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명례안길 44-3 (명례리 1122)
마산교구 최초의 본당으로 순교자 신석복 생가가 있는 곳
명례 공소는 낙동강 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밀양과 김해를 잇는 나루가 있던 곳이다.
명례는 하느님의 종 신석복 마르코가 출생한 곳이며, 현재 마산교구의 관할 지역에서는 가장 오래된 최초의 본당이고
경상도 전체에서 네 번째로 설립된 본당이다.
명례 본당은 대구 본당(1886년), 가실(왜관) 본당(1894년), 부산 본당(1890년)에 이어 1897년 신설해 부산의 서쪽을 전담시키고자 하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또한 김대건, 최양업 신부에 이어 세 번째 방인사제인 강성삼 신부가 사목하다 돌아가신 곳이다.
강변 마을 명례는 나루에 걸맞게 예로부터 외지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고 경제 활동이 활발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차츰 도로가 확충되고 배를 사용하지 않게 되면서 마을의 규모는 작아지고 번성했던 모습을
역사 속에 뒤로한 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조금씩 잊혀 갔다.
일찍이 교우촌이 형성된 명례에 신자들이 처음 나타난 것은 정해박해(1827년) 이후로 박해를 피해 정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강 건너 김해시 한림면과 생림면에 살던 교우들과도 교류를 가졌으며 병인박해 때 많은 교우들이 잡혀 갔지만 박해 후 다시 모여들었다.
명례 본당은 개항 이후 경남 지역 첫 본당인 부산 본당 주임 파리 외방전교회 죠조(Jozeau, 趙得夏, 1866~1894, 모세) 신부의 사목 방침에 따라
경남 중부 지역에 본당을 신설해 부산의 서쪽을 전담시키고자 하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신자들의 열망으로 명례 공소는 1897년 6월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초대 주임으로 강성삼(姜聖參, 1866~1903, 라우렌시오) 신부가 발령받게 되었다.
1897년 본당으로 승격됐던 명례는 신자들의 자발적인 모금으로 현재의 위치에 부지를 매입했고 강성삼 신부는 그 땅에
네 칸짜리 집을 지었다.
이후 1926년 새로 부임한 권영조(權永兆, 1901~1965, 마르코) 신부가 기와로 된 성당을 지어 1928년 낙성식을 가졌지만
아쉽게도 이 성당은 1935년 태풍으로 전파되었다. 지금의 성전은 1938년 무너진 자리에 축소 복원한 것이다.
그러나 명례에는 역사적으로 소중한 자료들이 많다. 처음 본당이 설립되어 사용한 제대와 십자가, 남녀 신자석이 칸막이로
분리되어 있는 내부는 초기 신자들의 기도하는 모습을 그려 볼 수 있는 좋은 자료다.
명례는 신석복 마르코 순교자의 생가터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1828년에 태어난 그는 농사를 지으며
누룩과 소금 행상을 했고 피난 교우들의 권유로 신자가 됐으며 병인박해 때 대구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붙잡혀
1866년 3월 31일에 순교하였다.
명례성지조성추진위원회(위원장 이제민 신부)는 명례 성지 조성을 위하여 2007년 4월 매입한 입구의 한옥을 보수해
그해 8월 강성삼 신부의 세례명을 따라 라우렌시오의 집으로 명명했다.
또 2010년 개인소유의 축사로 변해버린 신석복 순교자의 생가 터와 주변 일대를 매입하고 야외 돌제대를 설치했다.
그리고 명례 성당과 그 일대를 경상남도 문화재로 신청하여 12월 31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26호로 등록되었다.
앞으로 명례 성지는 생가 터에 순교자 신석복 기념 성당을 건립하는 것을 비롯해 명례를 신앙선조들의 삶과 신앙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갈 예정이다.
■ 명례 본당과 강성삼 라우렌시오 신부(1866-1903)
명례 공소는 1897년 6월 본당으로 승격하고 초대 주임은 강성삼 신부였다. 강성삼 신부는 충청도 홍산에서 태어났다.
충청도 내포에 살았던 외조부 신 베드로는 의술이 뛰어났으며 영세한 후 각처로 다니며 전교하다가 병인박해 때
홍주읍 포졸들에게 잡혀 해미에서 85세로 치명하였으며. 외숙인 신 아우구스티노도 23세 때 해미에서 순교하였다.
1881년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나가사끼에서 코스트(Coste) 신부의 지도로 1년 간 예비 신학 교육을 받고
1882년 말레이 반도의 페낭 신학교에 유학하여 공부하던 중 1890년에 귀국, 새로 설립된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남은 학업을 미친 뒤 1896년 4월 26일 뮈텔(Mutel, 민덕효) 주교의 주례로 강도영 마르코, 정규하 레오와 함께
국내에서는 최초로 약현(현 중림동)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 날의 사제 서품은 한국인 최초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사제 서품을 받은 때(1845)로부터 50년만이었다.
사제 서품을 받고 정식으로 부산 절영도에 부임하여 절영도와 8개 공소의 364명 신자를 돌보았다.
1897년 임지 변경 문제로 우도 신부와 상의하여 경남 밀양군 하남면 명례로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그해 9월 명례에 3칸짜리 집 한 채를 120냥에 매입하였으나 매수자가 집을 비우지 않아 이듬해 1월에야 명례로 옮길 수 있었다.
밀양, 청주(현 진양), 양산, 언양 등 14개 공소, 500여 명의 교우를 대상으로 6년 동안 사목하였다.
명례 본당에서 사목중에 일화가 있다. 1899년 3월 자인에 사는 교우 정씨가 어떤 일 때문에 대구의 로베르 신부에게
부탁하여 밀양 군수에게 편지를 보내도록 하였다.
그런데 편지를 받은 밀양 군수는 몹시 자존심이 상해 정씨를 옥에 가두었다.
이에 강성삼 신부는 군수에게 편지를 보내. 정씨가 무죄이므로 즉시 석방되어야 한다고 요청했다.
그러나 군수는 강 신부의 청을 묵살했고, 면담 요청도 거절했으며 강 신부와 다른 천주교인마저 감옥에 가두겠다고 위협했다.
강 신부는 밀양에서는 군수의 천주교에 대한 편견 때문에 사건이 공정하게 처리될 수 없으므로 서울에 가서 재판을 열자고
군수에게 제의하였다.
그러자 군수는 겁을 먹고 정씨를 석방하는 한편 강 신부에게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 주기를 청하였다.
1900년 초 강성삼 신부는 병 때문에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며, 이듬해 여름에도 크게 앓아 공소 순방도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본래 병약했고 한적한 산촌인 명례로 임지가 정해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1903년 9월 19일 37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강성삼 신부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고 단지 절영도와 명례에서 남긴 13통의 서한이 있을 뿐이다.
강성삼 신부의 묘비는 삼랑진 성당에 있으며, 묘소는 부산 성직자 묘역에 있다.
강 신부가 죽자 명례본당은 다시 공소가 되었고 마산 본당에 속했다.
그리고 1926년 5월 10일 권영조 신부가 부임하며 다시 본당으로 재 설립되기도 했으나 1930년 삼랑진으로 본당 소재지를
이전하며 다시 삼랑진 본당 소속 공소가 되었다. 이후 진영 본당을 거쳐 현재는 수산본당 관할 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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