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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스 산맥의 땅 밑에 숨어있던 감자가 유럽으로 건너와 전 세계로 퍼지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 오해와 편견, 그리고 어려움을 극복한 인간의 의지가 숨어 있다. <출처: gettyimages>
감자! 우리에게 매우 친근하고, 온 세계 사람들의 식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기에 아주 오랜 옛날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우리 밥상 위에 있었을 것만 같은 식용 작물. 하지만 감자가 원산지를 벗어나 세계로 퍼지게 된 것은 농경의 긴 역사에 비하면 정말 최근에 벌어진 일이다. 그것은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 소위 ‘신대륙’의 발견과 함께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아메리카 대륙 출신인 옥수수, 고구마, 고추, 토마토, 초콜릿 등과 함께 감자는 넓은 의미의 ‘세계화’의 결과이며, 금과 은을 찾아 떠났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정복자들이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발견하여 전파한 ‘신세계’의 가장 귀중한 보물이기도 하다.
초콜릿이나 토마토, 또는 고추가 없었더라면 우리 식탁이 그저 조금 더 단조로웠을 뿐일지 모르지만, 옥수수, 고구마, 그리고 감자가 없었더라면 많은 사람들이 아직 굶주림과 그에 따른 병으로 고생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아마도 세계 인구가 오늘날처럼 폭발적으로 늘어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데스 산맥의 땅 밑에 숨어있던 감자가 유럽으로 건너오고, 이어서 아시아, 아프리카 등, 말 그대로 이 세상 끝까지 전해지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 오해와 편견, 그리고 여러 어려움을 극복한 인간의 의지가 그 뒤에 숨어 있다.
콜럼버스를 비롯한 유럽의 탐험가들이 ‘새로운 세계’라고 부른 땅에 도착해서 만나게 된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들의 주식은 옥수수였다. 옥수수는 남북 아메리카 두 대륙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9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옛날부터 원주민들이 재배하고 있었고, 반죽을 이용한 전병에서 수프, 발효시킨 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요리되어 소비되고 있었다. 그러나 감자는 ‘신대륙’에서조차도 널리 알려진 먹거리는 아니었다. 옥수수와는 달리 감자는 남아메리카 대륙 안데스 산맥의 고지대에서만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잉카 화가 구아르만 포마 데 아얄라(Guarman Poma de Ayala)가 그린 감자 심는 장면(1615∼1616년). 감자는 이미 기원전 3000년경부터 잉카 문명 지역에서 재배되고 있었다.
감자는 이미 기원전 3000년경부터 그 지역에서 재배되고 있었다. 잉카인들이 오늘날의 페루 지역을 점령하여 대제국을 세운 기원후 1400년 무렵, 그곳 주민들은 색, 크기, 맛, 성장 조건이 다양한 여러 품종의 감자를 재배하고 있었고, 잉카 제국의 언어인 케추아(Quechua)어로 ‘파파스(papas)’라 불렸던 감자는 옥수수, 고추, 때로는 여러 육류를 곁들여 주된 식량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전설로 전해오던 잉카 제국의 금과 은을 노리고 온 에스파냐의 피사로(Francisco Pizarro, 1475~1541)가 제국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유럽인들은 처음으로 감자와 만나게 되었다. 피사로와 그의 병사들은 그때 감자를 처음 맛보게 되고, 그런대로 먹을만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맛본 이 식물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는 잘 알 수가 없었다. 감자는 그때까지 유럽 사람들이 소비하던 작물과는 다른 점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16세기 유럽인들에게 덩이줄기 식물 자체는 매우 낯선 것이었다. 물론 그들도 당근이나 순무를 먹었지만, 감자는 이 두 가지 뿌리와는 생김새가 매우 달랐다. 특히 유럽인들에게 생경했던 것은 그 재배 방식이었다. 그들이 알던 대부분의 작물은 씨앗을 뿌려서 재배하는 것이었는데, 안데스 산맥의 주민들은 감자 자체를 잘게 잘라 심었고, 신기하게도 그 작은 부분이 하나의 완전한 식물로 자라났던 것이다. 유럽인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이러한 특성들은 감자를 둘러싼 많은 오해와 편견의 원인이 된다.
유럽, 특히 프랑스의 18세기를 흔히 ‘계몽주의 시대’라고 부른다.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이 세상 모든 현상과 사물, 제도에 대한 합리적 인식과 개혁을 지향하는 계몽주의 정신은 프랑스에서 1751년에서 1772년까지 전 17권의 텍스트와 11권의 동판화보, 그리고 몇 권의 부록과 찾아보기를 포함해 전 35권으로 출간된 서양 최초의 대규모 백과사전인 달랑베르(Jean Le Rond d’Alembert, 1717~1783)와 디드로(Denis Diderot, 1713~1784)의 [백과전서]에서 그 종합적인 위용을 확인할 수 있다. 위에 언급한 달랑베르와 디드로 외에도,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를 비롯한 수백 명의 프랑스 학자들이 집필하였고 다루는 항목의 표제어만도 어림잡아 7만 개에 달하는 이 사전은 당시 유럽이 인간, 자연, 사회에 대해 가지고 있던 모든 지식의 집합체라고 말할 수 있다.
[백과전서]에는 ‘감자’를 뜻하는 프랑스어 단어인 ‘pomme de terre’라는 표제어를 가진 항목 두 개가 잇달아 실려 있다. 첫 번째이자 대표 항목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조쿠르(Louis de Jaucourt, 1704∼1779)가 집필한 ‘Pomme de terre, (Botan.)’ 항목이다. ‘Botanique’, 즉 ‘식물학’이라는 항목의 분류에 걸맞게 조쿠르의 기술은 매우 객관적이고 학술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저자는 먼저 우리가 먹는 부분인 뿌리―사실은 덩이줄기이지만 당시에는 아직 뿌리와 덩이줄기를 구별할 줄 몰랐다―의 모양을 묘사하고, 이어서 학명(Solanum tuberosum esculentum)을 소개한다. 이어서 이 식물의 여러 부분, 즉 뿌리, 줄기, 잎, 꽃 등을 오늘날의 어떤 백과사전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체계적이고 상세하게 묘사한다. 끝으로 이 식물의 원산지를 언급하고,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유럽인들이 각기 감자를 소비하는 방식을 소개한다.
두 번째는 브넬(Gabriel François Venel, 1723∼1775)이 집필한 ‘Pomme de terre, Topinambour, Batate, Truffe blanche, Truffe rouge, (Diete.)’라는 긴 제목을 가진 항목이다. ‘Diététique’, 즉 ‘식생활’이라는 분류에 역시 걸맞게 이 항목은 프랑스에서 감자가 소비되는 방식을 주로 다루고 있고, 제목이 이렇게 긴 이유는 프랑스에서 사용되는 감자의 다양한 명칭을 소개하기 위해서다. 조쿠르는 원래 의학자 출신으로서 [백과전서]의 항목들 가운데 약 4분의 1을 집필하고, 1759년 이후 [백과전서]의 실질적 편집자 역할을 맡은 사람이다. 또 브넬은 의학, 약학, 화학에서 당시 최고 전문가로서 화학자 라부아지에의 스승이기도 했다. 이 두 항목은 1760년대에 프랑스에서 감자에 대해 최고의 지식인이자 전문가들이 가지고 있던 견해, 그렇지만 오류와 편견에서 반드시 자유롭지만은 못했던 지식을 보여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감자는 그 명칭이 너무도 다양했다. 먼저 [백과전서]의 이 두 항목을 대표하는 표제어이자, 오늘날에도 ‘감자’를 일컫는 가장 대표적인 프랑스어 어휘인 ‘Pomme de terre(폼 드 테르)’가 있다. 이 단어는 ‘땅(terre)’이라는 말과 ‘사과’ 또는 ‘열매(pomme)’라는 말이 합쳐진 것으로, 18세기에야 프랑스어에 등장하는 어휘이다. ‘감자’가 에스파냐 사람들에 의해 전해져서 16세기 말부터는 독일에서 재배되었고 프랑스에는 독일을 거쳐 수입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pomme de terre’는 마찬가지 뜻인 네덜란드어 ‘aardappel’이나 독일어 ‘erdapfel’의 직역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 두 단어들 역시 라틴어 어휘인 ‘malum terrae’를 옮긴 것일 가능성이 높다. ‘Malum terrae’는 13세기, 다시 말해서 감자가 유럽에 수입되기 훨씬 전부터 땅 속에서 자라나는 여러 종류의 덩이줄기 및 뿌리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어 왔다. 그러던 것이 언젠가부터 감자를 지칭하게 되었는데, 이처럼 학자들이 사용한 학명마저 지칭 대상이 여럿이라는 점은 유럽인들이 감자의 정체를 파악하는 일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감자와 비슷한 식물로 혼동된 예루살렘 아티초크. <출처: (cc) H2ase at en.wikipedia.org> |
고구마는 감자보다 일찍 에스파냐에 도착했고, 비슷한 생김새로 혼동을 일으켰다. |
비싸고 귀한 식재료 트러플. 트러플이 감자와 비교된 것은 둘 다 땅속에서 발견되고 검은색을 띠었기 때문이다. |
브넬이 두 번째 이름으로 제시한 ‘topinambour(토피낭부르)’는 실제로는 감자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전혀 다른 종류의 식물이다. 학명은 ‘Helianthus tuberosus’, 영어로는 ‘jerusalem artichoke’, ‘sunroot’, ‘earth apple’ 등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예루살렘 아티초크’라는 이름은 그 맛이 아티초크(Artichoke, 엉겅퀴과 꽃식물)와 비슷하다는 데서 왔지만 이 식물은 예루살렘이나 이스라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실제로는 이 식물도 아메리카 대륙에서 전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근대 초기까지 유럽인들은 신기한 사물들은 모두 아시아에서 왔다고 믿는 경향이 있었다. 다른 예를 들자면 옥수수는 한동안 ‘터키 밀(turkish wheat)’이라고 불렸다. ‘Earth apple’은 위에서 보았다시피 ‘pomme de terre’, ‘aardappel’, ‘erdapfel’과 같은 뜻이다. 실제로 이 작물도 ‘malum terrae’라는 라틴어 이름으로 불린 적도 있다. 우리말로도 ‘돼지감자’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마찬가지로 땅 속에서 덩어리의 형태로 자라나며, 또 마찬가지로 아메리카 대륙에서 ‘구세계’로 전해진 이 식물과 ‘감자’ 사이의 혼동은 이해할 만하다.
세번째 명칭인 ‘batate’ 역시 ‘감자’와는 유전적으로는 별 관계가 없는 별개의 식물이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Batate’라는 이름의 기원이 된 식물은 1500년경 유럽인들이 그곳에 진출할 때 카리브해 연안 및 페루의 저지대를 포함한 아메리카 대륙의 따뜻한 지역에서 널리 지배되던 것으로, 카리브해 지역에서 많이 쓰이던 타이노(Taino) 언어로 ‘batatas’라고 불렸다. 이는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고구마다. 고구마는 1492년 이후 곧바로 에스파냐에 도착했고, 그 달콤한 맛 때문에 빨리 그리고 상당히 인기를 끌었다. 이어서 감자가 도착하자 사람들은 ‘batatas’와 ‘papas’라는, 비슷하게 생긴 이 두 식물을 혼동하게 되었다. 아마도 어릴 때 감자와 고구마를 구별하기 어려워했던 사람이 필자만은 아닐 것이다. 이 두 단어의 헷갈리는 결합에서 프랑스어로는 ‘patate’, 영어로는 ‘potato’라는 단어가 생겨났고, 이 단어는 점차 고구마보다는 감자를 지칭하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이름을 빼앗긴 셈이 된 고구마에게는 억울하겠지만, ‘달콤한 감자’, 즉 ‘patate douce’, 또는 ‘sweet potato’라는 단어가 새로 만들어져서 오늘날 고구마를 지칭하는 대표적인 단어가 되었다.
브넬은 이어서 ‘흰 트러플’, 또는 ‘붉은 트러플’이라는 명칭을 소개한다. ‘송로버섯’이라고 흔히 번역되는 트러플(Truffle)은 감자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귀하고 비싼 식재료로서, 그 뛰어난 향 때문에 서양 음식에서 매우 각광을 받는 재료이다.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정복자들은 감자를 보자마자 그것을 트러플과 비교했다. 아마도 그것은 둘 다 땅 속에서 발견되고, 게다가 감자의 어떤 종은 검은색을 띠고 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탈리아인들도 감자가 수입되자 그것을 ‘작은 트러플’을 의미하는 ‘tartuficolo’, ‘tartufoli’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렀다. 또 이 단어가 독일로 넘어가면서 변화되어 오늘날의 ‘kartoffel’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다양한 명칭은 감자가 유럽인들에게 얼마나 당혹스럽고 이해하기 힘든 물건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운 사물들은 또한 많은 편견들을 낳기 마련이다.
감자가 처음 유럽에 들어왔을 때 그것은 악마와 관련이 있는 미심쩍고 수상한 작물로 오해를 샀다. 특히 중세 유럽에서 흑마술의 재료로 사용되었던 벨라도나와 비슷하게 생긴 감자꽃(사진)은 이러한 의심을 더욱 부추겼다.
유럽에 들어온 감자는 처음에는 별로 인기를 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상당히 꺼려하는 식물이었다. 울퉁불퉁하고 못생겼으며 때로는 시커먼 외모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땅 밑에서 자라난다는 점, 그리고 별다른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잘 자란다는 점까지. 아직도 미신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유럽인들에게 감자는 뭔가 악마의 계략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미심쩍고 수상한 느낌을 주었다. 특히 중세 유럽에서 흑마술의 재료로 사용되었고 실제로 독성이 강한 벨라도나(Belladonna, 아름다운 귀부인이라는 뜻)의 꽃과 감자의 꽃이 생김새가 비슷하다는 점은 의심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첫 번째 편견은 감자가 나병을 일으킨다는 생각이었다. 나병은 유럽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병 가운데 하나였다. 이는 아마도 감자의 껍질이 매우 거칠고 울퉁불퉁해서 나환자들의 피부를 연상시킨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감자가 일찍 수입된 프랑스의 몇몇 지방에서는 이 이유를 들어 당국이 감자 재배를 금지하기도 했다. 두 번째 편견은 감자가 미약, 즉 성적 흥분제의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었다. 사실 처음 이런 의혹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토마토와 고구마였는데, 감자는 고구마와 생김새가 비슷했기 때문에 덩달아 의심을 받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 아일랜드와 북유럽 등 감자를 많이 먹게 된 지역에서 높은 인구 성장률을 보이자, 이것도 감자의 최음 효과 때문이라고 해석되기도 했다. 이는 물론 감자 덕택에 그 지역 주민들의 영양 상태가 좋아졌기 때문일 따름이다.
빈센트 반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The Potato Eaters)> 1885년, 캔버스에 유채, 82 x 114cm, 반 고흐 미술관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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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무시무시한 의혹에 비하면 브넬이 [백과전서]의 항목에서 보여주는 편견은 그다지 심각한 수준은 아니다. 조쿠르가 감자를 “유럽인들은 재 밑에서 익혀서 껍질을 벗기고 양념을 해서 먹으며, 설탕당근(panais, parsnip, Pastinaca sativa)과 맛이 비슷하다”고 상당히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는데 반해, 브넬의 평가는 별로 호의적이지 못하다.
이 지역[프랑스의 동북부] 주민들, 특히 농민들은 한 해의 대부분 동안 이 식물의 뿌리를 가장 일반적인 식량으로 사용한다. 그들은 감자를 끓는 물이나, 오븐, 또는 재 밑에서 익히기도 하고, 그것으로 여러 가지 투박하고 촌스러운 잡탕을 만들기도 한다. 조금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버터로 양념을 하거나, 고기와 함께 먹거나, 일종의 튀김[벌써 프렌치프라이가 발명된 것일까?]을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어떻게 요리하건 간에 이 뿌리는 맛이 없고 잘 부스러진다. 이것은 결코 쾌적한 음식이라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그저 양분을 섭취하는 것 이상을 바라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푸짐하고 건강한 먹거리를 제공해준다. 감자가 방귀를 뀌게 만든다는 비난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농민과 노동자의 건강한 신체에 방귀쯤이야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감자는 그저 돼지 먹이로나 어울리고, 서민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먹는 음식이라는 생각은 생명력이 끈질겼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에도 감자를 고급 식재료로 쳐주지는 않는다. 잠깐 옆길로 빗나가자면, 그래서인지 서양의 유명한 화가들 가운데 감자를 소재로 한 작품을 남긴 이는 별로 없다. 하지만 두 명의 뛰어난 예외가 있으니, 여러 의미에서 ‘민중화가’라는 칭호가 어울리는 19세기의 밀레(Jean-François Millet, 1814~1875)와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가 그들이다.
어쩌면 개인적인 취향에 불과한 이 편견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는 두 저자 모두 감자의 원산지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에 따르면 감자는 북아메리카의 버지니아에서 유럽으로 들어왔고, 이는 상당 기간 동안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지지했던 의견이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감자의 원산지는 분명히 오늘날 칠레와 페루에 해당하는 안데스 산맥의 고지대다. 버지니아 기원설이 널리 퍼지게 된 주된 원인은 1597년 발간된 존 제라드(John Gerard)의 [식물도감(Great Herball, or Generall Historie of Plantes)]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저자는 고구마와 구별하기 위해 감자에 ‘버지니아 고구마(Battata virginiana)’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감자가 에스파냐 사람들을 비롯한 여러 항해가들에 의해 당시 잉글랜드의 식민지였던 버지니아에 수입되었고, 이어서 영국으로 전해졌다는 설이 있었지만 이 설은 근래 부정되고 있다. 오늘날에는 감자가 북아메리카 동부에 소개된 것이 영국에 소개된 것보다 나중의 일이라고 본다. 반면, 거의 같은 시기인 1601년에 앤트워프에서 발간된 [희귀 식물(Rariorum Plantarum Historia)]에서 샤를 드 레클뤼즈(Charles de l’Écluse)는 감자를 정확히 묘사하고, 그 기원에 맞게 ‘Papas peruanorum’이라는 정확한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요컨대 조쿠르와 브넬은 어떤 이유에서건 제라드의 잘못된 학설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존 제라드의 [식물도감]에 묘사된 감자. |
샤를 드 레클뤼즈의 [희귀식물]에 묘사된 감자. |
감자를 둘러싼 여러 편견 때문에, 17세기와 18세기 유럽의 농부들은 감자 재배에 그다지 열성적이지 않았다. 가장 큰 예외는 아일랜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일랜드의 춥고 습한 기후는 감자 재배에 매우 적합했다. 하지만 17세기 중반 무렵, 아일랜드에 감자가 널리 퍼져 재배된 데는 이러한 자연 조건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오랜 기간 동안 아일랜드는 잉글랜드와의 갈등과 전쟁에 시달려 왔다. 17, 18세기에 아일랜드 대부분의 토지는 잉글랜드에 거주하는 지주들의 소유였고, 지주들은 환금성이 높은 수출용 작물 재배나 가축 사육을 위해 그 땅을 사용했다. 즉 농민들의 실제 필요와는 상관없이 토지가 사용되었다는 뜻이다. 끊임없는 기근과 병에 시달리던 아일랜드 농민들에게 재배를 위한 넓은 땅이나 농기구도 필요 없고, 돌볼 필요도 별로 없는 감자야말로 하늘의 선물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감자는 땅속에서 자라고 오랫동안 보관되기 때문에, 서리를 비롯한 악천후나 경우에 따라 전쟁의 말발굽에서도 상당히 안전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한편,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는 정부가 강력하게 개입하여 감자 재배를 권장하기도 했다. 계몽주의 이상을 받아들여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진한다는 구실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던 ‘계몽전제군주’의 한 사람인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1712~1786)는 1756년 국민들에게 감자 재배를 강요하는 ‘감자 칙령’을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입맛이 까다롭기로 이름난 프랑스, 특히 ‘프렌치프라이’라는 유명한 요리법의 고향인 프랑스에서 감자 재배가 그다지 활발하지 않았다는 점은 [백과전서]가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바꿔놓기 위해 여러 계몽주의자들은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 가운데서도 파르망티에의 기여가 결정적이었다.
감자의 보급과 대중화에 기여한 프랑스의 계몽주의자이자 농학자 안투안 파르망티에.
앙투안 파르망티에(Antoine Parmentier, 1737∼1813)는 프랑스 북부의 생디디에라는 소도시에서 태어나서 약학을 공부하고, ‘7년 전쟁’(1756∼1763) 동안 종군 약사로 복무하게 된다. 프로이센군의 포로가 되어 독일에서 1년이 넘도록 감금생활을 하면서 거의 감자만으로 끼니를 때워야했던 그는, 그때 감자가 가진 식품으로서의 장점을 몸소 체험하게 된다. 프랑크푸르트에서 화학을 더 연구한 뒤, 1763년 프랑스로 돌아온 파르망티에는 감자의 보급을 위해 힘쓴다. 1769년 대흉작을 겪은 후, 1771년 브장송 아카데미는 ‘기근의 참화를 줄일 수 있는 식량 연구’라는 주제로 논문을 현상 공모한다. 그리고 감자를 비롯한 여러 식물에서 쉽게 전분을 분리해낼 수 있다는 것을 밝힌 파르망티에의 논문이 상을 받게 된다. 그 논문에서 파르망티에는 “지난 전쟁에서 우리 병사들은 감자를 상당히 많이 먹었다. 과도하게 섭취한 경우도 있었지만 부작용은 없었다. 나도 2주 동안 감자만 먹고 지낸 적이 있었지만 피로하거나 아프지 않았다”고 밝혔다. 아이러니하게도 브장송 법원은 1748년 감자 재배 금지령을 내렸고 그 금지령은 여전히 유효했다. 1772년 파리 의과대학은 감자 소비가 위험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다. 파르망티에는 <감자의 화학적 분석(Examen chimique de la pomme de terre)>(1773), <감자로 빵 만드는 방법(Manière de faire le pain de pommes de terre)>(1778) 등의 연구서를 발표한다.
계몽주의자들의 특징은 그들의 삶이 이론과 실천을 조화롭게 결합시킨다는 점에 있다. 파르망티에도 마찬가지여서 그의 업적은 단순히 이론적인 영역에 머무르지 않았다. 하루는 파르망티에가 친구들을 초대해서 만찬을 베풀었는데, 그날 차려진 음식들은 모두 감자를 재료로 한 것들이었다. 초대받은 손님은 디드로와 함께 [백과전서]의 책임편집자였던 달랑베르, 화학자 라부아지에, 그리고 벤저민 프랭클린 등이었다고 한다. 다른 계몽주의자들의 마음을 얻은 그는 이제 국가의 최고 권력에 접근한다. 1785년 8월, 베르사유에서는 루이 16세의 생일을 축하하는 파티가 한창이었다. 그때 수많은 귀족들을 헤치고 한 남자가 연보랏빛 꽃으로 만든 꽃다발을 국왕에게 바친다. 국왕은 그 꽃―바로 감자꽃―을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가슴에 꽂아준다. 감격한 파르망티에는 “폐하, 이제 굶주림이란 불가능합니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또한 국왕을 따라하려는 수많은 귀족들이 감자꽃을 찾아서 그 천대받던 식물의 꽃값이 무려 금화 열 냥까지 올랐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다진 고기와 으깬 감자로 만드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가정요리 아쉬 파르망티에. <출처: (cc) Leon Brocard at en.wikipedia.org>
이제는 서민들에게 다가갈 차례다. 파르망티에의 주장에 동의한 루이 16세가 파리 근교의 땅을 하사했고, 파르망티에는 거기에 감자를 재배했다. 그리고 그 밭에 경계를 서는 병사들을 배치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낮에만 감시를 하는 척하다가 밤에는 사라져버렸다. 호기심을 자극해서 서민들이 병사들로 하여금 지키게 할 만큼 이 귀중한 ‘금지된 과일’을 훔쳐다 맛보고, 또 재배하도록 하는 것이 실제 목표였기 때문이다. 몇몇 귀족들은 파르망티에의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에서 감자를 ‘파르망티에르’라고 부르자고 제안하기도 했다고 한다. 루이 16세는 그에게 생-미쉘 훈장을 수여한다. 파르망티에의 이름은 ‘아쉬 파르망티에(hachis parmentier)’라는, 다진 고기와 으깬 감자로 만드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가정요리를 비롯한 여러 요리 이름에 지금도 남아 있다.
파르망티에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788∼89년 프랑스는 극심한 흉작과 기근에 시달리고, 여러 가지 사회 불안은 혁명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혁명이 한창 진행 중이던 1794년 한 여인이 오로지 감자만을 주재료로 삼은 31가지 요리를 소개하는 요리책을 출간한다. 그 책의 제목은 [혁명파 요리사(La cuisinière révolutionnaire)]다. 파르망티에의 노력이 마침내 민중에게도 뿌리를 내린 것이다.
오해와 편견에서 시작해 오늘날 우리 식탁에 놓이게 된 감자의 전래는 뜻밖에 ‘지식’에 대한 성찰을 제공한다. [백과전서]의 첫 번째 권에 디드로는 <스키티아의 양(Agnus scythicus)>이라는 항목을 집필, 게재한다. 이 항목의 주제가 되는 ‘스키티아의 양’이란 페르시아의 동쪽에 위치하고 유럽인들에게는 야만 지역을 대표하는 스키티아 또는 스키타이에서 발견되며 양(羊)처럼 생겼다고 전해지는 특이한 식물이다. ‘양’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 식물은 겉모습이 양처럼 생겼고 털로 뒤덮여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근처에서는 다른 식물들이 자라나지 못하며 늑대들이 즐겨 먹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학자들이 조사해 본 결과, 이 식물은 그저 상당히 긴 솜털로 뒤덮인, 고사리와 닮은 식물에 불과했다.
디드로의 주된 관심은 실제로는 이 허황된 식물의 실체보다는, 이러한 전설이 생겨나고 전해져서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된 과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디드로에 따르면 처음으로 이 식물을 소개한 사람은 17세기의 유명한 자연학자이자 예수회 수도사 아타나시우스 키르허(Athanasius Kircher)다. 이어서 당대의 유명한 학자들, 심지어는 베이컨마저도 키르허의 ‘권위’만을 믿고 이 허황된 이야기를 사실로 받아들여 전파하게 되고, 또 이 이야기는 이 학설을 지지하는 바로 그 유명한 사람들의 ‘권위’에 힘입어 점점 의심할 수 없는 진리로 굳어져 갔다는 것이다. 결국 디드로가 이 항목을 통해서 보여주려던 것은 아무리 권위자의 것일지라도 모든 말과 글, 심지어는 학술 서적과 백과사전의 항목조차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합리적인 비판의식을 통해 체로 치듯 걸러봐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직접 보았듯이, 책임편집자 디드로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백과전서]의 항목들도 오류와 편견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오늘날의 모든 지식 생산자와 보급자들, 그리고 소비자들도 항상 깊이 고민해 볼 일이다.
자료출처 : 네이버캐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