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우익(金友益)
[본관] 예안(禮安)
[문과] 광해군(光海君) 4년(1612) 임자(壬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위(12/34)
[생졸년] 1571년(선조 4)~1639년(인조 17) / 향년 68
[거주지] 영천(榮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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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조 학사집(鶴沙集)
통훈대부 행 한성부 서윤 김공 묘갈명병서(通訓大夫行漢城府庶尹金公墓碣銘幷序)
우리나라의 예악과 문물은 조선의 세종조(世宗朝)에 이르러 비로소 크게 갖추어졌다. 이때 문절공(文節公) 김 선생(金先生) 휘(諱) 담(淡) 같은 분은 한 시대의 명신 중에 덕과 공렬이 가장 성대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오래도록 추모하며 사당을 세워 제사를 받들고 있는데, 공에게 5대조가 된다.
고조 휘(諱) 만평(萬枰)은 좌통례(左通禮)이고 증조 휘(諱) 좌(佐)는 충순위(忠順衛)이며, 조부 휘(諱) 택민(澤民)은 사섬 첨정(司贍僉正)이고, 부친 휘(諱) 윤의(允誼)는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추증되었다. 모친 한양 조씨(漢陽趙氏)는 충의위(忠義衛) 휘(諱) 량(諒)의 따님으로, 융경(隆慶) 신미년(辛未年, 1571, 선조 4)에 공경을 낳았다.
휘(諱)는 우익(友益), 자는 택지(擇之)이다. 어려서 송소(松巢) 권우(權宇)에게 수학하였고, 조금 성장해서는 능히 스스로 분발해서 글을 읽어 임자년(壬子年, 1612, 광해 4)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성균 학유(成均學諭)ㆍ학록(學錄)ㆍ학정(學正)을 거쳐 박사(博士)에 승차되었다.
외직으로 나가서는 거산도 찰방(居山道察訪)이 되었고, 병진년(丙辰年, 1616, 광해 8)에 해서(海西) 좌막(佐幕)으로 기주관(記注官)을 겸하였다. 정사년(丁巳年, 1617, 광해 9)에는 영원 군수(寧遠郡守)에 제수되었다. 신유년(辛酉年, 1621, 광해 13)과 임술년(壬戌年, 1622, 광해 14)에 형조 좌랑(刑曹佐郞)과 분병조 정랑(分兵曹正郞)에 제수되었다.
계해년(癸亥年, 1623, 인조 1) 이후로는 안동(安東)ㆍ진주 제독(晉州提督)에 거듭 제수되었다. 무인년(戊寅年, 1638, 인조 16)에는 봉상시 주부(奉常寺主簿)를 거쳐 얼마 뒤에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으로 천직(遷職)되었다. 가을에 해미 현감(海美縣監)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체직되었다.
기묘년(己卯年, 1639, 인조 17)에 병에 걸려 운명하였다. 경진년(庚辰年, 1640, 인조 18)에 감천(甘泉) 고방산(古方山) 아래 사향(巳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아! 공은 지성으로 어버이를 섬겼다. 계사년(癸巳年,1593, 선조 26)에 승지 공이 역질에 걸리자 똥을 맛보고 하늘에 기도하였다.
장사를 치름에 남들이 모두 꺼려함에 백씨(伯氏), 계씨(季氏)와 함께 직접 널을 운반하여 흙을 지고 와서 장사를 지내고는 삼 년 동안 10리 밖까지 걸어가서 날마다 성묘하였다. 백씨가 일찍 죽은 것을 애통히 여기고는 차마 홀로된 형수와 조카에게 선대의 제사를 돌려가며 지내게 할 수 없어서 종신토록 홀로 마땅히 마련하여 지냈다.
문절공(文節公) 무덤에 비각이 없어서 직접 여헌(旅軒) 장 선생(張先生)에게 비명을 청하여 돌을 깎아 새기었다. 그러고 나서 차례로 사대의 묘표를 세우고서 탄식하기를, “평생 뜻하던 바를 끝마쳤다.”라고 하였다. 영원(寧遠) 고을이 피폐했을 때 공이 마음을 다해 구획을 하여 몇 년 사이에 떠나고 달아난 사람들이 사방에서 돌아왔고, 고을의 창고는 더욱 불어나게 되자 감사(監司)가 이 사실을 조정에 알렸다.
해미 현감(海美縣監)으로 있을 적에는 치적이 더욱 드러났는데, 한평군(韓平君) 이경전(李慶全)의 만시(挽詩)에‘지금까지 사람들의 입에 풍비(豊碑)로 전해지네’가 있다. 해서 막부로 있을 적에는 도내의 많은 사람들이최기(崔沂)의 옥에 연루되어 귀양을 온 자가 많았는데, 당시 어떤 사람이 감사(監司) 백대형(白大珩)에게 사주하여 장차 화가 전가되려고 하였으나 공의 주선에 힘입어 일이 잠잠해졌다.
판서(判書) 남이공(南以恭)이 그 일을 자세히 알고 발탁하여 등용하려고 하였다. 사예(司藝) 이숭언(李崇彦)의 시 ‘이미 성명이 여대에 담겨 있어 기쁘구나.’가 있다. 이괄(李适)의 변란이 발발함에 향인이 공을 추대하여 의병대장으로 삼았다. 순식간에 병사와 식량을 다스렸는데 열읍의 최고였다.
일찍이 재주와 역량을 자부하며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하였으나 끝내 팔리지 않았으니 운명이도다. 병석에 눕자 약을 물리치면서, “나의 선대 모두 오랜 수를 누리지 못했으나 내 올해 나이가 칠십에 다다랐으니 족하다.”라고 하였다. 자제들이 울면서 간청했으나 입을 다물고 먹지 않았다. 그 통달한 식견이 이와 같았다.
부인은 순천 김씨(順天金氏)로 고(故) 상국(相國) 승주(承霔)의 후손이고 생원 윤흠(允欽)의 따님이다. 4세에 부친상을 당해 울면서 고기를 먹지 않았다. 시집을 가서 부드럽고 아름답게 아녀자의 도리를 지켰으며, 노비를 부림에 기쁘고 성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공보다 12년 먼저 죽었고, 무덤은 공의 무덤 앞에 있다. 딸 다섯 명은 사인(士人) 권상신(權尙信), 생원(生員) 전유흠(全有欽), 정언(正言) 전익희(全益禧), 생원(生員) 민월(閔越), 유학(幼學) 김요필(金堯弼)에게 출가하였다. 세 아들 찬(鑽)ㆍ옥(鈺)ㆍ첨()이 각각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종호(宗灝), 종미(宗渼), 종급(宗汲)이다. 내외손(內外孫) 남녀와 증손 남녀가 매우 많다. 공의 본관은 선성(宣城)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드높은 기상과 / 軒然氣
확고한 의지를 지니고 / 確然志
드넓은 재주와 / 恢然才
훌륭한 기량을 지녀서 / 偉然器
큰일을 할 줄 알았는데 / 若有以爲
여기에서 그치고 말았네 / 而止於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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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이경전(李慶全):
1567~1644.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집(仲集), 호는 석루(石樓)이다. 1590년(선조 23) 문과에 급제하였다. 1608년(선조 41)
정인홍 등과 함께 영창대군의 옹립을 꾀하는 소북(小北)의 유영경(柳永慶)을 탄핵을 받아 강계(江界)에 유배되었다.
같은 해 광해군이 즉위하자 풀려나 충청도ㆍ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주청사로 중국에 가서 인조의 책봉을 요
청한 공으로 한평부원군(韓平府院君)에 진봉되었다. 저서에《석루유고(石樓遺稿)》가 있다.
[주02] 지금까지 …… 전해지네:
이 만시는《석루유고》권3〈김여미우익만(金餘美友益挽)〉의 두 번째 구이다.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試割桐鄕未浹朞,
至今人口藉豐碑. 何關斗米荒三逕, 任是升沈各一時. 那復從容談易數, 不堪衰淚洒哀詞. 門庭玉樹聞交映, 待得逢場卽舊知.”
[주03] 최기(崔沂)의 옥(獄):
1616년(광해군 8)에 해주 목사(海州牧使) 최기가 이이첨(李爾瞻)의 일파인 박희일(朴希一)ㆍ박이빈(朴以彬)을 무고죄로 처형하
였다가 이이첨의 미움을 받아, 이이첨 일파인 황해도 관찰사 백대형(白大珩) 등에 의해 남형죄(濫刑罪)로 투옥되어 고문을 받고 옥
사(獄死)한 사건을 말한다.《燃藜室記述 卷21 廢主光海君故事本末 崔沂海州之獄》원문에는 최기(崔圻)로 되어 있으나 역사적
사실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 황만기 (역) |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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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通訓大夫行漢城府庶尹金公墓碣銘 幷序。
吾東方禮樂文物。至我世宗朝始大備。時則有若文節公金先生諱淡。在一代名臣中。德烈最盛。鄕人久猶追慕立祠。以俎豆之。於公爲五世祖。高祖諱萬枰。左通禮。曾祖諱佐。忠順衛。祖諱澤民。司贍僉正。考諱允誼。贈右副承旨。妣漢陽趙氏。忠義諱諒之女。以隆慶辛未生公。諱友益。字擇之。少受學于權松巢宇。稍長。能自奮勵劬書。中壬子文科。由成均學諭學錄學正。陞博士。出爲居山道察訪。丙辰。佐海西幕。兼記注官。丁巳。除寧遠郡守。辛酉壬戌。佐郞刑曹。正郞分兵曹。癸亥以後。荐授安東,晉州提督。戊寅。主簿奉常寺。俄遷漢城府庶尹。秋。拜海美縣監。未幾遞。己卯。感疾卒。庚辰。葬甘泉古方山下已向原。嗚呼。公至誠事親。癸巳。承旨公遘癘。嘗糞禱天。及喪。人皆忌避。與伯季氏親自扶櫬。負土以葬。三年內徒步十里外。日一省墓。痛伯氏早沒。不忍使寡嫂孤姪輪行先祀。終身獨當辦行焉。文節公墓無顯刻。躬請銘于旅軒張先生。伐石鐫之。仍次第立四世墓表。乃歎曰。平生志願畢矣。寧遠邑殘。公盡心區畫。數年間。流逋四歸。府庫克溢。監司至以聞于朝。於海美尤著治績。李韓平慶全詩。至今人口藉豐碑。其在海幕也。道內多連累崔圻獄被謫者。時人嗾監白司大珩將嫁禍。賴公周旋。事寢。南判書以恭。知其詳。將擢用。李司藝崇彥詩。已喜姓名藏呂袋。當适變。鄕人推公爲義兵大將。咄嗟治兵糧。爲列邑最。嘗自負其才局。謂百事可做。卒不售。命矣。寢疾。却藥餌曰。吾先皆不享遐壽。吾今年迫七十。足矣。子弟泣請。則接口而止。其達識如此。配順天金氏。故相承霔之後。生員允欽之女。生四歲。遭親喪。號泣不食肉。及笄。柔嘉執婦道。御婢僕不色於喜怒。先公十二年卒。墓在公墓前。五女。適士人權尙信,生員全有欽,正言全益禧,生員閔鋮,幼學金堯弼。三男。鑽,鈺,。各有一子。宗灝,宗渼,宗汲。內外孫男女。曾孫男女甚繁。公宣城人。銘曰。
軒然氣確然志。恢然才偉然器。若有以爲而止於是。<끝>