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 교수는 결론 부분에서 '구원'과 '보호'를 가지고 이중성이라고 하는데, 그러나 이는 이중성이 아니다. 이중성이라는 것은 서로 대립되면서 하나가 될 때 쓰는 말이다. 구원과 보호는 대립이 아니고 같은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 윤 교수는 구원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는데, 전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전쟁의 적은 바로 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너무나 단순(?)하다.
* 그러면 이 여호와 전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 출애굽기 15장에 치료하시는 하나님이 나오고, 12-14장에는 유월절이 나온다. 그렇기에 구원이 무엇인지를 소개하기 위해서는 바로의 강팍 개념이 들어가야 되고, 바로만 하나님께 대어든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모세에게 달라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출애굽기 14:14에 '가만히 있어라 여호와께서 하신다' 라는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박수만 치라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이 개입할 전쟁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 바로를 강팍케 하셔서 일을 진행시키시는 것이다. 이 말은 바로나 히브리인이나 똑같은데, 한 쪽은 강팍케 하시고, 한 쪽은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다.
* 그렇다면 구원 속에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의 강팍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 담겨져야 하는 것이다. 즉, 히브리인들을 치료를 시켜야 하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바로를 강팍케 하고, 이스라엘을 치료하는 모습이 있는 전쟁이어야 하는 것이다.
* 그런데 본 글에는 이러한 내용이 전혀 없다. 그냥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전쟁하셔서 구원했다' 라는 것이 전부이다. "그래서 '바다의 노래'에서 우리는 여호와의 전쟁을 토한 '자기 백성의 구원과 보호'의 목적이 그들을 여호와의 거룩한 처소로 인도하는 것을 보았다(출15:13-17)" 라는 것으로 결론을 맺고 있는 것이다.
* 그러나 이것은 신학자의 모습이 아니다. 그냥 성경을 죽 나열하는 것에 불과하다. 무슨 국어시간인가? 원어를 사용해서 독자로 하여금 기죽게 할지는 몰라도, 원어를 그런 식으로 다루어서는 곤란하다.
* 이방의 종교도 얼마든지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이다. 자기 민족을 도와주는 것은 종교의 특징이다. 다른 종교와의 차별성이 전혀 나타나지를 않는다.
* 출 15장이 과연 그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여호와는 용사인데, 그래서 이스라엘을 구원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끝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왜 광야에서 망해야 하는가? 강팍케 하신 의미를, 유월절 어린양의 의미를 모르면 이렇게 되는 것이다.
* 하나님은 전쟁을 하신다고 독이 올라 있는데, 지금 이스라엘은 그 아픔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왜 어린양이 죽어야 하는 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 십자가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처?십자가의 그 아픔을 간직하고, 독이 올라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피 흘리기까지 그 싸움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래서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내어 뱉는 것이다.
* 광주사태에서 자기 자식이, 부모가 죽었다면, 그들은 용서하겠는가? 경상도 사람이 아니고, 광주시민의 아픔으로 광주사태를 보면 말이다.
* 여호와 전쟁 - 사람이 사람에게 당해도 이러한데, 하나님이 사람에게 당하셔서 복수하는 전쟁이 여호와 전쟁이다. 이 글에는 이러한 독이 오른 개념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왜 바로를 강파케 하시고 이스라엘을 치료해야 하는가에 대한 설명이 여호와 전쟁을 말하려 하면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 어떻게 치료를 하시는가? 고난에 합류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유월절에 부두로운 빵이 아니라, 딱딱한 무교병(고난의 떡)을 먹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이 이 글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떻게 구원이라는 말을 쓸 수가 있는가? 하나님이 용사가 되어서 싸워 이겨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한다는 것은 초등학생 수준이다. 그러나 이것은 여호와 전쟁에서의 구원이 아닌 것이다.
* 성경을 이런 식으로 구조 분석적으로 보면, 사실 성경에서 아무 것도 발견할 수가 없다. 그것은 그냥 글을 보는 것이지,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대차 대조적 구조로 하는 것은, 구조를 분석하는 차원에서도 잘못된 것이다. 점진적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다.
* 여호와 전쟁의 이중성은 '강팍'과 '치료'라고 하면 말이 되는 것이다. 둘 다 죄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독 오르심을 알아야 하는데, 이것을 민 25장에는 하나님의 질투하심이라고 되어 있는데, 바알브올 사건으로 간음한 남녀를 꼬챙이로 찔러 죽이는 것이다. 이것을 평화의 계약이라고 하는 것이다.
* 세례요한이 그렇게 외친 것은 하나님의 분노하심을 가슴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에스겔은 왜 그렇게 똥을 먹고, 뒹굴어야 하는가? 성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분노하심을 가득 담고 있기 때문이다.
◈ 성령 받은 사람은, 이러한 독이 올라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균형과 조화' 같은 것은 아예 없는 것이다.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는 것이다(요16:8).
* 여호와의 전쟁을 이렇게, 본 논문처럼 다루는 사고방식 자체가 성령 받은 자의 모습이 아니고, 썩어빠진 세상의 사고방식인 것이다.
▣ [ 구약해석에 따른 위험성과 복음적 해석 ] ▣
1. 해석 작업에 대한 학문적 접근과 그 한계성
* 구조주의를 하는 자들에게는 흠을 잡을 수가 없다. 결론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이 그렇다는 것이다. 교회사 교수들은 개혁을 한다고 박이 터지는데, 이들은 규중궁궐(閨中宮闕)에 있는 것이다. 논문 쓰는 것도 전혀 걱정이 없다. 아무 본문이라도 분석하면 되는 것이다. 안 되는 본문이 어디 있는가?
* 이들의 무기는? 이성(理性)이다.
① 인간의 이성은 대체로 믿을 만하다. ② 인간의 이성은 자기 실수를 실수라고 판단하는 능력이 있다. ③ 인간의 이성은 실수에 대해서 수정할 능력이 있다.
* 구조주의는 이러한 이성을 바탕으로 성경을 문학작품으로 보고 덤벼든다. 그래서 성경을 해석하는데 다음과 같은 틀을 가지는 것이다.
◈ 작가 → 창작과정 → 작품 → 해석과정 → 독자
* 그리고 이것을 거꾸로 하면 비판이 되는 것이다.
◈ 작가 ← 창작과정탐색 ← 작품 ← 해석원칙 ← 독자
* 여기서 해석원칙이라고 하는 것은, 읽는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서 시각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요한 계시록을 집에 누워서 보는 것과 감옥에서 보는 느낌이 다르다는 것이다.
* 목사가 설교를 해도 듣는 사람은 자기에게 맞추어서 듣는 것이다. 유리한 것만 골라서 듣는 것이다. 결국은 이렇게 가면,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라고 결론을 내는 것이다. 그래서 전하는 자가 듣는 자가 의견이 일치하면 필연이 아니고 우연인 것이다. 교통사고가 나는 것처럼 말이다. 말을 많이 하다보면 맞는 것이 있어지는 것이다.
* 언어학을 공부해보면, 사투리라고 하는 것은, 같은 지역에서 말은 많이 하다보니, 공통된 요소가 생겨서 되는 것이다. '마카무라' 라고 할 때, 처음에는 이사온 사람이 모르지만, 차츰 가면서 앞뒤의 말을 분석하면서, 그 용도를 알게되어 자기도 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Ю?만남이 되는 것이다.
*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이해한 것이 그 사람에게도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자아가 타인을 통해서 자아를 재확인하는 과정에 불과한 것이다.
* 그러므로, 성경을 보면서 은혜를 받는 것은, 未璲?평소에 생각하던 것을 발견했기에, 자기의 잘남을 발견함으로 자기를 대견스러워하는 것이다.
* 그래서 성경의 다음과 같은 어떤 특정한 본문을 볼 때마다 은혜를 받는 것이다. 물론 말씀에 대한 지독한 오해이다.
(사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시 86:7)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막 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 그러나 이러한 일치에 대해서 확인할 길은 없고, '일치되었구나!' 하는 당사자의 임의성에 따라야 하는 것이다. 이 일치를 하바머스는 '이해' 라고 했지만, 그러나 데릴라는 이를 비판하여 이해가 아니고, 말을 많이 하다가 생긴 '우연의 일치' 라고 했다.
* 결국 인간은 소리만 질러놓고 겁 많은 강아지처럼 숨어버리는 것이다.
* 인간이 바벨탑을 지을 수 있는 것은, 건축자재가 있어서가 아니고, 언어 때문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언어를 흩어버리신 것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일치된 사고방식을 부정하는 것이다.
* 인간에게는 성장환경이 다르기에 각기 다른 해석원칙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만남이 있는 것은 우연인데, 하나님께서는 이 언어를 끊어버리셨다. 그러면 이 언어 밑에는 과연 무엇이 있는가? 우리는 아직 무엇이 있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 십자가와 언어 - 이것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살펴보면, 하나님이 바벨탑에 속한 아브람을 할례로 죽이시고,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되게 하신 것은, 그 무엇이 따로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그 무엇에서 새로운 언어가 나올 것이 아니냐는, 즉 그 계시언어를 이루는 인간의 존재성이 따로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인 것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예수님이 오시기를 보고 기뻐했기 때문이다.
*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되게 하신 것은, 인간의 존재성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기 약속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오직 약속이다. 아브라함이 믿은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인 것이다.
(롬 4: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 4: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 그러므로 인간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 보여주는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십자가를 보여주는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 이삭의 희생 - 중요한 것은, 아브람은 바벨탑에 소속된 사람이지만, 아브라함은 이삭의 희생 제물로 말미암아 새로 시작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 증거는, 처음에는 아브라함의 씨이지만 나중에는 이삭의 씨가 되는 것이다(창22장).
(창 22:16)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창 22: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그게 성하여 하늘의 별?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창 22: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 이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복의 주체가 아브라함이 아니고, 이삭으로 바뀌는 것이다. 또 이삭 때는 야곱으로 바뀌는 것이다. 야곱이 이스라엘이기 때문이다.
* 여호와 전쟁 -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자는 축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 것이, 바로 여호와 전쟁인 것이다. 그래서 기생 라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고 미리 손들고 항복을 한 것이다.
* 결국 하나님의 뜻은 모든 육을 다 죽여버리는 것이다. 이 육을 죽이는 방법으로, 일차적으로 언어를 끊어버리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언어를 인간의 이성으로 부리겠다는 것이 유대인이고, 그 후손이 구조주의자들인 것이다.
* 성경해석에 있어서, 이러한 구조분석으로는 성경이 해석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인간은 어떤 권력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모습이든지 간에, 지배받고 있는 그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 설화 구조 분석 - 설화 구조 분석이라고 하는 것은, 언어기호들을 재편성해서, 다시 구획하여 재편집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즉, 가을에 농촌에서 고추를 따서 마당에 늘어놓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보이는 것은 고추라는 것이지, 다른 것은 아니다. 다만 늘어놓는 과정을 통해서 인간의 못된 모습을 발견할 수는 있는 것이다.
*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일을 시도하는 인간을 살펴서, 그래서 그 인간의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아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 메를로 퐁티에 의하면, '지각의 주체는 '사유' 가 아니고 '신체성' 에 있다' 라고 했다.
* 인간은 배고프면 횡설수설하지만, 배가 부르면 제정신이 된다. 즉, 인간의 근본은 몸에 있다는 것이다. 즉, 몸의 안정성이 말로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몸이 가장 기본이 된다.
* 배가 고프면, 기도하는 것도, 노는 것도, 아무 것도 안 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자기 중심이고, 그래서 따지고 보면, 세계를 해석하는 것도 자기를 해석하는 것이다.
*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를 표현하는 수단이다. 그래서 문학작품은 자기 이야기라는 것이다. 경험을 하든, 상상을 하든지 간에 말이다. 작가가 이러한 작품을 통해서 불만을 터트리는 것은, 이 세상에는 해답이 없다는 것이다.
* 성경에 '이웃을 사랑하자' 라고 했을 때, '그래, 이웃을 사랑하자' 라고 하면, 별문제가 안되지만, 왜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가를 파악을 해야, 성경을 제대로 파악을 하는 것이다.
* 이렇게 말하면 신학을 너무 사변적으로 한다고 비판을 한다. 성경에서 순종을 하라고 하면, 하면 되지 무슨 이유가 그렇게 많으냐는 것이다. 자, 그러면 과연 말씀에 순종할 사람이 있는가?
(롬 11: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 순종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가두어 놓았다는 것이다. 빠삐용처럼 탈출에 성공한 사람이 없는 것이다. 순종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기 때문이다. 예외는 없는 것이다.
(수 11:20)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
* 가짜 여호와 전쟁 - 하나님께서 저주를 받게 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여호와 전쟁을 말하려면, 하나님의 강팍케 하심과 긍휼을 함께 언급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전쟁해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여호와 전쟁이 아니라, 민중들이 만들어낸 가짜 여호와 전쟁의 결과이다.
* 앞서 언급한 윤 교수의 논문은, 전혀 이러한 하나님의 강팍케 하심과 긍휼이 포함되어 있지 않는 것이다. 이런 것을 사변적인 것으로 여기고 마는 것이다. 독이 올라야만 하는 것이다.
* 지금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하나님의 선택과 인간의 자발적인 구원이다.
◈ 구약을 언약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 모세언약 ]
심판하는 근거 : 율법 어김(의가 없음) 은총 베푼 증거물 : 법궤에 발린 피(의가 있음) 은총 받은 자 : 국가 이스라엘 거부 자 : 이방 나라 거부 정신 : 선택된 국가의 유일 무일성을 거부 심판하는 방법 : 땅에서 정복당함
[ 새 언약 ]
심판하는 근거 : 율법 어김(의가 없음) 은혜 베푼 증거 :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은총 받은 자 : 유대인 중 남은 자와 빈자리에 보충해서 들어가게 된 이방인들 거부 자 : 자기의 종교적 의와 성과를 축적하는 자 거부 정신 : 인간에게도 선할 가능성이 있음을 주장 심판하는 방법 : 심판주가 강림하여 땅이 소멸됨
[ 노아 언약 ]
심판하는 근거 : 땅의 은혜성 확보(무지개 언약) 은총 베푼 증거물 : 정결한 짐승의 희생 은총 받은 자 : 노아 식구 거부 자 : 함과 가나안 거부 정신: 덮어 줌의 원리에 무지했음 심판하는 방법 : 종이 됨
[ 아브라함 언약 ]
심판하는 근거 : 복의 민족 출현(의의 민족 출현) 은총 베푼 증거물 : 할례 받은 자식(이삭)의 희생 은총 받은 자 : 아브라함과 그 자손 거부 자 : 에서 거부 정신 : 선택 행위 무시하고 혈통적 우선권 주장 심판하는 방법 : 노예가 되고 땅에서 유리하게 됨
[ 다윗 언약 ]
심판하는 근거 : 선택된 왕이 따로 존재함(의를 제공하는 왕이 따로 있음) 은혜 베푼 증거물 : 왕과 성전 은총 받은 자 : 유대 나라 거부 자 : 정치적 왕들 거부 정신 : 힘으로 유지되는 국가와 종교를 수립하고자 함 심판하는 방법 : 왕이 사라지고 성전이 사라짐
* 사람이 책을 읽으면서 이미 상상의 이미지를 그려서, 절망과 희망을 나누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여! 저는 힘이 듭니다' 라고 하면서 성경을 보면, 그 사람에게는 성경구절이 절망적인 것과 희망적인 것으로 나누어지는 것이다. 다른 이미지들도 마찬가지이다. 다 대립된 위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 중용(中庸) - 이것이 바로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음과 양의 중용이다. 그리고 플라톤에 있어서는 균형과 조화인 것이다. 인간은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는 것이다.
* 인간이 있는데, 이 인간의 반대 개념은 무엇인가? 짐승, 기계, 외계인 등, 구조주의에서는 자기가 처한 상황에 따라서 여러 가지가 될 수 있다.
* 롤랑 바르트는 기호학의 사각형 법칙을 주장했는데, A가 있다면, 그 반대는, 반(反)A, 비(非)A, 모순(矛盾)A, 이렇게 4가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 인간을 예로 들면, 반인간(천사), 비인간(기계), 모순인간(터미네이트)으로 나눌 수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것이다.
* 삐아제와 하이데거 - 삐아제가 심리학에서 말한 것처럼 이러한 현상은 맞지만, 그러나 왜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는다. 이것을 하이데거가 놀랍게도 밝히는데, 인간은 자기가 존재이기에 영원히 존재로 남으려고 하는데, 시간을 집어넣어서 인간의 존재가 소멸된다는 것이다. 존재이면서도 소멸되는 죽음이 있으니까,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새로운 희망을 가지려고 한다는 것이다.
* 아침에는 천국, 저녁에는 지옥, 이것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이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문학작품이 나오는 것인데, 거기에는 희망과 비전과 심지어 자기 부정의 죽음까지 집어넣어서 새로운 생명을 추구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존재의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불교인 것이다.
* 인간이 계속해서 말을 하지만, 결국은 같은 말의 반복이다(同語反復). 이 동어반복이라는 것은, 계속 같은 말을 한다는 것이 아니고, 아무리 다양한 언어를 사용해도 그 의미가 같다는 것이다.
* 예) 엄마, 배고파 = 어머니, 지금 내 배 가죽이 경련을 일으킵니다.
* 구약과 신약도 이러한 설화적 구조분석의 차원에서 보면, 그 성경책이 문제가 아니고, 이미 해석을 하고자 하는 의식구조 속에 틀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 틀은 하이데거에 의해서 밝혀졌듯이, 살고 싶다는 욕망, 인간 존재의 불안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이러한 틀로 아무리 성경을 본들, 성경에서는 삶의 존재 기반 밖에는 나오지가 않는 것이다.
* 이런 마음가짐으로 순종을 하는 것은, 말씀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순종이고, 그래서 하나님은 롬 11장에 있는 것처럼, 순종치 못하도록 가두어 놓으시는 것이다. 순종해 보았자 영광이 되지를 못하는 것이다.
* 프랑크프르트 학파의 아도르노라는 철학자는, 수학적 형식주의(숫자와 기호로 이루어짐, 예, 3+4=7 )를 말하면서, 숫자나 기호는 참과 거짓의 평가에서 떠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3 은 어떤 평가를 떠나 있기에, 무조건 선(善)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죄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선인이고, 이성이 그 진리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 Fx(a): Fy(b)= Fx(b) : 튁腥?괏ª楓?br /> * 위의 표는 사악한 신이 메시야를 통해서 자비로운 신으로 변해 가는 내용을 수식으로 나타낸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표는 아무리 보아도 작대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앞의 윤 교수의 논문처럼 아무리 성경을 구조적으로 분석해도 복음은 나오지 않는 것이다. 복음이 인간의 이성으로 좌우되는 것이 아니고, 신학의 결론은 이미 십자가의 길로 확정되어 있는 것이다.
2. 신학의 결론은 이미 십자가의 길로 확정되어 있음
3. 복음의 바탕으로서의 구약
(마 26:26)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마 26:27)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마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 우리가 성경을 전혀 모른다 하고서, 초신자로서 이 본문을 보았을 때, 처음에 무엇을 느끼겠는가? "왜 저러지, 왜 자기 몸을 떼어서 주실까? 아, 끝났네, 바로 그것이구나, 그래서 복음이구나!" 신학을 계속해도 바로 이러한 마음이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신자라고 한다면,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을, 이미 십자가로 확정되었음을 알고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구조주의처럼 신학을 해서 구원의 길을 모색하겠다는 것은 버려야 한다.
* 이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몸은 왜 안 되며, 오직 예수님의 몸이어야 하는가를 전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목사가 아니고, 이 사실을 전하는 증인이다. 세례요한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출발을 했으니, 우리도 그 길을 따라 어린양으로 시작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모세언약, 다윗언약으로 가면 구약이 뚫리는 것이다.
(창 2: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 2:10)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창 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창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 물이 동산 가운데서 나오는데, 그 동산에 두 가지 나무가 있다. 하나는 생명나무이고, 다른 하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이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했으니, 생명수 일단 선악나무와는 무관하다. 생명나무에서만 나오는 것이다. 이것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 에스겔의 새 성전이다.
* 에스겔의 새 성전 - 에스겔의 새 성전을 보면, 한 가운데 새 성전이 있고, 그 새 성전에서 물이 나오는 것이다. 물이 나와서 왕이 분배해준 모든 땅을 적신다.
* 인간의 이성 - 그렇다면 인간의 이성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선악과이다. 알아서 안 되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이성을 괜찮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구조주의적 성경해석은 바로 이러한 인간 이성에 기초하고 있음은 명백하다. 버려야 하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 북쪽 나라 주위에 강적들을(앗수르 등) 두심으로, 하나님은 그들의 어설픈 믿음을 소멸시키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실패하게 되어 있다.
* 어설픈 믿음 - 새로운 씨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무너지는 육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삿 2:22) 이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지킨 것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삿 2:23) 그 열국을 머물러두사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시며 여호수아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셨음이 이를 인함이었더라 (왕하 8:20) 여호람 때에 에돔이 배반하여 유다의 수하에서 벗어나 자기 위에 왕을 세운 고로 (왕하 8:21) 여호람이 모든 병거를 거느리고 사일로 갔더니 밤에 일어나 자기를 에워싼 에돔 사람과 그 병거의 장관들을 치니 이에 백성이 도망하여 각각 그 장막으로 돌아갔더라 (왕하 8:22) 이와 같이 에돔이 배반하여 유다의 수하에서 벗어났더니 오늘날 까지 그러하였으며 그 때에 립나도 배반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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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방 나라의 독립과 융성은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즉, 이스라엘로 하여금 언약의 소중성과 죄 용서의 능력이 세상적인 힘보다 월등함을 비교하라고 남겨두신 나라들이다. (책)
◈ 여호와 전쟁 - 사실 이방나라는 허수아비이다. 실제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싸움이다. 즉, 기능적 이스라엘이다.
* 야곱만이 하나님과 씨름했던 유일한 인간이다. 그래서 야곱의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이 되는 것이다. 모세가 오기 전까지는 하나님은 이름을 밝힐 필요가 없었다.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변화되는 것 자체가 이름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야곱은 이제 하나님의 모습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라는 말은, 이제 우리의 이름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 예수라는 의미는? - '죄에서 자기 백성을 건지는 자' 이다. 하나님은 남의 백성은 안 건지시겠다는 것이다. 신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바로 '주, 예수' 인 것이다. 그리고 이 이름이 구약에서는 '여호와' 로 주어진 것이다.
* 여호와 이름 - 아브라함, 이삭, 야곱식대로 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엘리야는 하나님의 이름대로, 하나님식으로 한 번 해보라고 기도한 것이다. 그래서 제단에 불이 붙었다.
(왕상 18:31)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 두 돌을 취하니 이 야곱은 여호와께서 옛적에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왕상 18:32) 저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 단으로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용납할 만한 도랑을 만들고 (왕상 18:36)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 우리의 기도 - '우리 어머니를 구원해 주옵소서' 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옵소서' 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쪽 이스라엘이 쉽게 이방화 된 이유는? (책)
* 이스라엘에 있어서 열 지파가 북쪽 나라를 세운 것은 사실 알맹이가 빠져나간 것이다. 남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는 껍데기이다. 그러나 이들이 남은 것은 오직 다윗언약 때문이다. 그런데 그 북쪽 알맹이는 왕이라는 인간이 국가를 세워 통치하는 이방나라의 모습이고, 그것은 남쪽도 마찬가지이다. 개혁해 보았자, 알맹이는 같은 것이다. 죽어야 한다. 없어지고 세로 세우는 것이다.
* 북쪽 이스라엘의 왕이 중심이 된 일사분란한 정치체제는 남쪽에서도 그대로 하는 것이고, 그래서 북쪽도 망하지만, 남쪽 유다도 망하는 것이다. 오직 다니엘처럼 '인자의 나라' 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의 전쟁은 이방나라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하시는 것이다.
* 그러면 오늘 우리의 싸움터는? 교회이다.
⊙ 왕의 보좌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통솔력이 요구된다. (책)
* 그러나 이 강력한 통솔력은 나라를 망친다. 그 예가 바로 여로보암 왕인데, 여로보암 왕은 백성들의 종교적인 욕망을 달래주기 위해 신당을 세운 악한 왕인 것이다. 그는 솔로몬 왕의 속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 왕상 12장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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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언약은 전쟁하는 왕이기를 요구한다. 자신의 능력으로 전쟁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이름의 용서하심으로 전쟁을 해야 한다. 그래야 이스라엘 왕은 '여호와의 종' 이 된다. (책)
(왕상 8:2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에게 말씀 하시기를 네 자손이 자기 길을 삼가서 네가 내 앞에서 행한 것같이 내앞에서 행하기만 하면 네게로 좇아나서 이스라엘 위에 앉을 사람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사오니 이제 다윗을 위하여 그 허하신 말씀을 지키시옵소서
⊙ 그런데 나라가 강해지면 왕은 교만하게 되고, 왕의 행동을 보아 백성들도 교만하게 된다. (책)
* 큰 교회의 공통된 특징이다. 틀림없다. 목사도 교인들도 교만하게 된다. 자기 교회가 괜찮다고 생각을 하니까, 예수님이 아니라, 교회를 믿는 것이다. 많은 숫자를 믿는 것이다.
(대하 12:1) 르호보암이 나라가 견고하고 세력이 강하매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니 온 이스라엘이 본받은지라
⊙ 다윗의 은혜와 긍휼을 모르는 자는 하나님의 원하는 씨가 아니라 딴 씨임을 확인하는 곳이 가나안 땅이요 약속의 땅이다. (책)
⊙ 레위기 26장에서는 그 이유를 하나님 소유의 땅이라는 차원에서 제시하고 있다. (책)
* 씨(Seed) - 하나님의 용서함을 받은 씨만이 씨이다. 그런데 레위기 26장에서는 땅에 대해서 설명을 하는데, 이 땅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다. 그러니까 지금 이스라엘은 남의 땅에 와서 엉뚱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천국 간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미 천국에 왔다고 생각을 하자는 것이다. 우리가 천국에 왔다면 어떻게 목회를? 지키는 것이다. - 관계자 외 출입금지!!
◈ 신약은 씨밖에 없는데, 구약은 이 씨와 땅을 결부를 시킨다. 그래서 '참된 백성이 누구인가?' 를 확인하는 것이 구약의 흐름인 것이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지금도 주님께서 일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너무나 자주 잊어버립니다. 우리는 다만 주님이 시키는 데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