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원 화백의 그림 전시회에서 모아 두었던 그림들을 정리하던 중에
몇장을 우선 게재해 봅니다.
이번 그림들은 인도지역 사람들의 삶을 담아 오셔서
엄청 커다란 화폭에 옮게 그리셨더군요,
큰 그림의 크기는 가로 4-5미터 세로가 2미터 가까이 될만큼
커다란 그림들이었답니다.
삶의 여정이 표정에 담겨 있는듯해서,
어떤 그림 앞에서는 평온하기도 했지만
어떤 그림 앞에서는 표정 뒤에 느껴지는 무게때문에
발길을 떼지 못했던 그림들도 있었답니다.
이상원 화백이 활동하시는 곳이 이곳 춘천......
미대 문턱은 고사하고,
정규 교육을 한 번도 받지 않은 화가 이상원,
그런 그가 원하는 것은 남는 그림,
기억되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그림을 모아 갤러리를 만들었다.
갤러리를 위해 그가 소장하고 있는 그림은 모두 1000 여점,
그림은 팔지 않는다.
개인이 소장하는 그림은 죽은 그림이라는 소신때문이다.
물소리와 새 소리 이 외에는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는 양구,
이상원은 콘테이너 박스를 작업실로 만들었다.
작업하기에는 춥다고 느껴지는 그 곳은 이상원과 닮아있다.
꼭 필요한 것 이외에는 소장하지 않는 그의 성격이 작업실 속에
녹아 있는 것이다.
이상원의 그림 인생은
극장의 간판장이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후 미군들이 초상화를 그리며 쌓은 실력을 바탕으로
각국의 국가 원수를 그릴 정도로 초상화계에서
최고의 성공을 거두게 된다.
하지만 그의 생각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것,
남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그래서 순수 미술을 하게 되었다.
어찌보면 너무 단순한 이유이지만,
극장의 상영이 끝나면 지워지는 간판을 그렸던
그에게는 너무나 간절한 이유가 된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영정을 그릴때 인연이 된
노산 선생의 유언이 계기가 되어
그는 불혹의 나이에 순수 미술을 하는 화가가 되었다.
하나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트렉터가 지나가고 남은 바퀴자국,
버려진 그물과 마대, 그리고 노인까지 그는 버려진 것들을 그렸다.
이상원 특유의 극사실주의로 말이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전국을 돌아 다니던 중,
차가 수렁에 빠지기도 하고
믈에 빠져 죽을뻔한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어렵게 소재를 찾던 중,
그의 관심을 끈 것은 인물이다.
생생한 표정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
그는 사람들의 표정을 담기 위해 쫓아 다니다
이상한 사람으로 몰리기도 했다.
최근 그가 그리는 그림들은 노인의 표정이다.
얼굴의 주름과 연륜,
그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이라고 이상원은 느끼고 있는 것이다
해외에서는 더욱 인정 받은 화가다.
2009년 러시아 에술의 자존심이라는 러시아 뮤지엄,
이상원 화백의 전시가 이 곳에서 열린 것이다.
전시가 열린 자체만으로도 영광이라는 그곳에
미술 교육도 받지 않은 그가 동양인으로는 처음,
생존 화가로는 샤갈 다음으로 전시를 하게 된 것이다.
정형화되지 않은 그림을 그렸기때문이다.
장지에다 유화와 수묵,
물과 기름으로 인물을 그린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는 이 전시회에서
동서양을 뛰어 넘는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는 작품으로
아방가르드(전위 예술)로만 치닫는 러시아 작가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는 작품 이라고 평가를 받았다.
또한 2001년 상하이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에서는
진정한 수묵의 현대화 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아래의 그림들은 2005. 4.30 부터 6. 6일까지
인상동 갤러리 '상'에서 전시되었던 그림으로서
인도지역 여행에서 만난 인간 군상들의 일부이다.
몇 년전 우연히 발견한 이상원 화백의 전시회는 나를 들뜨게 했었다.
함께 동행했던 동료 역시 상기되어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멀리서 발견한 포스터에 눈이 닿는 순간 ,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발걸음이 바빠지기 시작했으며,
들뜬 표정들을 둘 다 감추지 못하고 반은 뛰어 갔었다.
이상원 화백의 연세는 1935년 생이시니 70대 후반이시다.
그 연세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게 계심이 놀라웠고,
작품의 규모 역시 인물화치고는 주제들이 무척 큰 화폭에 담겨져 있었다.
벽면 가득 채워져 있는것은 그림 자체가 아니라
그림의 섬세함이 가져다 주는 극사실주의에 의한 표정이 살아 있어
더욱 가득 차 있는 느낌이었다.
표정 하나 하나가 사실적이라는 표현보다
살아 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한듯했다.
간신히 허락을 득한 후에 마음 놓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사진속의 인물들 표정에는
삶의 희노애락이 잃혀질듯 섬세하고 사실적이었으며
표정과 색깔의 조화 역시 그림을 돋보이게했다.
놀라움이었다.
8절지 스케치 북에 연필로 스케치 해온 그림을
그렇게 커다란 화폭에 똑같이 옮겨 그린것이 경이로웠다.
한걸음 한걸음 발길을 옮기면서
또 한번 놀라서 서로의 표정을 바라다 보았었다.
도록을 몇권 사가지고 나오면서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날 그렇게 우연히 조우를 하게 된 그림들,,,
이상원 화백을 만난듯 반가웠다.
인도에 가서 그려 오신 밑그림은
8절지 스케치북 정도 크기의 그림을 소묘로 그려 오셨던것 같다.
액자 속에 소묘로 표현되어진 그림이
화폭에 옮겨 그려진 그림과의 비교를 하면서 정말로 놀라웠다.
그 작은 그림을 어찌 그렇게 커다란 화폭에
같은 느낌을 주게 확대된 인쇄물처럼 그리셨을까?
슬며시 이상원화백의 전직이
극장 간판 그림을 그리시던 분이라는 생각이 떠올라
머릿속으로는 간판에 그려지는 배우들의 얼굴이
이화백의 손끝에서 표현되어지는
희노애락을 머릿속으로 따라 그리고 있었다.
첫댓글 훌륭한 화백이시군요. 제주에도 변시지 화백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상설전시로 10년을 하기로 해서 작품을
보냈다고 하는데 기당미술관에 전시된 그림을 보며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