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꺽정' 작가 벽초 홍명희가 북한으로 간 까닭은?
대하소설 '임꺽정'으로 이름을 날린 벽초 홍명희(1888~1968년)가 월북한 까닭은?
작가 홍명희는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한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에 김구 선생 등과 함께 참석한 후 북한에 눌러앉아 같은해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탄생과 함께 부수상 자리에 오른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북한에 남게 된 까닭은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1952년부터 1955년까지 북한 문화선전성 제1부상(차관)을 지내며 부수상이었던 홍 선생을 자주 만났다는 고려인 정상진씨는 2일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홍 선생이 북한의 친일파 완전청산을 높이 사 북한에 남게 됐다는 취지의 말을 하는 것을 직접 들었다"고 밝혔다.
정씨는 "어느 날 홍 선생을 찾아가 북한에 남게 된 이유를 묻자 '나에게는 공산주의자냐 민족주의자냐란 잣대보다는 애국자냐 친일분자냐란 잣대가 중요하다. 이승만은 대통령이 된 후 친일파를 끌어안고 춤췄다. 하지만 김일성은 친일파를 철저히 제거했다. 이승만은 일본과 싸운 적이 없지만 김일성은 일본과 싸웠다'라고 대답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홍 선생은 '나는 공산주의를 모른다. 다만 공산주의자들이 한 일(친일파 숙청)은 지지한다'고 말하기도 했다"면서 "홍 선생은 조선노동당에 가입하지도 않은 채 무소속으로 지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1955년 소련파 숙청 이후 소련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홍 선생이 그 뒤 북한 정권의 변화(김일성 독재화)에 대해 어떤 생각을 품게 됐는지 등에 대해선 모른다"고 말했다.
정씨는 특히 "양반지주 계급 출신인 홍 선생이 월북해 부수상에 올랐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이태준, 황철, 문예봉, 최승희, 김순남 등 남한의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1948년부터 다음해까지 월북했다"면서 "홍 선생이 스스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많은 남한 문화예술인들의 월북을 초래했다는 점에서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그는 또 "홍 선생은 '명예직' 부수상 자리에 있으면서 산하 기관장들로부터 직접 보고를 받은 적이 없었으나 나는 홍 선생의 소설을 읽고 감명을 받아 정부 청사에 들어갈 적마다 그를 찾아 많은 담소를 나누곤 했다"면서 "홍 선생은 소설 '임꺽정'을 완성하려 무척 애를 썼다"고 말했다.
한편 정씨는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한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때 홍 선생 등과 함께 기자회견을 연 김구 선생이 '북한에 잔류할 생각이 없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북한의 친일파 청산은 칭찬할 수 있지만 남한 동포를 버릴 수는 없다"고 밝히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홍명희(洪命熹, 1880년 5월 23일 ~ 1968년 3월 5일).
호는 벽초(碧初). 일제강점기의 소설가이자 독립운동가로서 한국이 낳은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해방 후 1948년 월북해 북한의 정치인으로 활동한 탓에 대한민국에서는 한동안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돼왔지만, 대하소설 <임꺽정>의 작가로서 한국 문학사에서 굵직한 획을 남긴 거인이다.
홍명희는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 태생으로서 그의 생가는 ‘일완 홍범식 고택(一阮 洪範植 古宅)’이라는 명칭으로 현재 복원돼 있다. 홍범식은 바로 홍명희의 부친이다. 풍산 홍씨 가계인 홍명희의 집안 내력은 참으로 파란만장한데, 그의 증조부 홍우길은 조선 말기에 이조편서를 역임했고, 조부 홍승목은 한일강제병합 후 조선총독부가 주는 작위를 받은 소위 친일파였다. 반면 그의 부친 홍범식은 금산군수로 활동하던 중 한일병합에 분개하여 자결한 애국지사다.
당시 일본 다이세이 중학(大成中學)에서 수학하던 홍명희는 부친의 자결 소식에 학업을 포기하고 조선으로 귀국. 일제에 저항하라는 아버지의 유지를 받아들여 독립운동에 나선다. 1919년 괴산에서 3.1 운동에 참가했으며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 수립을 지켜봤다. 그 과정에서 춘원 이광수와 친해졌는데, 훗날 친일 작가가 된 이광수와 홍명희 두 사람의 행보는 사뭇 달랐지만 이들의 우정은 오랫동안 변치 않고 유지되었다.
홍명희는 독립운동으로 수차례 옥고를 치루면서도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대일보 사장, 오산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였고, 신간회 운동을 주도하는 등 끊임없이 일제에 저항했다. 그리고 1928년 11월 21일 <임꺽정>을 조선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임꺽정>은 민중의 삶을 탁월하게 재현한 역사소설이자 뛰어난 토속어 구사로 ‘살아 있는 최고의 우리말사전’이라 불리면서 일제 치하의 독자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작가 홍명희의 투옥과 개인 사정 등으로 4차례 연재가 중단되었으며, 조선일보가 폐간된 탓에 그 자매지인 ‘조광’으로 지면을 옮기는 등 숱한 우여곡절을 겪어야했다.. 결국 홍명희는 일제의 압력에 못 이겨 1940년 <임꺽정>의 집필을 완전히 중단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은둔생활을 하게 된다.
1945년 해방 후에는 사회주의 운동가로서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하다 여운형과 함께 근로인민당을 조직했다. 여운형이 암살된 후에는 근로인민당의 지도자가 되었지만 소설가, 문학가로서 이름을 날렸지, 정치인으로서 역량이 부족했던 그는 현실의 벽에 가로막히고 만다. 그리고 1948년 김구, 박헌영 등과 남북 연석회의에 참가한 뒤 남한으로 돌아오지 않고 북한에 남아 월북인사가 된다.
이후 홍명희는 김일성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1968년 사망할 때까지 북한 초대 내각의 부수상,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과학원 원장 등 고위직을 역임한 뒤 1968년 사망하였고 북한의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이처럼 홍명희의 사상과 정치노선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후세 학자들은 그가 골수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사회주의에 공감했던 진보적 민족주의자라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