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사람> 2023년 겨울호
장시 외 1편
맹문재
1.
새들에게 먹이려고 아침마다 사과를 깎아
베란다에 놓는데
어느 날부터 말벌들이 차지했다
말벌들은 머리를 처박고 먹느라고
내가 다가가도 모른다
나는 고무호스로 물을 뿌려 벌들을 애먹이고
빗자루로 살짝 후려쳐 집 밖으로 내쫓지만
죽이지는 못한다
말벌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면서도
죽이지는 않는다
2.
내가 말벌들을 죽이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부부이기 때문이다
내가 한쪽을 죽인다면
나머지 한쪽은 얼마나 외로울 것인가
얼마나 아플 것인가
얼마나 두려울 것인가
얼마나 슬플 것인가
슬픔이 깊어지기 전에 한쪽마저 죽인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슬픔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도 슬퍼하겠지만 세상을 떠나기 전에
슬픔을 버리고 말 것이다
3.
나의 슬픔이 관념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태원 골목에서 확인했다
159명의 참사로 인한 슬픔은
내 손안에 없었다
김수영 시인은 슬픔을 시시하게 여기지 않으려고
넋두리로 말하지 않으려고
장시(長詩)를 안 쓰려고 했다
나는 내일 아침에 또다시 사과를 깎아
베란다에 내놓으리라
장시를 장시를 쓰지 않으리라
장시
1.
지하철에서 내렸는데
출입문 앞에 사마귀 한 마리가 있지 않는가
나는 놀랐지만
출근 시간에 쫓겨 그냥 지나쳐갔다
지하 깊은 곳에 있는 사마귀가
출구를 찾아 빠져나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급히 되돌아가 우산을 펼쳐 넣었다
출구를 나오지 못한 참사가 얼마나 많은가
2.
우산살의 틈새로 기어 나온 사마귀는
우산대 꼭대기까지 기어올라 앉았다
나는 사마귀가 날아갈까 걱정되어
조심조심 걷고
조심조심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사마귀는 말귀를 잘 알아듣는 반려견처럼
나의 발걸음에 박자를 맞춰
걸어가고 있었다
3.
우산을 펼칠 수 없었기에 사마귀는
지하철역 출구에서부터 비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신호대기를 지키고
횡단보도를 건너
나무와 풀들이 풍성한 공원에 도착했는데
풀잎 위에 놓인 사마귀는 힘이 빠졌는지
낯선 세상이어서 당황했는지
나와 헤어지기가 섭섭했는지
별 반응이 없었다
나는 사마귀에게 마음 상태를 물어보고
작별 인사도 나누고 싶었지만
우산도 쓰지 못한 채 뒤돌아서 뛰었다
4.
사마귀가 어쩌다가 지하에 들어갔을까
열차에 부딪히거나
사람들의 발에 밟히지 않은 것이
기적이지 않은가
발에 흙이 묻을까 봐 나를 업고 다니셨다는 할머니를
잊고 있었다
인연은 장시
장시로도 쓸 수 없는 장시
맹문재
1991년 『문학정신』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사북 골목에서』『기룬 어린 양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