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포 갯가로 나가
시월 둘째 토요일은 한로 절기였다. 같은 생활권이지만 좀 떨어져 사는 대학 동기가 이른 새벽에 우리 집 앞으로 와 도토리묵을 건넨다기에 받아두었다. 스무날 전 내가 근교 산행에서 주웠던 도토리를 보냈더니 묵이 되어 돌아왔다. 도토리를 전분으로 추출시켜 갈색의 묵이 빚어지기까지는 몇 단계 절차와 시간이 걸려야 하고 정성이 든다고 들었는데 친구 아내의 솜씨인 듯했다.
도토리묵을 받아 놓고 그 길로 사파동 텃밭으로 향했다. 엊그제 비가 내린 이후 텃밭 작물의 생육 상태를 살펴봤다. 무와 배추는 비를 맞고 싱그럽게 잘 자라고 있었다. 가을 들머리 심어둔 시금치와 상추를 발아율이 저조해 앞으로 더 지켜봐야 할 듯하다. 그보다 늦게 심은 아욱은 오히려 싹이 잘 돋아 자랐다. 텃밭에 들린 김에 비좁은 배추를 솎아내 김치 담글 재료로 장만했다.
집에다 솎음배추를 내려놓고 상남동 피부과를 찾아야 할 일이 기다렸다. 근년에 민감한 부위의 염증으로 주사를 맞고 약을 먹은 바 있는데 재발해 진료를 받아야 할 처지였다. 나는 웬만해서는 병원이나 약국을 찾지 않는 편인데 염증은 그대로 방치하면 악화가 되어 수습이 어려웠다. 그보다 더 불편함은 의사는 술을 끊으라고 하지만 나는 치료가 끝나면 다시 잇지 않을 수가 없다.
피부과 진료 후 곧장 마산역 광장으로 향했다. 광장으로 오르는 노점에는 제철을 맞은 푸성귀와 과일들을 가득 펼쳐 손님 맞을 채비를 했다. 나는 번개시장 들머리에서 김밥을 마련해 구산 옥계로 가는 60번 버스를 탔다. 어시장과 댓거리를 지나 현동을 거쳐 면 소재지 수정에서 백령고개를 넘어 종점 옥계로 갔다. 옥계는 포구인데 마을 뒤 계곡의 물이 맑았다고 옥계라 불려졌다.
포구에는 조업을 나가지 않은 어선들이 여러 척 묶여 있었다. 겨울에는 대구가 많이 잡히고 여름에는 해저에 통발을 드리워 장어를 잡는 어항인데 봄에는 도다리이고 가을에는 전어가 많이 잡히지 않을까 싶었다. 낚시가 잘 되는 물때인지 방파제에는 낚싯대를 드리운 이들이 여럿 보였다. 지역문화센터로 바뀐 초등학교 터를 지나 독립가옥 횟집에서 해안선을 따라가는 임도로 들었다.
왼편의 합포만에는 마창대교가 걸쳐 지났고 진해만에는 정박한 군함이 보였고 시가지 건물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봉화산이 흘러내린 산자락 길섶에는 제철에 핀 야생화들을 볼 수 있었다. 한여름에 절정이었을 노란 솔나물꽃이 아직 저물지 않고 남아 있어 눈길을 끌었다. 이슥해진 가을을 장식하는 미역취의 노란 꽃이나 구절초의 하얀 꽃 덤불은 언제 봐도 청초하고 아름다웠다.
옥계의 봉화산 산기슭으로 개설된 임도가 끝나자 난포 해안으로 가는 등산로로 내려섰다. 사람들이 다니질 않아 겹겹이 걸쳐진 거미줄을 걷어가며 지났다. 저 멀리 전방은 거가대교 연륙 구간인 갯바위에 앉아 김밥을 비우면서 쪽빛 바다와 뭉게구름을 쳐다봤다. 장복산의 안민고개와 불모산의 시루봉과 천자봉은 아득하게 보였다. 높고 푸른 하늘에 삽상한 바람이 불어와 상쾌함을 더했다.
갯바위에서 한 할머니가 바지락을 캐는 자갈밭으로 가보니 죽은 새끼 정어리들의 부패가 진행 중이었다. 할머니 얘기로는 며칠 전 일어난 일인데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했다. 다른 어패류는 피해가 없는 것으로 미루어봐 특정 물질에 의한 해양 오염이 아닐 수 있을 듯도 했다. 넓은 바다를 무대로 살아야 할 물고기 떼가 해류를 따라 갑자기 좁은 만으로 유입되어 생긴 자연사인가도 싶다.
갯바위에서 해안선을 따라 난포로 갔다. 그곳은 일제 강점기 등재된 법정 행정 동명이 남포였는데 지역 인사들이 현재의 난포로 되돌렸다. 남포의 ‘남’은 남루할 ‘람(襤)’으로 얕잡아 붙인 이름이었다. 난포는 봉화산이 거북의 등이고 갯바위 쪽은 머리인지라 거북이 알을 품는 풍수로 알 난(卵)에 품을 포(抱)를 쓰는 난포였다. 많고 많은 포구에서 품을 ‘포(抱)’는 난포가 유일하지 싶다. 22.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