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고조 유방의 죽음
출신 성분이 비천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고조 유방은 기원전 247-195년 52세 사망
재위는 기원전 202-195년 45세 즉위 7년간 통치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의 진나라가 기원전 221-206년 15년간 지속된데 반해서
한나라는 기원전 202-서기 220년 420년간 지속되면서 진정한 중국 통일 왕국이 된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이 49세 죽은지 4년만에 진나라는 망하고
기원전 206년 서초패왕 항우가 진나라 수도 함양에 입성해 시작된 초한전은 기원전 202년 유방의 한나라가 승리하면서 끝이 난다.
유방은 젊어서 강소성 (장쑤성) 서주시 패현의 정장 (파출소장)을 하면서도 빈둥거리는 한량이엇는데 사람을 끌어 당기는 묘한 카리스마가 잇는 사람으로 많은 인재를 중용해서 성공한다
황제로 즉위한 유방은 봉건제와 군현제를 조화시킨 군국제를 실시하였다. 그 해 7월, 연왕(燕王) 장도(臧荼)가 반란하자 유방은 이를 친정하고 친구 노관을 연왕으로 삼은 때 유방의 신하들 중에서 진희, 한신과 팽월, 영포 4장군은 영지도 넓을 뿐만 아니라 많은 전투를 경험한 노련한 무장으로 유방과 그의 부인 여태후에게는 특히 위험한 존재였다.
초한전 승리로 이끈 장군들 중 진희는 먼저 대땅에서 반란을 일으켜 토벌되었다. 한신이 반란을 기도한다는 중상모략이 들어오자, 마침 한신을 질투하던 신하들은 이를 토벌해야 한다고 진언했지만, 진평은 군사를 다루는 데 귀재인 한신과 정면승부는 위험하다면서 꾀로써 잡자고 제안했다. 유방은 이를 수용해 자신의 순행을 핑계로 한신도 오게끔 하고서 숨어 있던 종리매의 목을 가지고 온 한신이 온 곳에서 한신을 붙잡아 초왕에서 회음후(淮陰侯)로 강등시켰다.
이듬해 흉노(匈奴)의 공격으로 항복했던 한왕 신(韓王 信: 회음후 한신과 동명이인)이 그대로 반란했다. 유방은 이것을 또다시 친정해 항복시켰다. 그 이듬해인 기원전 200년, 흉노의 묵돌 선우(冒頓單于)를 토벌하고자 더욱 북으로 군을 움직였으나 묵돌 선우는 약한 병사를 전방에 배치해 패배한 척 후퇴를 반복했고 추격을 서두른 유방군의 전선이 길어진 가운데 유방은 그만 소수의 군사와 함께 백등산(白登山)에서 묵돌 선우에게 포위된다. 7일간 음식도 없이 궁지에 빠졌던 유방은 진평의 책략으로 묵돌 선우의 연지(왕비)에게 뇌물을 주어 간신히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백등산의 싸움〕. 그 뒤 유방과 묵돌 선우는 흉노를 형, 한을 제로 하는 형제 맹약하고 매년 조공하는 조약을 맺었으며, 이후 한이 흉노를 건드리지 않기로 합의했다.
기원전 196년, 여후는 한신이 반역을 계획한다는 누명을 씌우고 소하의 계책으로 그를 잡아 처형한다. 원정 중이던 유방은 한신이 처형된 소식을 듣고 몹시 슬퍼했다. 같은 해에 팽월도 붙잡혀 촉으로 유배되었으나 여치의 책모로 도중에 주살되고 한 명 남은 영포는 반란한 때부터 몸이 불편해진 유방은 태자 영[혜제]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려 생각하고 있었지만, 여치가 한 간언을 채택해 영포를 친정하러 나선 원정에서 돌아가는 도중에 고향 패에 들러 연회를 열었고 현지 백성의 아이 120명을 모아 '대풍가(大風歌)'를 노래하게 했다.
큰 바람 불고 구름은 높이 나는데(大風起兮雲飛揚)
위엄을 해내(海內)에 떨치며 고향에 돌아왔네(威加海内兮歸故鄕)
어찌 맹사(猛士) 얻어 사방을 지키지 않을런가(安得猛士兮守四方)?
그리고 패에 영구히 조세 면제 특전을 주었고 패 백성이 한 요청으로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고향 풍에도 같은 특전을 주었다.
군대 20만 명으로 반란했던 회남왕 영포는 조카 오성에게 참수당했지만,
영포를 칠 때 화살에 맞은 상처가 악화한 유방은 기원전 195년, 여치에게 향후 누구를 승상(丞相)으로 세울지에 인사책을 남기고서 죽은 때 자신의 최후를 깨달은 유방은 '사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라 묻는 여치에게 '(승상이자 상국인) 소하에게 맡기면 좋겠다. 그 다음은 조참이 좋으리라.'라고 대답하고 거듭 몇 번을 '그 다음은요?' 하고 묻는 여치에게 '그 다음은 왕릉이 좋겠지만, 왕릉은 너무 우직하니 진평을 보좌로 삼으면 되겠지만, 진평은 너무 두뇌가 명석하니 모두 맡기면 위험하다. 사직을 안정시키는 것은 분명히 주발이리라. 주발을 태위로 임명하라고 대답했다. '그 다음은요?' 라고 더욱더 묻는 여치에게 '대체 너는 언제까지 살 생각이냐? 그 다음은 너와 상관없는 일이다.'라고 쏘아버렸다. 이 유언은 사후에 모두 적중하는데 여기서 유방의 사람 보는 안목이 얼마나 정확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많은 공신과 제후왕이 숙청된 공석에 유방은 자신의 유씨 일족을 왕작에 모두 봉했다. 가장 공이 크던 번쾌도 죽을 위기를 맞았지만, 귀양 가는 도중에 유방이 죽자 번쾌는 참형을 면한다. 유방의 사후 태자 영이 혜제로 즉위했으나 실권은 모두 태후의 일가인 여씨 일문이 쥐었고 강대한 제후들도 모두 유방에게 숙청된 상태에서 태후에게 맞설 사람은 없었으나 여치 사후 주발과 진평에 의거해 여씨는 숙청되어 문제(文帝)가 옹립된 후 한은 문경(文景)의 치(治)라는 번영을 맞는다.
고조는 천하통일 이후 공이 있는 자와 성이 같은 유씨 등을 제후왕에 봉했는데, 다음과 같다.
연왕(燕王) 장도, 회남왕(淮南王) 영포, 대량왕(大梁王) 팽월, 초왕(楚王) 한신, 한왕(韓王) 한신(동명이인), 장사왕(長沙王) 오예, 조왕(趙王) 장이, 임강왕(臨江王) 공오, 남월왕(南越王) 위타, 강후(降侯) 주발, 유후(留侯) 장량, 갱힐후(羹頡侯) 유신, 대왕(代王) 유중, 오왕(吳王) 유비, 형왕(荊王) 유가, 이외 제후왕에 봉해진 자들이 더 있다.
하지만 북방 흉노와 대결하며 반역한 자 및 이성의 공신들을 모두 제거한 이후 유씨 일가 및 자식들에게 각가의 제후국의 왕에 오르게 함으로서 통일 진나라의 중앙에서 행정관을 지방에 파견한 군현제에서 다시 왕조 봉건제후국의 모습으로 되 돌아 갔다.
중국사상 최초 황제였던 진시황제는 이후 중국사에서 나쁜 선례로서 남았고 그 후의 혼란을 수습한 유방은 좋은 예로서 '황제라면 이러해야 한다.'라는 이상을 많은 후세인의 마음속에 남긴다.
특히 유방과 장량의 관계로 대표되는, 유능한 부하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게 한 점은, 후세에도 자주 인용되곤 했다.
특히, 사마천은 사기 한고조본기에서
太史公 曰(태가공 왈) :
夏之政忠 忠之敝 小人以野(하지정충 충지폐 소인이야),
故殷人承之以敬 敬之敝 小人以鬼(고은인승지이경 경지폐 소인이귀),
故周人承之以文 文之敝 小人以僿(고주인승지이문 문지폐 소인이사),
故救僿莫若以忠(고구사막야이충).
三王之道 若循環, 終而復始(삼왕지도 야순환, 종이부시)
周秦之閒, 可謂文敝矣(주진지한 가위문폐의)
秦政不改 反酷刑法 豈不繆乎(진정불개 반혹형법 개불무호)
故 漢興 承敝易變 使人不倦 得天統矣(고한흥 승폐역변 사인불권 득천통의)
夏나라는 정치는 忠을 강조했다.
그러다 보니 무례함이 성행했다.
殷나라가 한나라의 뒤를 이어 敬을 강조했다.
결국 귀신鬼神을 숭상하는 풍조가 유행했다.
周나라는 禮를 주창했다.
눈에 띠게 가식과 불성실이 드러났다.
周와 秦나라 사이의 기간에는 가히 禮가 허물어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秦나라는 그 정령을 바꾸지 않고 오히려 형법을 가혹하게 했으니 어찌 잘못되지 않았겠는가.
그런 연고로 漢나라가 일어나 허물어진 예를 승계하여 그 잘못된 것을 고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즐겨 따르게 하여 하늘로 부터 법통을 부여 받은 것이다.
라고 기록함으로써 한나라의 등장을 역사적 정통성으로 인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