 순종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되었다. 잠언 22장 4절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는 나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했으니 우리는 항상 자기를 낮추는 사람으로 살아서 영광이 예수님께로 돌려질 수 있도록 하자.
40장 15절로 24절: 하나님의 2차 메시지
하나님께서 하마의 생태를 이용하여 욥의 무지와 인간의 한계를 알게 하여 회개시키려고 당신의 섭리를 말씀하신다. 즉 커다란 힘과 덩치를 지닌 하마의 모습과 그 생태를 자세히 설명하심으로써 그에 비해 심히 미력하며 미약한 인간을 대조시키고자 한 것이다. 욥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피조물 중에서도 극히 연약한 인간이라는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교만함을 깊이 회개해야 했다. 그리고 욥이 발견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하고 온유하면서 무슨 일이든지 순종하고 의지해야만 아름답게 되어 진다는 것을 알았다. 오늘 우리도 저마다 힘이 들고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들 앞에서 고난을 해결 해주실 분이 누구인가를 살펴보자. 우리가 가진 천국의 소망이나 이웃사랑과 성도간의 교제와 내일의 소망 중 예수님이 베푸시지 않아도 되는 것이 무엇인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4절에 “또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고 하셨다. 이는 예수님 안에서 해야 할 일들이 태산과 같다는 말씀이다. 하지만 우리가 높아지면 영광을 받으려 하니 할 일이 없음과 오히려 수발을 들게 한다.
41장 1절로 34절: 하나님의 이차 메시지 연장
본장은 40장의 연장으로서 비유가 하마에서 악어로 옮겨진 상태에서 전개된다. 낚시로 악어를 낚으려면 악어의 힘을 모두 소진시켜 송사리 같이 만들어서 낚는다. 이렇게 할 수 있느냐? 모든 기구나 언어로 설득하거나 혹은 약한 동물을 다루듯이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1절로 11절까지 악어의 사냥에 어려움을 얘기하신다. 그리고 악어의 지체와 구조와 힘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결국 하나님은 욥에게 고난의 원인에 대하여 직접 답변하시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깨달아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욥은 자기 고난보다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을 통해 나타나는 신비로운 섭리 앞에 압도되었다. 여기서 욥이 말로만 했던 하나님의 주권을 확인하고 인간들이 전적으로 순종해야 하는 이유와 참 맛을 발견한다. 이제 욥은 자기의 눈앞에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지라도 궁극적인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간의 유한성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 것이다. 이제는 자기주장을 포기할 준비가 된 것이다. 모두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맡기면서 순종만이 최선이다. 이러한 말씀을 통해 욥이 이해하니 말씀을 마치시는 하나님의 모습 앞에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42장 1절로 6절: 욥의 회개
욥은 하나님으로부터 답변은 듣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의 주관적 섭리를 깨닫게 되었다. 즉 욥은 하나님의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자신이 바로 무지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가리운 자이었음을 깨달아 순종할 수밖에 없음을 3절에서 고백한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이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지 못하므로 불평과 자기 의에 대한 고집들을 깊이 회개하기에 이른 것이다. 6절에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몸의 편의를 위해서 앉은 재가 철저하게 회개하기 위한 재로 변한 것이다. 사실 하나님이 친히 욥에게 나타나신 것만으로도 욥의 고민은 이미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왜냐하면 욥은 고난 중에 하나님의 침묵하심을 심히 답답히 여기고 가장 고통스러웠는데 이제는 하나님께서 나타나심을 통해 모두 다 사라지고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소망하게 되었다.
42장 7절로 9절: 욥의 위하여 기도
욥의 세 친구들도 편협 된 지식을 가지고 무한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면서 무죄한 욥을 고소하였기에 구체적인 회개가 요구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제 욥의 위하여 기도를 통해서 죄 사함을 받게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법정에서 판결자(우리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9:33)와 보증인(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고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니16:19-20)과 구속자(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 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19:25)를 원했던 것이다. 욥이 이제는 성숙된 신앙을 소유함으로서 자신이 친히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는 사역자가 되는 축복된 종이 된 것이다. 특히 욥이 위하여 기도를 함으로서 화해를 이루는 성도의 진실 된 사랑을 보여주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사역을 보여준 것이다.
42장 10절로 17절: 욥의 승리와 축복
본문에서 욥은 시험과 환란이, 고난이 끝이 나고 모든 것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와서 보기 좋게 승리했는데 어떤 면에서 승리를 했는가?
첫째: 잃을 뻔했던 세 친구를 찾게 되었다. 친구들과의 관계회복이 완전히 이루어진 것이다. 본문 10절에 “욥이 그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고 하신 말씀을 보면 확실하게 회복된 것이다.
둘째: 형제와 지인들과의 관계를 회복하였다. 11절에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이전에 알던 이들이 다 와서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케쉬타(고대 화폐 단위를 말함) 하나씩과 금 고리 하나씩을 주었더라.” 는 말은 형제와 지인들과 회복에 있어서 많은 물질을 투자했음을 말한다.
셋째: 재물이 회복되는 축복을 주셨다. 12절에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의 축복은 재물을 확실하게 회복시켜주신 것이다.
넷째: 자녀의 회복을 주려고 젊음을 주신 것이다. 아들 일곱과 딸 셋을 주셨다. 그 딸들에게도 재산 상속이라는 기업을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듯 회복으로 끝나는 본서는 단순히 통속적인 행복한 결말을 그린 것만은 아니며, 성도들이 궁극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누릴 영원한 축복을 예표 한다. 인내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로 나아갈 수 있다는 소망과 인내가 있은 후에 영광스런 축복이 온다는 교훈이다.
구약에서 본 축복관 두 가지
현세의 복: 자손의 번성, 육적인 건강, 물질의 풍요, 생명의 보존, 평강한 마음, 현명한 아내, 자연의 순리적 운행이다.
영적인 축복: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와 교제, 영생, 죄 사함을 받음 등이다.
욥의 결말
17절에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 고난이 끝난 후 일백 사십 년을 살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열조에게 돌아갔다. 시험을 당할 때 욥의 나이가 몇 살인가는 정확하지 않지만 장수하였던 것이다.
첫댓글 사모님을 위한
기도 시간도 힘이 드시는데 ... ...
존경하는 동역자님 감사드립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