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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초 홍명희 연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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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7월 |
1888년 7월 3일(음력 5월 23일) 충북 괴산군 괴산면 인산리(人山里)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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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식(洪範植)과 은진(恩津) 송씨(宋氏)간의 장남으로 태어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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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순유(舜兪), 호는 가인(假人)·가인(可人)·벽초(碧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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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 3세 |
(고종 25년, 戊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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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친 은진 송씨 별세하다. 이조판서를 지낸 증조부 효문공(孝文公) 홍우길(洪祐吉) 별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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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년, 4세 |
한양(漢陽) 조씨(趙氏)가 계모가 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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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 5세 |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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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8세 |
『소학(小學)』을 배우고 한시를 짓기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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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11세 |
『삼국지』를 비롯하여 중국소설들을 탐독하기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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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13세 |
참판 민영만(閔泳晩)의 딸인 여흥(驪與) 민씨(閔氏)와 혼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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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14세 |
상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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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15세 |
서울의 중교의숙(中橋義塾)에 입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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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16세 |
장남 기문(起文)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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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8세 |
중교외숙을 졸업하고 귀향하여 『춘추(春秋)』 4전(四傳)을 공부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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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부부에게 일어 회화를 배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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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유학을 떠나다. 동경에서 문일평(文一平), 이광수(李光洙) 등과 교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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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19세 |
동경상업학교(東京商業學校) 예과(豫科) 2학년에 편입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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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선(崔南善)과 교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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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20세 |
동경 대성중학교(大成中學校) 3학년에 편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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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과 일본의 근대 문학을 비롯해 다양한 분야의 독서에 탐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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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22세 |
『대한홍학보』에 논설문 『일괴열혈(一塊熱血)』(창간호:3월호) 등을 발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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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23세 |
2월, 졸업시험을 앞두고 학업을 포기한 채 귀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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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평소 성적이 좋았으므로 대성중학교에서 졸업장 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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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지에 『쿠루이로프(끄릴로프) 비유담』(2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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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이 니에모예프스키의 시를 번역 한 『사랑』(8월호) 등을 발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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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9일, 금산군수로 재직중이던 부친 홍범식이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여 순국(殉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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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남 기무(起武) 태어나다. 호적상 이름은 기은(起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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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25세 |
출국하여 그해 겨울 만주 안동현(安東懸)에 체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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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26세 |
정인보(鄭寅普)와 함께 상해(上海)로 가서 박은식(朴殷植), 신규식(申圭植), 김규식(金圭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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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일평, 조소앙(趙素昻) 등과 함께 해외 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同濟社)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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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27세 |
11월 정원택(鄭元澤), 김진용(金晉鏞), 김덕진(金德鎭)과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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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을 위한 재정적 기반을 구축하고자 상해를 떠나 남양으로 향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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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28세 |
3월 싱가포르에 정착하여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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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30세 |
12월, 남양생활을 청산하고 싱가포르를 떠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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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31세 |
상해와 북경에 체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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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에서 신채호와 재회하여 평생지기로서 막역한 우정을 쌓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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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귀국하여 향리 괴산에서 장남 홍기문의 학업을 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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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2세 |
3월, 19일, 괴산에서 손수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하여 체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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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공주 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열린 1심 공판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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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 받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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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 생가인 괴산 인산리의 자택을 팔고, 선산이 있는 제월리로 이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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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경성 복심(覆審) 법원의 항소심에서 출판법 위반 징역 1년 6월을 선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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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경성 고등법원에 상고했으나 공소 기각되어 형이 확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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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33세 |
4월 28일, 감형되어 청주형무지소에서 만기 출감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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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보와 함께 내장산(內藏山) 일대를 여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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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34세 |
쌍동이인 딸 수경과 무경 태어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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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35세 |
서울로 솔가 이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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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신규식이 병사. 『동명』(10월 1일)에 쓴 『육당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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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 형식을 빌려 그의 죽음을 애도한 글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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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36세 |
조선에스페란토협회 주최로 중등학교에서 개최된 에스페란토어 강습에서 강사로 활동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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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도서주식회사 편집부에 근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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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사회주의 사상단체 '신사상연구회'에 창립회원으로 참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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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동아일보 취체역(取締役) 주필 겸 편집국장에 취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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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에 『월요만화(月曜漫話)』 『학예란』 『학창산화(學窓散話)』라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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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하에 칼럼을 연재.(∼19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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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신사상연구회'가 맑스주의 행동단체인 '화요회'로 개편되자 '화요회' 간부로 계속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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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38세 |
중국에 망명 중이던 신채호의 요청으로 동아일보에 그이 사론(史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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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패수(浿水)고』『전 후삼한고』『조선역사상 인천년래 제일대사건』등을 연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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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병조참판을 지낸 조부 홍승목(洪承穆)이 별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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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동아일보사를 사직하고, 시대일보로 옮겨 편집국장에 이어 부사장직에 취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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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일보에 칼럼 『학등(學燈)』을 연재하다.(∼1926년) 9월, 비타협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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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한 학술단체 '조선사정조사연구회' 결성에 참여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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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 39세 |
카프(KAPF)의 기관지에 해당하는 『문예운동』 창간호(1월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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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문예의 운동』을기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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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시대일보 사장에 취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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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화요회'를 주축으로 한 사회주의 사상단체들의 통합체 '정우회(正友會)'에 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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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딸 재경 태어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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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운동』 2호(6월호)에 『예술기원론의 일절』을 기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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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일보가 자금난으로 8월부터 휴간한 끝에 결국 발행권이 취소되어 폐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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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동아일보와 시대일보에 연재한 칼럼들을 모아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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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산화(學窓散話) 』를 간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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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정주 오산(五山)학교 교장으로 부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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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선의 시조집 『백팔번뇌(百八煩惱)』에 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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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40세 『현대평론』 창간호(1월호)에 『신간회의 사명』을 기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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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신간회(新幹會)'가 창립. 홍명희는 준비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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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대회 에서 부회장으로 선임되었으나 고사하고 조직부 총무간사직을 맡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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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학교 교장을 사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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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지의 '신간회' 지회 설립대회에 파견되어 지회 설립을 지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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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41세 |
10월, 제4차 조선공산당사건 관련 혐의로 검거되었다가 불기소로 방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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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1일, 조선일보에 대하 장편 역사소설 『임꺽정』을 연재하기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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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42세 『삼천리』 창간호(6월호) 및 제2호(9월호)에 『자서전』을 연재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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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옥된 관계로 중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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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8∼29일, '신간회' 복대표(複代表) 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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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소설』창간호(12월호)에 『창간사』를 기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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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3일, '신간회' 주최로 광주학생운동에 대한 일제 관헌의 조치를 규탄하기 위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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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대회 를 개최하려던 중 검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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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경찰부 유치장에서 『임꺽정』 집필을 계속했으나, 12월 24일 구속 송치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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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자를 마지막으로 연재를 중단 .(붕단편, 피장편, 양반편까지 연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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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43세 |
1월, '신간회' 민중대회사건으로 인해 기소. 9월, 예심이 종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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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44세 |
4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 상소를 포기하여 형이 확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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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45세 |
1월 22일, 가출옥으로 출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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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 홍성희(洪性喜)와 함께 재동에서 정미소를 경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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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조선일보에 『임꺽정』 연재를 재개.(의형제편 부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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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47세 |
김정희(金正喜)의 문집인 『완당(阮堂) 선생 전집』 (永生堂 간)을 교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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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4일, 의형제편 연재를 끝내고 15일부터 화적편 연재를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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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48세 |
신병으로 인해 금강산 등지에서 요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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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11월 23일∼12월 4일)에 『나의 본 大톨스토이의 인물과 작품』을 연재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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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4일, 『임꺽정』 화적편 '청석골'장을 마치면서 연재를 중단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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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49세 |
조선일보(1월 4일)에 『문학에 반영된 전쟁』을 기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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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조선일보에 조선의역사와 문화에 대한 칼럼『양아잡록(養 雜錄)』연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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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신채호가 옥사하자 조선일보(2월 28일)에 『곡(哭)단재』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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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4월호)에 『상해 시대의 단재』를 기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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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의 『상록수』에 『서문』을 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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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50세 |
12월 12일, 조선일보에 『임꺽정』화적편 '송악산'장 연재를 시작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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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52세 |
홍대용(洪大容)의 문집 『담헌서(湛軒書)』 (신조선사 간)를 교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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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일평이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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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4월 8일)에 『곡호암』을 발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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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4일, 조선일보에 『임꺽정』화적편 '자모산성'장의 서두까지 발표한 후 연재를 중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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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한용운(韓龍雲)의 회갑을 축하하는 한시를 짓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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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국이 악화되어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 244번지로 이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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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사 출판부에서 『임꺽정』4권(의형제편 상·하, 화적편 상·중)이 간행.(∼19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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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53세 |
『조광』(10월호)에 『임꺽정』화적편 '자모산성'장의 일부가 실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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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임꺽정』연재는 영구히 중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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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54세 |
서유구의 『누판고(鏤板考)』(大同출판사 간)를 교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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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55세 |
3월, 차남 기무가 정인보의 차녀 경완(庚婉)과 혼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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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58세 |
2월, 독립운동가 조완구(趙琬九)의 부인인 고모 홍정식(洪貞植)이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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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 해방의 감격 속에서 시 『눈물 섞인 노래』를 짓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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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에스페란토어 조선학회' 위원장으로 추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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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서울신문사 고문에 취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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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조선문학가 동맹'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추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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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서문화협회' 회장에 추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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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59세 |
『대조(大朝)』창간호(1월호)에 이태준(李泰俊), 이원조(李源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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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천(金南天)과의 대담 『벽초 홍명희 선생을 둘러싼 文學談議』가 실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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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조선문학가동맹'에서 주최한 제1회 전국문학자대회에 중앙집행위원장으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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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 말씀』을 보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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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홍명희를 중심으로 한 민주통일당 제1회 발기회가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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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신문(10월 9일)에 『정치인의 자기비판』을 기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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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 선거에서 관선(官選) 의원으로 선임되었으나 수락을 거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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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60세 |
장남 홍기문의 『조선문법연구』에 서문을 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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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여운형(呂運亨)이 피살. 여운형 인민장(人民葬)에서 장의의원회를 대표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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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도문(奉 導文)을 낭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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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8월 5일)에 한시 『곡몽양』을 발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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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민주통일당 등 5개당이 통합하여 결성된 민주독립당의 당수가 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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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민족자주연맹'(주석 김규식)의 결성에 참가하여 정치위원으로 선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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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61세 |
을유문화사에서 『임꺽정』 여섯권이 간행되다(의형제편 1·2·3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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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적편 1·2·3권). 『개벽』(3월호)에 『통일이냐 분열이냐』를 발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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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조선 제(諸)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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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한 이후 북에 잔류하다. 8월, 서울에 있던 가족들이 38선을 넘어 평양에 도착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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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 참가하다. 제1기 조선최고인민회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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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원으로 선출되다.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제1차 내각(수상 김일성)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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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김 책과 함께 3인의 부수사 중 한 사람으로 임명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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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62세 |
2월∼4월, 정부대표단의 일원으로 소련을 방문하다. 유림(儒林)의 발의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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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금산군 내에 부친 홍범식을 추모하는 『군수 홍공 범식 순절비(殉節 碑)』가 세워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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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66세 |
과학원장에 임명되다. 11월, 정부대표단의 일원으로 중국을 방문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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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68세 |
평양 국립출판사에서 『임꺽정』6권이 출판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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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69세 |
과학원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이 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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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70세 8월, |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으로 피선되다. 9월, 북조선 2차 내각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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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인의 부수상 중 한 사람으로 임명되다. 조선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이 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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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71세 |
국기(國旗)훈장 제1급을 받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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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72세 4월, |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최용건을 수행하여 소련을 방문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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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길에 동구 여러나라를 여행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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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74세 |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이 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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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75세 10월, |
제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피선되다. 동(同)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이 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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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 홍범식에게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추서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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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80세 11월, |
제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피선되다. 동(同) 상임위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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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위원장이 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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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81세 3월 5일, |
노환으로 별세하다. 평양 교외 애국열사릉에 안장(安葬)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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