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한 삼년전 쯤의 애기다.
추석을 지나 계절은 가을색으로 물들 무렵 !
햇볕이 제법 따겁게 내려 앉는 하늘맑은 9월 중순 어느 날
모 방송에서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이산" 이
시청자들의 가슴을 졸일때 쯤
안식구의 간곡한 요청으로 뒤주에서 숨을 거둔
사도세자와 그의 아들 정조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려
경기도 화성을 찾았다.
정조는 사도세자 능 주변의 소나무에 기생하는 송충이를
입으로 물어 죽였다 한다.그 덕분인지 지금도 능 주변 소나무가
무성하게 푸르름을 유지하고 있다.
용주사 대웅전의 오른쪽 기둥앞에는 정조께서 손수 심었다는
수령 약 200년의 가녀린 회양나무 한 그루가
중병을 앓고 있는 듯 치료를 받고 있다.
이 회양목은 조선 정조(1776∼1800, 재위)가 장조(사도세자)의 능을
이 근처( 현재의 융건릉)에 두고 능사(陵寺)로 용주사를 지을 때
손수 심은 기념수라 전해 오고 있다.
절을 중수하면서 대웅전 앞에 정조가 직접 심었다는 회양목 은
회양목으로는 보기 드문 노거수(천연기념물264호 )로 자랐으나
생육공간 협소로 뿌리 생육환경이 불량하여 시름시름 앓고 있어
2005년 치료와 수술을 받아 살아나는 듯했으나 2006년도에 고사하여
천연기념물제264호에서 폐위(?)됐다고 전한다.
지금은 안쓰러운 고사목으로 남아있어 뒤주에 갇혀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애틋한 효심이 절절히 다가온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부왕(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힌 채 8일만에 숨을 거둔
사도세자의 영혼이 구천을 맴도는 것 같아 괴로워 하던 정조는
부친의 넋을 위로하기 해 절을 세울 것을 결심,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의 묘를 천하제일의 복지라 하는 이곳 화산 (화성)으로 옮겨와
현릉원(뒤에 융릉으로 승격)이라 하고, 보경스님을 도화주로 삼아 이곳에 절을 지어
현릉원의 능사(陵寺)로서 비명에 숨진 아버지 사도 세자의 명복을 빌게했다.
낙성식날 저녁에 정조가 꿈을 꾸었는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했다 하여
절 이름을 용주사라 불렸고 그리하여 용주사는 효심의 본찰로서
불심과 효심이 한데 어우러진 사찰이 됐다.
대웅전 옆에는 세종때 간행된
부모은중경을 새긴 동판이 보관돼있고 은중경을 새긴 석탑도 조성돼있을 뿐 아니라
사찰 입구엔 효 박물관이 건립되어있다.
사천왕상이 그려진 일주문을 지나면 법당 안마당으로 들어가는 곳에 천보루가 서 있다.
청록색 방문과 황토빛 기둥, 선명한 원색의 단청,
천보루 한쪽벽에는 뭉게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보살님상이 있고,
그 아래로는 부처님의 말씀과
정조 임금의 애틋한 이야기를 담은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의 내용이
새겨져 있다.
규장각을 설치하는 등 조선시대 르네상스시대를 연 정조 임금은
뒤주 속에 갇혀 죽은아버지 사도세자를 너무나
그리워한 나머지 마음의 병을 앓았다고 한다
천보루 문턱 난간에 앉아
아버지를 죽음의 궁지에 몰아넣은
할아버지 영조 임금에 대한 미움과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연민의 정이 가슴속에서 메아리쳐 마음을 가눌
수 없었던 정조 대왕을 생각해봤다
조선의 22대 국왕 정조.
그는 18세기 왕권을 강화시키며 규장각을 설치하고,
붕당정치를 비판하여 탕평책을 실시하고,
화성 신도시 건설을 통해 민생을 살펴
문화의 르네상스라고 일컬어지는 시대의 군주로 개혁을 추진했지만
현실에 부딪혀 끝내 자신의 뜻을 다 펴지못하고
실패한 군왕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지금은 고사해버린 회양나무를 보며 정조께서 고군분투,
조선의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로 끝난
정조의 생애를 보는 듯 하여 가슴이 아리다.
드라마에서 보여 주듯 어린 세손(정조)은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쟁에서 희생되었듯이
항상 죽음의 위협속에서 세손시절을 보내며
고립무원의 길에서 살얼음을 밟듯 조심 조심 두렵게,
위태 위태하게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오며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정조는 새로운 도시 화성과 규장각을 지으며
화성을 중심으로 노론세력의 나라가 아닌 왕권이 강화된 제왕의 나라,
백성의 나라 ,
못이룬 사도세자의 꿈을 담은 나라를 차츰 차츰 만들어 갔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수 없는 좌절의 시간이 흐르며 몸은 불편해지고
병세가 악화 되었다.
언제나 몸을 단정히 하며 학문수련과 삶은 수도자를 연상시킬 만큼 수신제가 를 하였으나
그의 뜻대로 치국평천하의 뜻은 이루지는 못했다.
정조의 개혁 실패는 조선의 개혁 실패였고, "정조의 죽음은 조선의 죽음이었다."
고 후세 사가들은 평했다.
정조의 죽음으로 조선은 갈길은 멈추고 망국의 길로 치달았다.
1800년 6월 49세가 되던 해에 24년 3개월간의 재위기간을 마치고
개혁 미완의 군주 정조는 승하 하셨다.
정조가 죽고 조선이 망하는데 걸린 시간은 정확히 100년이었다.
※ 학창시절 한번쯤 읇조려 봤을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
조지훈의 승무 와 용주사 애기 는 다음기회에...
자료 / 용주사 홈피
글 및 편집 / 김억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