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란 유일신 야훼를 알아본 자들의 신앙고백
어제 있었던 청년회장님과의 논쟁을 이어가 보려고 글을 적습니다.
신앙도 내공 ㅤㅇㅣㅄ을뿐더러 성경지식도 미약한 사람이 적는 글이니 그냥 듣고 흘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의 왕국(Kingdom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의 원래뜻은 "권력", "권세"이런쪽에 더 가깝다고 합니다. 즉 물질적 형태로서의 왕국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권세가 지배하는 세상쯤으로 생각하시면 옮은 표현이 되는것 같습니다.)으로 우리를 인도해주는 안내자라고 생각합니다.
금강경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渡江不顧船 도강불고선 하고
到家杖便休 도가장편휴 하니
得魚更忘筌 득어경망전 이오
得意忽忘言 득의홀망언 하라
강을 건너면 배를 버리고
갈 곳에 이르면 지팡이를 버리리니
고기를 잡은 후엔 그물을 버릴 것이요
뜻을 얻었으면 말을 잊어 버려라
종국에 우리가 따라야 할것은 하나님의 의지이지, 성경 그 자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왕국에 들어서서 24시간 하나님과 소통하는 그 세상에서 성경이라는것은 더이상 의미를 가지지 않게될것입니다.
절대적 권위를 가진 성경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것입니다.
성 경(특히 모세5경이라 불리는 토라)이 애시당초 구전되던 형태에서 문서로 바뀐것은 모세의 출애굽 직후에서 남북왕조로 이스라엘이 대립하던 어느 시기라고들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인들은 어떤 의도로 성경을 만들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던 어떤 집단이 몇대를 걸쳐 신의 의미, 세상의 창조와 멸망 등에 대해 성찰을 하면서 깨달음을 얻었을것입니다. 그것을 아직 유일신의 존재를 모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야한다는 열망이 싹튼것도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저는 이 대목이 기독교가 가지는 큰 장점이라 생각합니다. 불교에서는 와서 묻는자에게 답변은 해주지만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또 한가지 놀라운 일은 세상 천지가 범신론이거나 불교처럼 신의 존재자체를 거부할때, 유대인들은 독특하게 세상의 범위에 속하지 않는 절대자라는 개념을 찾아내어 소통을 한 점이라 하겠습니다.
그러한 깨달음을 글로 옮겨적었던 목적은 유일신 야훼를 모든 사람들이 만날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었을것입니다. 궁극의 깨달음을 얻은 자의 자비로운 마음, 혼자 깨닫고 사라지겠다는 태도가 아닌, 모두 함께 유일신 야훼를 만나자는 그 외침이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성경 창작자들의 위대한 마음을 우리는 "일점일획"도 "무오류"라는 주장으로 성경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모습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어제도 말씀드렸듯, 노아의 방주 사건만 놓고 봐도 그렇습니다.
창세기 6장
16.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창세기 7장
1.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앞장에서 2쌍이던것이 한 장 넘어가면 7쌍이 됩니다. 이걸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충돌이 일어나게 됩니다. 저도 이런 성경 구절을 눈앞에 두고도 한자도 틀림이 없다는 주장에 아연해하며 기독교인들을 멀리하던때도 있었습니다.
저는 반대로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성경의 창작 집단은 대강 4개정도로 분류해보자는 것이 통설인데, 각각의 전승을 어떤 저자가 모아서 편집한것이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라고합니다. 한 집단은 2쌍으로 전승해왔는데, 한 집단은 이걸 7쌍으로 전승해 왔던거죠.
평생을 성경 편찬에 바쳤던 편집자가 둘간의 논리적 모순을 몰랐을리 없습니다. 하지만 노아의 방주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방주의 크기도 아니요, 싣고 갔던 짐승의 숫자도 아닙니다. 대노하신 하나님이지만 인간을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셨고(창조했으니 다 부숴버려도 할 말 없는거지요!) 그 사랑의 손길을 노아에게 보여주셨으며 이 일 이후로는 이런식의 벌을 주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신 점이지요.
그것을 아는 편집자였기때문에 양쪽의 전승을 가감없이 소개할 수 있었던것 같습니다. 제가 편집자였다면 한쪽을 간단하게 날려버렸겠습니다. 다음장에 달라질 짐승의 숫자를 그냥 지워도 될것을 편집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던것입니다. 성경 편집자의 의도가 드러나는 지점이요, 우리가 성경을 대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지점이라 생각합니다.
뜻은 하나님의 뜻이지만 적는 것은 인간이었습니다. 당연히 시대적 환경적 한계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간통하는 남자와 여자를 성경말씀대로 돌로 쳐죽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성경에서 동성애를 하면 안된다고 말했다는 것을 근거로 개인의 성적 취향에 죄의 굴레를 씌우는데는 주저함이 없습니다. 시대와 환경이 변하면 당연히 그에 대한 성경의 해석도 달라져야 하는것입니다.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창조주의 세상안에서 유일하게 부신 그 존재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심으로써 부질없는 인생의 굴레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서셨습니다. 그것이 사실이기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순간까지 저항다운 저항도 없이 지리멸렬하게 사라져 가던 그 제자 공동체가 목숨을 내놓고 선교를 할 수 있었겠지요.
이 예수님의 말씀만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대진리라 생각합니다. 그 외의 성경 저자들은 다 이 예수님의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 존재할 뿐입니다.
하나님 왕국을 가리키는 손가락인 성경을 보지말고 하나님 왕국을 바라봐야지요. 손가락에 털이 있으면 어떻고, 손 색깔이 파란색이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왕국을 가는 이정표로 삼아야할 성경으 잣구 하나 하나에 집착을 하게 되면 성경 본연의 의미를 우리가 퇴색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생각합니다.
모두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동성애를 혐오하라는 성경의 말씀이 충돌하면 저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시공을 초월한 절대자이자 절대진리이신 분은 예수님이시니까요.
성경이 하느님의 말씀을 옮겼다는 표현보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신앙고백"이라는 표현입니다.
우리도 성경에 근거하여 하나님과 소통하며 끊임없이 우리의 신앙을 고백해야 합니다.
21세기에 살아가는 기독교인답게 신앙심을 키우는 일에 기원전 이스라엘의 현실아래 집필된 성경의 모든 잣구를 그대로 수용하는것은 무리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