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송백(歲寒松柏), 장무상망(長毋相忘)
efootprint 2022. 7. 7. 21:14
세한송백[ 歲寒松柏 ]
추운 시절의 소나무와 잣나무.
즉 어지러운 시대에도 변치 않는 선비의 굳은 지조와 절개.
계절이 추워지면 모든 나무가 잎을 떨어뜨리고 변합니다. 그러나 소나무와 잣나무 같은 상록수는 변치 않고 늘 푸르름을 간직하죠. 그래서 선비의 변치 않는 지조와 절개를 그 푸름에 비유한 말입니다.
공자님 말씀에서 나온 표현인데, 본문은 이렇습니다. “날씨가 추워진 후에라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름을 비로소 알 수 있다.”
歲寒以前一松柏也 歲寒以後一松柏也(세한이전일송백야 세한이후일송백야)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도 하나의 송백나무요, 추워진 뒤에도 하나의 송백나무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 발문에 나오는 글이다. ‘세한도’는 투박한 풍격으로 널리 알려진 조선 후기 문인화의 대표작인데 그림을 그리게 된 사연으로도 유명하다. 추사는 만년에 제주도에 유배돼 많은 고생을 했는데 당시 역관(譯官)으로 중국을 자주 드나들던 제자 이상적(李尙迪)이 스승을 잊지 않고 중국에서 구한 귀한 책들을 보내주자 감격해 그에게 ‘세한도’를 그려주면서 그의 한결같은 의리를 칭송했다.
추사는 송백은 사철 시들지 않기 때문에 날씨가 추워지기 전이나 후나 한결같음을 강조하고 다만 공자께서 세한 이후를 들어 말씀하셨을 뿐이라고 쓰고 있다. 추사는 공자가 특별히 세한 이후를 들어 말한 것은 송백의 절개를 칭송하는 의미도 있지만, 공자 또한 세한에 뭔가 느끼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공자가 세한에 특별한 감회가 있어 그런 말을 했다는 풀이는 조금 과도한 해석이라는 느낌도 주지만, 추사의 귀양 생활이 그만큼 힘들었고 그런 처지에서 받은 온정이어서 더욱 감격스러웠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長毋相忘(장무상망)은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제주도 유배시절인 1844년에 우선 이상적(藕船 李尙迪, 1804-1865)에게 그려준
세한도(歲寒圖, 국보 제180호)에 찍혀 있는 인장입니다.
세한도(歲寒圖는
추사 연구의 대가였던 후지츠카 지카시(藤塚鄰)가
일본에 가져간 것을
근대 최고의 서예가인 소전 손재형(素筌 孫在馨, 1903-1981)이 1944년 전쟁의 아수라장 속에서
일본에 건너가 그를 설득해 가져온 작품입니다.
그 후 후지츠카의 집은 미군 폭격에 잿더미가 되었고, 그가 소장했던 많은 추사 관련작품도
한 줌의 재가 되었습니다.
존추사실(尊秋史室)이란 당호(堂號)를 썼던
손재형 선생의 열정 덕분에
세한도(歲寒圖는 비극적 운명을 모면한 것입니다.
세한도(歲寒圖에는
뿐만 아니라 스승과 제자 사이에 전해지는
아름다운 마음이 담겨 있어
시대를 초월한 향기를 지금도 전하고 있습니다.
세한도(歲寒圖에는
오른쪽위 제목 옆에 찍힌 백문인(白文印) ,
세한도(歲寒圖와 서문 형식의 글을 이어진 자리에
찍힌 주문인(朱文印),
글 끝부분에 찍힌 주문인 그리고 오른쪽 아래
귀퉁이에 찍힌 주문인 등
4과의 인장이 찍혀 있습니다.
세한도(歲寒圖)는
바다 건너 외딴섬에 나락처럼 떨어져 있는
자신을 위해 머나먼 청나라에서
귀한 책을 구해 보내준
이상적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추사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 것이라고 합니다.
추사는 세한도(歲寒圖에서
‘권세와 이익을 위해 모인 자는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성글어진다.’는 사마천의 말과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는 공자의 말씀을 들어
성인께서 특별히 소나무와 잣나무를 칭찬한 것은
단지 시들지 않는 곧고 굳센
정절 때문만이 아닐것입니다.
'겨울이라 마음속에 느낀 바가 있어 그런 것이다.’라는 말로 이상적이 세속의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는
의리를 갖고 있음을 칭찬하였습니다.
“고맙네! 우선, 이 세한도(歲寒圖를 보게나(藕船是賞)”
이상적은 이 작품을 받아들고 눈물을 흘리며 추사에게
"아!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권세나 이익을 쫒지 않고 스스로 초연히 세상의 풍조에서 벗어났겠습니까?
다만 보잘것없는 제 마음을 스스로 그칠 수 없어
그런 것입니다"라는 편지를 올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작품 오른쪽 귀퉁이에
'길이 스승님의 가르침과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뜻을 담아 장무상망(長毋相忘) 인장을 찍어
스승을 향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남겼습니다.
또한 그는 세한도를 청나라에 가지고 가
그곳 문인 16인의 글을 받아 스승의 뜻을 기렸습니다.
“우선! 이런 일은 세상에 언제나 있는 일이 아닐세”(세한도의 추사글)
“아닙니다. 스승님! 이 모든 것은 정치판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맞지 않으므로
저절로 맑고 깨끗한 곳에 계신 분에게 돌아가기 마련입니다.
이 그림과 글을 본 사람들이 제가 정말로 속된 세계에서 벗어나 권세와 이익의 밖에서 초연하다고 생각할까 두려울 뿐입니다.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당치 않은 일일 뿐입니다.”
(이상적이 추사에게 올린 편지글에서)
이 인장에 쓰인 장무상망(長毋相忘)은
한나라때 동경(銅鏡)에 보이는 장무상망 장상사 무상망(長相思 毋相忘, 오랫동안 서로 그리워하고 서로 잊지 않다)
불구상견 장무상망(久不相見 長毋相忘, 오랫동안 서로 보지 않아도 길이 잊지 않다)
견일지광 장무상망(見日之光 長毋相忘, 떠오르는 햇빛처럼 길이 서로 잊지 않다.
등의 글귀와 감천궁(甘泉宮)에서 출토된
장무상망이 새겨진 기와에서 빌어온 것으로
인장의 형태를 네모나게 하고 자법(字法)을 반듯하게 바꾼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毋(무)자는 ‘없다’ ‘말다’라는 뜻으로
無자와 통하는 글자입니다.
이 인장은 추사는 물론이며 추사의 스승인
담계 옹방강(覃谿 翁方綱, 1733-1818)과
추사와 동갑내기인 아들 성원 옹수곤(星原 翁樹崑, 1786-1815)에게도 같은 글귀의 인장이 있습니다.
또 추사의 평생지기인 이재 권돈인(彛齋 權敦仁, 1783-1859)과 추사 학예파의 형당 유재소(蘅堂 劉在韶, 1829-1911), 역매 오경석(亦梅 吳慶錫, 1831-1879) 등도 이 글귀의 인장을 즐겨 사용했다고 합니다.
헌종이 소장한 인장을 모은
보소당인존(寶蘇堂印存)에도 비슷한 인장이 많이 실려 있다고 합니다.
이상적이 청나라 문인들이 세한도(歲寒圖에 남긴 글을 낱장으로 베껴 놓은 둘째 장과 셋째 장 그리고 송나라 신기질(辛棄疾, 1140-1207)의 사(詞) 축영대근(祝英臺近)을
낱장으로 쓴 둘째 장과 셋째 장을 잇는 부분에도 같은 인장을 찍었습니다.
세한도속 한 귀퉁이에 자리하고 있는 이 장무상망(長毋相忘)의 붉은 색 네 글자는
스승에 대한 제자의 도리는 무엇이며
또 세속 권력이나 이익과는 무관하게 몸과 마음의 의리를 지키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듯한 인장입니다.
‘장무상망(長毋相忘)’은 이처럼
스승 추사 김정희와
우선 이상적의 변치 않는 의리와
감동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인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