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커밍 데이
Homecoming Day
강 문 석
근년에 흔하게 회자되는 말 중 ‘홈 커밍 데이’가 있다. 옛 직장을 방문하는 날을 그렇게 부른다. 우리말로는 마땅한 단어가 아직 없어서 그렇게 부르는 모양이나 공인된 말은 아니다. 영어론 홈과 커밍을 붙여 하나의 단어로 귀향이나 귀성 귀가 귀국을 뜻한다. 미국에서 대학이나 고등학교 졸업생이 연1회 가지는 동창회도 그렇게 부른다. 여기서 말하는 동창회는 이 용어가 생긴 배경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때 동창회가 열리는 장소가 반드시 모교라는 언급은 없다.
20여 년 전 정부에서 국토의 균형발전 어쩌고 하면서 전국에다 혁신도시를 만든다고 야단법석을 떤 적이 있었다. 그 결과가 수도권 과밀화해소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모르지만 정부부처는 그대로 두고 공기업들만 전국 각지로 흩어놓았으니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시간과 예산낭비 폐단은 이어지고 있다. 그때 대한민국 공기업을 대표하는 나의 옛 직장은 전남 나주로 옮겨갔다. 그 지역 사람들의 열망에 응답하여 당시 정부가 내린 결정이었다.
전국의 혁신도시가 밤만 되면 유령도시로 변한다는 언론보도가 한동안 이어진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낮에는 직장에 붙들려 꼼짝 못하다가 퇴근만하면 어떡하든 처자식이 있는 서울이나 수도권으로 찾아가니 혁신도시는 공동화현상이 벌어졌던 것이다. 단 한 번의 잘못된 정책결정 해악이 얼마나 큰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겠다. 그렇게 만들어진 혁신도시 덕분에 몇 년 전 영산강 자락 나주를 체험할 수 있었다.
경상도가 경주와 상주의 이름에서 만들어졌듯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에서 비롯되었으니 역사 속 나주는 남도를 대표하는 지역이었다. 나주를 방문한 그 행사 명칭이 ‘홈 커밍 데이’였다. 정확한 용어가 아닌데도 기관과 단체마다 유행처럼 그렇게 갖다 붙이고 있었으나 탓할 수도 없었다. 옛 직장을 찾는 일은 흔치 않지만 방문하는 은퇴자 입장에선 남다른 감회에 젖게 될 텐데도 그런 용어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주말 오후 예정에 없던 옛 직장 정원을 들어섰다. 혼인예식을 축하한 후 결혼식장을 나서니 바로 직장 정원이었다. 내가 현직 때 결혼식장 자리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기업의 설탕공장이었다. 당시 서울삼성병원 규모로 부산삼성병원이 그 자리에 들어설 거란 소문이 돌았고 그렇게 되면 후문 쪽인 우리 직장 바로 앞은 장례식장 영안실이 될 거라는 말까지 나와서 술렁댔다. 직장 사옥을 부산의 옛 도심 쪽에서 서면으로 옮겨온 것은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해였다.
이사해서 하반기가 시작되었으니 올림픽은 코앞이었다. 부산지역엔 요트경기장과 구덕운동장이 주경기장으로 지정되었고 대학 두 군데에 연습경기장도 마련되었다. 올림픽 조직위 사람들의 위세에 눌려 경기장 전기설비 점검책임을 맡은 사람은 눈코 뜰 새 없었다. 이곳 새로 지은 사옥에 근무한 것은 5년 남짓하지만 건물 전기설비 안전책임자와 두 군데 구청 민방위 출강 그리고 방송출연 등 돌아보면 그때 가장 보람된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흘러간 한 세대에 해당하는 세월은 옛 직장 정원을 몰라보게 만들어 놓았다. 고급수종 소나무들은 내가 떠난 후 어디서 옮겨 심은 것 같은데 울창한 숲을 이루었다. 이곳은 1960~70년대 부산의 중심도로를 땡땡거리며 달리던 전차의 차량기지가 있었고 후엔 일부를 잘라 간부사택도 만들었다. 입사 10여년에 몸담았던 변전소가 전차차고지 대부분을 넓게 차지하기도 했다. 지금은 모두 사라진 추억 속 풍경이지만 그땐 그랬다.
한창 정원풍광을 카메라에 담고 있을 때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이 있었다. 나무를 자르는 전동 톱을 휴대한 그를 나는 알아보지 못했다. 연령도 10년 넘게 차이났고 현직 때는 총무파트에서 보안업무를 맡고 있었다니 사무실도 서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러했을 것이다. 떠나고 없는 사람들의 얘기도 그는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들려주어 오늘 제대로 홈 커밍 데이를 가진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내민 명함엔 옛 직장 협력업체란 글자가 들었고 조경전문업체를 운영하고 있었다.
지난 봄 부산지역 8백여 명 은퇴자단체는 정기총회를 가졌고 마친 후 서울 본회에서 온 손님들과 영도에 있는 현직 때의 사업장을 찾았다. 부산에선 규모가 가장 작은 사업장이었다. 그곳 현직 후배들은 오순도순 정겨운 분위기 속에서 표정들이 밝았고 그 여운은 지금까지 남았다. 사업장을 방문하는 수용가들과 공사업계 사람들 출입이 적은 퇴근 직전시간을 이용했다. 1층 영업창구로부터 꼭대기 층 기술부서까지 두루 돌았다.
낯익은 후배들도 있었지만 20여 년 세월을 지나면서 바뀐 얼굴들이 많았다. 전 현직이 나란히 포즈를 취하여 만난 기념을 남기기도 했지만 업무에 방해하지 않으려고 선걸음에 우리는 사업장을 빠져나왔다. 사옥 뒤 사라진 정구장자리가 보였다. 정구장이 딸린 이곳 변전소에 3년 반 근무하면서 처음으로 정구를 접했다. 그 바람에 직원들과 팀을 이루어 서면 개성중학 코트에서 벌어진 부산시연합정구대회에 출전한 기억도 떠올랐다.
누군가 버릴 것을 쌓아두는 것도 병이라고 했다. 나를 보고 하는 말 같았다. 상태가 깨끗한 것은 아까워서 못 버리고 앞으로 요긴하게 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버리지 못하는 것들도 있다. 얼마 전부터 컴퓨터에 저장하고 있던 사진을 버리기 시작했다. 사진파일이 컴퓨터 용량을 차지해서 폐기하게 되었다. 영도 홈 커밍 데이 얼굴들을 정리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에 이런 잡문에 매달리는지도 모르겠다. 아! 가고 없는 날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